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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사관(植民史觀)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일제는 어쩔 수 없이 무단통치를 철회하고 문화정치를 표방하였다. 문화정치를 표방하고 부임한 사이토 마코토(齊藤 實)은 교활하게도 조선 사람들을 반일본(半日本)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다음과 같은 교육시책을 내놓는다.
“먼저 조선 사람들이 자신의 일, 역사, 전통을 알지 못하게 만듦으로서 민족혼, 민족문
화를 상실하게 하고,
그들의 조상과 선인들의 무위(無爲) 무능과 악행 등을 들추어내 그것을 과장하여 조선
후손들에게 가르침으로서 조선인 청소년들이 그 부조(父祖)를 경시하고 멸시하는 감정
을 일으키게 하여 그것을 하나의 기풍으로 만들고,
그 결과 조선인 청소년들이 자국의 모든 인물과 사적(史蹟)에 관하여 부정적인 지식을
얻어 반드시 실망과 허무감에 빠지게 될 것이니 그때에 일본사적, 일본인물, 일본문화
를 소개하면 그 동화의 효과가 지대할 것이다. 이것이 제국 일본이 조선인을 반일본인
으로 만드는 요결인 것이다“라고
지껄이면서 그 시책의 일환으로 1922년 12월 훈령(訓令) 제64호 조선사편찬위원회규정을 제정, 공포하여 새롭게 「조선사편찬위원회」를 설치하고 조선총독부 정무총감을 위원장으로 하고 주요인물을 중심으로 한 15명의 위원회를 조직하였다.(추후 상세할 예정)
상기한 사이토 마코토(齊藤 實)의 교육시책에서 제시하고 있는 교육시책의 내용과 오늘 한국의 현실을 면밀하게 대비를 해보면 식민사관의 폐해가 얼마나 크고 깊은지 이해를 할 것이다. 이미 앞서도 지적을 하였듯이 총칼로 지배를 하면 그 순간은 복종을 하는듯하지만 머지않아 곧 지배를 받는 자들도 저항을 하게 되고, 더 나아가서 무장을 하여 무력으로 대항을 하게 된다.
하지만 얼과 넋을 좀 먹고 갉아먹게 만드는 정책이나 시책들은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느끼지 못하게 서서히 시간을 두고 침투하기에 저항을 한다거나 투쟁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지 못하게 된다. 더 아나가서는 오히려 자신들을 광명의 세상으로 인도를 해주었다고 고마워 할 뿐 아니라 스스로 복종(복종을 하는 지도 모름)을 하게 되어 점령을 한 자들의 지배를 훨씬 더 용이하게 한다.
이러한 연유로 얼과 넋을 좀 먹고 갉아먹는 정신, 문화적인 침투는 받아들이는 입장에서는 쉽게 사라지지도 않을 뿐 아니라 대를 두고 전수가 된다. 앞선 장에서 조선의 마지막 총독 <아베 노부유끼>가 패전 후 물러가면서 뇌까린 말과 위 <사이토 마코토>의 말을 겹쳐서 보면 둘의 의도를 충분히 알고도 남음이 있을 것이다.
식민사관의 폐해는 이렇게 검질기고 무서운 결과를 우리 겨레들에게 남겼다. 물론 북녘 겨레들은 해방 후 지금까지 줄곧 《우리 민족 제일주의(그러나 배타적 민족주의가 아닌 열린 민족주의)》로 무장을 하고 자라나는 새 세대들에게 교육을 시켰다고 알려져 있다. 본인이 직접 북녘 땅을 밟아보지 않아서 더 자세한 것은 알 수가 없다. 다만 최근 보도들을 보노라면 유일 초 대국이라고 자칭 타칭 일컬어지는 미국과 정면대결을 하는 보도들을 보면서 짐작을 할 뿐이다.
반면 남쪽의 자라나는 청소년들과 사회 구석구석 슴배어 있는 외래 사상과 문화 말·글 등이 점차 사라지는 현실을 보노라면 <사이토 마코토>나 <아베 노부유끼>가 지껄인 내용들을 다시금 돌이켜 보지 않을 수가 없다.
1.식민사관(植民史觀)의 성립(成立) 배경(背景)
일본에서 조선에 대한 연구는 에도시대부터 나타났는데 그 형태를 대략 두 가지 정도로 볼 수가 있다.
첫째, 주자 학자들이 조선의 이퇴계(李退溪)의 학문을 존경하는 마음으로 연구를 하였다.
둘째, 고사기(古事記)와 일본서기(日本書紀), 그리고 일본 고전연구를 하는 국학자들의 조선 연구가 있었는데 이들은 오래전부터 일본 고전연구를 통해 일본의 조선 지배를 주장하였다.
이들로부터 형성된 조선역사관은 막부 말기 정한론(征韓論)으로, 메이지유신(明治維新) 이후로 조선침략(朝鮮侵略)의 기초가 되었다. 또한 이들로부터 일선동조론(日鮮同祖論), 일선 일역론(日鮮一域論)이 탄생하게 된다.
이후 메이지시대 초기에는 조선연구가 별로 진척이 없었으나 1920년대 들어서서 동경제국대학(東京帝國大學) 교수로 있었던 시게노(重野安釋)등이 <국사(國史)>를 저술하여 에도시대의 국학전통을 계승을 하면서, 일선동조론(日鮮同祖論)을 주장을 하면서 조선(朝鮮)은 일찍부터 일본의 지배를 받아왔다는 황당한 역사관(歷史觀)을 조작해냈다.
이 역사관은 역사교과서를 통하여 일본인들에게 광범위하게 확산이 되었고, 이로부터 조선인에 대한 일본인의 우월감이 생기게 되었다. 이는 엄격한 학문적 검증도 되지 않았으며 단순한 에도시대의 국학전통을 이어받은 오류투성이 임에도 오랫동안 일본의 학계, 교육계에서 전승이 되면서 그릇된 역사관이 되었다. 바로 여기로부터 식민사관이 태동이 되었다.
2. 일인학자들의 조선사 연구와 식민사학의 본격적인 전개
일본에서는 1885년에 동경제국대학(東京帝國大學)에 사학과(史學科)가 개설이 되었고 그 후 2년 후인 1887년에 국사과(國史科)가 개설이 되면서 본격적으로 근대 역사학이 출발을 하였으며, 조선사(朝鮮史)에 대한 연구도 본격화 되었다. 조선사 연구 초기에는 주로 고대사에 집중이 되었으나 일제의 조선침략이 본격화되면서 그들의 연구는 침략의 합리화, 정당성을 부여하는 방향으로 연구가 되었다.
1889년 국사학과가 증설이 되었으며, 사학회(史學會)가 출범을 하였고 그 기관지 사학회잡지(史學會雜誌)가 발행이 되었다. 그 후 사학회잡지는 사학잡지(史學雜誌)로 이름이 바뀌면서 일본의 조선사 연구가 본격화 되었다. 이 후 청 – 일 전쟁 전후 일본의 조야와 학계의 관심은 온통 조선에 집중이 되었다. 1890년대 말까지도 일본의 학계에서는 조선사에 대한 주 연구대상은 고대사였다.
