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 소개
이상실의 새 소설집 『죽음의 시』가 출간됐다. 8편의 단편소설이 수록된 이번 소설집에는 우리가 사는 현실에 존재하는 다양한 삶의 모습이 담겨 있다. 대체로 궁핍의 결과로서의 모습들인데 이것은 작가 이상실이 견지하고 있는 작가적 관점이기도 하다. 먼저 표제작인 「죽음의 시」는 물류센터에서 일하는 노동자의 이야기다. 오늘날 ‘비대면의 삶’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은 바로 이 작품에서 그려진 물류센터와 거기서 일하는 노동자, 그리고 자동화된 물류센터의 SF적 노동 환경일 것이다. 이 자동화의 결과가 소비자에게는 편의를 제공할지 모르지만 노동자들은 자동화의 하찮은 부품이 되어가고 있음을 작가는 날카롭게 파헤치고 있다. 의미심장한 것은 물품 출고 작업을 할 때는 음악이 계속 흐른다는 점이다. 따라서 다음 대목은 여러 면에서 인상적이다.
작업을 시작한 지 세 시간쯤 지났을까. 안내 방송이 나왔다. 지금 부른 사원은 즉시 중앙으로 오라고 했다. 종기도 불렀다. 종기는 중앙데스크로 갔다. 관리 사원이 말했다.
“누구신가요?”
“박종기입니다.”
이름을 확인한 관리 사원은 눈을 부릅뜨고 입술을 오므렸다.
“사원님, 유피에이치(UPH, 시간당 피킹)가 꼴찌네요. 일곱 시 오십 분에서 여덟 시 사이에 뭘 하셨습니까? 잠잤나요?”
“아, 그때, 피디에이가 십 분간 쉬라고 해서 물 마시고 화장실도 가고 잠시 쉬다가 일했습니다.”
“사원님, 작업 들어가기 전에 교육받지 않았나요? 자동할당 마감 시간이 육 분 남았을 땐데, 쉬고 어딜 다녀와요? 사원님, 앞으로 그러시면 안 됩니다. 아시겠습니까?”(42~43쪽)
사실 소설에서 종기를 질책하는 ‘관리 사원’도 자신의 언어로 작업을 지시한다기보다는 기계의 한 부품처럼 작동하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그러고 보면 이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 자동화된 물류센터에서 부품화된 존재들이다. 물론 과잉 노동으로 인해 죽임을 당해야 하는 존재는 구윤재 같은 밑바닥 노동자다. 일종의 의식화된 노동자였던 구윤재를 죽게 한 것도 예삿일처럼 다가오지 않는다. 「죽음의 시」를 통해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현실은 섬뜩하다는 느낌을 준다. 이 「죽음의 시」와 「시인과 소녀」는 내용은 다르지만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의미에서 함께 읽어야 하는데, 특기할 것은 작가가 이러한 노동 현실의 치유제 혹은 극복을 위한 상징으로 ‘시’를 배치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현실과 예술의 만남
하지만 「사진 밖으로 뜬 가족」에서 확인할 수 있듯, 예술의 힘은 미약하고 도리어 현실적인 삶을 훼방하기도 한다. 물론 「사진 밖으로 뜬 가족」의 예술, 즉 구체적인 삶과 괴리된 예술과 「죽음의 시」나 「시인과 소녀」에서 보여주는 예술은 작품의 분위기와 결말에 다른 결과를 가져온다. 작가가 이 소설들에서 자신의 ‘예술론’을 다루려고 한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작품들에서 ‘예술’이 상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은 사실이다. 예술 작품은 아니지만 「마지막 동창회」에서 등장하는 “볼레 모양의 머리핀”도 ‘위안부’로 끌려갔던 유하와 남주의 삶을 이어주는 상징으로 빛난다.
「마지막 동창회」는 짧은 분량에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가게 되는 전후 사정과 ‘위안부’로서 살아야 했던 유하의 시간, 그리고 그 이후의 이야기를 압축적으로 보여준다는 점에서 이 소설집의 가장 큰 성과라고 할 수 있다. 작가는 유하의 삶을 상투적으로 위로하지 않으면서 유하의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인 남주를 등장시켜 재회하게 만드는데, 그것도 살아 있는 유하가 아니라 죽은 유하를 남주와 만나게 함으로써 살아서는 진정으로 위로받지 못한 일본군 ‘위안부’의 삶을 말하고 있다. 유하와 남주를 만나게 해주는 영미는 유하의 삶을 남성인 남주가 감당하지 못할 것을 이미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유하는?”
