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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은산을 음가 그대로 발음하면 가을산이 잡힌다. 그토록 열렬했던 여름도 아침저녁 도톰한 이불을 끌어당기는 것으로 위력을 내려놓더니 어느새 툭, 가을이 왔다. 세상 반가운 가을이다. 단 한 번도 가을을 싫어한 적 없었으나, 올해는 더 사랑해버릴 것 같은 예감이다. 청풍명월(淸風明月)의 고장으로 산행을 간다는 것부터가 가을을 마중가는 격이니, 뭔들 선선하지 않으랴. 인생의 시기가 가을과 같으면 모두가 넉넉하고 너그러울 것이다. 바야흐로 이해와 용서가 어울리는 계절이다.
가은산(加隱山)은 이름에서 은둔의 부끄러움을 지녔다. 어떤 유래에선지 '간신히 몸만 피한다'는 뜻을 지녔다하니 맞은 편 옥순과 구담에 제 값어치를 내어준 걸까. 청풍호반 물줄기를 선명히 한 눈에 담은 산세치고 지나치게 낮은 이름 같다. 그러나 온 계절이 다 아름다울 호반의 산그림자를 예사로이 넘길 산객은 없으리라. 하나 둘 입소문이 날아들더니 이제는 등산객이 줄을 잇는다는데,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들뜬 기분이 앞서간다.
▲ 산행출발지 옥순대교 (들머리 도착시간 10:50)
새벽에 잠들어 새벽에 눈 뜰 때면 가끔 "이 시간에 내가 왜 깨었지?" 생각 들 때가 있다. 한 달에 한 번 산행을 가는 날이면 몸에 긴장의 끈을 품고 잠들어야 그나마 다시 잠드는 사태가 생기지 않는다. 오랜만에 5시 알람시간에 자동반사하듯 튕겨 일어나고 조건반사하듯 밥을 안치고 냉장고를 여닫는데, 휘청거리며 든 생각. '좀만 더 자면 안 될까?'
그 가망없는 바램을 애써 누그러뜨린 덕분인지, 고속도로를 베개 삼아 하염없이 꿈길 달렸다. 이리 뒤척 저리 뒤척을 반복하는 잠자리지만, 휴게소 세워주면 언제 그랬냐는듯 화장실로 간다. 산행이 길러준 새로운 이력인가 하여 저절로 웃음이 난다. 좀 더 쉬워지고 단순해지는 신경세포도 분명 신의 작품일 것이다.
▲ 옥순대교에서 옥순봉을 담다.
▲ 하늘자락 구름이 예술이다. 산행인원 27명 단체인증샷
가은산의 가장 사랑스러운 명소는 옥순봉을 바라고 선 새바위 구간일 것이다. 그러나 (붉은 줄 구간은)비지정구간이므로 과감히 포기한다. 단 한 사람의 이탈자도 없이 정규코스를 밟았음에도 이탈보다 자유로운 무탈의 해탈을 느끼고자 함이다.
▲ 뿌리의 길
정확하게 11시부터 산으로 들고 줄곧 편안한 흙길을 즈려 밟는다. 발치 아래 뒤틀린 뿌리들이 땅을 기어간다. 이로운 그늘과 뿌리의 조화로움에 산행초입이 가을의 초입 같아진다.
가은산에 대해선 아름다운 우리말 전설이 하나 있다. 이 땅의 태곳적 신화에 등장하는 마고할미와 관련된 전설이다. 마고할미가 나물 캐러 왔다가 반지(?)를 잃어버렸는데 아흔아홉 번째 골짜기에서야 간신히 찾게 되었다. 반지를 찾은 마고할미는 “이 산에 골짜기 하나만 더 있었더라도 한양이 들어설 자리인데, 내가 이곳에 눌러 앉아 살려고 해도 한양이 될 땅이 못 되니 떠나가겠다.”라며 떠났다고 한다. 마고할미가 떠나갔다고 하여 ‘가는산’이라는 이름이 붙었단다. 고운 이름을 점지한 것은 고마운데 그 할미, 참 인정없고 몰염치하다. 반지를 찾아준 것에 감지덕지는 못할망정, 한양 땅이 아니어서 떠나다니... 차별이 심하다.
▲ 그림 같은 절경의 청풍호와 옥순대교
▲ 통천문일까 했더니 곰바위라 한다.
바위가 바위를 떠받든 형상이 신화 속 아틀라스(혹은 시지포스)처럼 거대한 형벌을 짊어진 모습이다. 투박한 생김과 바람이 드나들기 좋은 문을 보는 순간, 돌 하나쯤은 너끈하게 들어올리는 힘 좋은 장사가 떠오른다. 그나저나, 왜 우리나라 사람들은 바위만 보면 흔들어보는(최소한 흔드는 시늉이라도 하려는) 걸까. 우리 전설 속에는 흔들바위를 비롯한 장사의 전설이 심심찮게 등장한다. 서양의 천벌에 해당하는 바위는 적어도 아니란 말씀이다. 힘이 세어도 순박함이 깔린 것이 우리의 정서이겠지.