1901년 하야시(林泰輔)에 의해 저술된 《조선근세사(朝鮮近世史)》는 1892년 하야시(林泰輔) 자신이 저술한 <조선사>를 증보한 것인데 식민사학의 논리를 학술적으로 담보를 해주는 것이었다.
이 책은 1906년 현채에 의해 【중등교과동국사략(中等敎科東國史略)】으로 역술(譯述)이 되어 한말(韓末) 사학이 일제 식민사학에 본격적으로 먹혀들어가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1902년 김택영이 저술한 〖동사집략(東史輯略)〗 역시 일본인 사서의 영향으로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을 무비판적으로 수용을 하였다. 학부의 국사교과서 편찬을 책임졌던 김택영과 현채가 모두 식민사학에 오염되어 있었다. 이는 우리 역사교육에 있어서 치명적이었다. 아직 우리 역사 교육에 대한 근대적 관계가 채 설정이 되기 전에 일본인들의 근거도 미약하고 학문적으로도 검증이 안 된 황당한 논리를 그대로 국사교과서에 수용을 했다는 것은 그 이후 전개될 우리 역사가 식민사관에 매몰되었음을 보여준다고 하겠다.
3. 조선사(朝鮮史)의 본격적인 연구(硏究)
19세기말 일본학자들의 조선사에 대한 연구의 중심은 주로 고대사에 머물러 있었다. 하지만 청-일 전쟁, 로-일 전쟁 후 20세기에 들어와 일제의 한국 침략이 본격화 되면서 일제의 조선사 연구는 그들의 침략(侵略)을 정당화하고 합리화하기 위한 목적으로 조선사가 다방면적(多方面的)으로 확대가 되어 연구를 하기 시작하였다.
1) 만선사(滿鮮史)의 성립(成立)
일제가 어용학자들을 동원하여 만선사(滿鮮史)를 연구하게 된 것은 조선침략(朝鮮侵略)과 만주침략(滿洲侵掠)에 필요한 학문적 자료를 제공받고 그 합리성을 부여하기 위함이었다. 만선사(滿鮮史)라는 것은 배달겨레 역사의 주체적(主體的) 발전을 부정하고 배달겨레사를 대륙사(大陸史)에 부속시킴으로서 “배달겨레사의 타율성”을 강조하기 위한 역사관(歷史觀)을 만들었던 것이다.
2)일선동조론(日鮮同祖論)
에도시대의 국학파(國學派-官學派)의 전통을 이어받아 심화발전시킨 일선동조론(日鮮同組論)은 일제의 조선침략(朝鮮侵略)을 합리화하는데 매우 유용한 이론으로 작용이 되었다. 일제는 그들의 조선침략행위를 일선동역(日鮮同域)의 복고(復古-고토를 회복)라고 주장하면서 일제의 조선지배(朝鮮支配)의 정당성을 주장하면서 일제에 저항하는 의병운동과 독립운동(獨立運動)의 부당성을 역설하면서 그에 대한 탄압이 정당하다는 합리성을 부여하였다.
3)정체성이론(停滯性理論)
일제는 조선침략의 정당성을 합리화시키기 위해서 조선의 역사, 문화가 발전하지 못하고 과거에 머물러 있었다는 이론을 만들어내었다. 즉 조선인들은 역사발전단계에 있어서 원시공산사회-고대노예제사회-중세봉건사회-자본주의사회의 단계를 거치지 않고 20세기를 맞았다는 것이다. 즉 당시 조선은 중세봉건사회를 거치지 않고 정체해 있는 상태로 21세기 세계자본주의시대를 맞이하였기 때문에 일제가 조선을 발전시켜주어야 한다는 이론인 것이다.
4.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의 조선사(朝鮮史)에 대한 정책(政策)
일제는 조선을 군사적(軍事的)으로 침략을 한 후 정치‧경제적(政治·經濟的)인 침탈도 용이하게 하기 위해서 그들은 조선에 대한 역사(歷史), 지리(地理), 법제(法制), 풍속(風俗) 등도 함께 연구를 하였다. 그들은 조선과 조선인의 얼과 넋(풍속, 문화 등등)을 연구하면서 발견하게 된 조선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것은 그들의 목적과는 다르게 조선인들의 역사 문화적인 저력과 광대함이었다.
일제는 “조선인(朝鮮人)은 다른 식민지에 있어서의 야만반개화(野蠻半開化)의 민족
과 달라 독서속문(讀書屬文)에 있어서 문명인(文明人)에게 떨어지는 바가 없다”고
하였다.
상기한 문장과 같은 일제의 조선에 대한 생각은 조선인이 그들의 역사에 대해 애착을 가지게 된다면 일제의 조선지배가 그리 간단치 않음을 알게 하였다. 따라서 일제는 조선인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시킬 수 있는 조선사(朝鮮史)에 대한 독서(讀書)를 금지시켰다. 1910년 일제가 조선을 강점한 이후 곧바로 배달겨레의 발자취(歷史)에 관한 서적들을 불사라 버렸으며, 조선사를 읽는 조선인들을 탄압을 하였다는 사실이 이를 입증한다.
한편 일제의 식민지 정책은 조선에 대한 압박에 머물지 않고 조선사를 재구성(再構成)하려는 야욕을 가지고 이를 실행하였다. 그들은 당시 그들이 주장하였던 일선동조론(日鮮同祖論)이나 강압만으로는 조선인의 복종을 기대하기 어려움을 알게 되었고, 조선인들이 역사서를 통해 민족의식과 독립의식을 고취하고 있는 상황에서 조선사를 재구성하는 정책이 절실히 필요하였다. 이로부터 조선인의 사서들을 없애고 조선인들을 압박하는 것만으로는 그들의 조선침략을 정당화 시킬 수 없기에 그들이 의도하는 식민사관(植民史觀)에 맞추어 역사를 왜곡하여 일제의 조선침략을 정당화 합리화하려고 하였다.
일제는 1923년 12월 《조선사편찬위원회》를 내오고, 1925년 6월 일황칙령 제218호를 통하여 〖조선사편수회(朝鮮史編修會)〗를 독립관청으로 승격시키면서 본격적으로 배달겨레사를 왜곡하기 시작하였다. 〖조선사편수회〗에서는 “조선사” 37책을 간행하였는데 이는 일제의 식민사관을 뿌리 내리기 위하여 편집간행한 것이었다.
“조선사”의 문제점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① 배달겨레사의 시작은 단군(박달 임금)이 아니라 화하족(和夏族)¹의 식민지(植民地)에서부터 시작이 되었다.
② 배달겨레의 고대사 상한선을 가능한 한 최대로 끌어내렸다. 이에 대한 이론이 삼국사기(三國史記) 초기불신론, 조선반도(한반도)에는 구석기시대가 없었다는 등등의 이론이 있다.
③조선의 문화발전은 자체적으로 생성 발전된 것이 아니고 외래문화(外來文化)의 모방과 그 유입에 의한 것으로 세계사의 문화발전에 비해 파행적으로 진행이 되어왔다.
④조선에 대한 외세의 침략은 크게 강조가 되고, 외세를 물리친 능력은 평가조차 되지 않았으며 따라서 조선인들의 외세에 대한 사대주의사상(事大主義思想)이 크게 부각이 되었다.
