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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비의 섬, 추자도.
제주올레 18-1코스 <추자도 올레> 다녀온 이야기.
첫째 날. 12월 17일.
해남에 들어서서 우선 점심을 먹다.
‘운저리초무침’이라는 메뉴를 크게 광고하고 있기에 운저리가 뭘까 궁금했으나, 물어보니 망둥어라는 대답이다. 갯벌에 기어 다니는 짱뚱어가 생각나서 먹고 싶은 마음이 일지는 않았다. 마침 재고가 떨어져 팔지 않는다고 하여 내심 안도.
우수영터미널에서 쾌속선을 타다.
비가 부실거리고 있어 출발부터 기분이 썩 뜨지는 않았으나 오후부터는 갤 거라는 예보만 믿기로 했다.
렌트한 차는 여러 기능이 있어 기분 좋았지만 여기까지다. 더 이상 차를 몰고 갈 수 없다.
추자도에서는 걸어 다닐 일만 있고, 추자도에서 돌아와서는 진안까지 도로 타고 올 일만 있기 때문이다.
아깝지만 어쩔 수 없다. 어차피 우리가 탈 배는 비교적 작은 쾌속선이지 자동차까지 실을 수 있는 대형 페리가 아니기도 했다.
기상악화로 예정시간표보다 일찍 출항한단다. 서둘러 달려오기를 잘했다.
(위 : 진도대교의 교각)
(울돌목의 빠른 여울)
<퀸스타 2호>는 물 위에 어느 정도 부상(浮上)해서 달리므로 빠르다. 그 대신 항행 중에는 갑판에 나가 서 있을 수 없는 것이 흠이다. 자칫 바다에 빠질 수 있기 때문이란다.
선실 내부가 썩 괜찮은 인테리어를 자랑하고 있을 뿐 아니라, 각자의 지정석까지 정해져 있어 앉은 채 두 시간 보내는 일이 크게 따분하지는 않다.
선실 안에 220볼트 콘센트도 몇 군데나 있어 전화기 충전을 하거나 노트북을 들여다보는 것도 가능하다.
하지만 승객은 우리를 포함하여 스무 명이 채 못 되는 듯 한산하기만 했다.
아침에 서둘러 나온 탓으로 처음 삼십 분 정도는 앉은 채 깜박 졸았다.
눈을 뜨고 창밖을 보니 이미 망망대해의 한가운데였다.
서해안과 남해안은 얕다고 누가 그랬는가.
고군산군도가 있는 서해도 그랬고 추자도를 향해 가는 이 남해도 그렇고, 망망하고 깊기만 하다.
연해(沿海)의 지저분한 쓰레기 수면에만 익숙하던 눈에 너무나 상쾌하게 비쳤다.
우수영 터미널을 떠나 70킬로미터 쯤, 항로의 좌우로 불쑥불쑥 솟은 크고 작은 바윗덩어리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제주도까지 가는 거리의 절반을 조금 넘는 정도의 위치에, 이런 암석의 돌기(突起)들이 모여 있는 것이다.
이름 하여 추자군도.
마흔두 개의 섬, 그 중에 사람이 사는 유인도가 네 군데, 나머지 대부분의 섬은 사람이 살지 못하는 돌덩어리란다.
(상추자도와 하추자도를 잇는 추자교.)
어찌 이런 대해의 한 가운데에 느닷없이 돌들이 솟아 있으며 거기에 사람이 살게 되었을까. 신비롭지 아니한가.
‘신비의 섬’이라는 이름은 바로 여기서 내가 붙였다.
쾌속선의 유리창은 부옇게 흐려 있어 사진으로는 잘 찍히지 않았으나 그래도 수평선 위에 여기저기 돋아있는 암괴(巖塊)들은 확실히 확인할 수 있다.
뱃길 왼쪽에 가로로 길게 선 꽤 큰 바위섬은 횡간도(橫干島)이리라.
워낙 바위가 험해 보여 사람이 살지 않는 섬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옆으로 지나가면서 보니 하얀 등대가 서 있었고, 중턱쯤의 높이에 마을이 있는 것이 보였다! 여기에도 사람이 살고 있는 것이다.
점점 흥미로워졌다.
추자도는 남동-북서 방향으로 두 개의 섬이 이웃해 있다.
