|
《노예제냐 자유 고용제냐 》
《노예제냐 자유 고용제냐》- 현대인들의 행위와 사고에 대하여
* 출처: 신동기 저 《인문학적 생각들》(티핑포인트, 2016년 5월 출간) p163-179
노예제가 좋을까 자유 고용제가 좋을까 하고 질문을 받으면 사람들은 누구나 다 당연히 자유
고용제가 좋다고 대답할 것이다. 노예제는 도덕 관념상 허용될 수도 없고 지금까지 보고 들어온 내용으로도 끔찍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좀 더 깊이 들어가, 고대 그리스·로마 시대나
17-19c 아메리카처럼 노예제가 허용되는 환경이고 아울러 도덕관념을 일체 배제한 상태에서, 일을 시키는 입장이라면 여러분은 어느 쪽을 선택할 것인가. 그리고 두 번째로, 동일한 환경에서 이번에는 여러분이 일을 지시받아 해야하는 입장이라면 노예제를 선호할 것인가 자유 고용제를 선호할 것인가 하는 질문이다.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일을 시키는 입장이라면 노예제를 많이 선택할 것이고, 지시받아 일을 해야하는 입장이라면 자유 고용제를 선택할 것이라 생각한다. 과연 그럴까? 먼저 첫 번째 질문에 대해 생각해보자.
택시를 탈 때 어떤 택시는 매우 쾌적하다. 청결하고 자리도 눅눅하지 않고 심지어 은은한 향
수까지 준비된 경우도 있다. 그런 차는 운행도 조심스럽다. 턱이 있는 곳에서는 손님이나 차
에 충격이 가지 않도록 미리 거리를 두고 속도를 조절해 부드럽게 넘어간다. 그런데 어떤 택
시는 그 반대다. 자리에 앉는 순간 푹 꺼진 좌석 하며 지저분한 바닥, 퀴퀴하게 찌든 냄새 등,
저절로 두 발이 모아지고 몸이 옹송그려진다. 몸의 표면적을 최대한으로 작게 하여 좌석에 닿는 부분을 최소화 하려는 무의식적 반응이다. 오감의 불쾌함은 곧바로 극도의 공포로 이어진다. 급발진, 급정거에 속이 불편해지고 턱이라도 나타나면 청룡열차가 따로 없다. 갑작스런 비상에 온몸이 굳어진다.
앞의 예는 ‘개인택시’의 경우이다. 그리고 뒤의 예는 항상 그런 것은 아니지만 ‘회사택시’를
탔을 때 종종 겪게 되는 경험이다. 왜 이런 차이가 존재하는 것일까. 누구나 생각하는 것처럼
그 이유는 간단하다. 개인택시는 차가 운전기사 본인의 것이고, 회사택시는 운전기사 본인의
차가 아니기 때문이다. 택시 운전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다. 자가 거주냐 전세 거주냐에 따라
서도 집 관리에 대한 태도가 달라질 수 있고, 자기 돈으로 외식을 하느냐 회삿돈으로 회식을
하느냐에 따라서도 먹는 속도가 달라질 수 있다. 자기 소유냐 타인 소유냐에 따라 사람들의
태도는 달라진다.
지도교수로부터 인분을 먹을 것을 강요당한 엽기적인 사건의 피해자 학생이 친구에게 보낸 이메일에서 ‘현대판 노예가 있다면 나인 것 같다’라고 말한 내용이 언론(2015.8.8일자. SBS ‘그것이 알고 싶다’)에 보도되었다. 고대 노예제나 17-19c 노예제 때 노예들은 과연 인분을 먹을 것을 강요당할 정도의 대우를 받고 살았을까. ‘노예제란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의 생명과 재산의 절대적 지배자가 될 만큼 그 사람을 자기의 소유물로 하는 권리가 설정되는 일’(몽테스키외, 하재홍 옮김, 법의 정신, 2012, 동서문화사, 265면)이다. ‘노예’는 ‘다른 이의 소유물’이나 ‘타인’이 아니라, 바로 주인 ‘자신의 소유물’이다. ‘회사택시’가 아닌 ‘개인택시’이고, 자기돈을 들여서 산 ‘자신의 소중한 재산’이다.