⑤문헌고증적이고 실증주의학풍에 관계가 있다고 하지만 연구대상이 정치사(政治史) 중심으로 구성이 되어있으며, 사회(社會), 경제(經濟), 문화발전(文化發展)등에 대한 규명을 거의 하지않았을 뿐만 아니라 규명을 하였다고 한 부분들에 대해서 마져 매우 부정적으로 묘사를 했다는 것이다.
⑥조선의 어두운 면과 수치스러운 면만을 과장되게 혹은 왜곡해서 부각을 하였다. 특히 조선시대의 당쟁사(이 부분에 대해서는 면밀한 연구가 새롭게 되어야 할 것으로 본다)가 매우 부정적으로 묘사가 되며 당쟁사로 인하여 조선의 발전이 되지못했으며, 정체할 수밖에 없다는 논리를 폈다.
이러한 연구 및 조선사재구성의 목적은 그들의 조선침략과 지배를 정당화 합리화하기 위한 것이다.
5.식민사관(植民史觀)의 본질(本質)
1)일선동조론(日鮮同祖論)
일선동조론은 일선동종론(日鮮同種論) · 일선동원론(日鮮同源論) · 일선일역론(日鮮一域論) · 일선동역론(日鮮同域論) 등으로도 불리운다.
일선동조론(日鮮同祖論)은 일본서기 출운신화(出雲神話)에 나오는 아래 내용에 그 근거를 두고있다
.
“스사노오 노미코토(素盞鳴尊)가 조선의 지배자가 되었고, 이니히 모니코토(稻氷命)
가 신라왕이 되었고, 그의 아들인 아메 노히보코(天日槍)가 왜에 귀화하였다.“
이와 같이 허황하기 짝이 없는 황당 소설보다도 못한 내용을 근거로 조선과 왜는 조상이 같으며 조선은 고대로부터 왜의 지배하에 있었기에 근대 이후 일본의 조선 침략은 침략이 아니라 복고(復古)라고 하면서 일본의 조선침략을 정당화 합리화 하였다. 이러한 황당한 역사해석은 일본의 보통 사람들에게까지도 반도조선은 일본의 지배하에 있었다는 역사상(歷史像)을 믿게 했고, 그들의 침략행위에 대해서조차도 응당하게 받아들이는 것과 같이 일본인들의 이성을 마비시켰다. 즉 근대에 들어서 일본의 조선침략은 침략이 아닌 과거의 고토를 회복하는 것이며 원상복구라는 논리로 정당하게 받아들여졌다.
일선동조론(日鮮同祖論)은 만선사(滿鮮史)와 연계가 되어 대동아공영권(일본의 대륙침략 이론을 제공)으로 확대가 되었다. 즉 “일본과 조선뿐만 아니라 만주 · 몽고의 여러 민족까지도 같은 조상 · 같은 근원을 가졌다”라는 주장을 하는 것이다. 따라서 일제의 조선침략은 물론이고 대륙과 몽고를 침략하는 것 역시 정당하다는 논리를 펴는 것이다.
일선동조론은 배달겨레 말살의 근본이념이 되었으며 일본어와 일본사는 국어와 국사로 둔갑을 하였다. 또한 일본은 내지(內地) 이며 조선은 일본의 속국이나 식민지가 아닌 내지의 연장이라고 강변을 하였다. 따라서 조선인은 일제의 침략전쟁에 마음대로 징병하여 대포 밥으로 써먹었으며, 경제적으로는 조선인들을 마음대로 징용하여 써먹을 수 있는 자기들의 소유물 정도로 여겼다. 일제는 일제강점기 우리의 뿌리를 알 수 있게 하는 성씨 마져도 일본식으로 바꿀 것을 강요하였다.
일선동조론의 대표적인 학자는 기다(喜田貞吉) 이다. 3·1운동 직후 기다(喜田貞吉)는 《일한양민족동원론(日韓兩民族同源論)》을 통해서 일선동조론을 되풀이하여 주장하였다. 기다는 더 나아가 이 논문에서 일선동조론을 뛰어넘어 만주와 몽고의 여러민족까지 같은 조상 같은 근원을 가졌다고 주장을 하였다. 기다의 이 이론은 1930년대 우치다 료헤이(內田良平)가 주장한 대아시아주의의 이론적 근거가 되었다. “대아시아주의”는 <일선동조론> 이나 <만선사관>의 범위를 뛰어넘는 침략논리의 확대 재생산의 결과로, 일제가 침략의 범위를 확대하며 내세운 대동아공영권이라는 것도 여기에 기초하고 있다.
인선동조론(日鮮同祖論)의 뿌리는 매우 깊고 간악하다. 이 논리는 일제시대 내내 조선침략과 식민지 지배의 논리로서 존재하고 작용한 식민사관의 대표적인 논리였다.
2) 타율성론(他律性論)
타율성론(他律性論)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우리 배달겨레의 역사가 배달겨레의 자주적이고 주체적인 역량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외세의 간섭과 압력에 의하여 타율적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배달겨레의 일만년(강단사학에서는 어불성설이라고 하나 이 역시 면밀히 연구를 해야한다.) 역사가 북쪽으로부터 화하족 · 몽고족 · 만주족 등으로부터 영향을 받았으며, 남쪽으로는 일본 등의 이웃한 외세의 침략과 압제에 의해서 비주체적(非主體的)으로 전개되어 왔다는 것이다.
일제는 이러한 역사이론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조선사(朝鮮史)에 보이는 타율적요소(他律的要素)들을 끄집에 내어 그것을 역사주류로 서술하였다. 반면 조선사의 자율적인 모습은 외면을 하였다. 대외투쟁사(對外鬪爭史)에서 우리의 자주적(自主的)인 역량이 없이는 승리가 불가능한 사건들 조차 거의 외면을 하거나 애써 과소평가를 했다. 자주적인 역량에 의해 승리를 가능하게 해준 사회경제적(社會經濟的) · 문화적(文化的) 능력(能力)에 대해서는 일언반구 언급 조차 하지않았던 것이다. 또 고대사(古代史)에서 조선인(朝鮮人)의 자주성(自主性)과 깊은 관련이 있는 단군(檀君-박달 임금)에 대해서는 “그 설(說)이 황당(荒唐)하여 믿지 못할 것”이라고, 혹은 “단군조선(檀君朝鮮)이 반도 고대사(古代史)의 한 시기를 획득하였다고 하는 것은 올바른 역사연구로 인정(認定)할 수가 없다고” 주장하면서 우리 고대사를 억지로 공백으로 만들어버렸다.
배달겨레의 자주적이고 주체적인 역량을 부정하고 타율적(他律的)인 면에 초점을 맞추어진 조선사, 특히 고대사는 왜곡될 대로 왜곡이 되었다. 조선(朝鮮)의 역사는 태고적부터 북쪽은 화하족의 식민지로, 남쪽은 왜의 영향아래에서 시작된 것으로 왜곡을 하였다. 즉 북쪽에서는 기자(箕子), 위만(衛滿), 한사군(漢四郡) 등의 화하족세력이 지배를 하였고 남쪽은 신공왕후(神功王侯)의 정벌(征伐)을 전후하여 수세기 동안 왜의 지배하(支配下)에 있었다고 하는 인본의 “남선경영설(南鮮經營說)” 내지는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을 창작해내었던 것이다.