가은산 바위들은 굵직하고 듬직하다. 미련스럽지 않을 만큼 날렵함도 갖추었다. 그곳 바위들이 소나무를 키우는 광경은 저마다 기기묘묘한데, 바위의 양육 비결이 궁금해질 지경이다. 인간의 품새를 훨씬 앞지르는 바위의 가르침이 이 가을, 하찮은 일상에 시름겨운 이들에게 묵직하게 가닿기를.. 가을은 기도하게 한다 했던가!
▲ 청풍명월 이름 같은 날이면 하늘의 구름도 한껏 미를 뽐낸다.
청풍호 가르는 유람선 물살처럼 바위와 바위 사이, 그리 좁지만은 않다. 오랜만에 등장한 남오현 전 회장님 덕분에 힘센 천하장사 바위를 깊이 새겨서인가. 유난히 좁고 넓은 품새에 대해 생각해본 하루~
▲월악산 줄기 시원하게 내달리다 맑은 호수로 눕는 곳.
전쟁의 여신 아테나는 제우스의 머리를 도끼로 쪼개었을 때 완전 무장한 모습으로 태어났다. 한국인이 사랑하는 소나무는 거친 갑옷, 창 끝 같은 솔잎이 아테나 여신처럼 완전체로 태어난다. 인고의 상징 바위는 또 다른 인고의 상징 소나무를 어떻게 키우고 단련시켰을까. 바위마다 소나무는 제우스와 아테나처럼 혈육인듯 개별적이다. 이때 나는 바위를 예찬해야 할까, 소나무를 예찬해야 할까.
▲ 아무리 봐도 질리지 않는 풍경에 풍경이 얹혔다.
가은산 정상부는 숨겨진 은닉의 뜻이 말하듯 다소 후미진 인상을 풍긴다. 주유천하 왕래하던 조선의 선비는 어디로 숨었나. 그냥 산 속에 폭 감춰졌기에 못내 그런 뜻을 달게 되었나. 정상이 이렇게 정상스럽지 않은 곳도 드물 것이다. 그 이름 가은산.
청풍호는 날개를 펼쳤다. 남한강 물줄기가 고스란히 합쳐지며 활짝 날개를 펼친 형상으로 날아오른다. 호수가 날아오르는 모양에서 선비의 도포자락 같은 학의 선율을 엿본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눈에 잡히지 않을 새바위. 폰 속의 긴 손(줌)이 나가 새바위를 당겨본다. 바위는 점점이 자라 콩알만해지는데 둥지의 어미새로 보기 완벽한 각도다. (바위 만큼 각도마다 달라지는 얼굴도 없을 것이다.) 새는 날아가기 쉬우니 멀찍이서 봐야겠지. 옥순대교를 바라보는지 예의 먼 어딘가로 시선을 두었다. 순간, 청풍호가 날개를 펼친 뜻을 알겠다. 어미새 한 마리 바위에 묶여 종종거렸을 것이다. 겨드랑이 날갯죽지 자라고 자라 그예 호수에 닿아서일 것이다. 쉼없이 깃털 다듬다 마침내 날개로 뱃길을 연 새바위.
▲ 씩씩한 여장부 이현미 총무님이 겁없이 올라앉은 모로 누운 소나무. 칠칠치 못한 다음 타자에서 불상사를 남겼다.
왜 올랐을까. 오르고 나서야 알았지만 남들 따라 한 죄밖에 없다. 운동두뇌 없는 신체로 마음 한 번 잘못 쓰면 순식간에 앞모습 구기며 뒤로 낙하해버릴 판. 튼튼한 소나무에 사시나무 떨듯 얹혔지만 최대한 웃는다. 사진이니까. 그 와중에 카메라 각도를 계산하는 찍사의 임무. 조금 더 난간 끝까지 옮겨가야 풍경이 다치지 않는다나. 남오현 회장님이 거구를 이용해 살짜기 자리이동을 도와 준다. 팔 하나 믿고 소나무 앉은자리 이동을 실시하는데, 사태는 그 모든 안간힘이 끝나고서야 파악되었다. 비명 끝에 땅에 착지하고 남은 것은 까맣게 끈적끈적한 송진의 흔적. 접착제이자 껌딱지 같은 것이 바지에 오롯이 새겨지고 말았다. 한동안 성심성의껏 지우는 방법을 고민해야 할, 그날의 주인공이 준 선물. 나는 가은산 소나무 그렇게 농락당했다.