중소기업에서 몇천만원 짜리 기계 한 대를 사면 사장은 틈만 나면 조이고 닦고 기름칠을 한다. 그야말로 지극정성이다. 그렇게 하는 이유는 다름 아니다. 자기 것이기도 하고 이 기계가
앞으로 본인에게 몇천만원, 몇억 아니 그 이상의 큰돈을 벌어줄 소중한 ‘노동수단’이기 때문이다.
노예는 단순히 ‘말하는 동물’이 아니다. 기계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았던 고대 시대 및 산업화
이전 시대, 노동력이자 유일한 노동수단이었다. 즉 오늘날의 노동자 역할에 기계 역할이 더해진 수단이었다. 한마디로 주인이 부자가 되려 할 때 그 부의 원천은 100% 이 노예라는 ‘말하는 동물’에서 나왔다. 당연히 노예 가격도 싸지 않았다. 미국 남부에서 농업 노예 한 명의 값은 1795년 30달러 정도였고, 1815년 노예무역이 공식적으로 폐지된 후인 1860년에는
1200-1800달러 정도(에릭 홉스봄, 정도영·차명수 옮김, 혁명의 시대, 2009, 한길그레이트북스, 542-3면)였다. 영국 캠브리지 대학이 발표한 자료에 의하면, 18c 남자 농업 노예는 140파운드, 여자 가사 노예는 60파운드로 오늘날 가치로는 각각 14,000파운드, 6,000파운드 정도(2015.8.13일자 뉴시스 참조)였다.
영국 자료 기준으로 볼 때, 남자 농업 노예는 원화 기준 2,600만원 상당이고 여자 가사 노예
는 1,100만원 상당이다. 사람의 가치를 금액으로 따질 수는 없으니 싸다 비싸다 할 수는 없
고, 다만 당시의 유일한 노동수단이자 노동력이라는 차원에서 볼 때 우리나라 현재의 물가 수준에서는 그리 높은 가격은 아니라 할 수 있다. 농업 노예 기준으로 볼 때 중형 자동차 가격정도이다. 그러나 당시의 산업 구조와 가까운 아직 산업화가 덜 된 국가의 물가 수준에 비추어보면 매우 비싼 가격이다. 어찌 되었든 부를 안겨줄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자 적지 않은 금액을 지불하고 마련한 재산인 만큼 바보가 아니라면 주인 입장에서는 항상 노예 상태를 최상으로 유지하여 오랫동안 잘 사용하려 했을 것이다. 자가용이나 공장의 기계를 새로 살 때의 각오처럼, 짧은 기간에 감가상각이 많이 되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여 노예를 관리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주인들이 노예들에 대해 비인간적 대우나 잔인한 행동 같은 것을 하지 않았
을 것이라 생각할 수는 없다. 일단 ‘사람’이 아닌 ‘말하는 동물’인 이상 기본 대우 자체가 이미 비인간적인 것이고, 그 이상의 잔인한 행동도 많이 했을 것이다. 오늘날 노예제가 아닌 자유 고용제에서도 종업원에 대한 비인간적 대우가 심심치 않게 발생하는데 노예제 아래에서는 당연히 그 이상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멀쩡한 자기 차를 망가트려 고물상으로 보내는 어리석은 사람은 없듯이, 일상적인 대우에서 잔인한 행동을 하더라도 ‘말하는 동물’이 심각하게 망가지거나 아예 못쓰게 되는 그런 상황까지 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노예에 대한 주인들의 대우는 시종일관하지 않았다. 고대 노예제에서 노예
는 시장 생산을 위한 도구로 전락하면서 그 대우가 열악해졌고, 17-19c 아메리카에 있어서의 노예 제도 역시 국제 분업 무역을 위한 면화 등의 플랜테이션 경작이 일반화되면서 노예에 대한 대우가 더 열악해졌다. 노예가 주인의 소유물이기는 하지만 고대 그리스에서의 가족은 노예를 포함한 개념이었으며, 가장을 중심으로 한 남편과 부인, 아버지와 자식의 관계처럼 주인과 노예 역시 중요한 가족관계(아리스토텔레스, 이병길·최옥수 옮김, 정치학, 2006, 박영사, 18면 참조)였다. 로마 마찬가지로 초기에는 ‘노예와 더불어 생활하고 노동하고 식사를 했으며, 노예에 대해 온정과 함께 공정을 유지’(몽테스키외, 하재홍 옮김, 법의 정신, 2012, 동서문화사, 275면)하였다.