이러한 조선사(朝鮮社)의 전개의 논리는 비단 고대사 뿐만 아니라 중·근세사까지 확대적용을 하여 조선사에 있어서 외세의 역할을 강조하고 그 외세(外勢)에 의하여 타율적(他律的)인 역사가 전개되어왔다고 강변을 하였다.
이러한 조선사의 타율성(他律性) 이론(理論)은 만선사관에서 시작되었다. 만선사관(滿鮮史觀)은 만주사(滿洲史)를 화하족의 역사에서 분리시켜 조선사와 한 체계 속에 묶어 당시 중국이 만주에 대한 영토주권을 주장하지 못하게 하는 논거를 제시하는데 그 목적이 있었다.
그러나 조선사(朝鮮史)의 입장에서 볼 때는 만선사의 체계는 조선사의 독자성(獨自性), 자주성(自主性)을 불가피하게 부정하게 되는 것이다. 나아가 조선의 정치, 경제, 문화 등 일체가 외세의 압도적인 영향하에 이룩되어 조선의 독자적인 것은 없다는 논리로 발전하며 조선인에게는 자주성이 없다는 사고의 논거가 되었다.
만선사관의 대표적인 학자는 이나바(稻葉岩吉)였다. 그는 조선이 ㉠ 조선 왕가의 대부분이 만주나 중국계라는 민족 계통상의 동질성. ㉡ 국토와 국경이 중국과 분립할 수 없는 점. ㉢ 경제적으로 중국에 예속된 점 등의 이유를 들어 만선불가분론(滿鮮不可分論)을 주장하였다. 이것은 조선사의 종속성을 강조함과 동시에 타율성론을 강조한 것이다.
위에서 살펴본 만선사관론자(滿鮮史觀論者)들과는 다른 입장에서 조선사의 타율성 이론을 주장한 것이 반도적(半島的) 성격론(性格論)이다. 이 사관의 대표적인 학자는 미나미(三品彰英) 이다. 미나미(三品彰英)는 조선사의 성격을 부수성(附隨性), 주변성(周邊性), 다린성(多隣性) 등으로 규정을 하고 이같은 조선사의 최대 형성요인(形成要人)이 반도(半島)라고 하는 지리적(地理的) 조건(條件)임을 지적하였다. “아시아 대륙(大陸)의 중심부(中心部)에 가까이 있는 부수(附隨)된 이 반도는 정치적(政治的)으로도 문화적으로도 반드시 대륙에서 일어난 변동(變動)의 여파를 받음과 동시에 주변 위치 때문에 항상 그 본류(本流)로부터 벗어나 있다”고 부수성(附隨性)을 주장하였다.
또한 “이같이 주변적임과 동시에 다린적이었던 조선반도(朝鮮半島)의 역사에 있어서는 이 두 개의 반대작용이 동시에 혹은 단독으로 미쳐서 아주 복잡다기한 양상 마져 나오게 하고 동양사(東洋史)의 본류로부터는 벗어나 있으면서 항상 1개 내지는 그 이상의 여러 세력의 여파가 폭주하여 밀려오고, 때로는 2개 이상의 세력의 항쟁하에 시달리고 혹은 하나의 압도적 세력에 지배가 되던가 했다”고 그 주변성 다린성을 설명하였다. 이러한 사실이 정치사에서와 마찬가지로 문화사(文化史)에도 보여진다고 하였다.
반도적 성격은 대외투쟁(對外鬪爭) 관계에서뿐만 아니라 대외관계(對外關係), 국내(國內) 정치권형성(國內政治圈形成), 당파성(黨派性), 문화면(文化面)에서도 나타나 소위 사대주의(事大主義)라고 하는 성격(性格)을 형성하게 하였다고 주장한다. 그는 조선사를 소위 사대교린(事大交隣) 외래문화(外來文化) 수용(受容)의 역사로 보고 특히 “사대주의(事大主義)라는 것은 절대적(絶對的) 존재(存在)라고 생각되는 국외세력에 복종(國外勢力)에 복종하고 그 권위 밑에 번속(藩屬)하고 의존주의에 의해서 국가를 유지하려는 것”으로 규정하였다.
외교관계(外交關係)에 있어서는 사대주의가 기본이념이 되어있었기 때문에 만일 의존하고 있는 린방세력(隣邦勢力)에 변동이 생기면 그것이 국내 정치적세력에 영향을 미쳐 정쟁이 보이고 역사적 전환의 중대 시기가 나타나는 바 조선사상에 나타난 친명파(親明派), 친청파(親淸派), 친일파(親日派), 친로파(親露派) 등이 그것이었다고 지적한다.
따라서 조선사(韓國史) 전개에 대한 불가결한 요건으로 외세를 생각지 않을 수 없게 되고 조선사의 분립(分立) 항쟁(抗爭)이 그러했던 것처럼 그 대립의 해소도 대부분 타율적(他律的)으로 이뤄졌다고 하며 이런 상황에서 조선사(朝鮮史)에 있어서 변증법적 발전을 기대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타율적 요소는 문화창조면에서도 나타나 조선의 문화는 종주국의 것을 모방한 것 외에는 없다는 식으로 강변을하였다. 미나미의 이러한 주장은 조선의 자주성을 말살함으로서 일제의 침략을 정당화하려는 것이다.
타율성(他律性) 사관론자(史觀論者)들의 주장은 여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조선사를 타율적인 것, 의타적인 것, 숙명론적인 것으로 강조하다 보니 이러한 성격들이 조선인의 일체적인 행동과 사고에도 영향을 미쳐 소위 사대주의(事大主義)라고 하는 고질적인 성격이 조선인(韓國人)에게 생리화 하였다고 주장한다. 이 병적인 생리는 조선인(한국인)의 의식구조, 행동양식, 등 일상의 모든 것을 규제하는 고질화된 “주의(主義)”로 굳어졌다는 것이며 이 사대주의는 조선인(한국인)의 골수에 사무쳐 민족성(民族性)으로 발전하였다고 주장하였다.
이와같이 식민사관(植民史觀)에 있어서 하나의 관념지주인 타율성론(他律性論)은 그것의 범주에 개념화시킬 수 있는 만선사관(滿鮮史觀), 반도적(半島的) 성격론(性格論), 사대주의론(事大主義論)과 더불어 조선(한국)의 정치, 경제, 문화의 모두가 외래세력(外來勢力)에 의해 형성되었으며 따라서 조선문화(韓國文化)의 독자성, 조선인(韓國人)의 자주성 조차도 부인하는 해괴한 이론인 셈이다.
조선사에서 자주성이 일단 부정이 되면 그러한 비주체적(非主體的)인 역사(歷史)를 가진 조선민족(韓民族)은 언제나 외세의 지배를 받는 것이 불가피한 것으로 된다. 그런 가운데 일제의 조선에 대한 역할이 강조될 수 밖에 없었다. 이것이 식민사관론자(植民史觀論者)들이 노린 목적이었다.
