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땅에 기근이 있으므로 아브람이 애굽에 우거하려 하여 그리로 내려갔으니 이는 그 땅에 기근이 심하였음이라 그가 애굽에 가까이 이를 때에 그 아내 사래더러 말하되 나 알기에 그대는 아리따운 여인이라 애굽 사람이 그대를 볼 때에 이르기를 이는 그의 아내라 하고 나는 죽이고 그대는 살리리니 원컨대 그대는 나의 누이라 하라 그리하면 내가 그대로 인하여 안전하고 내 목숨이 그대로 인하여 보존하겠노라 하니라 아브람이 애굽에 이르렀을 때에 애굽 사람들이 그 여인의 심히 아리따움을 보았고 바로의 대신들도 그를 보고 바로 앞에 칭찬하므로 그 여인을 바로의 궁으로 취하여 들인지라 이에 바로가 그를 인하여 아브람을 후대하므로 아브람이 양과 소와 노비와 암 수 나귀와 약대를 얻었더라 여호와께서 아브람의 아내 사래의 연고로 바로와 그 집에 큰 재앙을 내리신지라 바로가 아브람을 불러서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이렇게 대접하였느냐 네가 어찌하여 그를 네 아내라고 내게 고하지 아니하였느냐 네가 어찌 그를 누이라 하여 나로 그를 취하여 아내를 삼게 하였느냐 네 아내가 여기 있으니 이제 데려가라 하고 바로가 사람들에게 그의 일을 명하매 그들이 그 아내와 그 모든 소유를 보내었더라"
아브람이라는 사람이 개인적으로 일어난 사소한 이야기가 어떻게 성경에까지 등장 할 수 있는지를 우리는 생각해 봐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일은 흔히 일어날 수 있는 일입니다. 살던 장소가 가뭄이 들어 호구 대책이 없을 때, 그 살던 곳을 떠나는 것도 너무나 상식적인 일입니다. 그리고 살만 한 큰 나라로 들어가는 것도 흔히 예상할 만한 행동입니다.
그런데 그 큰 나라에서 무슨 해를 당할 것인지도 마리 점검해야 합니다. 남들이 이 나그네 가족을 보면서 탐을 내어 뺏어 갈 만한 것이 있는가도 미리 챙겨봐야 합니다. 아브람이 보기에 남들이 탐낼 만한 것은 자기 아내 밖에 없었습니다. 너무나도 미인이었나 봅니다. 힘이 있는 세력들이 자기 아내를 탐낼 때 그냥 줘버리면 쉽게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 자기를 죽이고 아내를 빼앗는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아예 살아보겠다고 나선 마당입니다. 피해 갈 입장도 못됩니다. 아내가 남이 탐을 낼 정도로 이쁜 것도 사실이지만 그런 와중에서 아내도 살고 자신도 살아남아야 한다는 것도 풀어야 될 현실입니다. 무슨 좋은 수가 없을까요? 여기에 또 다시 아브람의 상식이 동원됩니다. 아내도 살고 자기도 사는 수를 생각합니다.
즉 아내의 미를 통해서 오히려 둘 다 살 수 있는 방도를 구상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 13절에 보면, "원컨대 그대는 나의 누이라 하라 그리하면 내가 그대로 인하여 안전하고 내 목숨이 그대로 인하여 보존하겠노라 하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아내의 아내 됨을 포기하는 방안입니다. 도리어 아브람 자신을 아내의 오빠, 즉 아름다운 여인의 오빠로 나서므로서 그 미모가 안겨 줄 혜택 속에 오빠라는 자격으로 들어가서 생명을 부지 하겠다는 겁니다.
이러한 아브람의 의식 속에는, 자신이 하나님의 복의 중심에 서 있는 중요한 인물이라는 사상이 있었습니다. 즉 아내의 운명이 어떻게 되든 말든 자기 자신은 축복과 저주의 중앙에 놓여 있기에 그 어떤 수를 써서라도 죽지 않아야 하나님의 일이 무사히 성사된다는 의식입니다. 그래서 "그대로 인해 내가 살고"라는 말을 서슴없이 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아브람의 상식적 생존술입니다.
과연 그들이 애굽 나라에 들어왔을 때 그들이 예측한대로 일이 진행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오히려 한 술 더 뜨서, 아내로 인해 자기가 목숨 부지 하는 수준이 아니라 아예 호강을 하는 위치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과연 아브람의 지략이 제대로 통하고 있다는 증거입니까?
