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왼쪽부터 주부들의 아이디어로 탄생한 컬러 자개 네일 아트, 음식쓰레기 처리기, 발 주머니 포대기.
여성 발명가들의 관심 영역은 생활 발명품이 압도적으로 많다. 한국여성발명협회 회원 3500명 중 대부분이 평범한 주부들. 살림하며 떠오른 색다른 아이디어가 발명 특허로 발전하는 일이 많다. 지난 5월 열린 대한민국 여성발명품 박람회 출품작들도 의·식·주, 일상 생활과 직접 관련되는 발명품이 대부분이었다. 오유정씨가 발명한 ‘발 주머니 포대기’는 말 그대로 아기 발을 담을 주머니가 포대기에 붙어 있다. 아기를 업을 때 발만 쑥 빠져 나오는 경험을 해본 엄마들이 환호했다. 최금선씨의 패션 지퍼 운동화는 색색의 모양 낸 운동화 몸체와 밑창을 지퍼로 연결했다. 지퍼를 열면 운동화 바닥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운동화 속으로 칫솔을 넣어 닦느라 애써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웃음을 터뜨릴 발명품이다.
어떤 여성들이 발명가가 될까. 두꺼운 안경을 쓴 괴짜 천재는 아니지만, 유난히 호기심 왕성하고 겁 없이 저지르는 타입이 많다. 청국장 잼을 내놓은 정정례씨(해누리 대표)가 좋은 예다. 경주 북쪽 건천이 고향인 그는 어려서부터 먹는 것 좋아하고 밀가루로 온갖 실험을 다 해본 말썽쟁이였다. 엄마 몰래 밀가루를 퍼내 소금과 소다를 넣고 빵을 굽는다고 온 집 안을 어질렀다. 주물럭 주물럭 한 대로 빵 모양이 나오는 게 신기했다. 숙명여대 약대에 다닐 때 기숙사 생활을 했는데, 이때 고추장 토스트를 만들어 인기를 얻었다. “밤에 배고프잖아요. 그럼 친구들이랑 토스트를 만드는데, 유독 나만 고추장도 발라 보고 막장도 발라 보고 그랬어요.”
이씨는 청국장 잼을 만들면서 집 안에 실험실을 차리고 별의별 실험을 다했다. 양파를 끓이고 조리고 사과를 굽고 조리고…. 냄새 피운다고 가족들이 싫은 소리를 해댔지만 굽히지 않았다. 좌절도 있었다. 숱한 실험 끝에 만들어낸 상품이 이미 특허가 나 있는 것이었다! 새로 착수한 것이 청국장 잼. 발명특허를 받은 완성품에선 청국장 냄새가 하나도 안 난다. “우선 학교 급식에 건강 빵과 청국장 잼 메뉴를 넣어서 어린이와 청소년들이 좋은 음식을 먹게 했으면 좋겠어요. 그다음엔, ‘코리언 헬시 스프레드’로 세계 시장에 수출하고 싶어요.” 녹차 잼, 키토산 잼도 발명했다. 발명 특허 받아놓은 게 5개. 8개가 출원 중이다.
허브 마스크를 발명한 조정숙씨(코코허브 대표)는 흑산도가 고향.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중학교 1학년 때까지 신문 배달을 했다. 뉴스에 민감하고 부지런한 성품이 그때 키워졌다. 허브 마스크 발명은 이라크 전쟁 뉴스를 보다 번쩍 떠올랐다. 가스전에 대비해서 숯을 헝겊 자루에 넣어 마스크 대용으로 쓴다는 것이었다. “마스크 정도면 돈 좀 까먹어도 얼마나 까먹겠느냐고 남편이 부담 없이 도와주더군요. 큰아이 운동복 빨다가 고무줄에 달린 단추를 보고 퍼뜩 생각이 나서 마스크 끈 조절 실용신안등록을 했지요.”
- ▲ 왼쪽부터 주부들의 아이디어로 탄생한 유아용 스푼, 천연 비누, 컬러자개 나비 문양.