가은산 정상부 가는 어디메에서 길 한가운데를 점령하고 도시락을 먹는 산행팀을 보게 되었다. 그들은 산길 좁은 도로를 통째로 저당잡은 듯 당당한 모습이었는데 단순히 사람들 통행만 방해한 게 아니었다. 미안하지도 않은지 누가 들어도 요란스런 끄억거림으로 술과 음식을 나눠 먹는데 저절로 눈살이 찌푸려졌다. 그러나 진짜 어이없는 것은 그 후에 일어났다. 그들이 앉은 자리에서 겨우 스무 발작 정도 떨어졌을까. 그 좁다란 자리의 스무 배는 될 널찍한 식탁자리가 나온 것이다. 우리는 갑자기 비분강개하며 그들의 몰염치한 행동과 주위를 살피지 않는 단순 무식한 행위를 본의아니게 흉보게 되었다. 조금만 더 내다보면 그토록 욕을 보지 않아도 될 훌륭한 자리가 기다리고 있는데 말이다. 바지에 송진액 묻히고 나서야 나도 깨달았다.
▲ 청풍호 넓은 띠와 월악산 줄기를 한 눈에 조망할 수 있는 최적의 전망대
▲ 바닥에 엎드린 바위는 누구를 숨겼을까. 가은산은 볼매산(볼수록 매력있는 산)이다.
▲ 저 너머 뾰족하게 돌출한 영봉의 모습이 이 사진의 실제 주인공이다.
▲ 새는, 오늘도 여전히 날갯짓 파닥거렸을까. 잔잔하던 호수가 가까이 끌어당긴 손 끝에서 은비늘을 일으킨다.
▲ 사진 각도 좀 아는 최진국 회원. 옆선이 살아나고 있다고 옆선을 보였을까.
▲심호흡 명상으로 라인을 숨기는 박정철 부회장의 베스트 샷.
▲ 가은산을 첫 산행지로 택한 오세진 회원. 오랜만의 젊은 피다.
가은산을 걷고 있지만 옥순과 구담봉은 떨어질 수 없는 사이처럼 서로를 끌어당긴다. 단양팔경에 속하지만 엄밀히 제천군에 소속된 옥순, 구담봉은 대학자 이황과 천재화가 김홍도와 관련된 기록이 전해진다. 남한강 뱃길 따라 단양팔경 유람을 다니던 그 옛날 선비들에게 옥순봉은 단양팔경에 접어드는 관문으로 여겨졌다. 옥순봉에는 퇴계 이황의 글씨인 '단구동문(丹丘洞門)’이 새겨져 있다는데, 신선이 사는 아름다운 단구(단양의 옛 이름)로 들어가는 문이라는 뜻이란다. 단양팔경에 대한 퇴계 선생의 남다른 애정을 짐작할 수 있다. 더불어 김홍도의 화첩 속에는 단양팔경을 유람하는 그림이 여럿 전해진다. 옥순봉과 구담봉의 모습들 또한 화폭 속을 유람하고 있다.
▲ 사진에 대해 나 만큼(?)이나 각도를 생각하는 오석현 회원님
▲ 좋은 건 일단 따라해보는 참여정신
이렇게 너도 나도 새바위처럼 먼 어딘가를 쳐다보는데, 가까이에서 대단한 볼거리라도 생긴 마냥 다급히 부르는 소리. 속지 말아야지 생각하면서도 착실하기 때문에 속아주는 척 가보았다.
이렇게 끼인 자세로 바위 사이 공간을 점령하면 웃길 거라 생각하는, 조금 더 단순한 자들의 가련한 아이디어. 이 아이디어를 그래도 훌륭히 수행해줄 준비된 후발주자들이 있으니 다행이지. 이 확장시켜 놓은 공간으로 엑소더스, 영광의 탈출을 감행하는 것이다.
멀쩡하게 그냥 내려와도 될 공간을 옆에 두고 '재미와 스릴'을 창조하며 걷기 위해 오히려 준비된 건, 가은산 바위군일지도 모른다.
▲ 바위 사이 틈 만들기에 재미 들린 남오현 전 회장님. 누군가는 배가 나온 것이 아니라 가슴이 들어간 것이라 했던가.
▲ 그냥 흔한 길섶의 바위라 생각들겠지만 자세히 보아야 보이는 풀꽃이 있다.
소나무다. 그것도 아주 어린 소나무다. 아니다, 소나무가 아니다. 어부바 한 엄마 등에 깨금발로 낑낑 오르는, 어리고 어렸던 우리들이다. 엄마 등엔 먹고 재울 포대기 띠도 없지만 어떡하든 살아야 한다며, 동동거리던, 이 땅의 모든 어른들 유년이다.
