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어진 옥합.
눅7:36-50절, 347.348.405장. 3927 Bible 말씀연구소 박봉웅 목사
오늘 본문은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을 잔치의 귀한 손님으로 초청했는데 난데없이 초청하지 않은 창녀가 나타나서 목 놓아 울면서 값비싼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부으면서 산발한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씻었습니다. 갑자기 잔칫집은 술렁이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을 초청한 주인인 바리새인 시몬은 심히 불쾌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잔칫집의 분위기는 어수선하다 못해 난장판이 되고 사람들의 관심은 주인인 시몬이 아니라 사건을 저지른 여인과 예수님에게로 넘어갔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과 함께 초대된 제자들과 여러 손님들의 시선은 울면서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바르는 그 여인에게 쏠렸습니다. 그 여인의 기구한 삶에 대해서는 성경에 자세히 기록되지는 않았지만 이 성경의 내용을 살펴보면 짐작하고도 남습니다.
그 여인은 우선 남들이 봐도 그렇고 자기가 봐도 그렇고 완전히 바닥인생이었습니다. 거리에서 몸을 파는 창녀의 인생을 그 누구하나 인정하는 사람도, 관심 두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모두가 자기를 손가락질하고 침 뱉고 욕하고, 짓밟고 그러면서 이용해 먹고 배신했습니다.
이 여인은 마음도 육신도 병들대로 병들어 꿈도 희망도 없는 가련한 여자였습니다. 그런데 멀리서 보던 대로 그리고 들은 소문대로 예수님만이, 자기의 과거와 현재의 죄를 해결할 수 있는 분인 줄 믿고 감히 율법주의자 바리새인 시몬이 예수님을 위해 베푼 잔치에 쳐들어 온 것입니다.
그녀는 예수님을 보자마자 그동안 참아왔던 눈물이 와락 쏟아지고 걷잡을 수 없이 통곡했습니다. 그녀는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동안 고이 간직하고 저축했던 값비싼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다 부었고 머리털로 씻었습니다.
말하자면 그 여인의 전 재산을 다 드렸습니다. 이 광경을 옆에서 지켜보던 주인인 시몬은 기가 막혔습니다. 남의 잔칫상에 재를 뿌리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완전히 난장판을 만든 것에 대해서 분을 삭이고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점잖은 체면에 여자를 물리적으로 끌어낼 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마음으로 은근히 예수님에 대해서 불만을 가졌습니다. 예수가 정말 선지자라면 이 여자가 누구며 그의 과거와 현재의 삶을 잘 알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여자의 행동을 어찌 가만히 지켜만 보고 있는지 그것이 불만이었습니다.
사실 바리새인으로서 예수님께 관심을 가지고 잔치를 베풀고 초청했던 것은 아름다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더구나 당시 대부분의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한 결 같이 예수님의 말씀과 이적에 대해서 사사건건 시비를 걸고 반대하면서 비판 일색이었는데,
유독 바리새인 시몬만이 예수님에게 관심을 갖게 된 것만 해도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당시는 신분 사회인데다 남의 이목을 중요시하는 사회이고 보면 시몬의 용기도 대단했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 시몬이 예수님께 대한 이해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나 구주로 영접한 것이 아니고 선지자나 뛰어난 선생님 정도의 수준이었습니다. 그는 아직도 자기의 체통, 체면 등 당시 바리새인들이 갖고 있던 도덕적인 성결에 대한 자만심이 있었습니다.
예수님 가까이 있다는 그 자체를 불결하고 불쾌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는 상대적으로 도덕적인 의를 가지고 있다는 인정을 받기 원했는데 예수님의 관심은 자기보다 그 마을에서 가장 손가락질 받고 가장 소문난 한 여인에게 도리어 시선을 주는 것에 참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바리새인은 마음으로 이 분이 진짜 선지자이던가 라고 의심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시몬의 마음을 훤히 아시고 말씀했습니다. 오백 데나리온 빚진 사람하고 오십 데나리온 빚진 자가 한 날 한시에 탕감을 받았다면 둘 중에 누가 더 고마워하고 사랑하겠느냐 라고 비유로 말했습니다.
여기에 대해서 시몬도 당연히 많이 탕감 받은 자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시몬과 이 여인을 비교했습니다. 그리고 어째서 예수님은 자기를 잔치에 초대해준 시몬보다 세상에서 따돌림 받는 이 여인에게 더 많은 사랑을 베풀었는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남들이 뭐라고 하든 그 여자는 주님으로부터 용서와 사죄를 받은 것에 대해서 감격과 감사의 눈물이 비오듯했습니다. 사실 오늘의 이 장면은 진정한 의미에서 기독교의 신앙은 무엇이며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목적이 무엇이며 예수님은 어떤 분인가, 그리고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는 과연 어떻게 믿어야 할 것인가를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 본문을 통해서 다음과 같은 몇가지 진리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로, 예수님은 우리들의 속마음을 다 알고 계십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우리들의 창조주이시며 구원의 주시므로 우리의 깊은 속마음을 잘 알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시몬의 속마음도 읽고 있었고, 향유를 담은 옥합을 깨뜨려 예수님의 발에 부으며 흐느끼는 여인의 마음도 다 알고 계셨습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기를 열길 물속은 알아도 한길 사람의 속마음은 알 수가 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속마음을 다 알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진실하게 살려고 애써야 합니다.