결론적으로 노예는 ’말하는 동물‘로서 인간 대우를 받지는 못했지만 주인의 소중한 재산이었
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인분을 먹을 것을 강요받을 정도의 어리석은 자해성(주인이 자신의 소
중한 재산을 스스로 망가트리는) 잔인한 대우는 없었을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리고 고대
그리스·로마 시대에 있어서나, 17-19c 아메리카 대륙에 있어서나 노예의 주요 역할이 가사 담당에서 상품 생산으로 바뀌면서, 가족 또는 가족에 가까운 신분에서 부를 창출하는 단순한 노동수단으로의 전락과 함께 대우가 열악해졌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가사든 생산 활동이든 ‘일’을 대하는 노예 쪽에서의 입장은 어떠했을까. A. 스미스는 ‘어떠한 재산도 획득할 수 없는 인간은 가급적 많이 먹고 가급적 적게 일하는 것 이외 어떤 것에도 관심을 가질 수 없다’(Adam Smith, The Wealth of Nations, 2003, Bantam Dell, 493p)라고 말하고 있다.
노예는 소나 말과 다름없는 주인의 소유물이다. 몸도 주인의 것, 그 몸으로 생산해 낸 것들도
모두 주인의 것이다. 그런데 노예는 소나 말과 다른 것이 있다. 바로 ‘생각하는 능력’이다. 소
나 말도 본능적으로 가급적 적게 일하고 많이 먹으려 한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본능적으로·기계적으로 작동하는 순박한 욕구에서 그친다. 어린아이들의 순진한 욕심처럼. 그런데 ‘말하는 동물’인 노예는 ‘생각’을 할 수 있다. 따라서 자연스럽게 어떻게 하는 것이 자기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것인지를 공간적·시간적 차원에서 비교분석하게 된다.
그런데 현실에서 외부적으로 그가 소유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가 외부적으로 소유하는 것은 모두 주인의 것이 되기 때문이다. 방법은 내부적으로 소유하고 몸을 최대한 힘들지 않게 유지하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가급적 많이 먹는 것, 많이 자는 것 그리고 적게 일하는 것이다. 특별히 사악해서 그런 것이 아니다.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누구나 자연스럽게 자신의 이익을 가장 우선시하기 마련인데, 노예에게는 땀 흘리고 잠을 줄여가면서 열심히 일해 자신을 이익되게 할 어떠한 방법도 주어져 있지 않다. 따라서 주어진 제약조건에서 자신에게 가장 이익되는 것을 생각한 결과 나온 답이 많이 먹고 많이 자고 적게 일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자유 피고용인이 ‘일’을 대하는 입장은 어떨까. 자유 피고용인 역시 노예와 동일하게 자기 이익을 우선시한다. 그러나 다른 점은, 노예는 그 이익을 우선시한 결과가 극히 미미한 수준의, 1.5리터밖에 되지 않은 위 가득 채우기, 하루 24시간 한계 내에서 최대한으로 잠 많이 자기 그리고 마찬가지로 24시간 한계 내에서 최대한 놀기인데, 자유 피고용인은 그 욕망 실현에 제약이 없다. 있다면 그것은 본인의 능력 그리고 태도일 뿐이다. 따라서 자유 피고용인은 현실에서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정당한 방법이 있다면, 그리고 다른 특별한 편법이 허용되지 않는 환경이라면 당연히 최선을 다해 노력을 하게 된다.
