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낙민
가성직자단의 신부로 활약
1751-1801, 세례명 루가(특은 바오로) , 서소문 밖에서 참수
일찍이 천주 신앙을 받아들인 남인 출신의 젊은 학자들 중에는 훗날 높은 벼슬을 한 사람이 많았다. 그러나 높은 벼슴에 오를수록 그들은 외부의 탄압 속에서 '신(신앙)이냐 아니면 왕(세속의 영달)이냐’ 를 놓고 고민하거나 좌절을 겪지 않으면 안되었다. 현감 이승훈, 승지 정약용,진사 황사영 등이 바로 이런 인물들이었다.
신이냐 왕이냐?
충청도 예산 출신의 홍낙민(洪樂敏. 루가)도 마찬가지였다. 1751년 남인에 속하는 유명한 양반 집안에서 태어난 홍낙민 역시. 혼히 그러한 집안의 자제들이 그리하였던 것처럼 과거를 보기 위해 학문에 몰두하였다. 이익의 제자로 유명한 홍유한은 그의 당숙이었는데, 홍낙민은 스물여섯 살 때인 1776년에 그의 소개로 양근 대감 마을에 사는 권철신의 제자로 들어가게 되었다.
이후 그는 이벽, 정약용, 권일신 등과 사귀었으며. 1784〜 1785년 경에는 이승훈으로부터 ‘루가’ (혹은 바오로)라는 세례명으로 세례를 받았다. 그러나 홍낙민은 1780년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면서 고민에 빠지게되었다. 세속의 영달에 대한 욕심이 신앙의 가르침과 함께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이 에 그는 교회를 등지지 않으면서도 남의 이목을 피하기 위해 과거 공부를 계속하였고. 1788년 문과에 급제한 뒤에는 사간원 정언(正言)과 사헌부 지평(持平)을 역임하였다.
이 무렵 그는 고향을 떠나 서울 서대문 밖에서 살고 있었는데, 1786년 이래 약 2년 동안은 가성직자단 안에서 신부로 임명되어 활동한 적도 있었다.
1791년 신해 박해가 일어나자 정조는 그가 천주교 신자들과 가까이한다는 얘기를 듣고 이를 금하도록 하였다. 이때부터 그는 겉으로는 천주교를 멀리하는 것처럼 보였으나. 집에 돌아와서는 기도 생활을 계속하면서 교회의 가르침에 따라 재(齋)를 지켰다.
주문모 신부가 입국하자 홍낙민은 보례를 받은 후 성사받을 준비를 하였다. 그러나 1795년 여름 주 신부가 입국한 것이 발각되어 을묘박해(乙卯迫害)가 일어나자. 그는 두려운 나머지 천주교를 배척하는 상소를 올렸다. 여기에서 그는 "천주교의 폐해는 홍수나 맹수보다 심하여 철저하게 금하지 않는다면 장차 나라에 큰 화가 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가 천주교 신자임을 알고 있는 정조는 그의 솔직하지 못함을 책망하면서 공직에 있는
자는 언제나 자기 생각을 있는 그대로 임금에게 말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그의 마음은 다시 신앙으로 기울어지기 시작하였다. 홍낙민은 스스로 자신의 나약함과 배교를 책망하였고, 다시 교리를 실천하였으며. 때가 되면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굳게 다짐하였다. 믿을 만한 전승에 따르면. 그는 매일 묵주 기도를 드렸는데,공무 중에나 집에 손님과 친구들이 찾아왔을 때라도 한 번도 묵주 기도를 빠뜨리지 않았다고 한다.
1799년 홍낙민은 모친상을 당하였으나 신주를 모시지 않았다. 게다가 아직 그의 신앙이 완전하게 단련되지 못한 상태에서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 나게 되었다. 2월 12일 금부 도사에게 체포되어 의금부로 압송된 그는, 그날부터 즉시 추국(椎_)을 받았다. 추관들은 그에게 “지금도 천주교를 신봉하느냐? 네 동료로는 누가 있으며 , 누가 지도층인가?” 라고 물었다. 이에 홍낙민은 “천주교의 가르침인 십계 중에는 부모에 효를 다하고 임금에게 충성 하라는 말이 있는데. 이것이 어찌 틀린 것입니까’ 하고 항변하였다. 그러나 그는 거듭되는 문초에 다시 두려움이 앞서 몇 마디 나약한 말을 했지만, 동료들을 밀고하지는 않았다.