윗섬(상추자도)과 아랫섬(하추자도)이 하나로 연결된 것은 1960년대.
부실하던 다리가 45톤 트럭의 통행으로 무너지자 1966년에 다시 추자교를 짓기 시작하여 무려 7년만인 1972년에야 완공했다.
다시 짓는 동안에는 두 섬 사람들이 어떻게 왕래했을까. 작은 배로 나루를 건너듯이 그렇게?
상추자도의 추자항에 도착. 쾌속선은 우리를 내려놓고 제주까지 간다.
배에서 내려서자마자 즉시 알 수 있는 깨끗한 바닷물.
(등대산)
아주 조그만 항구다.
어항이기도 하지만 어항 특유의 찝찔한 갯내음도 나지 않았고 오히려 매우 깔끔한 느낌의 여객항으로 변모해 있다.
항구에 면한 집들은 깔끔하게 수리되어 있기도 했다.
부두는 자그마한 원호를 그리며 아늑하게 자리 잡고 있는데, 항만 안의 모든 집과 시설들이 부둣가 길쪽을 바라보고 섰다.
예약해둔 숙소 건물도 지척에 바라다 보인다.
정면을 노란 페인트로 삼각형을 디자인한, 아래층은 카페 겸 족욕탕(足浴湯), 위층이 게스트하우스인 곳이다. 제주올레가 이 섬에 18-1코스를 만들면서 제휴한 숙박 겸 안내소인 듯. 정면 한 구석에 조그맣게 <제주올레 족은 안내소>라 쓴 판이 붙어 있다.
‘족은’이라니? ‘은’ 즉 ‘작은’의 제주 말이다.('ㅈ' 밑에 '아래아'를 쓰고 'ㄱ'받침을 붙였더니 이 까페에서는 글자가 깨지는군요.)
아, 추자도는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에 영속(領屬)된 하나의 면(面)이다.
제주올레는 제주도 본섬에 국한하지 않고 우도·가파도 등 부속섬들에까지 이른바 서브트레일(sub trails)들을 개설했다. 제주올레길의 연장이 이곳 추자도에도 18-1코스라는 이름으로 뚫린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내가 ‘신비의 섬’이라 부르는 이유는 또 있다.
주민들의 말씨다.
전라남도 억양이 아닌 듯한 것이 그 첫째이고, 가끔 제주도 방언이 섞이는 것도 그랬다.
한동안 전남 영암군에 소속되어 있었다고는 하지만 떨어진 거리로 보아 주민들의 언어습관에 영향을 미치지는 못 했을 것이고, 근세에 제주도로 소속이 바뀌었다 하여 말씨까지 따라서 바뀔 리 없건마는.
‘작은작제’ 거리에서 만난 한 아주머니의 말씨로 제주도에서 오신 분인지 물었는데 아니라는 대답이고, 한 식당의 주인 아주머니도 ‘~함수광?’처럼 말하는 것을 보고 역시 제주도 출신인지 물었으나 아니라고 했다.
‘바다[海]’를 ‘바당’이라고 하는 것도 제주를 닮았다.
그렇다면?
얼치기 언어문화학자인 나는 이 수수께끼를 풀어야 한다.
숙소에 짐을 풀다.
우리 일행 말고 다른 손님은 없단다. 게스트하우스에서 낯선 숙박객을 만나면 여러 행동이 조심스러운데, 잘 됐다.
예보와는 달리 저녁 늦게까지 날씨는 신통찮은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맹렬한 바람을 뚫고 숙소 가까운 곳을 잠깐 걸어 다녀 보았다.
최영(崔瑩)장군의 사당은 대서리(추자항이 있는, ‘작은작제’ 마을)에서 꽤 중요한 곳이다.
추자초등학교 운동장 둘레를 빙 돌아 높은 언덕 위로 올라가서 있다.
언덕에 오르면서부터 추자항 전체가 내려다보이고, 항구 건너편의 산과 그 꼭대기의 등대탑까지 한 눈에 조망되는 곳.
사당을 거쳐 등성이 뒤로 돌아간 곳은 높은 바위절벽 위였다.
소나무 외에도 동백나무·후박나무 등 남쪽 섬지방의 특징적인 나무의 숲이 아주 볼 만 하다.