흔히 교회에서 사람들이 성경을 보면서 자기 입장을 옹호하는 쪽으로 해석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목사가 주장하기를, "여러분, 이 교회에서 누가 중심이 되어 돌아가며 누가 제일 중요한 인물입니까? 장로입니까? 권사입니까? 주일 학교 어린이입니까? 아닙니다. 여기 서 있는 목사가 제일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이 교회에서 크게 역사하는데 있어 여기 있는 이목사없이는 안되는 겁니다. 따라서 여러분들의 개인적인 사정만 호소하지 말고 우선적으로 목사에게 어떤 어려운 점이 없는가, 아쉬운 점이 없는가를 살펴야 합니다. 만약 이 점을 소홀히 하여 하나님의 일에 장애가 생긴다면 이는 사탄의 역사임에 틀림없습니다."라고 합니다.
이러한 성향이 목사 한테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소리를 듣고 있는 일반 교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명절날 오랜간 만에 온 가족이 다 모이게 되면, 소위 교인이라는 자들이 이런 생각을 가질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 저는 기독교 신자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러나 저 시집간 누이 동생은 절에 다니고 있습니다. 실제로 살아계시고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참 하나님이 엄연히 살아 계시다는 것을 증거하기 위해서라도 이 오빠가 저 불교 신자 누이 동생보다 사는 게 더 나아져야 하고 자식들 재능도 더 뛰어나게 해주셔야 되지 않습니까? 만약 더 불교 신자 누이 동생이 더 낫게 되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릴까 두렵습니다. 그렇게 되면 이는 사탄의 역사임에 분명합니다. 하나님 제발 저를 잘되게 해 주셔서 하나님이 살아있음을 증거케 하옵소서"라고 말입니다.
바로 이러한 잘못을 그대로 아브람이 저지르고 있습니다. 아내는 단지 자신을 통한 하나님이 일의 보조물에 불과하다고 본 것입니다. 그래서 아내의 장래나 운명은 뒷전이요 오로지 자신의 안녕을 챙기는 겁니다. 그것도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이라는 의식으로 정당화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이 시도하는 방책에 그냥 묵묵히 따라가 주는 것 같습니다. 애굽의 바로 왕이 아브람에게 큰 재물을 내릴 때까지만 해도 하나님의 일이 모두 아브람의 생각에 의해서 진척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일시에 무너져 버리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의 뒷통수를 치시는 겁니다. 어떻게 말입니까? 아브람 자신이 버렸다고 여긴 그 아내 사래를 도리어 하나님이 친히 관여해서 보호하시는 겁니다. 그 엄청난 애굽의 권력으로부터 그리고 남편 아브람의 버림으로부터도 말입니다.
즉 하나님 보시기에 아브람이 중요한 인물이 아니라 도리어 아내 사래가 중요한 인물이었던 것입니다. 이점을 아브람은 몰랐던 겁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은 아브람의 작전에 따라 묵묵히 따라오신 겁니까? 이는 아브람의 모든 행위가 인간들이 스스로 자신을 지키고 목숨을 부지하려는 상식적인 태도를 대변해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의 일이란, 인간의 일을 애초부터 가로막아서는 것이 아니라 인간들이 마음껏 하고 싶은대로 다 하게 하면서도 왜 그런 일이 전혀 하나님과 무관한 일임을 보여주고 지적하시려는 겁니다. 자기보다 더 중요한 인물이라고 간주했던 아내 사래를 하나님이 하나님의 내세운 방식으로 동원해서 지켰다는 말은 결코 아브람이 아내를 지킬 수 있는 것도 아니요 더 나아가서 아브람으로 하여금 복의 근원되게 하시는 것도 아브람의 본인의 노력과 상관없다는 말씀을 하시기 위함입니다.
우리는 창세기 3:15를 잘도 기억합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여기보면, 악마를 이기는 것은 남자의 후손이 아닙니다. 여자의 후손입니다. 여성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나온 인물이 악마 속에 있는 남성도 구원해 냅니다.