일제의 어용사학자들 가운데 타율성론(他律性論)을 지속적으로 강조한 대표적인 인물은 도리야마 기이치(鳥山喜一)와 미나미(三品彰英)였다. 도리야마 기이치(鳥山喜一)는 조선사는 중국대륙세력 · 만주 방면세력 · 일본세력 등 세 개 세력의 소장(消長)에 의해 영향을 받아왔다고 했다.
미나미(三品彰英)는 조선이 전례주의적(典禮主義的)이고 주지주의적(主知主義的)인 중국, 주의주의적(主意主義的)이고 정복주의적(征服主義的)인 만몽(滿蒙), 주정주의적(主情主義的)이고 애호주의적(愛護主義的)인 일본 등 3대 강국의 영향에 따라 역사가 전개되었다고 했다. 따라서 조선은 중국이나 호전적 정복세력인 몽고 · 만주세력에 안기기보다는 주정주의적인 일본에 와야한다고 하면서 일제의 조선침략을 합리화하고 정당화시켰다.
결론적으로 타율성론이라는 것은 일제의 조선침략과 식민지 지배를 정당화 합리화하는 논리에 불과한 것이다. 다시 말해 조선의 발전을 위해서는 일본이 필요하다는 억지논리를 강변하면서 이의 당위성을 역사왜곡과 문화왜곡에서 찾으려고 한 것일 뿐이다.
여기서 현재를 살아가는 배달겨레의 구성원으로서 심각하게 그 교훈을 찾아야 하며 뼈저린 반성을 해야한다. 현 한국사회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외교 등등 모든 분야를 상기한 타율성론과 등치시켜보면 할 말을 잊게 만든다. 그에 대해서는 굳이 구구절절 설명을 할 필요가 없다고 본다. 다만 현 한국사회는 위에서 살펴본 타율성론보다도 훨씬 더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음을 알아야한다.
현재는 오로지 바다 건너 아메리카만 바라다보며 모든 것을 내 맡기고 있으며, 그토록 배달겨레에게 참혹한 상처를 남긴 일본이 없으면 단 하루도 살아갈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으니 현재의 한국사회는 일제강점기보다도 훨씬 더 악화가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식민사관 특히 타율성론에 철저히 세뇌가 되어버린 한국사회 치유할 방법은 없는가? 우리 모두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할 것이며 이를 극복하기 위한 끈질긴 노력들이 절실히 필요하다고 본다.
그럼 왜 한국사회가 해방이 된지 69년이 지난 현 시점에서 일제가 기획하고 어용사학자들이 작품을 쓰고 각색한 시나리오가 오늘 날 한국사회를 철저히 지배를 하게 되었는지에 대해 철저하게 반성을 해야한다. 배달겨레의 얼과 넋을 가진 사람들이라면 모두 힘을 모아 그 극복방안을 찾아야 할 것이다. 아래는 이병도의 《풀뭇간의 쇠망치》에서 〖한국인(韓國人)의 민족성(民族性)〗 중 단점을 나열한 부분의 전문을 실어준다. 상기한 타율성론과 어떻게 맞아떨어지는가를 비교하면서 읽어보기를 권한다. 바로 오늘 날 한국의 현실이 있게 된 실마리가 될 수도 있다고 본다.
“다시 다음에 좋지 못한 유형의 몇 가지를 든다면
(1) 량협(量狹)한 성질(性質) ...... 이것은 우리 반도의 지리적 환경의 영향이 아닌가 생
각된다. 즉 우리나라에는 산악 · 협곡(峽谷) · 분지(盆地)가 많아, 저 넓은 대지에서
자라난 민족에 비하여 기우(氣宇)가 좁고 애중(愛憎)이 심하고, 조그만 일에까지 이
해를 따지고 시비를 분석하며 상호배제(相互排除) · 시기 · 질투 등 양협의 습성이
대동단결을 방해하는 사례가 많다.
(2) 형식치중의(形式置重)의 습성(習性) ...... 옛날로부터의 허례허식이 이를 잘 증언하고
있다. 근래 헤일 수 없는 빈번한 종종의 기념식과 동상 건립, 내용보다도 외형에 치
중하는 대학의 건축물들 ― 근사한 예로 요리상(한식韓食) 위에 벌여 논 잡다한 가짓
수는 왕왕 외국인을 놀라게 한다.
(3) 천박(淺薄)한 현실주의(現實主義) ...... 원대한 전망이나 계획보다도 당장 눈앞에 놓
인 현실에 구애되어 그때 그때를 미봉해 나가는 일이 우리 생활 가운데 허다한 것을
발견할 수가 있다. 우리나라에 위대한 종교가 생겨나지 못하고² 미신적인 요소가 지
금에까지 잔존한 이유도 여기에 잇다고 나는 본다.
(4) 꾸준한 노력(努力)과 근면(勤勉)의 부족성(不足性) ...... 재질에 있어서는 가까운 중
국인이나 일본인에 비하여 결코 떨어지지 않고 어느 점에서는 뛰어난 소질을 가지
고 있으면서도 계속적인 노력과 근면은 그들을 따라가지 못할 때가 많다.
우리의 공적사적 생활 가운데 용두사미(龍頭蛇尾)격의 것이 많이 있는 것은 여러 가
지 이유에 기인한 바도 있겠지만 대체로 보아 꾸준한 노력과 인내의 결핍에서 초래
되는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위에서 든 기질적성격의 유형 이외에도 더러 다른 것이
있을지 모르나, 대체적으로 그러한 범주를 추출할 수 있지 아니한가 생각된다.
상기한 이병도의 <한국인의 민족성>의 내용을 보면 한 마디로 한국인(조선인)은 반도에서 태어나고 살다 보니 성격도 협소하고 겉치레에 치우치는 형식주의적이고, 미래에 대한 희망이나 안목도 없이 현실에 안주하는 천박한 현실주의자이며, 게으르고 근면하지 못한 근성을 지녔다는 것이다. 더구나 【우리나라에 위대한 종교가 생겨나지 못하고²】에 있어서는 그가 과연 제대로 된 우리 역사와 문화를 연구했는지 의심이 가지 않을 수가 없다. 물론 오랜 기간 많은 자료들을 섭렵하고 연구야 했겠지만 그가 접한 자료들이라는 것이 일제가 만들어낸 자료들 이외에 무얼 더 접하고 연구를 했는지에 대해서는 선뜻 공감이 가지 않는다.
위에 예를 든 〖한국인의 민족성〗이 일개 평범한 사람이 한 말이라면 그러려니 하고 넘어갈 수도 있겠지만 이병도가 누구인가? 해방이후 한국의 사학계의 시조와 같은 인물이 아닌가? 그런 이병도가 위와 같은 사고로 우리의 역사와 문화를 이끌어오고 후학들을 배출하고 그 후학들이 이 나라의 역사와 문화를 지배하는 현실이라면 오늘 날 남쪽의 현실에 대해서 일면 이해가 간다.