바람이 강하여 더 다니지 못하고 마을 뒤를 빙 돌아 도로 ‘작지’거리로 내려왔다.
추자항에 면한 이 거리를 작제(‘제’는 ‘지’의 와음)라 부르는데, 이 ‘작지’도 수수께끼의 단어의 하나다. 옛 지도에도 대작지(大作只)로 실려 있다는 신비의 단어.
궁금하여 ‘작제거리’를 지나는 한 주민에게 물었으나 그 역시 잘 모르겠단다.
일행 중 한 사람이 “작지라는 이름이 붙은 곳의 공통점은 ‘자갈해안’이라”는, 어디서 들었다는 이야기를 해 준다.
흠… 그렇다면 이 항구가 예전에는 자갈해안이었다는 말인가?
다소 의심쩍어 하면서도 그럴듯하게 들렸다. 부산의 ‘자갈치’와도 소리가 닮았다. 작지-자갈치. 매우 그럴듯하다. 다른 지방에 갈 때 확인해봐야겠다.
작은작제거리, 공식적으로는 대서리(大西里).
최근에 여러 사업으로 깔끔하게 정리되었다는 느낌이 강하다.
역시 제주올레의 지역활성화 활동의 덕분일까, <추자탐험>이라는 관광 프로그램도 있고, 탐방객 안내센터도 있다.
부둣가에서는 바닷물에 낚시를 담그고 고기를 잡는 관광객이 심심찮게 눈에 띈다.
잠깐 옆에서 구경하는 동안에도 펄펄 뛰는 고등어며 삼치를 연방 낚아 올리는 광경이 신기하기도 하고 재미나기도 하다.
물고기가 부두 가까이까지 들어온다는 것은 이 섬이 대해(大海) 한 가운데에 있어 물이 깊다는 증거다. 물이 또한 깨끗하니 이 고기들은 바로 구워서 먹어도 되겠다.
무공해와 자연, 그리고 생명력이라는 단어들이 또렷이 떠올랐다.
저녁 먹은 ‘오동여식당’에서 잠시 TV를 보니 마침 추포섬에 산다는 해녀 모녀의 이야기가 방영되고 있었다.
이것도 재미있는 우연이다. 우리가 오는 날에 추자도 사람 이야기가 방영되다니.
추포도는 추자군도의 네 번째로 큰 유인도다.
딸 해녀는 수영선수로 꽤 이름을 날린 사람이었단다.
둘쨋날. 12월 18일.
아침으로 이곳 특산인 굴비구이 정식을 먹다.
씨알이 굵지는 않았으나 본고장 굴비는 맛이 달랐다. 게다가, 뼈까지 씹어 먹을 수 있을 정도로 내 입맛에 맞게 바싹 구워내 주었다.
아침에 굴비구이를 먹는 것도 참으로 오랜만의 일이고, 한 끼에 굴비 두 마리를 먹는 것도 흔치 않은 일이었다.
녹색의 국이 함께 나왔는데 엉겅퀴로 끓인 국이라 한다.
먹었으니 이제 밥값을 해야 한다.
<제주올레 18-1코스, 추자도올레> 걷기를 시작.
어제 저녁에 잠깐 보고 지나쳤던 초등학교와 최영장군 사당이 시작점.
추자초등학교는 예전에는 많은 아이들이 다녔던 듯.
건물이 매우 크고 알록달록 예쁘게 꾸며져 있다.
이 좁은 섬에서 이렇게 넓은 운동장도 이채롭다.
한 옆에는 교사들의 사택인 듯한 건물이 서 있는데, 깔끔하고 꽤 현대적이다. 사택 앞에 선 큰 나무 두 그루는 비자나무.
이 비자나무도 제주도에서나 볼 수 있는 나무인 줄 알았던 것이, 이 섬에서도 만난다.
자연환경이나 생태계도 제주도와 남해안의 중간 쯤 되는 섬이라는 느낌을 또 가지게 된다.
최영의 사당은…
많은 무속인들이 그를 신(神)으로 모시고 있다, 특히 해안이나 섬지방의 ‘당집’에서.
그의 무인(武人)으로서의 강력한 카리스마와 남다른 충절이 무속인들로 하여 수호신으로 영접하고 싶은 요인이었을 것.