우리는 말로만 이 사실을 잘 안다고 주장하면서 막상 교회 내에서는 사회나 가정에서 보면, 자기 자신의 중요성에 근거로해서 하나님의 일을 추진하려고 덤빕니다. 즉 나는 기도를 많은 자라든지, 나는 전도나 성경 지식을 많이 가졌기에 하나님이 남들을 사용하지 않고 특별히 나를 사용한다든지, 하는 사고방식에 젖어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특별히 자신을 보호한다는 겁니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성도 보호는 특별히 가엽게 여기고, 불쌍히 여겨주셔서 보호하시는 겁니다. 대단한 재주꾼이요 능력꾼이라서 특별히 사용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보면 신자의 행동이나 불신자의 행동이나 다 같이 상식의 범주에서 못 벗어나 있습니다. 그렇다면 신자와 불신자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우리는 이 점을 바로 왕의 태도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사래가 바로궁에 간 후 바로 왕은 혼줄이 났습니다. 바로 가문에 하나님의 큰 재앙이 떨어졌습니다. 바로 왕은 이 재앙의 원인이 사래에게 있는 줄 알아 아브람을 다구치게 됩니다. "왜 진작 나에게 당신의 아내라고 말하지 않았느냐? 당신 때문에 내가 큰 곤혹을 당했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바로 왕은 모든 것을 원상 복귀해 주려고 합니다. 아브람 부부를 애굽에서 내보내는 겁니다. 많은 선물과 함께 말입니다. 즉 바로 왕은 하나님의 재앙을 재수 없는 일로 간주합니다. 그래서 평소의 자신의 인생으로 얼른 되돌아 가 버립니다. 그것으로 끝입니다.
거기에 비해 아브람은 하나님이 어떤 식으로 자기를 인도하는 지를 알았습니다. 인간적인 방식으로 다 허락하면서도 바로 그것이 얼마나 큰 잘못인가를 깨닫게 하시는 식으로 관여하시는 하나님이었던 것입니다. 즉 하나님은 자기 성도를 늘 실패자로 만들어 버립니다. 낭패자로 전환시킵니다. 이러한 인간들의 낭패와 실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구원은 늘 성공적입니다. 바로 이것이 성도를 지키는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마태복음 8장에도 나옵니다. 거기게 귀신들린 청년이 나옵니다. 모든 마을 사람들이 싫어하는 청년입니다. 거기에 비해서 마음 사람들은 자신들을 제정신 가진 자로 여깁니다. 그 가운데 예수님이 계십니다. 예수님께서 귀신 들인 청년에게서 귀신을 추방해 내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해서 추방된 귀신은 수많은 돼지 떼 속에 들어가서 그 돼지들이 몽땅 바닷물에 빠져서 죽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마을 사람들은 예수님이 자기 곁을 떠나주기를 요청했습니다. 소위 말해서 재수없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위대한 능력이고 뭐가 간에 평상적인 자신의 세계를 흔들리게 하면 상대가 누군지 상관없이 배척하려는 것이 불신자의 태도입니다.
하지만 신자는 그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뜻을 읽게 됩니다. 무가치하고 자기 성공과 생존에 방해된다고 쓰레기 취급하고 버려버린 그 더미에서 도리어 하나님의 자비를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실패자가 되어야지만 주님의 은총을 발견하는 겁니다. 물론 신자에게만 해당되는 사항입니다.
그래서 교회에서는 일체 경쟁이 없어야 합니다. 자신이 잘한다고 여기는 방식 때문에 억울하게 하나님의 일에 방해된다고 무시하는 대상이 나타날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이 아브람에게 일어난 이야기는, 하나님께서 신자를 어떻게 다루시는가를 보여줍니다. 우리 하고 싶은대로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기도를 골라가며 하면 하나님이 더 기뻐하실 것 같지만 이 또한 성공적인 기도가 가져다 주는 효험을 보겠다는 노림수에 불과하고 그리고 잘라버렸다고 소원같은 것이 멀리 간 것이 아니라 기도하는 마음 속에 응어리져 그대로 들어 있기 마련입니다. 참 신앙인은 자신의 솔직한 마음을 다 하나님에게 털어놓고 살며 그리고 그 결과를 하나님에 일임하는 자입니다. 실패, 그것은 성공한 신자의 일생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말로만 안다는 하나님의 뜻이 실제로 우리에게는 우리의 실패를 통해서 이루어짐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은총이 날로 드 크게 느껴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