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하역사소설 태종 이방원 56
5.정통 유학과 도참설의 한판 대결
인왕산에 오르니 남경(한양)은 장관이었다
서운관은 천문(天文)과 역수(曆數) 그리고 날씨를 맡아보던 기관이다.
서운관이라 부르기 이전에는 태복감(太卜監), 사천대(司天臺), 관후서(觀候署)로 불리었다.
하늘을 관찰하던 기관이 천도 후보지를 물색하는 담당부서가 된 것이다.
서운관원들이 임금에게 인왕산을 안내하기 위하여 도착한 곳이 중앙관상대가 있던 뒷산이었다.
천도 후 서운관이 관상감(觀象監)으로 이름이 바뀌었으니 서운관과 관상대 자리는 깊은 인연이 있나보다.
무악산 자락에서 연(輦)을 타고 출발한 태조 이성계는 사천(沙川)을 지나 무악과 인왕이 연결되는 고개를 넘어
연에서 내렸다. 언덕이 가파르기 때문에 수레가 달린 연이 오르지 못하기 때문이다.
신하들이 견여(肩輿)를 타고 오르기를 주청했지만 왕은 걸었다.
야전에서 단련된 하체가 튼튼하기도 했지만 걸으면서 산세를 살피겠다는 뜻이었다.
한참을 오르던 임금이 멈추었다.
눈앞에 펼쳐진 모습은 장관이었다.
마주 보이는 용마산 뒤로 용문산이 아스라이 보이고 북쪽으로 삼각산을 병풍삼아 백악산이 우뚝 서 있었다.
남쪽으로는 어머니 품처럼 아늑한 목멱산이 자리 잡고 있었다.
멀리 관악산도 시야에 들어왔으며 은빛 물결이 부서지는 한강도 눈에 들어왔다.
남경(南京-한양)을 처음 본 이성계의 소감은 병법에 통달한 야전군 지휘관 출신답게 남경(한양)이
군사요충이었다. 특히 목멱산 아래 1만 군사를 주둔 시키면 100만 대군을 대적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용(踊-번데기)이 되지 않기 위하여 턱수염을 한강에 담그고 있는 묘(猫)의 모습을 하고 있는
목멱(木覓- 남산)은 천하의 군사요충이었다.
산세를 관망하던 임금이 윤신달에게 물었다.
“여기가 어떠냐?”
“우리나라 경내에서는 송경이 제일 좋고 여기가 다음가나, 한 되는 바는 건방(乾方)이 낮아서 물과 샘물이
마른 것이 한이 될 뿐입니다.”
천도 자체를 취소하게 하고 개경에 눌러앉기를 바라는 수구세력의 저항은 끈질겼다.
“송경인들 어찌 부족한 점이 없겠는가? 이제 이곳의 형세를 보니 왕도가 될 만한 곳이다.
더욱이 조운하는 배가 통하고 사방의 이수도 고르니 백성들에게도 편리할 것이다.”
태조 이성계가 흐뭇한 미소를 띠우고 있는데 양원식(楊元植)이 나서며 머리를 조아렸다.
“적성(積城) 광실원(廣實院) 동쪽에 산이 있어 거기에 사는 사람들에게 물으니 계족산(雞足山)이라 하는데
그 곳을 보니 비결에 쓰여 있는 것과 비슷합니다.”
“조운할 배가 통할 수 없는데, 어찌 도읍 터가 되겠는가?”
“임진강에서 장단까지는 물이 깊어서 배가 다닐 수 있습니다.”
“장단에서 광실원은 뱃길이 없지 않은가? 더 이상 거론하지 말라.”
이성계의 마음은 남경에 쏠리고 있었다.
도읍지의 조건이 조운이라는 것도 무악산 학습을 통하여 터득했다.
천하의 요새와도 같은 남경에 군사를 주둔시키면 왕조와 한반도를 지켜낼 자신감이 생겼다.
“왕사(王師)께서는 어떻게 보시었소?”
“여기는 사면이 높고 수려(秀麗)하며 중앙이 평평하니 성을 쌓아 도읍을 정할 만합니다.
그러나 여러 사람의 의견을 따라서 결정하소서.”
토굴에서 면벽수행 하던 승려답게 여유 있는 자세다.
하지만 외향적인 표현과는 달리 새로운 도읍지는 인왕산으로 유치하고야 말겠다는 의지가 강했다.
태조 이성계가 계룡산 천도공사를 중지시켰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자신에게 천도 후보지에 대한 자문이
올 것이라 예상하고 준비를 단단히 하고 있었다.
남경에 마음을 두고 있는 이성계의 의중을 파악한 무학대사는 자문에 응하기 위하여 인왕산을 여러 차례
올랐다. 삼각산 세 봉우리중의 하나인 국망봉에 올라 산세를 살펴봤다.
왕십리에서 삼각산과 도봉산을 바라보며 지세를 살피던 중, 십리(十里) 앞으로 더 나가라는 도선국사의
현몽도 받았다.
무학대사 마음의 중심 추는 선바위에 있었다.