그러므로, 해난 사고를 막아주는 영적인 신체(神體)로 모셔지는 것은 차라리 쉽게 이해하겠으나, 묘하게도 정체성이 모호한 안내문은 고개를 갸웃거리게 한다.
‘미신의 대상이 아니라 한 영웅의 시혜적인 행위를 기리는 장소’로 포장하려는 의도는 어떻게 보아도 자연스럽지 못했다.
새로 지은 듯이 보이는 사당과 돌계단 등을 어색하게 느끼면서 뒤로 돌아가 보니 전부터 있던 표지석이 숨어있는데, 일렀으되, ‘神廟禁地碑(신묘금지비)’.
‘신의 사당이 있으므로 잡인을 금하는 곳’이라는 뜻이겠다.
비석은 작고 돌은 마모되어 가고 있었으며 깨져 나간 글자가 많아 기록을 해독하기 어렵다. 다만, 새로 세운 안내판의 내용과는 꽤 다름을 짐작할 수 있을 뿐.
어쨌든 원래의 이 사당은 최영을 무속적 신으로서 모시던 곳임은 분명했다.
제주시가 새로 세운 두 장의 안내판(내용이 서로 약간 다르기도 하다)에 따르면, “원(元)에 반역한 자들을 진압하기 위하여 최영장군이 3백여 척의 전함과 2만여 명의 고려정부군을 이끌고 제주로 향하다가 풍랑을 만나 추자도에 기착하였고, 섬 주민들에게 그물 짜는 법과 고기 잡는 법을 가르치는 등 많은 혜택을 베풀었다"는 것이다.
그러면 장군이 조난하여 오기 전까지는 이 섬의 사람들은 고기 잡는 법도 몰랐을까?
또, 왕명으로 제주도에 출정하여 가고 있던 부대가 섬에 기착해서 그런 혜택이나 베풀고 있을 만큼 한가로웠을까?
‘미신을 탈피’하고 싶은 심정은 이해하지만 정사(正史)에 없는 이야기로 오히려 이상한 스토리를 만든 것은 ‘반댈세’다.
어제에 이어 바람이 몹시 센 날이다.
사당 뒤쪽 절벽해안의 능선은 제대로 서 있기조차 힘들 정도로 강한 바람이 불어와 위험하기까지 하다. 대해 가운데의 섬지방답다.
북쪽 바다의 광활함과 점점이 떠있는 돌섬들을 잠시 구경한 후, 오래 서 있지 못하고 발걸음을 옮긴다. 제주올레의 특징적인 화살표 안내표지를 따라.
이 18-1코스는 윗섬을 왼쪽으로 한 바퀴 돈 다음 추자교를 건너 아랫섬으로 이동하여 또 한 바퀴 돌고 다시 다리를 건너 출발지점인 작은작제 거리로 돌아오는 형태다.
'걸궁'과 '헌식'을 지내는 거북바위 앞을 지난다. 그리 넓은 공간이 아니지만 바다를 향해 제단이 차려져 있어, 섣달그믐에 마을 사람들이 모여 공동체 의식을 지내는 곳이다. 이 작은 모퉁이를 ‘기꺼산’이라 부른단다.
걸궁은 밥 굶는 이를 위한 구휼(救恤)활동, 헌식(獻食)은 바다에서 죽은 사람을 위한 위령제에 해당한다. 요즘은 추자항에 모여 종이에 밥을 싸서 바다에 던지는 것으로 변모했다 한다.
이어지는 능선길은 로맨틱하다. 그러나 거의 돌로 이루어진 섬이어서 발밑은 온통 암반이며 부서진 돌들로 조심해야 한다.
이윽고 나타나는 ‘봉골레(봉글레·봉굴레 등 들쭉날쭉하다)산’ 정상.
중국인을 위한 안내판에는 봉두산(风头山·鳳頭山)이라 표기되어 있지만 이는 ‘봉의 머리’와는 관계없고 ‘봉수대가 있던 산’임이 분명하다.
역시 현장에는 넓은 암반이 펼쳐져 있고 사방이 환히 내려다보이고 있어 봉수대의 입지로 완벽한 환경이 갖추어져 있다.
