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조/명
한 명 희 시인
│시인 프로필│
1965년 대구 출생
1992년 『시와시학』으로 등단
시 집�
『시집읽기』
『두 번 쓸쓸한 전화』
『내 몸 위로 용암이 흘러갔다』
수상�
시와시학상
<시인이 뽑은 대표작 5편>
황금동전이 쌓이는 의자 외 4편
한명희
괴테가 앉았던 이 의자 섹스피어가 앉았던 이 의자를 내어드리지요
카프카가 앉았고 도스토예프스키가 앉았던 이 의자도 내어드리겠습니다
이 의자는 나무로 만들어졌습니다 눈 좋은 목수가 동굴에서 해저에서 꿈 속에서 나무를 골라냈습니다 오르페우스의 후예들이 의자에
돋을새김했습니다 디오니소스의 자식들이 의자를 지켰습니다
당신들이 몰려오자 이 의자가 황금으로 물드는군요
좋습니다 내어드리지요 의자 위에 황금동전이 쌓이기 시작합니다 다시 많은 사람들이 몰려오고 있습니다 당신들이 달려오자 영문 모르는 사람들조차 뛰기 시작합니다
의자가 의자를 복제합니다 복제된 의자가 복제된 의자를 복제합니다 복제된 의자를 복제한 의자가 복제된 의자를 복제한 의자를 복제합니다 의자가 늘어납니다 황금동전이 그득그득 쌓입니다
좋습니다 앉으시지요 외롭고 높고 쓸쓸했던 이 의자를 보들레르가 앉았고 두보도 앉았고 백석도 앉았던 이 의자를 당신들께 내어드리겠습니다
시인들을 위한 동화
아주아주 옛날에는 사람들이 몸으로 글을 썼어요 고호가 귀를 잘라 그림을 그린 것처럼요 사마천이란 사람은 자기의 가장 소중한 부분을 잘라 글을 썼답니다
세월이 흘러흘러 사람들은 도구를 이용하게 되었어요 예세닌은 손목의 동맥을 절단했어요 그리고 거기서 나오는 피를 펜에 찍었답니다 그가 쓴 시들은 비린내가 났지요
또 시간이 흘러 글쟁이들은 작업실을 갖게 되었답니다 보들레르는 창녀이자 애인의 방에서 트라클은 여동생이자 애인의 방에서 포는 사촌 여동생이자 아내의 방에서 작업을 했어요 아주 격정적인 작업이었지요
그리고는 급격한 변화가 일어납니다 전쟁과 내전, 불신과 검문, 폭력과 폭식, 가상이변에 광주민중항쟁, 힌두쿠시 산맥 남쪽에서는 테러가 일어났고 애플은 아이패드를 내놓았지요 두바이유는 자주 백 달러에 육박했어요
요즘은 멀티태스킹이 대세입니다 사람들은 인터넷을 하면서 글을 써요 다큐멘터리를 보면서 영화를 보면서 글을 써요 짜깁기를 하면서 모자이크를 하면서 글을 써요 사람들이 점점 만능이 되어갑니다
경춘 고속도로
저 복장은 수도사의 것이 틀림없다
검은 후드로 얼굴을 반쯤 가리고
허리에는 띠를 둘렀다
옷자락이 땅에 끌리고 있다
저 사람은 수행 중임에 틀림없다
그렇지 않고서야 여기를 걷고 있을 리가 없다
느릿하나 일정한 보폭
그것은 수도사의 것이다
저 사람은 중세에서 왔음이 틀림없다
그렇지 않고서야 경적이 이렇게 울리는데
저토록 태연할 리가 없다
저렇게 모를 리가 없다
수도사의 침묵 정진은 오래가지 못할 것이다
누군가에 의해 강제 중단될 것이다
어쩌면 더 비참한 결말을 맞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수도사는 의연할 것이다
너무도 해맑은 얼굴로
그가 아주 오랫동안 수행해왔음을 증명할 것이다
화요일의 자살에 대한 상상
죽으려고 달려든 것은 아니었다
빛이 그리웠을 뿐
따스함이 그리웠을 뿐
피해갈 수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비켜가기 싫었을 뿐
물러서기 싫었을 뿐
한밤의 국도
상행선도 하행선도 텅 빈 곳