1776년 건국 이후 19c 중반까지의 미국 사회를 연구한 A. D. 토크빌은 ‘노예들의 숫자가 적
은 지방들이 노예들의 숫자가 많은 지방들보다 인구, 부 및 번영의 정도에 있어서 월등하게 빨리 신장한다는 특이한 사실’(A.D. 토크빌, 임효선·박지동 옮김, 미국의 민주주의, 2005, 한길사, 448면)에 대해 말하고 있다. 또 근대 자본주의의 역사를 연구한 에릭 홉스봄(1917-2012)은 ‘노예 노동은 노예를 사들일 때 지불한 몸값과 또 그들을 키우면서 제공한 의식주 생계비를 계산에 넣을 때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는 비싸게 먹히며, 자유노동에 비하여 명백히 비생산적’(에릭 홉스봄, 정도영 옮김, 자본의 시대, 2002, 한길그레이트북스, 363면 참조)이라고 말하고 있다.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다. 소유할 수 없는 자는 노력할 이유 역시 없고, 무한대로 소유할 수 있는 자는 편법이 없다면 정당한 범위에서 최선의 노력을 다할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노예와 자유 피고용인의 자기 것 소유 여부에 따른 태도 차이 말고도 자유 고용계약이 생산수단 소유자 입장에서 더 유리할 수밖에 없는 다른 이유가 있다. 노예의 유지관리 비용은 모두 전적으로 주인의 부담이다. 그러나 자유 고용인의 생활 및 건강 유지비 등은 모두 자유 피고용인 본인 부담이다. 따라서 사용인 입장에서 노예를 사용할 때는 노예의 건강과 수명을 고려해 비용과 수익 창출을 장기적 차원에서 고려할 것이고, 자유 피고용인을 고용했을 때는 대체 인력이 있는 한 그들의 건강과 수명에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을 것이다.
즉 자유 피고용인에 대해서는 짧은 기간에 감가상각이 심각할 정도로 진행되더라도 최대한으로 생산물을 뽑아내려는 유혹에 빠지게 될 것이다. 그런데 자유 피고용인의 단기간에 걸친 조기 감가상각은 사용자 입장에서만 유혹을 받는 것이 아니다. 자유 피고용인 본인의 입장에서도 결과적으로 그런 유혹에 빠질 수 있다.
A. 스미스(1723-1790)는 ‘성과급으로 보수를 받으면 지나치게 자신을 혹사시켜 몇 해 안가
자신의 건강과 체질을 망가트리기 쉽다’라고 말하고 있다. 사용자의 탐욕적 생산성 극대화, 자유 피고용인의 지나친 자기 이익 추구가 노동력의 심각한 훼손 또는 상실까지도 가져올 정도라는 이야기다. 어찌 되었든 비용 측면에서 보더라도, D. 리카도(1772-1823)의 임금생존비설(Wage Subsistence Theory) 이론까지 추가로 고려하면, 사용자 입장에서의 자유 피고용인 선택은 분명 더 유리한 대안이며, 또 각자의 이익 추구 측면에서 보더라도 어느 정도까지는 사용자와 자유 피고용인의 이해가 일치하기까지 한다.
A. 스미스는 ‘자유인이 한 일이 궁극적으로 노예가 한 일보다 더 비용이 적게 든다는 것은 모
든 시대, 모든 국민의 경험이 입증하는 바라고 나는 믿는다’라고 말한다. 노예 제도의 폐지가
반드시 인도주의적 차원 때문만은 아니고, 더욱이 노예들만을, 흑인들만을 위한 것도 아니었
다는 것을 의미한다. 경제성 차원에서도 노예 제도는 폐지될 수밖에 없었다.
두 번째 질문은, 직접 생산을 하는 입장에서는 노예제와 자유 고용제 중 어느 쪽을 선호하겠
느냐는 것이다. 물론 앞서 질문의 전제와 같이 노예 제도가 허용되고, 인권에 대한 도덕관념
은 모두 배제한 상태에서다
사람들이 학업을 마치고 사회생활을 시작할 때 자영업보다는 대부분 직장을 택한다. 직장 중
에서도 공무원이나 공기업을 선호한다. 자영업과 직장을 대비하면 각각의 특징적 속성은 ‘자
유’와 ‘안정’이다. 그리고 직장에서 일반 기업과 공무원을 다시 대비하면 그 각각의 상대적 속성 역시 ‘자유’와 ‘안정’이다. A. D. 토크빌은 ‘고대의 노예들은 자기 상전과 같은 종족에 속했으며 교육과 지혜의 측면에서는 오히려 상전보다도 우월한 경우도 있었다. 양자를 구별하는 유일한 척도는 자유였다’(A.D. 토크빌, 임효선·박지동 옮김, 미국의 민주주의, 2005, 한길사, 444면)라고 말하고 있다.