“왔다네.”
“왔구먼, 죽음을 왜 숨겼는가?”
“유하가 저세상으로 갔다고 말하먼 자네가 안 올 것 같응께…. 그라고 유하가 이 시상에 있다고 했을 때 자네 맘하고, 저 시상으로 떴을 때 맘도 알고 싶었네. 오늘 아침에는 말하고 싶었는디 참말로 입이 안 떨어지등마.”
영미가 치마 끝단을 잡고 눈을 훔쳤다.(93)
「마지막 동창회」는 죽은 유하에게 지내는 제사로 마무리되지만, 마지막 문장은 다음과 같다. “남주가 볼레머리핀을 안주머니에 넣었다.” “볼레머리핀”은 유하와 남주를 이어주는 상징물이면서 그것이 영미, 유하, 남주가 살던 고향에서 부르던 ‘보리수’의 사투리라는 점, 그것을 본뜬 ‘작품’이라는 점에서도 결국 유하를 기억하게 해주는 것도 일종의 예술의 일이라고 작가는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독법은 「계양산기」를 읽을 때도 적용 가능하다. 「계양산기」의 골자가 되는 내용이 글쓰기에 관한 것이라는 것, 그것을 위해서 소설 『임꺽정』의 내용을 과감히 차용하는 것도 결국 작가가 이야기와 서사를 앞세우지만 언제나 ‘예술’에 대해 예민한 인식을 가지고 있음을 드러낸다. 이 작품에서는 『임꺽정』의 일부 내용을 차용했지만 어쨌든 마치 두 편의 소설을 겹쳐놓은 구조를 가지고 있다. 이런 방식은 「환각의 도시, 그리고 섬」에서도 그대로 반복된다. 이 액자 구조 자체가 낯설고 새로운 방식은 아니지만 「계양산기」가 글쓰기에 대한 작품이라는 것, 또 「환각의 도시, 그리고 섬」이 작중 화자의 잃어버린 소설 원고를 되찾아 다시 읽는 구조를 갖는 점은 작가 이상실의 글쓰기에 대한 마음을 보여준다고 할 것이다.
하지만 이상실의 특징은 예술에 대한 이러한 인식과 마음이 세칭 ‘예술가 소설’로 흐르는 게 아니라 「죽음의 시」나 「시인과 소녀」에서처럼 예술을 적극적으로 현실에 개입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이 소설집 『죽음의 시』 전체에 팽팽한 긴장감과 밀도를 더해준다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작가정보
이상실
1964년 전라남도 완도군 생일도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초등학교를 다녔다. 이후 부산으로 갔다. 충무동 소재 약국에서 학교를 다니며 이십 대 중반까지 살았다. 서울에서도 몇 년 거주하다 인천에 정착했다. 2005년 계간 『문학과 의식』 신인상으로 작품활동을 시작했으며, 소설집 『월운리 사람들』 『콜트스트링의 겨울』, 장편소설 『미행의 그늘』이 있다. 현재 한국작가회의 이사로 활동 중이며, 인천작가회의 사무국장을 역임했다.
작가의 말
나는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뒤를 밟기도 했다. 산으로 갔다. 전설이 어린 도둑고개를 넘었다. 바다로 갔다. 남해안 외딴섬에 내려 마을 사람들 이야기를 들었다. 남태평양 남양군도(南洋群島) 천국의 섬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고, 망망대해의 물살을 가르며 싱가포르 센토사로 끌려간 소녀를 상상하기도 했다. 도시로 돌아와 아르바이트생을 만났다. 노동자와 거리의 시인, 샐러리맨 그리고 어느 가족을 만났다. 환각에 젖은 거리를 걷기도 했다. 인물들이 겪거나 벌인 인물들의 삶을 쓰지 않으면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편린으로 치부할지 몰라도, 누군가에게는 전부일 수 있는 사건을 두고 무심히 지나치기가 힘들었다. 보일 뿐 볼 수 없는 원형 감옥 ‘파놉티곤’ 같은 환경에서 하루하루를 버티며 살아가는 인물들, 그러한 삶마저도 부러운 인물들, 낯선 곳으로 끌려간 인물들, 사소한 것에 슬퍼할 겨를도 없는 인물들을 달래며 이야기를 전개했다. 그들이 처한 현실을 그들과 함께 걸으며 자유롭게 말하고 대화했다.