살려고 날아왔다
살려고 여기까지 왔다
외출
여자가 돌아왔다
은빛 원피스 그대로 여자가 돌아왔다
바다 속을 다녀왔나
여자에게서 물미역 냄새가 났다
구름 속을 다녀왔나
여자에게서 빗방울 냄새가 났다
나무 안을 다녀왔나
여자의 눈에서 연둣빛이 났다
여자는 돌아왔어도
여자의 말수는 돌아오지 않았다
여자는 돌아왔어도
여자의 미소는 돌아오지 않았다
꽉 다문 입술로 원피스의 얼룩을 가리고 있었다
<시인의 최근 신작시>
동병상련 외 4편
쑥 한 줌이 모자라, 마늘 한 쪽이 모자라
인간이 되지 못한 호랑이들에게
꼬리 하나가 모자라
인간이 되지 못한 여우들에게
일 점이 모자라
인간이 되지 못한 불합격들에게
만 원짜리 하나가 모자라
인간이 되지 못한 밥값들에게, 술값들에게
영 점 일 초가 모자라
인간이 되지 못한 올림픽 신기록들에게
표 하나가 모자라
인간이 되지 못한 선거들에게
퍼즐 한 조각이 모자라
인간이 되지 못한 수수께끼들에게
한 발자국이 모자라
인간이 되지 못한 선착순들에게
한 사람이 모자라
인간이 되지 못한 소돔에게, 고모라에게
한 사람이 모자라
인간이 되지 못한 단두대의 마리 앙뚜와네트에게도
나는 성공한 사람
나는 탈옥에 성공한 사람
감시의 눈을 피해 파놉티콘을
빠져나온 사람
막아서는 벽들을
온몸으로 뚫은 사람
고공절벽에서 뛰어내리고도
죽지 않은 사람
넘실대는 파도 속을 헤엄쳐
바다를 건넌 사람
마지막 관문
국경을 넘은 사람
유유히
자세히 뜯어보면
처절히
금을 그은 사람
수직선과 수평선을 딱 부러지게 그린 사람
이미 수많은 사람들이 깃발을 꼽았고
앞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깃발을 꼽을지라도
나는 이 깃발을 꼽고야만 사람
깃발 앞에 펼쳐진 것이
가시밭에 자갈밭뿐일지라도
나는 어쨌든
되돌아볼 수도 없는 사람
돌아갈 수도 없는 사람
밥상 앞에서의 묵상
따끈한 국밥이 한 상 차려져 있기에
마침 숟가락도 하나 남아있기에
무심코 먹은 밥은
남이 먹으려고 오래 벼르던 밥이었고
허기가 져서
먹어도 먹어도 배가 고파서
허겁지겁 집어 삼킨 밥은
남이 먹다 남긴 밥이었고
딱히 배가 고픈 것도 아닌데
꼭히 먹고 싶은 것도 아닌데
하도 권하기에
한입 먹어 본 밥은
설익은 밥이었고
몸에 좋다기에
이 맘 때면 먹어둬야 한다기에
쫄래쫄래 따라가 먹은 밥은
순 눈칫밥이었고
밥그릇 수가 늘어나면
요령도 늘어날 줄 알았으나
밥상머리 앉음새는 좀체 나아지지 않았고
삼시 세끼 먹는 밥에 대한 걱정은
떠날 날이 없고
원시시대
한 무리의 사람들이 작대기를 두드리며
해안으로 내려갔다
한 무리의 사람들이 작대기를 두드리며
돌멩이를 둘러쌌다
한 무리의 사람들이 작대기를 두드리며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이것은 불이다
이것은 불이다
이것은 불이다
이것은 불이다
한 무리의 사람들이 작대기를 두드리며
더 크게 노래했다
이것은 불이다
이것은 불이다
이것은 불이다
이것은 불이다
한 무리의 사람들이 작대기를 두드리며
불 속으로 뛰어들었다
한 무리의 사람들이 작대기를 두드리며
불꽃이 되었다
공주가 나오는 동화
교수니-임, 교수님이 어떻게
그러실 수가 있어요
교수님이 어떻게 제 꿈을
이렇게 짓밟아 버리실 수가 있어요
언니, 언니도 이제
평범한 여자의 길로 접어들었구나
친구야 다시 한번 생각해 봐
지금도 안 늦어
한번만 더 생각해 봐
시인이 뭐 그런 걸 해요
연애나 하면서 살지
아이는 안 낳을 거죠?
