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월 20일, 안양한라 팀의 홈구장인 안양 종합운동장 아이스링크를 찾아 챔피언 결정전 진출을 위한 플레이오프 준비에 한창인 심의식 감독을 만났다. 아이스하키는 상대의 가슴이 부서져라 무섭게 몸을 부딪치는 보디체크나 끊임없이 벌어지는 몸싸움으로 가장 거칠고 남성적인 스포츠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중학교 3학년 때 처음 하키스틱을 잡은 후 지난 2006년 은퇴할 때까지 22년 동안 현장을 떠나지 않았던 심의식 감독. 22년 중 15년을 국가대표로 빙판 위를 누비던 그였기에 우람한 체격에 거친 모습일 것이라 생각했다. 눈앞의 그는 그러나 170cm 쯤의 아담한 키에, 얼굴에서 웃음이 떠나지 않는 서글서글한 이웃집 형 같은 인상이다. 한국 아이스하키 사상 첫 아시아 제패를 한 것에 대해 축하 인사를 건네자 “아이고~ 저도 어떻게 된 건지”라며 웃는다.
“아이들(선수들)에게 고맙습니다”란 말로 입을 연 그는 “우리 아이들의 ‘해보자’는 의욕과 그동안 갈고닦은 기량이 우승의 원동력입니다”라며 공(功)을 후배이자 제자인 선수들에게 돌렸다.
“한두 점 지고 있어도 언제든 뒤집을 수 있다는 근성과 의지만큼은 우리 아이들이 미국, 캐나다, 유럽의 스타들과 견주어도 절대 뒤지지 않습니다.
거기에 용병 선수들과 토종 선수들이 잘 융합해 서로 모자란 점을 채워 준 것이 우승으로 이끈 힘이지요. 제가 한 일이라야 아이들에게 자신감을 주기 위해 응원하고, 끊임없이 잔소리했던 정도예요.”
그리고 한국 아이스하키의 현실에 대해 아쉬움을 털어놓는다.

“제가 한창 선수로 뛸 때나 지금이나 상황이 달라진 게 없어요. 이런 환경에서도 한국 아이스하키에서 희망을 찾은 건 우리 선수들이 다른 어떤 나라 선수들보다 열정적이고 똑똑하다는 겁니다.”
앞에 놓인 커피 한 모금을 마신 그가 다시 말을 잇는다.
“전지훈련을 가면 외국 코치들이 우리 선수들을 보고 깜짝 놀랍니다. 자기 나라 선수들에게 몇 달을 가르쳐야 할 기술과 전술을 우리 선수들은 1주일도 안 돼 스펀지처럼 흡수해 버리거든요. 하나같이 ‘이런 선수들을 가지고 있는 한국이 왜 아이스하키 변방인지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이 말을 들으며 우리 아이스하키의 미래가 어둡지 않다는 희망을 가지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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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2월 24일 저녁, 경기도 안양 실내아이스링크에서 2008~2009 아시아리그 아이스하키 4강 플레이오프(7전 4선승제) 2라운드 1차전 안양 한라 vs 일본제지 크레인스 경기 모습. |
통산 203경기, 136골, 201포인트(골+어시스트)로 역대 1위, 한국리그 MVP 5회를 차지한 그는 우리나라 아이스하키 역사에서 전설적인 존재다. 선수 시절 그의 등번호 ‘91’은 이제 아무도 달 수 없는 영구결번이 되었다.
그가 아이스하키 선수가 된 것은 텔레비전에서 본 아이스하키 선수들의 모습이 너무 멋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중학교 2학년 때 집에서 TV를 보는데, 아이스하키 연고전을 하는 거예요. 헬멧을 쓰고 스틱을 든 선수들이 막 부딪히고, 주먹다짐도 하는데 멋져 보이더라고요. 당장 ‘나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마침 제가 다니던 중동중학교에 아이스하키부가 있었어요. 팀을 찾아가 ‘선수시켜 달라’고 했죠.”