목차
사진 밖으로 뜬 가족 · 007
죽음의 시 · 037
마지막 동창회 · 063
같은 시간 속의 사람들 · 095
시인과 소녀 · 123
퇴근길 · 149
계양산기 · 179
환각의 도시, 그리고 섬 · 205
해설 | 내몰린 사람들을 향한 소설의 윤리(이병국) · 234
작가의 말 · 254
추천사
소설집 『죽음의 시』는 몰입감을 높이며 단숨에 읽게 하는 마력이 있다. 이야기는 탁월한 묘사와 속도감 넘치는 문장으로 흥미롭게 전개된다. 이야깃거리는 가볍지 않다. 작품의 서술자는 깊고 넓고 예리한 눈으로 역사와 사회를 천착한다. 작품을 통한 진단은 통렬하여 어느 작품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겠다. 작품집에 수록된 소설 속 인물들은 남태평양 센토사에서 블라캉 마티의 언덕을 오르거나 감옥 같은 공간에서 세상을 바라본다. 눈 내린 마을의 하우스와 반지하를 회상하는가 하면, 환각에 휩싸여 도시의 거리와 섬을 오간다. 그들의 이야기는 지금 우리 이웃의 삶에 대한 이야기이거나 이웃이 겪은 이야기나 다름없다. 묵직한 주제로 밀도를 높인 이 소설집은 진정한 리얼리스트의 글을 맛보기에 충분하다.
―윤정모 (소설가·한국작가회의 이사장)
책 속으로
쉬엄쉬엄 요령껏 하겠다고 엄마를 설득한 종기는 출근 시간이 다가오자 물류센터로 가는 셔틀버스에 올랐다. 목적지까지 이십 분가량 남았을 때였다. 전화벨이 울렸다. 이름이 떴다. 구윤재였다. 전화를 받았다. 여자였다. 구윤재 엄마라고 했다. 박종기 사원이냐고 물었다. 회사 동료인지, 윤재를 잘 아는지 물었다. 지난번 문자를 받았는데 이제야 연락드려서 미안하다는 말도 했다. 한동안 한숨 소리만 이어졌다. 한숨이라니. 구윤재에게 피치 못할 사정이 있는 것만은 분명해 보였다. 윤재 엄마는 “윤재가, 우리 윤재가, 그제 새벽 두 시쯤에 내 아들 윤재가, 그쪽 물류센터 2층 화장실 바닥에서 급성 심근경색으로 쓰러져서….” 더듬거리며 말을 잇지 못하던 구윤재 엄마는 윤재가 죽었다고 했다. 빈소도 없이 병원 냉동고에서 차가운 시신으로 누워 있다고 말했다. 회사가 산업재해로 인정하지도 않고 여러 가지로 불리한 상황이라며, 그날 윤재에 대한 동선을 아는 만큼만 증언해주면 고맙겠다고 했다.
_「죽음의 시」 56~57쪽
액자 안에는 사진이 있었다. 늙은 여인이었다. 막내 또래는 뭉툭한 보자기를 가슴에 품고 있었다. 남주가 영미를 보며 입을 열었다.
“유하는?”
“왔다네.”
“왔구먼, 죽음을 왜 숨겼는가?”
“유하가 저세상으로 갔다고 말하먼 자네가 안 올 것 같응께…. 그라고 유하가 이 시상에 있다고 했을 때 자네 맘하고, 저 시상으로 떴을 때 맘도 알고 싶었네. 오늘 아침에는 말하 고 싶었는디 참말로 입이 안 떨어지등마.”
영미가 치마 끝단을 잡고 눈을 훔쳤다.
