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물론(齊物論)의 지위와 의미
장자 내편(莊子 內篇), 제2장 제물론(齊物論)
(1) 제물론(齊物論)의 지위(地位)
제물론은 『장자』 책에서 핵심중 핵심에 해당하는 장(章)이다. 그래서 『장자』의 장(章) 중에서 그 지위가 가장 높다고 할 수 있다. 제물론은 깊은 철학적 사고가 있어야 이해되는 이론이다. 제물론을 서양 철학의 언어로 말하면, 존재론, 인식론, 가치론을 함께 알아야만 그 윤곽에 대해 감이 잡히는 이론이다. 노자는 잠언 형식의 글이 많지만, 장자는 우화 형식의 글이 많다. 그래서 장자를 쉽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우화의 의미를 제대로 알기 위해서도 제물론에 대한 선이해가 있어야 한다.
장자는 인생의 목적을 소요유(逍遙遊)로 보았다. 즉 사람은 바쁜 일 없이 소풍 가서 재미있게 즐기듯이 놀기 위해 태어났다는 것이다. 그런데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렇게 재미있게 놀면서 일생을 보낼 수가 없다. 왜냐하면 여유 있게 놀면서 일생을 지내려면 여러 가지 조건이 갖추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그 조건 중에는 건강과 경제적인 여유도 있고, 인간관계를 잘해야 하고, 남에게 무시당하지 않을 정도의 사회적 지위도 필요하다. 이러한 조건이 잘 갖추어지지 않으면 일생을 소요유하기 어렵다.
그런데 장자는 제물론을 알면 어떤 조건에 있든지 인생의 목적인 소요유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제물론은 장자철학의 근저에 놓여 있으며, 장자의 다른 글들을 해석해 낼 수 있는 위치에 있기 때문에 그 지위가 가장 높다. 제물론이 무엇이길래 이러한 지위에 있는지 그 의미를 살펴보자.
(2) 제물론(齊物論)의 의미(意味)
제물론은 ‘만물이 가지런하다는 이론’이다. 만물은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을 의미한다. 그리고 가지런하다는 말은 ‘가치우열 없이 대등하다’는 의미를 지닌다. 그러면 제물론은 ‘이 세상의 모든 것들(만물)이 가치우열 없이 대등하다는 이론’이다. 이 이론에 따르면, 왕과 백성, 양반과 상놈, 주인과 노예, 재벌과 거지, 회장과 회원, 장애인과 비장애인, 사람과 동물, 생물과 무생물, 창조주와 피조물, 현상(現象)과 실재(實在), 무명(無名)과 유명(有名) 등 모든 존재가 가치우열 없이 대등하다가 된다.
장자의 해설자들 중에는 장자가 노자와 다른 점을 부각해서 노자는 법가(法家)나 병가(兵家)에 가까운 데 비해 장자야말로 도가(道家)에 철저하다고 한다. 물론 그런 해설도 가능하다. 노자는 사회적 문제에 관심이 깊었지만, 장자는 철저히 개인문제에 집중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러나 필자는 노자와 장자 사이의 차이점보다는 공통점이 훨씬 크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왜냐하면 장자가 노자의 철학을 철저히 따르고 있다는 점 때문이다.
장자가 노자의 철학을 철저히 따르고 있다는 근거로는 노자 『도덕경』 56장, 1장, 2장을 들 수 있다. 이 장들을 살펴보면 장자의 핵심 철학인 제물론(齊物論)은 노자의 현동론(玄同論)을 철저히 따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노자 도덕경 56장
어떤 대상이든 한정형식으로 구분해서 이름 붙일 수 있어야 그 대상을 비로소 무엇이라 말할 수 있는데, 진실로 있는 것은 이름으로 불리어 분별되기 전의 상태이기 때문에 이것을 아는 사람은 말이 없다. 이름으로 분별해서 말하는 사람은 진실로 있는 것을 제대로 알지 못한 것이다. 진실로 있는 것을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사물들을 분별하는 감각기관이라는 구멍을 막고 판단작용이라는 문을 닫아야 한다.
이렇게 하면 분별하는 예리함은 꺾이고, 공통부분을 보게 되어, 다툼의 원인이 되는 분열을 해소하여 통합한다. 감각기관을 통해 들어온 한정형식의 두드러진 빛깔을 다른 빛깔과 조화시켜 두드러지지 않게 하고, 티끌처럼 분별되지 않도록 같게 한다. 이것을 ‘현묘한 같음’이라고 한다.