추관들은 수렴청정을 하고 있던 대왕대비에게 이 사실을 보고하였다. 그런 다음 홍낙민에게 사형 판결 대신 유배형을 내리고, 관례에 따라 그의 다리에 매질을 가하였다.
배교의 벌로 기꺼이 받은 순교
홍낙민이 매질을 당하는 순간. 하느님께서는 그의 본심을 알고 그를 기다려 주셨다. 그의 얼굴에는 갑자기 황홀한 기쁨이 넘쳐 났고, 추관들의 어떠한 호령과 형벌도 무서워하지 않을 용기가 솟았다.
▲ 홍낙민은 형장으로 끌려가면서도 백성들에게 권면 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제가 지난날에 한 모든 것은 비겁하게 목숨을 보전하려던 것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이제 또 매질을 당하고 망신을 당하니, 저는 마음속에 있는 말을 모두 솔직하게 말씀드리고 용감하게 죽고자 합니다. 제가 섬기는 하느님은 하늘과 땅과 천신(天神)과 사람과 만물의 주재자이십니다. 마테오 리치와 다른 선교사들은 우러러볼 만한 도리와 성덕 (聖徳)을 가진 사람들이며. 그들의 말은 모두 진리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지금 하느님을 위하여 죽고자 하며. 그렇게 함으로써 천주교 신앙의 진리를 증거하고자 합니다.”
실로 자신이 넘어야 할 온갖 고난과 두려움. 세속에서 가족과 후손들이 겪어야 할 불이익과 억압을 잘 알고 있는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이었다. 국청을 주재하던 추관들은 이 말에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주변에 있던 의금부 형리들도 이제 막 감형을 받은 죄인이 사형을 원하는 것에 놀라 웅성거렸다.
추관들은 다시 대왕대비 앞으로 사람을 보내 이 사실을 보고하였고, 대왕대비는 몹시 노하여 혹독한 고문을 가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홍낙민의 몸은 매질로 으스러졌다. 옥으로 다시 끌려 온 그는 상처에서 흐르는 피를 씻으며 “이제 나는 행복하고 마음이 편안하다.고 말하였다. 이제 그에게는 세속의 영달이 하찮은 것에 지, 나지 않았던 것이다. 사형 판결문을 받고 나서도 그는 “이제 내가 받을 죽음은 이전의 배교에 대한 벌이므로 기꺼이 받겠다”면서 기쁘게 서명하였다.
금부 옥에서 나와 서소문 밖 형장으로 끌려가는 동안 홍낙민의 얼굴에는 기쁨이 넘쳤다고 한다. 그 기쁨은 명도회 회장 정약종, 총회장 최창현 등과 함께하는 길이라 더욱 크게 느껴졌을 것이다. 수레 위에서 혼들리는 고통음 당하면서도 그는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보며 주변에 모여든 백성들에게 권면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1801년 2월 26일(양 4월 8일)이렇게 홍낙민은 칼날 아래 자신의 목숨을 바쳤으니, 그때 그의 나이 쉰하나였다. 홍낙민의 용감한 증언을 들은 교회사가는 훗날 이렇게 기록하였다. "처음에는 굳세다가 마지막에 가서 굴복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죄를 지은 뒤에 다시 일어나고, 배교하였다가 순교자가 되는 것은 혁혁한 공로를 동반하는 위대한길이다.”
홍낙민의 집안에서는 그 후 여러 명의 순교자들이 나왔다. 그의 셋째 아들 홍재영(洪柃榮, 프로타시오)은 신유박해 때 체포되어 배교한 뒤 유배형을 받았으나, 1839년의 기해박해 때 용감하게 신앙을 증거하고 전주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또 홍낙민의 손자이자 홍재영의 맏아들인 홍봉주(洪鳳周,토마스)는 교회를 위해 오랫동안 활동하다가 1866년 병인박해 때 서소문 밖에서 순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