“유하가 우리 집에 온 지 십 년도 넘었는디, 그때 자석들 데리고 내 집에 와갖고 나한테 부탁하고 갔네. 보리장나무숲에도 가서 자네 이야기도 함시롱. 죽으먼 여그다 뼛가루를 뿌려 달라고. 여그가 자네하고 유하가 만난디 앵인가?”
“….”
영미 아들과 며느리가 돗자리를 펴고 제상을 차렸다. 젊은 남자가 영정 사진을 제상에 올렸다. 막내 또래의 남자는 제상에 보자기를 올려놓고 풀었다. 유하의 항아리였다.
_「마지막 동창회」 93쪽
잠시 후였다. 굴뚝 난간을 향해 연이 솟아올랐다. 가오리연이었다. 소녀의 연이었다. 소녀가 뉴셀 담장에 올라 가오리 연을 날리고 있었다. 소녀는 얼레를 붙잡고 실타래를 풀며 더 높이 더 멀리 날려 보냈다.
루리!
시인이 소리쳤다.
“동규 씨! 보이죠? 따님이 연을 날리고 있어요.”
동규는 몸을 일으켰다. 하늘을 가르는 연과 소녀를 바라보았다. 연은 꼬리와 귀에 글자를 달고 솟구쳐 올랐다. 좌우로 비행하다 바람에 밀려 멀어지며 곤두박질치는가 싶더니 땅을 박차고 솟아올랐다. 연은 ‘아빠 빨리 내려오세요’를 꼬리에 달고, 두 귀는 ‘함께 밥 먹어요’를 단 채 날갯짓을 했다. 오 작가가 확성기를 들고 소녀에게 다가갔다. 확성기에서 소녀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빠, 빨리 내려오세요’.
‘아빠, 함께 밥 먹어요’.
_「시인과 소녀」 146쪽
숲과 함께 징매이고개로 향했다. 고개를 넘고 생태 터널을 빠져나왔다. 부대 앞에서 공촌사거리로 가는 버스를 타고 내렸다. 버스가 지나왔던 경명대로 변을 걸었다. 징매이고개에 다다르자 인적이 끊겼다. 주변은 우거진 숲이었다. 주호는 잠시 후 계양산의 도둑 이야기가 전개된다고 말했다.
연희진에서 서울로 가는 최단 거리 코스는 징매이고개 길이었습니다. 서울로 가려는 사람들, 서울로 가야 하는 짐을 실은 전라도와 충청도의 범선이 서해안 뱃길 따라 연희진에 당 도했고, 하선한 사람들은 이 고개를 넘었습니다. 조정의 세곡 창고가 있는 서구 원창동 환자곶에서도 세곡을 등에 지고 말에 얹고 넘어야 했습니다. 고갯길은 지름길이었지만 사람들 은 쉽게 넘을 수 없었습니다. 화적(火賊) 때문이었습니다. 화적들에게 물건을 몽땅 빼앗기거나 화적들이 제시한 통행료를 그들에게 뜯겨야만 고개를 넘을 수 있었죠. 탈 없이 고개를 넘으려면 천 명이 함께해야 가능했습니다. 그래서 징매이고개는 천명고개라고도 했고, 임꺽정고개로 불리기도 했답니다
_「계양산기」 189~190쪽
“이장님!”
이장을 불러놓고 사립 밖으로 걸음을 재촉했다.
“이장님. 오빠가 와요. 애리도 와요.”
미주는 배를 가리키며 이장 댁을 벗어났다. 이장은 미주를 불렀지만 앞만 보고 걸었다. 그리고 뛰었다. 이장은 미주를 뒤쫓았다.
“미주야!”
“오빠가 약초를 가지고 왔어요. 애리도 왔어요. 오빠가 날 불러요. 애리가 빨리 오래요.”
이장은 뒤통수에 대고 소리치며 주저앉았다.
“아니여, 그 배는 아닌 것 같어. 가지 마랑께!”
미주는 달렸다. 고구마밭과 수수밭, 소나무숲을 지나 해변 의 바윗길을 따라 선착장으로 내달렸다.
이후, 미주는 돌아오지 않았다.
_「환각의 도시, 그리고 섬」 232쪽
기본정보
ISBN 9788966551736
발행(출시)일자 2023년 12월 15일
쪽수 25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