사실 이 성경이 우리에게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이날 잔치에서 되어진 사건을 보고 있었던 사람들의 속마음, 함께 앉은 자들이 속으로 말하되 이가 누구이기에 죄도 사하는가(눅7:49)라는 말씀 속에 있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언제나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예수는 누구인가 하는 명제입니다. 사실 이 성경의 기자의 관심은 예수님은 누구이며 그는 무엇을 하셨는가에 있습니다. 그는 우리의 중심을 보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서 또는 예수님 앞에서는 의식과 외식이 통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바리새인 시몬과 그 여자 사이의 근본적인 차이는 한 쪽은 아직도 외식과 체면과 주변을 의식하는 것이요 다른 한쪽은 체면이나 겉치레보다 진심으로 주님을 사랑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 여인의 신앙과 사랑이 바리새인보다 10배나 낫다는 말씀을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솔직히 우리나라는 아직도 체면, 체통문화 아래에 있습니다. 남의 눈길이 중요하고 남의 평가에 의해 좌우되는 사회에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신앙마저도 의식과 외식으로 일관되기 쉬운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좋아하는 것은 솔직하고 진실하게 자기의 부족과 연약과 죄를 인정하고 주님의 자비와 긍휼과 용서를 구하는 그 사람을 귀히 보십니다. 아무리 큰 죄인이라도 주님의 십자가를 의지하고 나아오는 자에게 주님은 사죄의 축복을 주십니다.
우리는 우리의 체면 껍데기를 벗어 버려야 합니다. 자기를 위장하는 외식(外食)을 버리고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다면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祝福)을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둘째로, 예수님은 우리들의 죄를 용서하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오늘의 본문의 핵심은 사실 여기에 있습니다. 본문에 보면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저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저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 이에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죄 사함을 얻었느니라(눅7:47-48절)라고 했습니다.
바리새인 시몬과 그 여인 사이에 차이가 있다면, 시몬은 예수를 단순히 선지자 중의 한 분으로 이해했으나 그 여자는 예수님께 나아오면 모든 죄를 용서받을 수 있음을 믿었던데 있습니다. 그래서 그 여인은 예수님께 죄를 통해 자복하고 용서를 구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기독교는 단순히 문화의 종교나 교양의 종교가 아닙니다. 기독교는 단순히 원리적 종교나 도덕적 종교가 아닙니다. 기독교는 생명의 종교입니다. 생명의 종교는 죽었던 자가 다시 살아서 새 생명을 얻는 것을 의미합니다.
새 생명은 바로 죄를 회개하고 용서함 받을 때 얻어지는 것입니다. 산부인과 병원은 고요해서는 안 됩니다. 산모의 진통소리와 아기의 울음소리가 범벅이 될 때 새 생명이 탄생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셋째는 예수님은 형식과 외식보다 눈물을 귀히 보십니다. 시몬의 사고방식은 바리새 적이었습니다. 그는 전통을 귀히 여기고 신분사회의 품격을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지식인으로서의 자존심을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진정으로 예수님을 바로 모시기에는 적절치 못했습니다.
하지만 그 여인은 자기의 과거와 현재의 죄를 생각할 때 주체할 수 없이 흐르는 눈물을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솔직히 그 여인의 통곡과 눈물은 잔칫집 분위기에 전혀 안 맞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여인의 눈물의 기도, 눈물의 회개, 눈물의 헌신을 받아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인생을 지으신 창조주이시며 인생을 구원하는 구주이시기 때문에 인생의 깊은 속마음을 다 아시고 받아주신 것입니다. 그 여인은 기쁨의 잔칫집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장소에서 울음바다를 이루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녀의 눈물의 호소를 들으시고 죄를 용서해 주시므로 예수님은 죄를 용서하는 하나님이심을 선포하셨습니다. 눈물은 참으로 순수한 인간의 감성입니다. 눈물이 메말랐다는 말은 순수성이 없어졌다는 말입니다.
눈물이 말랐다는 것은 의식과 체면이 발전되고 정직하지 못하고 진실하지 못하다는 뜻입니다. 아이들은 울면 모든 것이 해결되는 줄 잘 알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 성도들도 하나님 앞에 울면 문제 해결이 됩니다.
눈물을 되돌려 달라고 기도합시다. 하나님은 눈물의 기도를 귀히 보십니다. 예수님이 바리새인의 초청보다 여인의 회개의 눈물을 더 귀히 받아 주셨듯이 오늘도 눈물로 하나님께 나아오는 자를 껴안으시고 사죄의 은총을 주실 줄 믿습니다.
하나님이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 하시리이다.(시51:17)라고 했습니다. 도덕적으로 의로운 채 하는 자가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니라 자기 죄를 회개하는 자가 천국에 갈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한 사람도 빠짐없이 천국에 가실 수 있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자료출처 3927bible 말씀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