▲ 바위나 소나무만 놀러 온 것이 아니라며 청풍호 물고기 한 마리 소문도 없이 툭, 튀어 올랐다.
나무하러 다닐 땐 발 아래 나뒹굴었을 등걸, 솔방울, 갈비(소나무 갈잎)들이 산에 다니면서는 착한 생명으로 현신한다. 뭍으로 올라온 힘든 노정을 상상하게 하는 저 표정. 자연은 오히려 인간보다 다채로울 것이다, 틀림없이.
서서히 청풍호가 가까워진다. 하산하기로 약속한 오후 4시가 가까워오지만 볼거리는 자꾸만 나타나고 다리는 부실한 신호를 알려온다. 산행이 운동이라면 한달에 하루 운동하는 날이다. 열심히 걷고 운동해야 마땅한데 남들 다 하는 수영도 헬스도 내 인생 사전엔 한 번도 없었다. 오십 줄 넘어서니 몸이 삐거덕거린다. 남들 말할 때 혹시 태연하게 웃어 넘겼을까. 그도 아니면 누구나 제 경험일 때 오는 당혹감일까. 건강 챙기고 보약 생각하면서도 운동 만큼은 노동으로 때우는, 나의 안일함이 걱정스럽다.
▲ 일필휘지로 몸을 뒤튼 소나무. 그 사이로 상천마을이 나타났다.
▲ 물개바위
물개바위를 만난 건 하산길 막바지였다. 갑자기 뭍으로 솟아오른 가파른 상승세, 누가봐도 물속 포유동물의 몸집을 닮았다. 흰수염고래부터 돌고래까지, 주둥이부터 이끼로 그려진 눈주위까지, 영락없는 돌핀(dolphin)이라며 산행지도를 찾는데… 그 모습 찬찬히 뜯어볼수록 엔돌핀 팍팍 차오르는 물개쇼다. 하산길에 분수처럼 솟구치는 단단한 바위의 가뿐한 춤사위다.
더 놀라운 것은 물개바위의 뒤태였다. 우리 앞에 쇼를 선사하는 서커스의 물개처럼 휘장에 가려진 물개바위의 뒷모습은 애처롭기 그지없다. 난간이랄 것도 부실하기만 해서 지탱하고 의지할 데라곤 언감생심 제 몸둥이 같은 좁은 바닥뿐이다. 물속에서 솟아오를 때 어차피 홑몸이었다는 듯 물비늘 터는 모습이 당당하고 환상적이다.
가을이 올 무렵이면 초록이 얼마나 풍성하게 무언가를 감추는지, 그 싱싱하던 것이 어느 순간부터는 자애롭고 따스한 초록을 드러내는지를 알게 한다. 하산하도록 마지막까지 제 숨은 매력을 터뜨리는 산도 흔치 않을 것이다. 기대를 흡족하게 만족시키는 가을산 가은산.
사실, 마지막 보너스로 던진 계단이 가파르지만 무릎 흔들리는 것만 빼면 다른 산행보다 견딜 만 하다. 무릎이 전부라는 건 감춰도 될까.
드디어 하산을 완성했다. 첫 출발할 때 호기롭게 선두그룹에 섰던 것은 순전히 총무님과 회장님이 열심히 준비한 부침개를 뒤집어야겠다는 갸륵한 생각이었다. 그러나 후미의 선두주자였던 내 버릇 그대로 하산길에서 약속을 무로 돌려 버렸다. 버릇되니 포기하지 말라던 말이 무색하게, 저질 체력은 쉽게 들통나고, 얌체 같이 주는 부침개만 넙죽넙죽 받아먹고 말았다.
청풍호는 제천시의 청풍명월 브랜드에 걸맞게 제천시에서만 청풍호라 이름하고, 일반적으로는 충주호라 부른다고 한다. 충주호로 익히 들었던 그곳이 이곳 청풍호라는 소리에 무식한 잠에서 귀가 번쩍 뜨이고 말았다. 산행을 십 년 해도 영원한 길치를 표방하는 나의 우둔한 지리 감각에 혀를 내두르는 것과 동시에, 그 쉽고도 고마운 소개를 해준 박규식 기사님이 너무도 고마웠다. 앉아마자 미련퉁이마냥 잠이 든 내게, 지나치는 풍경을 일러주는 친절한 소개에 어찌 한낱 잠이 대수랴. 차창 밖을 비단을 감은 듯 흐르는 청풍호가 이렇게 가까운데 깨우지 않았다면 어찌 했을꼬. 지나치는 사이로 옥빛 호수가 차르르 실눈처럼 잠기는 것을, 졸린 눈 크게 뜨며 바라보았다.
아마도 해질 무렵이 아름다우리. 미치도록 붉게 물들, 청풍명월 그 유유한 호수 위로 달 하나를 얹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