그렇게 한 결혼인데……
우리는 상관없다
너 하나만 잘 살면 된다
그렇게 한 결혼인데……
모든 동화는 여기서 끝이 난다
아무도 뒷얘기는 하지 않는다
한명희 시인의 체험적 시론___
시가 몸으로 오던 때
“사람은 변하니까요.”
들어본 그 어떤 말보다 강력한 설득이었다. 사람은 변하니까 그 사람도 달라졌을 거라는. 그래서 지금쯤은 마음의 빗장을 풀어도 될 거라는. 정말 그럴 것 같았다. 강산도 변하고 무쇠도 변하는데 사람인들 변하지 않겠는가. 아무리 사람은 쉽게 바뀌는 것이 아니라고는 하지만.
시 쓰는 것이 삶의 전부가 되기를 바랬었다. 정말 간절히. 시를 믿고 싶었고 시를 위해 순교하고 싶었다. 그러니까 시는 평생 추구하며 목숨 바쳐도 좋은 그 무엇이었다. 그 때의 나는 필록티티즈였다. 자주 화살을 꺼내어 닦았다. 그리고 기꺼이 상처와 고립을 받아들였다. 아니 그것을 즐겼다. 아니 그것을 영광으로 생각했다. 독사에게 물린 발꿈치쯤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몸에서 나는 악취. 그것도 싫지 않았다. 사람들의 불평과 외딴섬으로의 내동댕이쳐짐.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나에게는 활이 있지 않은가. 내 화살이 아니면 전쟁에서 승리할 수 없지 않은가. 내 이름은 필록티티즈가 아닌가.
상처가 시의 양식이고 불행이 시의 밑천이라고 굳게 믿던 시절이었다. 아니 상처가 부족한 나의 삶을, 불행이 부족한 나의 삶을 원망하기도 했다. 조금만 더 아팠으면 조금만 더 불행했으면 나의 시는 한결 윤택해지리라고 믿었다. 병든 자화상이 더 아름답게 보이던 시절이었다.
사람은 변하는가. 나 자신의 필요에 의해 나를 바꿀 수도 있는가. 사람은 변하는가. 외부 환경이 나로 하여금 어쩔 수 없이 나를 바꾸어 놓도록 하는가. 그게 아니라면 세상만사 그러하듯 자연스럽게, 자연스럽게 변해가는 것인가. 이러한 생각들은 드디어 여기에 닿는다. 변하는 것도 좋은 것인가. 변해서 둥글둥글해질 수만 있다면 그게 더 좋은 일인가. 나의 변함은 변절이 아니고 승화인가.
나의 상처가 부끄러워진 것도 아니고 나의 불행이 줄어든 것도 아닌데 나는 내 몸에서 나는 냄새가 싫어지기 시작했는가. 나는 여전히 외딴 섬에 고립되어 있는데, 사람들로부터 거부당하고 있는데, 뭍이 그리워지기 시작했는가. 시가 아니어도 될 것 같고, 시를 떠나서도 잘 살 수 있을 것 같은가. 시가 찾아오지 않아도 아무렇지도 않게 되었는가. 드디어 시를 버려도 좋을 것 같은가.
시가 몸으로 오던 때가 있었다. 나는 시가 내 몸에 들어올 무렵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미세한 진동. 잠시 몸을 움직이면 날아가 버릴 것 같은 그 파닥임. 따뜻한 기운. 그리고 환한 빛. 아, 그때 내 몸은 얼마나 아름다워졌던가.
그. 러. 나. 나는 필록티티즈가 쓴 시들을 모두 버리고 싶어졌다. 필록티티즈가 아닌 그 무엇으로 새로 태어나고 싶어졌다. 거기서 전혀 새로운 입을 가지고 전혀 새로운 노래를 하고 싶어졌다. 몸으로 오는 시가 아니라 머리로 오는 시, 입으로 오는 시, 가슴으로 오는 시를 따로따로 쓰고 싶어졌다.
이렇게 횡설수설하는 나는 여전히 신경증 환자일 뿐인가. 필록티티즈가 나아가는 곳. 거기는 또다른 섬일 뿐인가. 나는 여전히 상처를 지닌 채 냄새를 풍길 것인가. 다만 그 상처와 불행을 더 깊숙이 숨길 뿐인가.
사람은 정말 변하는 것인가. 변하지 않는 것인가. 시인은? 그리고 내 시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