‘자유’는 1789년 프랑스 대혁명 이후 숭고한 정치적 의미를 지니기 전까지는 법률적으로 ‘노
예 상태’의 반대를 나타내는 단순한 의미(에릭 홉스봄, 정도영·차명수 옮김, 혁명의 시대, 2009, 한길그레이트북스, 148면 참조)였다. 즉 ‘자유’와 ‘노예’는 자리를 함께할 수 없는 배타적인 양극의 의미였다. 또 A.D. 토크빌은 ‘현대인들은 끊임없이 두 가지 상반되는 열정에 사로잡혀 있다. 즉 이들은 한편으로 지배되기를 바라며, 다른 한편으로 자유로운 상태에 머무르기를 원한다’(A.D. 토크빌, 임효선·박지동 옮김, 미국의 민주주의, 2005, 한길사, 890면)라고 말하고 있다.
현대인들은 모두 마음 상태가 최소 절반 이상은 이미 자발적 노예가 되어 있다는 이야기다.
나를 대신하여 누군가가 나의 삶을 일부라도, 아니 할 수만 있다면 내 삶 전체를 통째로 책임
져 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조금이라고 하고 있다면 우리는 절반이 아니라 훨씬 그이상으로 이미 노예 쪽으로 기울어진 상태다. 타인이 내 삶을 책임진다면 그것은 다름 아닌 동일한 정도로 그가 나를 소유하고 있는 것이며, 누군가 내 삶을 통째로 책임지고 있다면 그는 이미 완벽한 주인으로 내 위에 우뚝 서 있는 것이다.
현대인은 늘 바쁘다. 삶의 의미를 새겨볼 잠시의 여유도 없다. 바빠 죽겠다는 말을 어느 누구
할 것 없이 모두 입에 붙이고 산다. 고대 그리스의 한 축이었던 스파르타에서는 농사를 노예인 헬로트가 전담했다. 그리고 시민들은 정치와 전쟁만을 담당했다(플루타르크, 이성규 옮김, 플루타르크 영웅전 전집, 2003, 현대지성사, 111면 참조). 당시 농사가 경제활동의 대부분이니 생산은 모두 노예가 담당한 셈이었다. 고대 로마 마찬가지였다. 단순한 농사는 물론 하녀, 유모, 미용사, 가정교사 등 생산 및 가사 활동을 노예가 담당했다.
고대 그리스·로마에서 시민이 생산 활동에 직접 나서지 않은 이유는 명료했다. 덕을 향상시키고 정치적 직무를 수행하는데 여가가 필수이기 때문이었다(아리스토텔레스, 이병길·최옥수 옮김, 정치학, 2006, 박영사, 286면 참조). 삶을 의미 있게 만들고 건강한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데는 오늘날 마찬가지로 여가가 필요하다. 어제를 뒤돌아보고 주위를 챙기고 스스로를 추스를 잠시의 짬이 허용되지 않는 삶이 건강할 수 없고, 사회 역시 민주주의 아닌 중우정치로 가기 쉽다.
직장 생활을 오래 하다 보면 직장과 개인 자신을 혼동하는 경우가 많다. 직장의 명성과 자신
을, 조직이 부여한 타이틀과 자신을 동일하게 보고, 또 자기 소유도 아닌데 영원히 직장과 함
께할 것 같이 행동을 한다. A.D. 토크빌은 ‘하인은 자기 자신에게 명령하는 사람의 재산에 자기 자신을 만족스럽게 투영하고, 주인의 명성을 함께 나누어 갖고, 주인의 계급에 따라 자신을 높이고, 다른 사람의 위대함으로 자신의 마음을 채우며, 그 위대함을 충분히 그리고 실질적으로 가지고 있는 사람보다 더 그 위대함을 높이 평가하고 있는 것이다. -중략- 주인의 긍지가 하인의 부질없는 허영과 천박한 허세로 되는 것이다’(A.D. 토크빌, 임효선·박지동 옮김, 미국의 민주주의, 2005, 한길사, 748면)라고 말하고 있다.
기본적으로 직장과 개인은 노동 제공과 그에 따른 보수 지급의 계약관계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개인 입장에서 더 좋은 조건이 있으면 직장을 옮길 수 있고, 조직 역시 상황이 어려
우면 합법적 범위 내에서 계약을 해지하고 구성원을 내보낼 수 있다.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다른 곳으로 옮긴다고 조직이 그를 배신자 취급하는 것도 근거 없는 행위이고, 조직이 불가피한 상황으로 고용계약을 해지하자는데 무턱대고 내 인생 책임지라 하는 것도 정당하지 않다. 조직에서 오너가 아니라면 일반 사원이든 CEO든 모두 피고용인이고 피고용인이 아니라면 오너다. 그리고 피고용인은 오너 또는 조직과 계약에 따라, 계약기간 동안, 계약서상 의무를 다하고 그에 대한 반대급부를 받을 뿐이다.