하지만 처음에는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지금도 그렇지만 제 신체조건이 운동을 하기에는 왜소했어요. 학교 다닐 때 제 번호가 항상 1~3번이었어요. 늘 교탁 바로 앞에 앉을 만큼 작았죠. 선생님이 한번 쓱 보더니 ‘넌 안 돼’ 하며 퇴짜를 놓더군요.”
기회는 중3 때 다시 찾아왔다. 강남으로 학교가 옮겨 가면서 아이스하키부 선수 중 상당수가 다른 학교로 전학하거나 운동을 그만둬 선수가 부족했던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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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12월 4일 한국아이스하키 사상 첫 100포인트를 돌파한 심의식 감독의 선수 활동 모습. |
“학교 게시판에 아이스하키부 모집공고가 붙었어요. 제일 먼저 찾아가 가입 신청을 했어요. 물론 ‘안 된다’고 하시더군요. ‘안 시켜 주면 저 가출합니다’란 말만 100번쯤 하며 선생님을 반협박했죠(하하하). 막무가내였던 제게 선생님이 진 거죠. ‘운동은 절대 안 된다’는 부모님도 선생님한테 했던 것처럼 ‘안 시켜 주면 저 가출합니다’라는 말로 설득하는 데 성공했어요.”
그렇게 시작한 아이스하키. 심의식은 이후 한국 아이스하키의 거의 모든 기록을 갈아 치우며 대학 2학년 때부터 국가대표에 발탁될 만큼 돋보였다. 그럼에도 그는 스스로 “운이 좋은 선수였다”며 자신을 낮추었다. 그리고 감독이 된 첫 시즌 한국 최초의 국제대회 우승감독이란 훈장을 달았다. 놀라운 것은 그가 지금껏 단 한 번도 성인 팀을 지도해 보지 않은 초보 감독이란 것이다.
“초보였기에 (우승)할 수 있었다는 생각도 합니다. 초보는 뭐든 배워야 할 입장입니다. 무게 잡을 이유가 없죠. 감독이긴 하지만 상황 판단이나 경기 운영과 같은 것은 빙판에서 직접 뛰는 현장의 선수에게서 배울 것이 많습니다. 배울 게 있으면 후배나 제자인 선수에게 물었습니다. 덕분에 우승까지 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는 “스스로를 낮출 수 있을 때 비로소 감독다운 감독이 될 수 있다”며 말을 이었다.

“어느 스포츠든 스타 출신은 감독으로 성공하기 어렵다는 속설이 있습니다. 이유는 눈높이 때문이죠. 많은 감독들이 자신의 선수 시절 실력만을 생각하는데 그건 아닙니다. ‘나는 선수 때 이렇게 했는데 너는 왜 그게 안 돼’가 아니라 ‘나는 선수 시절 이렇게 했었는데 너는 이렇게 해보는 게 더 어울릴듯해’를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지휘봉을 놓는 순간까지도 감독은 자신의 능력치가 100이 아닌 50일뿐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나머지 50을 채우기 위해 늘 선수들과 함께 연구할 수 있어야 좋은 감독이 될 수 있지 않을까요? 선수들과 함께할 때 ‘우리’라는 신뢰도 만들어지고 비로소 ‘팀’이 되는 거죠.”
팀을 맡자마자 덜컥 만들어 낸 우승. 그래서 앞으로 더 높은 곳을 바라볼 사람들의 눈높이가 부담스럽다는 초보 감독 심의식. 언젠가는 대표팀 감독으로 올림픽 무대를 밟는 꿈을 꾼다는 그가 마지막으로 입을 열었다.
“가끔 TV에 비치는 야구장, 농구장, 배구장이 참 부럽더군요. 그런 모습을 본 후 텅 빈 (아이스)링크에서 우리만의 경기를 벌일 때면 종종 참 외롭습니다. 관중으로 꽉 들어찬 링크에서 경기할 때면 비록 우리나라가 아니더라도 우리 능력의 120%를 쏟아 냅니다. 우리 링크에서 그래 보고 싶습니다. 열심히 뛰는 모습을 우리 팬들에게도 보여줄 날을 늘 꿈꾸고 있습니다.”
사진 : 김진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