그래서 가까이할 수 없고, 멀리할 수도 없다. 이익이라 할 수 없고, 손해라 할 수도 없다. 귀하다 할 수 없고, 천하다고 할 수도 없다. 따라서 가깝고 멈, 이익과 손해, 귀하고 천함 등의 분별심에 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살면서 평화로운 세상을 만들 수 있기 때문에 세상에서 가장 귀한 존재가 된다.
노자 도덕경 1장
도라고 생각하여 말할 수 있는 도는 항상의 도가 아니다. 왜냐하면 도라고 생각하여 말할 수 있기 위해서는 이름을 붙여야 하는데, 이름을 붙여 부를 수 있는 이름은 항상의 이름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름 없음이 천지의 시작이고, 이름 있음이 만물의 어미이다. 그러므로 늘 이름 붙이고자 함이 없어야 그 대상의 오묘한 실재(實在, reality)를 보고, 늘 이름 붙이고자 함이 있어야 그 대상의 분명한 현상(現象, appearance)을 본다.
이 실재와 현상은 같은 곳에서 나왔으며 이름이 없고 있고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이 양자는 만물들 사이의 ‘차이’를 드러내는 방향으로 나아가면 더욱 분명해지겠지만, ‘같음’ 방향으로 나아가면 그 경계는 모호해진다. 모호하고 더욱 모호한 곳으로 나아가면 여러 오묘한 궁극적 실재의 세계로 들어가는 문이 나온다.
노자 도덕경 2장
세상 사람들은 자신들이 좋아하는 인위적인 아름다움을 아름다움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그 ‘아름다움’에는 이미 자신들이 싫어하는 ‘추함’이 전제(前提)되어 있다. 세상 사람들은 자신들에게 좋은 행위인 인위적인 선함을 선함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그 ‘선함’에는 이미 자신들에게 좋지 못한 행위인 ‘악함’이 전제되어 있다. 그렇게 서로 전제가 되어 있으므로 있음과 없음은 서로 낳고, 어려움과 쉬움은 서로 이루며, 길고 짧음은 서로 비교되고, 높고 낮음은 서로 기울며, 음표와 소리는 서로 화합하고, 앞과 뒤는 서로 따른다.
이 때문에 성인은 ‘억지가 없음’에 머물면서 인위적인 일을 하지 않는다. 성인은 말 없는 가르침을 행하고, 만물을 작동시키지만 그 일을 자신이 했다고 말하지 않으며, 만물을 생성시켜 놓고 소유하지 않고, 어떤 일을 할 때 그 일이 자신의 공이 되리라 믿지 않고, 공을 이루더라도 그곳에 머물지 않으며, 무릇 오직 머물지 않는다. 이로써 오히려 공이 사라지지 않는다.
사물을 볼 때 그 사물과 다른 사물과 구분하기 위해서는 이름(名)을 붙여야 한다. 이름을 붙이게 되면 그 이름이 가리키는 영역과 그 영역이 아닌 영역의 구분이 뚜렷해진다. 도덕경에서 영역을 구분하는 이름에 해당하는 용어를 현대 형이상학(존재론)자인 화이트헤드는 영원한 대상(eternal objects)이라고 하며, 한정형식(限定形式, forms of definiteness)이라고도 한다. 이 용어는 고대 형이상학(존재론)자인 플라톤의 이데아(Idea)와 유사하다.
『도덕경』 56장에서 노자는 현동(玄同)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감각기관에 의해 한정형식이 파악되어 차이점이 분명히 드러난다. 그리고 이성적 추리에 따라 판단을 할 때도 한정형식이 파악되어 차이점이 분명히 드러난다. 이렇게 한정형식이 분명히 드러나면 날수록 진리에 가깝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노자는 오히려 진리와 멀어진다고 말하면서 진리를 제대로 아는 사람은 말이 없다고 한다.
진리를 제대로 아는 사람은 차이점보다 공통점에 주목한다. 공통점을 계속 주목해가면 결국 모든 사물이 같다는데 이르게 된다. 이것을 노자는 ‘현묘한 같음’인 현동(玄同)이라고 한다. 그는 현동을 보게 되면 분별심에 매이지 않고 자유롭고 평화로운 삶을 살기 때문에 가장 귀한 존재가 된다고 말한다. 그리고 『도덕경』 1장에서는 같음 방향으로 가게 되면 실재의 세계에 이르게 된다고 한다. 『도덕경』 2장에서는 선악(善惡), 유무(有無), 난이(難易), 장단(長短), 고저(高低), 음성(音聲), 전후(前後)의 같음을 본다.