몽테스키외는 노예 제도의 부당성을 지적하는 내용에서 ‘주인이 먹을 것을 주었으니 노예 제
도가 노예들에게 유익할 수도 있지 않냐’는 질문을 가정하면서, ‘그렇다면 노예 신분은 스스로 생활비를 벌지 못하는 사람에게만 한정지어야 할 것이다’(몽테스키외, 하재홍 옮김, 법의 정신, 2012, 동서문화사, 267면 참조)라고 자답하고 있다.
A. D. 마슬로우(1908-1970)는 인간의 욕구 단계를 낮은 단계에서 높은 단계로, 생리적 욕구-안전의 욕구-소속·애정의 욕구-존경의 욕구-자아실현의 욕구, 다섯 단계로 제시하였다. 그리고 욕구 간 관계는 아래 단계부터 위 단계 욕구로 물이 채워지는 것처럼 차례대로 채워져 간다고 하였다.
주인의 비싸고 소중한 재산인 노예에게 있어 생리적 욕구와 안전 욕구 충족은 필수다. 이 두
가지가 보장되지 않으면 주유를 하지 않은 자동차처럼 노예는 노예로서 기능을 제대로 할 수
가 없기 때문이다. 세 번째 욕구 단계인 소속·애정의 욕구는 부분적으로 충족된다. 앞서 A.
D. 토크빌의 지적에서처럼 부잣집 노예의 자부심과 소속감이 가난한 자유민의 그것보다 결코 떨어질 일이 없을 터이니.
몽테스키외의 ‘노예 신분은 스스로 생활비를 벌지 못하는 사람에게만 한정지어야 할 것이다’
라는 언급은, A. D. 마슬로우의 욕구 이론에 비추어 볼 때 논리적이다. 자유인이지만 생존 자체가 위협받을 정도로 빈곤하다면 그것은 생리적 욕구와 안전의 욕구가 충족되는 노예의 삶보다 결코 낫다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때 그 사람에게 노예와 자유인 둘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는 권리가 주어진다면, 그것은 결코 그에게 해 되는 조건은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인권 문제나 관념적 자유, 그리고 법적 형식을 배제했을 때의 이야기다.
여기서 다시 두 번째 질문으로 돌아가자. 당신이 직접 생산을 하는 입장이라면 노예제와 자유 고용제 중 어느 쪽을 택할 것인가. 아니다. ‘어느 쪽을 택할 것인가’하고 미래 시점으로 질문을 하면, 명분 또는 보편적 상식에 구속되거나 주위를 의식한 대답, 또는 말뿐인 의미 없는
대답이 나오기 쉽다. 진실한 그리고 현실적인 의미 있는 답을 얻기 위해 이미 선택이 이루어
진 과거 시점으로 질문을 해 보자.
지금까지의 선택에서 당신은 자유를 택했는가 안정을 택했는가, 개인적 삶의 문제들을 스스로 해결했는가 아니면 국가와 사회에 기대고 또 조직에 매달리고 하지는 않았는가, 또 자신의 독자적인 가치와 일시적으로 조직으로부터 주어진 완장의 역할·지위를 혼동하고 호가호위 하지는 않았는가. 내 몸과 정신의 참된 주인으로 의미 있는 삶을 만들기 위해 자신을 살피는 생각의 시간은 끊임없이 마련해 왔는가.
오늘날 그 누구도 노예가 되기를 원하지 않는다. 아니다, 다들 그렇게 말한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노예적 행동·태도·생각에서 완벽하게 자유롭지는 못하다. 극히 소수를 제외하고는. 21c, 평등의 기치를 높이 세우는 시대에 더 이상 노예제는 없다. 그러나 제도가 없다고 실질까지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이름이 달라져, 인식하지를 않아, 재미와 자극에 취하여 실질을 간과하고 있을 뿐이다.
* 출처: 신동기 저 《인문학적 생각들》(티핑포인트, 2016년 5월 출간) p163-179- 7
*****(2024.12.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