신라 천년, 고려 오백년을 이어온 구심점은 불교라고 믿고 있었다.
고려왕조 말, 탐욕에 물든 일부 승려들에 의하여 불교가 고려조정에 끼친 패악도 없지 않았으나 그래도
불교가 국가의 버팀목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살생을 금하는 불타의 가르침이 도성 안에 살아 있어야 서로 죽고 죽이는 살생을 피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호국불교 정신이 도성 안에 뿌리를 내리고 있어야 전쟁의 참화를 피할 수 있고, 백성들이 태평성대를
구가할 수 있다고 굳게 믿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기 위하여 도성 안에 사찰이 있어야 함은 물론이고, 장삼을 걸치고 화평의 춤을 추고 있는 듯한 선바위를
도성 안에 포함시켜야 한다는 것이 무학의 염원이었고 계책이었다.
하지만 정도전의 생각은 달랐다.
건국이념으로 삼은 척불숭유(斥佛崇儒)라는 낱말이 말해 주듯이 불교는 척결의 대상이었다.
“꼭 도읍을 옮기려면 이곳이 좋습니다.”
남경(한양)에 기울고 있는 왕의 심중을 읽은 신하들이 머리를 조아리며 주억거리기 시작했다.
이 모습을 지켜보던 하륜이 홀로 말했다.
“산세는 비록 볼 만한 것 같으나 지리의 술법으로 말하면 좋지 못합니다.”
하륜은 무악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성계는 시큰둥했다.
어제 조운을 앞세워 무악산을 예찬하던 하륜의 예기를 경청하던 모습과는 사뭇 달랐다.
"산세가 빼어나구려. 이렇게 좋은 터를 추천한 왕사의 얘기를 더 듣고 싶소."
"일국의 도읍지는 천년사직을 기약해야 옳을 줄 아뢰옵니다.
나라가 천년세세 태평성대를 구가하려면 나라 안의 혼란도 없어야 하겠지만 외침이 없어야 합니다."
나직하지만 힘이 있는 목소리였다. 삼각산을 바라보며 호흡을 가다듬은 무학대사는 말을 이어갔다.
"우리나라는 바다 건너 왜구로부터 시달리고 있습니다.
동쪽 바다 건너 왜국(倭國)의 발호를 잠재우기 위해서는, 인왕을 주산으로 하고 북악을 좌청룡, 목멱(남산)을
우백호 삼아 정전(正殿)을 동향으로 앉혀야 할 것이라 아뢰옵니다."
앞날을 내다보는 무학대사의 능력이었을까? 우연의 일치였을까?
무학대사의 눈은 예리했다.
남해안에 상륙하여 노략질을 일삼던 왜구들이 왕도(王都) 코 앞 강화도까지 출몰하여 조운선을 약탈할 정도로
커버린 왜(倭)를 위협세력으로 보는 것은 현실감각이 있었다.
하지만 고려 왕국을 속국으로 취급하던 원나라와 명나라 즉, 대륙세력을 침략세력으로 보지 않고 당연시하는
사대(事大) 시각은 아쉬웠다.
또 하나 왜구쯤이야 대단치 않게 보는 이성계의 심중을 읽지 못했다.
지금은 역성혁명에 성공하여 새 왕국의 국왕으로 등극하였지만, 고려의 청년장교시절 이성계가 백성들로부터
박수를 받게 된 것은 남해안에 상륙하여 노략질을 일삼던 왜구를 격퇴한 것이었다.
이성계에게 왜구는 위협국가가 아니라 토벌의 대상이었다.
"동향(東向)이라…? 기이하군요. 이유를 말씀해 보시오"
북악산과 삼각산을 지긋이 바라보던 이성계가 무학대사에게 되물었다.
"동향으로 된 정전 옥좌에 성상께서 앉아계시면 문무백관들이 성상을 향하여 머리를 조아리게 됩니다.
왜국 역시 성상께 머리를 조아리게 되는 형국이 되는 것 입니다.
용트림하는 왜국의 기세를 꺾으면 천년세세 태평성대를 이룩할 것이오. 그 위세를 잠재우지 못하면 국난에
처하여 나라의 명운이 위태로울 것입니다"
무학대사의 목소리는 설법하듯 나직했지만 확신에 차 있었다.
훗날 임진년의 조선 침공과 국권찬탈. 그리고 오늘날의 일본을 생각해보면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하는 대목이다.
이로부터 200년 후, 1592년 조일전쟁(임진왜란)이 터졌다.
바다에서는 이순신 장군이 ‘죽고자 하면 반드시 살고, 살고자 하면 반드시 죽을 것이다.’
필생즉사 사필즉생
(必生卽死 死必卽生) 이라는 일념으로 고군분투 했지만 국토는 유린되었다.
선조 임금이 창덕궁을 탈출하여 의주로 몽진 떠나고 조국의 명운이 백척간두에 걸렸을 때, 백성들은
무학대사의 예지력에 탄복했고 아쉬움에 탄식했다.
앞날을 내다보는 무학대사의 능력이었을까? 우연의 일치였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