대립되는 두 가지는 분명히 다른데, 그것을 같은 것으로 보면 모순(矛盾)이 일어난다. 이러한 모순을 찾아내는 사람은 똑똑하다. 그런데 노자가 보기에는 한쪽 눈만 떠 있는 사람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사람의 눈에는 차이점만 보이고 공통점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손바닥과 손등은 다르다. 손바닥을 손등이라고 하든지, 손등을 손바닥이라고 말하면 물론 잘못이다. 공통점인 손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동일하다. 유와 무는 다르다. 그러나 이것은 차이점만 보았을 때이다. 이것도 공통점에서 보면 동일하다.
유와 무의 공통점을 존재라고 한다. 왜냐하면 손바닥과 손등처럼 유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무가 함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존재론적 입장이다. 또 유가 인식되기 위해서는 무가 함께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유라는 개념이 형성되기 위해서는 무라는 개념이 반대편에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인식론적 입장이다. 문제는 가치론에서 일어난다. 둘 중에 유는 가치 있고 무는 가치 없다고 생각하면 반쪽밖에 못보는 부족한 사람이다. 둘 다 동일하게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노자의 유무상생(有無相生)이다.
낮과 밤은 반대개념이다. 그런데 낮과 밤의 공통점은 하루이다. 손바닥과 손등은 다르다. 그렇지만 공통점은 손이다. 괴로움과 즐거움의 공통점은 느낌이다. 젊음과 늙음의 공통점은 일생이고, 삶과 죽음의 공통점은 개체(個體)의 존재이다. 반대개념에서 어느 한쪽만 가치 있고, 다른 쪽은 가치 없다고 생각하는 데서 모든 문제가 발생한다. 이것을 노자는 인위적(人爲的)이라고 한다. 양쪽의 공통점인 관점에서 차이가 없다는 것을 밝힌 것이 노자의 현동론이고, 장자의 제물론이다.
하루는 낮과 밤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낮은 가치 있고 밤은 가치 없다고 생각하면 하루의 반은 불행하게 된다. 젊음을 가치 있고 늙음의 가치 없다고 생각하면 일생의 반은 불행하게 된다. 즐거움은 가치 있고 괴로움은 가치 없다고 생각하면 삶의 반은 불행한 느낌을 갖게 된다. 괴로움 없이 즐거움은 존재할 수 없고, 인식될 수도 없는데도 즐거움만 가치 있다고 생각했을 때, 괴로움이 생기면 불행하게 된다. 괴로움이 왔을 때, 이 괴로움의 반동(反動)으로 즐거움이 생기게 된다.
제물론의 관점에 서면 삶은 가치 있고, 죽음은 가치 없다는 생각으로부터 벗어난다. 그래서 장자는 제물론의 관점에 서면 항상 소요유할 수 있다고 말한다. 소요유는 어느 한쪽에 기울어지는 작은 사고에서 벗어났을 때 가능하다. 제물론을 이해하여 작은 사고에서 벗어나면 큰 사고를 갖게 된다. 그래서 장자는 자신의 책 『장자』에서 큰 사고가 필요하다는 것을 곤(鯤)이라는 큰 물고기와 붕(鵬)이라는 큰 새의 존재를 우화로 표현한 것이다.(소요유 1절)
마지막으로 현동(玄同)과 제물(齊物)의 문자적 의미를 살펴보자. 현동(玄同)에서 동(同)자는 ‘같다’는 의미이다. 그러면 무엇이 같다는 말인가? 이것은 우선 지금까지 말한 것처럼 상반되는 두 가지가 같다는 말이다. 그리고 공통점이 궁극적 존재에 이르게 되면 모든 존재자가 같다는 말이다. 현(玄)은 어두운 밤에 사물들이 구별되지 않는 것처럼, 사물들 사이의 경계선을 기점으로 구분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현동(玄同)은 사물들 사이를 구분하지 않고 그들의 같음을 본다는 의미이다.
제물(齊物)에서 물(物)은 모든 사물을 가리킨다. 제(齊)는 우열이 없이 모두 가지런하게 동일한 지위를 가진다는 의미이다. 특히 상반되는 것들 중에 어느 한 쪽에 가치를 두면 다른 쪽은 가치가 없어지게 되는데, 그러면 기울어지게 된다. 제(齊)는 이렇게 기울어지지 않고 평형을 유지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따라서 제물(齊物)은 상반되는 두 가지는 가치 차이가 없다는 것이며, 나아가 모든 사물에 가치우열이 없다는 의미를 지닌다. 따라서 노자의 현동(玄同)과 장자의 제물(齊物)은 동일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질문) 상반되는 사물과 모든 사물에 가치 차이가 없이 같다는 것(제물론)을 알면, 우리들의 일상생활 속에서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가?
〈이어지는 강의 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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