3) 조선사(朝鮮史)의 정체성론(停滯性論)
앞선 장에서 본 조선사(朝鮮史)의 타율성론(他律性論)과 함께 식민사관(植民史觀) 양대지주(兩大支柱)가 되는 이론은 정체성론(停滯性論)이다. 이 이론은 배달겨레의 역사가 왕조(王朝)가 바뀌고 사회적인 변혁의 과정을 거쳐왔음에도 불구하고 사회경제(社會經濟) 구조에는 아무런 발전을 가져오비 못했으며 특히 근대사회(近代社會)로 이행에 에 필수적인 봉건사회(封建社會)를 거치지 못하고 전근대적인 단계에 머물러 있다고 하는 것이다.
20세기 초까지 일본에서 조선사 연구자들은 주로 대외관계사, 정치사, 역사지리에 대한 고증에 관심을 가지고 연구를 하였다. 반면 사회문화, 경제적인 측면에서는 그다지 주목을 끌지 못했다. 이 방면에 대한 연구는 경제사학자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독일에 유학하여 경제발전전단계설을 정립한 뷰어에게 수학한 후꾸다(福田德三)였다. 그는 러-일전쟁 전에 조선을 여행하였고 여행중에 전문이나 자료를 근거로 하여 “조선의 경제조직과 경제단위”라는 논문을 발표하였다. 그 논문의 방향은 다음과 같다.
근대사회의 성립을 위해서는 봉건제(封建制)의 존재가 필수불가결하다는 전제에 서서, 조선이 근대화에 늦어 혼미(昏迷)하고 있는 근원을 조선에 봉건제가 결여되었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그리고 일본과 조선사를 비교하여 19세기말 20세기 초의 조선의 사회경제적(社會經濟的) 발전단계는 일본의 봉건제가 성립되었던 가마꾸라(膁倉時代:12세기말 ~ 14세기 중엽)시대보다 이전인 10세기경의 후지와라시대(藤原時代)에 머물러 있다고 하였다.
서양사의 사회경제적 발전단계론에서는 인류가 원시공산사회(原始共産社會), 고대노예제사회(古大奴隸制社會), 중세(中世) 봉건사회(封建社會), 그리고 근대(近代) 자본주의사회(資本主義社會)로 발전한다고 분석을 하고 있다. 후꾸다(福田德三)의 주장대로 20세기 초의 조선이 10세기말의 일본 고대말에 해당되는 것이라면 조선은 그때까지 봉건제조차 성립이 되지 않았다는 것이 된다. 그런 억지 주장의 측면에서 본다면 당시 조선사회의 사회경제적인 구조는 정체를 한 것이 된다.
경제학자의 시야(視野)로 이러한 조선의 모습은 일본의 조선사 연구자들에게도 동일하게 투영이 되었다. 가와이(河合弘民)가 주권침탈(主權侵奪) 이후 조선문화(朝鮮文化)는 전적으로 일본에 있어서 후지와라시대(일본의 10세기)와 같은 상태에 있으며 조선사의 현상은 후지와라시대의 단계에 정체(停滯)해 있다고 하였다.
1910년 야마지(山路愛人)도 조선을 여행하고 나서 당시 조선인의 모습 중에서 나라조(奈良朝)의 일본인 모습을 연상하게 한다고 하였다. 1919년 3·1운동 직후 조선을 여행한 일선동조론자(日鮮同祖論者) 기다(喜田貞吉) 역시 당시의 조선의 풍습 생활은 헤이안조(794~1185)시대의 일본인과 비슷하다고 하였다.
이와 같은 주장은 후꾸다의 헤이안조론과 행태상으로는 일치하지만 후꾸다의 주장이 사회발전단계적 측면을 중시했다면 기다는 조선인의 생활양식 그 자체가 헤이안시대의 일본인 생활양식과 같다고 본 점이다. 이들은 조선에 봉건제도(封建制度)가 없었다는 것을 지적하는 동시에 조선사회(朝鮮社會)의 발전은 일본보다 약 600여년 뒤쳐졌다고 보았다.
정체성론(停滯性論)이 왜 일제의 조선침략을 정당화 해주는 식민사관인가. 정체성론은 조선사의 사회경제적 낙후성을 지적하는 측면에서만 그치는 것에 그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논리는 당시 조선사회의 사회경제적 구조가 일본이나 여타 나라에 비해서 약 1000여년이나 뒤쳐졌으니 조선사회를 근대화시키기 위해서는 일제의 조선의 사회경제적 발전에 대한 역할을 해야하며 조선인은 마땅히 이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조선침략의 당위성을 설파하는데 그 궁극적 목적이 있는 것이다.
후꾸다(福田德三)는 전근대적인 사회발전단계에 있는 조선의 발전을 위해서 일본이 어떤 역할을 할 것인지에 대하여 “봉건적 교육과 경제단위의 발전이 결여한 조선과 조선인에 대하여. 그 부패쇠망의 극에 이르른 민족적 특성을 근저로부터 소멸시키고 일본에 동화시켜야 할 자연적 운명과 의무를 가진 유력 우세한 문화의 사명을 짊어져야 하는 것” 이라고 지껄였다.
이러한 논리의 진정한 목적을 보자면 그들의 논리가 사회경제적 사실을 분석하여 밝힌다기보다는 조선을 정체적인 사회로 규정함으로써 조선을 근대화시키기 위하여 일본의 조선침략(朝鮮侵略)을 정당화 하고 합리화 하는 차원으로 비약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와같은 이론은 구로다(黑田巖)에 이르러 조선은 자력으로 근대화할 수 없는 낙오자이며 일본은 조선을 근대화시켜 주는 역할을 해야한다는 단계로 비약발전을 시켰던 것이다.
일제의 정체성론자(停滯性論者)들은 서양사의 발전과정을 기준으로 하였다고 하지만 일제의 조선침략을 학술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한 목적에서 도출된 이론 아닌 강변에 불과할 뿐이다. 그들은 당시 조선사회가 정체(停滯)되어 전근대적인 사회에 머물러 있기 때문에 조선을 근대화 시키기 위해서는 일제의 사명과 역할이 중대하다고 강변을 하였고, 종당에는 일제의 조선 침략과 그 지배를 정당화하고 합리화 시키는 데까지 비약시켰으며 이는 식민사관(植民史觀)의 또 다른 든든한 지지대를 제공해주었던 것이다.
얼마 전에 온 나라를 발칵 뒤집어놓은 〔교학사교과서파동〕과 소위 뉴라이트라고 하는 자들이 주구장창 주장하는 《식민지근대화론(植民地近代化論)》의 뿌리와 줄기가 어디인가 하는 것을 정확하게 우리가 알 수 있게 해주는 이론이 바로 【정체성론(停滯性論)】 인 것이다.
이 나라는 일제의 압박으로부터 해방이 되었다고 하는 70여년이 되었음에도 아직까지 일제시기를 살고 있다는 것이 증명이 되고 있는 한 실례이다. 물론 혹자는 이론(異論)을 제기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현대식민지 경영은 과거와 같은 직접 경영으로부터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등 다방면적인 면에서 간접적 지배방식을 택하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특히나 경제적 지배와 문화적 지배는 피지배인들이 도저히 그 속내를 알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피지배인들이 스스로 알아서 지배를 받아들인다는 데 그 위험성이 있다. 이는 지배에 대한 피지배인들이 저항이라는 것은 절대 생각할 수 없으며 오히려 지배에 대한 저항을 해아한다는 선각자들에게 공격을 하는 웃지 못 할 현상이 현대세계사회의 신식민지지배방식인 것이다.