평범한 주부의 아이디어가 국가 기관에 등록되는 ‘쾌거’에 흥분, 본격적으로 덤볐다. 하지만 실패도 컸다. 항균 기능성을 반영하지 못한 제조법 때문에 30만 개, 2억 원어치를 무용지물로 만들었다. 그것을 극복하는데 3년이 걸렸다. 올해 7억~8억 원어치를 팔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항균 마스크가 성공해서 이번엔 다른 걸 하나 더 만들었어요. 헝겊 봉제 제품이란 게 공통점이죠.” 자동차 성에 제거용 항균 걸레 ‘딱순이’다. 실용신안과 디자인 출원 중이다.
평범한 주부를 발명가로, 사업가로 변신하게 만드는 데는 남편의 사업 실패도 큰 몫을 한다. 10년 전, 한국을 뒤흔든 외환위기가 결정적 요인으로 등장한다. 음식쓰레기 처리기 루펜으로 스타가 된 이희자씨는 IMF 체제 때 남편 사업이 완전히 망해 다섯 식구가 비닐하우스로 나앉았다. 어느 날, 2005년부터 음식물쓰레기를 매립할 수 없다는 뉴스에 귀가 번쩍 뜨였다.
“20년 동안 살림만 한, 주부 9단이었어요, 제가. 철 마다 시래기, 호박오가리, 무말랭이 만들던 생각이 나면서, 음식물 쓰레기도 그렇게 말려서 버리면 될 텐 데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기본 아이디어는 좋았지만 시행착오가 끝없이 이어졌다. 마르기는 하는데 악취가 지독했다. 일본서 탈취 기술을 배워왔더니 유난히 국물이 많은 한국 음식의 특성과 안 맞았다. 강제 배기 방식을 썼는데, 그나마 아파트 하수관에 연결이 안 되는 경우가 많았다.
“기술 문제를 하나씩 해결하고 나니 디자인이 과제로 남더군요. 디자이너에게 맡길 돈이 없어서 미대 1학년 다니던 아들에게 부탁했어요.” 젊은 감각이 주효했다. 판로를 찾아 건설사를 찾아 나섰다. 고급 아파트를 짓는 건설사를 설득, 빌트인으로 설치하는데 성공했다. 2004년 첫 매출은 8억 원. 이듬해 300억 원으로 수직 상승하더니 지난해 500억 원을 넘겼다. 올해는 아랍에미리트, 쿠웨이트, 카타르 등 중동 국가에 수출을 시작, 1000억 원 이상을 목표로 하고 있다. 그는 한 걸음 더 나가서 말린 음식 쓰레기를 연료로 사용하는 방법을 연구중이다.
즉석 도정기를 발명한 윤명희 한국라이스텍 대표도 아이 둘 키우며 슈퍼마켓을 운영하던 주부였다. 남편 사업이 외환위기로 주저앉으면서 슈퍼마켓도 문을 닫아야 했다. 빈손으로 나앉은 그는 쌀이 번쩍 떠올랐다. 9분도, 7분도 등 벼에서 껍질을 깎아내는 도정 정도에 따라 밥맛이 달랐던 기억이 났다. 즉석 도정기를 만들어 그 자리에서 도정한 햅쌀을 팔아보자는 아이디어가 이어졌다. 도정기에 스폰지를 붙여 소음을 줄이고 쌀 저장고의 이슬 맺힘 현상을 해결하는 이온 저장고도 발명했다. 쌀부대를 바닥에 쌓아놓고 파는 대신, 진열대를 만들어 소량씩, 고급 식품처럼 팔게 했다.
“쌀 시장의 차별화, 고급화가 필요합니다. 중국에서 대량 생산으로 값싼 쌀을 내놔도 우리는 맛있는 쌀로 승부할 수 있습니다.” 그는 “즉석도정기 뿐 아니라 현미 건강 선물세트 등 쌀 관련 특허가 16건”이라고 자랑한다.
이영옥씨(진주쉘 대표)는 자개 가공업을 하던 남편이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난 뒤 그의 뜻을 잇기로 한 게 발명으로 발전했다. 자개 장롱으로 잘 알려진 전통 나전 공예는 값도 비싸고 대량 생산도 어렵다. 그가 착안한 것은 자개의 영롱한 빛을 살리는 컬러 자개. 빨강 파랑 초록 보라 등 갖가지 색으로 착색한 컬러 자개로 인테리어를 개발했다. 컬러 자개를 오리고 남은 조각을 가공, 네일 아트 재료도 만들었다. 자개에 색을 들이는 기술로 특허를 얻고 2006년 독일 국제발명전에서 은상을 받았다. 올해 연 매출액은 10억 원 정도지만 내년에는 30억 원이 넘을 것으로 예상한다. 가전제품과 고급 자동차 내장, 조명기구 갓 등 컬러 자개의 쓰임이 무궁무진하기 때문이다.
- ▲ 허브 마스크, 청국장 잼, 즉석 쌀 도정기, 간이 공기청정기 등 생활에서 얻은 아이디어로 연 매출 수억~1000억원대 상품을 만들어낸 여성 발명가들. 왼쪽부터 정정례, 윤명희, 이길순, 이희자, 이영옥, 조정숙, 한미영씨. /이명원 기자 mwlee@chosun.com
여성 발명가들의 활약은 앞으로 더 커질 것으로 기대가 크다. 한미영 한국여성발명협회장은 “창의성이 곧 지적 재산인 세상에서, 여성들이 생활 속에서 발견한 문제와 문제 해결 능력은 우리 사회의 큰 자산이 될 것”이라고 자신한다. “식품과 생활용품에서 여성들이 특히 강합니다. 장을 담을 때 독에 숯 띄우는 것을 무심코 봐 넘기지 않고 숯의 항균 작용을 읽어낸 것도 여성들입니다.” 한 회장은 한국이 여성들의 아이디어를 발명으로 ‘실현’ 시키기 위한 시스템도 세계에서 손꼽히는 수준으로 갖췄다고 자부한다. 정부 지원 하에 여성발명협회가 2001년부터 여성발명품박람회를 해마다 열고 있으며, 2003년 여성발명 경진대회가 시작됐다. 2006년 여대생 발명 캠프와 여성 발명 창의 교실이 개설됐고 올해 들어 여성발명 지도사 과정도 생겼다.
물론 발명이 곧장 사업 성공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여성 발명 스타들이 빠짐없이 겪은 것이 바로 실패. 기술적인 문제와 상업적인 문제가 언제나 도사리고 있다. 그러나 남다른 창의력을 묻어버리지 않으려는 여성들의 도전이 이어지는 곳이 발명의 세계다. 주부 방송작가 김모씨는 “아이 키우면서 온갖 아이디어가 다 나오는데, 이것을 언젠가는 꼭 실현시키고 싶다”고 말한다. 유아들이 신발의 왼쪽 오른쪽을 바꿔 신는 것에 착안한 발명 아이디어가 그 하나다. 무명의 여성 발명가들이 오늘도 꿈을 키우고 있다.
아이디어 있는데 돈·기술 없으면… ☎ 02-538-2710
좋은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그런데 기술도 없고 돈도 없다. 어떻게 해야 할까.
발명은 지식 재산이다. 등록이 안되면 자기 것으로 주장하기 어렵다.
사단법인 한국여성발명협회(www.inventor.or.kr 02-538-2710)는 이런 경우를 위해 무료 변리 자문 서비스를 해주고 있다. 발명 내용을 서류화하고 특허청에 신청하는 작업을 도와 준다. 회원은 특허 출원 때 변리사 비용에서 혜택이 있다.
특허 등록이 되면 그때부터 실용화, 상품화 작업이 큰 과제다. 협회는 올해부터 특허청이 지원하는 시제품 제작 예산 1억원으로 1인당 300만원까지 무상지원을 시작했다. 본격 상품화를 위한 정식 금형 제작은 발명진흥협회에서 지원한다. 심사를 거쳐 최대 5000만원까지 무상 지원이다.
이외에도, 여성 발명 경진대회와 여성 발명 창의 교실을 통해 발명 교육을 받을 수 있으며, 대학생은 여대생 발명 캠프에 참가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