4) 당파성론(黨派性論)
식민사관의 또 다른 지주(支柱) 이자 근현대사에 있어서 배달겨레를 가장 끈질기고 검질기게 괴롭힌 것이 소위 당파성론(黨派性論) 이다. 이는 결국 배달겨레는 절대 단합이 될 수 없으며 자신들의 이해와 집단의 이익을 위해서는 끼리끼리 뭉쳐서 상대방을 음해하고 모해하며 더 나아가서 나라를 망쳐버릴 정도로 부패타락을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족속들에 대해서는 외세가 개입을 하여 지배를 해야 한다는 당위성과 정당성을 부여하는 것으로 까지 발전을 하고있는 것이다.
당파성론(黨派性論)은 주로 조선시대에 벌어진 정치사의 측면을 매우 부정적인 면으로 보고 있으며, 이를 통해서 조선인의 정파성(政派性)과 분파성(分派性)을 부각시켜 조선인의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적인 능력과 자질을 부정하면서 이로부터 조선사회는 필히 몰락을 할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일본이 조선을 침략하고 지배를 하는 것은 정당하며 합리적이라고 강변을 하는 것이다.
조선에 대한 정치적인 진행과정을 당파성이라고 규정을 하고 이론을 체계화 발전시킨 학자는 학정참여관으로 조선에 부임한 시데하라(幣原袒) 이다. 시데하라는 1907년에 저술한 《조선정쟁지(朝鮮政爭誌)》에서 정파는 “주의(主義)를 가지고 서로 대립하는 공당(公黨)이 아니고, 이해를 가지고 서로 배제하는 사쟁(私爭)이다”고 정의하였다. 그는 그 근거로 1890년대에 이건창(李建昌)이 저술한 《당의통략(黨議通略)》을 자의적으로 왜곡하여 제시하였다.
일제의 조선 강점후에 시데하라의 이론을 그대로 받아들인 자는 하야시(林泰輔)였다. 하야시는 <조선통사(朝鮮通史)-1912년>에서 “당시의 소위 당파란 것은 본래 확호(確乎)한 주의강령(主義綱領)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여러 가지 돌아가는 형세에 따라 동서남북 여럿으로 분속(分屬)된 것이다”고 하여 시데하라의 부정적인 입장을 그대로 수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정치사 이외에도 경제사 측면에서도 당파성론을 정립하고자 하였다. 경제사가인 가와이(河合弘民)는 “경제생활이 곤궁하고 그에 따른 사회조직은 문란이 당쟁 만연의 주된 원인이 되었다”는 경제적 조건이 사회조직의 문란을 가져와서 당쟁이 만연하게 된 주요 요인이었다는 결제결정론적 해석을 하였다.
또 다른 일본인으로는 아사우미(麻生武龜)로서 그는 재정사에 관련해서 연구를 하였다. 그는 당쟁의 폐단이 지방행정에 미치는 영향을 논하였다. 일본의 학자들은 조선인들은 고칠수 없는 정쟁성을 가지고 있다고 하면서 조선인의 정쟁체질론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이론들은 당쟁이 정치사 뿐만 아니라 조선인들의 체질적 한계로까지 굳어졌다고 하면서 이를 입증하여 조선의 당파성론의 이론적 지평을 넓히겠다는 의도에까지 비약을 하게 되었다.
3·1 운동 후에는 오다 쇼고(小田省吾) 등에 의해 더욱 정교하게 정리가 되었다. 이들은 조선사편수회의 주축들이었으며 이들이 조선사편수회 주축들이었다는 것은 당파성론의 관제적 성격이 명백하다는 것을 알게 해준다. 특히 오다 쇼고(小田省吾)는 신유년(辛酉年)의 천주교에 대한 박해와 홍경래의 난까지 당쟁과 연관하여 해석함으로써 당쟁이 사회 전반에 끼친 부정적인 영향을 강변하였다.
당파성론을 요약하면 조선인들은 정치사뿐만 아니라 경제사 마져도 당파성에 젖어서 사회발전을 이루지 못하였으며 종당에는 당파성으로 인하여 나라가 무너지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는 논리이다. 이 당파성은 조선인들에게 일시적이고 일회적인 것이라거나 겉으로 드러난 현상이 아닌 유전적으로 내려온 내면에 체질화되어 고칠 수 없는 고질병이라고 진단을 하였다.
우리는 본 당파성론에서 교훈을 찾아야 할 것은 일반인들 사이에 흔히들 회자되고 있는 “조선놈들은 대단히 뛰어난데(귀맛 좋게 하는 말) 둘만 모여도 안돼(분파성)” “조선놈들은 때려야 말을 들어.(이기성. 반사회성등)” 등과 같은 아무런 의식없이 하는 말들이 바로 저 식민사관에 의해 정교하게 만들어지고 왜곡되어진 식민사관의 폐해라는 것이다. 이제 이 식민사관이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세뇌가 되어져서 우리 스스로도 그게 식민사관의 폐해라는 걸 모르고 있을 정도로 체질화가 되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6. 식민사관(植民史觀)에 대한 극복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식민사관은 그저 우리가 이미 극복을 하고 지나가버린 먼 옛날의 일이 결코 아니며 우리 앞에서 일순간에 사라져버릴 일회적인 것도 결코 아니다. 또한 식민사관이 나 개인에게 어떤 영향이 있을 것인지 또는 나와는 무관하다고 여기는 방관자적 태도는 대단히 옳지 않다고 본다.
앞서 언급한 식민사관 ① 일선동조론 ② 만선사관 ③ 타율성론 ④ 정체성론 ⑤ 당파성론에 대해 면밀하게 살펴보아야 할 것이며 내가 지금 하는 말과 행동들이 과연 이로부터 자유로운지 심각하게 반성을 해봐야 할 것이다.
필자가 보는 견해로는 현재 한국은 식민사관을 극복한 것이 아니고 오히려 내면화 체질화가 되어서 더욱 빠져나올 수 없는 지경에까지 내몰려 있다고 본다. 물론 극히 일부는 식민사관에 대해 심층적으로 연구를 했다거나 공부를 한 것은 아니지만 어쩐지 앞서 언급했던 식민사관 논리들(물론 자신들은 모르는 상태)이 옳지 않다고 여겨 우선 겨레의 입장에서 내가 아닌 《우리-공동체 정신의 최대치임》》라는 입장에서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과 같은 다방면적인 활동을 하는 이들도 있음을 부인하지 않는다. 또한 자신들은 결코 식민사관에 세뇌가 되지 않았으며 식민사관에 대해서는 절대 허용할 수도 없고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하는 이들이 대다수 인 것이 현실이다.
하지만 현 한국의 상황 즉 정치, 경제, 문화, 외교등 우리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음은 물론이려니와 심지어 말과 글은 점점 더 이 땅에서 사라져 가고 있고, 더 나아가서 이름과 성 마져도 영어식 혹은 외국식으로 지어 부르는 이들이 이 사회에 적지 않다. 참으로 식민사관의 폐해는 당시 보다는 오히려 현대 한국사회에 미치는 악영향이 훨씬 더 크다고 할 수 있다. 일제 패망 후 이 땅을 떠나면서 지껄였던 마지막 총독 아베 노부유끼의 말을 다시 생각하게 된다.참으로 통탄할 일이다.
필자가 본 ≪우리 역사 이야기≫에서 우리 역사의 뿌리와 줄기에 대해 본격적으로 분석하여 기고하기 전에 식민사관을 먼저 분석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우리는 우리의 선사시대 및 상고대사 그리고 중근세사는 물론 근현대사까지도 아울러서 공부를 하고 배워야 우리의 얼과 넋을 되찾고 배달겨레의 우수성을 만방에 과시하게 될 것으로 본다. 그것도 일제가 왜곡할 대로 왜곡해댄 우리의 역사 문화가 아닌 온갖 화난(火亂) 속에서도 그나마 남아있는 소중한 자료들을 절대로 배척하지 말고 면밀하게 연구하고 분석하여 식민사관에 왜곡되고 사라져버린 배달겨레의 역사 문화를 되찾는 길만이 식민사관을 극복하고 21세기 이후 미래에 올 새 세대들에게 찬란한 겨레의 삶을 열어줄 것으로 본다.
이를 위해서 우리는 일제가 우리의 역사와 문화를 어떻게 말살시켰는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다고 본다. ≪우리 역사 이야기 – 3, 4≫은 각론에 불과하다. 우리는 일제가 말살한 우리의 선사, 상고사, 고대사에 대해 어떻게 말살을 하고 멸실을 했으며 왜곡을 했는지에 대해 실증적으로 분석을 해보아야 한다.
또한 일제는 배달겨레의 얼과 넋을 말살하고 반일본인으로 만들어 그들의 침략야욕을 달성하기 위하여 조선청년들을 징병이라는 명목으로 끌어다가 전쟁터에 대포 밥으로 이용을 하였으며, 청년들은 물론 장년들까지 징용으로 끌어다가 광산으로, 건설장으로 밀어 넣어 노예노동을 강요하다 못해 저항하거나 도망을 가는 조선인들에 대해서는 서슴없이 총살을 하였다. 심지어 16살 애 어린 여자 아이로부터 유부녀들까지 끌어다가 방직공장 노동자로, 신발공장 노동자로 노예노동을 강요하였으며 일본군의 성 노리게로 삼다가 이용가치가 없다고 여기는 순간 무자비하게 살상을 했던 그 비극이 이 땅에서 다시는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이 모든 것들을 합리화 해주는 것이 바로 식민사관이다. 또한 그 식민사관을 내려 먹이기 위해서 학교교육이라는 허울 좋은 울타리 속에서 자라나는 조선인들을 철저하게 식민지 노예들로 세뇌시켰던 것이다. 식민사관을 극복하지 않고서는 배달겨레의 미래는 결코 보장이 될 수 없으며 오히려 배달겨레가 이 땅에서 사라지는 비극을 맞이할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한 문장 올리면서 이번 회를 마치려고 한다.
春來不似春(춘래불사춘)이라!!!
2014년 5월 13일
이 용 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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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하족(和夏族) : 단재 신채호 선생께서는 한족이라고도 하지 않으셨다. 현 중국 정확히는 진정한 가운데 나라가 아닌 중화인민공화국(中和人民共和國) 즉 화하족의 가운데라는 나라의 지배층을 이루는 세력을 가리켜 《화하족(和夏族)》 이라고 하셨다. 그 의미는 단군조선(檀君朝鮮-엄밀히 말 하면 박달임금이 계시는 아사달을 말 한다. 추후 분석 예정) 시기 삼조선≪三朝鮮 - 신한(진한이라고 하지만 신한이라고 해야함), 말한(마한이라고 하지만 말한이라고 해야함), 불한(변한이라고 하지만 불한이라고 해야함)≫ 으로 지방을 나누고 그 아래 다섯 방향으로 나누어 지방을 다스렸다고 분석을 하셨다. 다섯 방향은 북, 동, 남, 서, 중을 말 하는데 그 중에서 화하족은 단군조선시기 남쪽지역에 살았다고 한다. 남쪽은 불(火)이요 여름(夏)이니 그들은 단군의 지배를 받는 남쪽 지방에 거주를 하고 있다고 분석을 하였다. 따라서 그들 족속들을 이름 하여 화하족(和夏族) 이라고 하며 그들이 사는 지역은 단군조선의 가지인 지나《枝(혹은 支)那》라고 하였다. --- 본 문제는 추후 상세할 예정.
2. 우리나라에는 위대한 종교가 생겨나지 못하고 : 필자가 연구해온 바에 의하면 이 문장은 박장대소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세상에 근대 · 현대 배달겨레의 발자취(역사)와 문화분야에 시조라고 일컬어지는 대학자께서 이런 문장을 남기다니 솔직히 믿어지지가 않는다. 일개 평범한 사람이 위와 같은 언급을 했다면 이해를 할 수가 있다. 이 역시 이병도 역사학의 태생적 한계가 아닌가 한다.
단재 신채호 선생은 그의 저서 ≪조선상고문화사(朝鮮上古文化史)≫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을 하셨다. “조선(단군조선을 말함)의 삼신교(三神敎)는 태어나서 수천년 동안 세상을 풍미했다.”
필자가 그동안 연구해온 바에 의하면 배달겨레 및 이민족의 문화 및 종교에 있어서 삼신교 혹은 삼사상(三思想)은 오늘날까지도 강력한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온누리 종교 문화의 근원을 이루므로 그것이 우리의 삼신교 혹은 삼사상인지 조차도 모르고 있다. 우리 겨레의 오랜 믿음으로 된 천 · 지 · 인 즉 천신(天神), 지신(地神), 인신(人神)이 하나 되니 사람 하나하나가 하늘이라는 사상인 것이다. 따라서 필자는 단재 신채호 선생의 말씀에 전적으로 동감을 한다. 본 문제도 종교적인 문제로만 아니라 과학사상적으로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에 대해 분석을 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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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식민사학이 지배하는 한국고대사 (이희진)
거짓과 오만의 역사 (이희진. 동방미디어. 2001.8)
식민사관과 민족사관 (채수목. 담수. 2008년.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
식민사관의 형성과 그 논리 (박걸순. 순국. 2008.5.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수소 수 석연구원)
일제총독부 간행 역사교과서와 식민사관: 지배이데올로기와 국사교과서 (이명화. 역사 비 평15 / 역사비평사. 91.11.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연구위원)
식민사관의 성립배경과 본질 (이상주. 새 물결 / 자유 평론사 137. 88.4. 국사편찬위원 회위원)
또 다른 조선의 역사 (정용석. 동신출판사. 2009.1)
단군조선은 이렇게 말살됐다. (서희건. 조선일보사.1985)
풀뭇간의 쇠망치(이병도. 휘문출판사. 1972)
조선상고문화사(신채호. 비봉출판사. 2008)
고조선력사개관(북한사회과학원 허종호외. 도서출판 중심. 2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