지금은 산불감시초소가 있다.
(주홍색 : 직구도. 이 뒤로 넘어가는 낙조가 "직구낙조'라 하여 추자팔경의 하나라고.
연두색 : 다무래미. 조류에 따라 땅이 드러나서 걸어서 건너갈 수 있단다.)
봉골레산을 내려가면 영흥리다.
마을로 가는 내리막 능선길에도 암반은 여전히 깔려있는데 이를 적당히 쪼아 계단처럼 만든 것은 누구일까. 옛날 옛적 이곳 봉수대를 관리하는 병사가 자신들의 편의를 위해 이렇게 했을까.
추자항의 마을 ‘작은작제’에서는 돌담을 보기 힘들었으나 이 마을에서는 드디어 돌담을 높이 쌓은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정겨운 광경을 만나게 된다.
대지가 좁은 탓에 대체로 마당은 거의 없고, 돌담은 매우 높아서 집의 처마 끝이 잘 보이지 않을 정도다. 바람이 강한 섬동네 특유의 지혜라 할까.
제주도의 돌담은 화산석으로 쌓아 숭숭 뚫린 구멍으로 바람이 통과할 수 있지만, 이곳의 돌은 벽돌처럼 네모지게 깨어지는 덕분에 담을 직각으로 빈틈없이 깔끔하게 쌓을 수 있을 뿐 아니라 3미터에 가까운 높이로 올릴 수도 있는 것이 제주도와 다르다면 다르다.
더욱 재미있는 것은, 바람이 통과하는 공간을 최소화하기 위하여 담을 옹성(甕城)처럼 지어 꼬불꼬불 돌아 드나들게 되어 있다.
집들도 창문을 아주 작게만 뚫고, 본래의 초가 건물 앞을 시멘트벽으로 한 번 더 막은 형태로서, 모든 지혜가 강한 바람의 공격을 막기 위해 동원되었다.
때로는 집주인마저도 통행의 불편을 감수하고서라도 바람을 막아야 했던 자연과의 한판 승부였던 것이다.
과연 담이 쌓아진 안쪽은 완벽하리만큼 바람이 없고, 밝은 햇살을 가득 안아 아늑하고 따뜻하다. 아침부터 강한 바람에 시달린 여행자가 잠시 한숨을 돌릴 수 있는 시간.
추자도의 마을에는 물이 귀했을 것이다. 마을마다 지하수를 퍼 올리는 커다란 우물이 서너 개씩이나 있다. 지금은 물론 다른 방법으로 상수(上水)를 공급하고 있지만, 전통의 우물들도 여전히 매우 잘 관리되고 있는 것이 특징적이다. 최소한 빨래나 허드렛물로는 충분히 쓸 수 있겠다.
육지의 우물보다 훨씬 크고, 비가림 지붕까지 씌워져 있다.
‘가운데 샘’, 그렇게 이름을 붙인 것도 재미있다.
개중에는 ‘일본우물’도 있다. 일제강점기에 판 우물이어서 그렇게 부른다는데 ‘일번(1番)’ 우물이 잘못 알려진 탓도 있을지 모르겠다.
후포라고 부르는 이곳은 추자도의 옛 이름 후풍(候風)에서 이어진 이름일 것으로 추측되었다. 이 마을도 작은 어항으로서 최근에 관광객 시설을 짓기 시작했다.
윗섬의 서쪽 해안에 해당하는데, 특징적인 ‘나바론 절벽’이라 부르는 하늘길이 이어진다.
쳐다보기만 해도 아찔한 절벽이 높이 솟아 있어 여행자를 지레 위협한다.
얼마나 무시무시했으면 2차대전 때의 알제리 해안에 독일군이 설치했던 무적의 포대(砲隊) 진지 나바론의 이름을 붙였을까.
강한 바람 때문에 아무래도 안전을 생각해야겠기에 이 ‘나바론 하늘길’을 걷는 것은 아쉽지만 포기했다. 일행 중에는 어린이가 섞여 있기도 했다.
정해진 코스를 잠깐 이탈하여 영흥리를 통과하면서 마을 구경을 좀 하고 이어 등대산으로 올라가기로 하였다.
좁디좁은 골목길도, 다닥다닥 붙은 마당 없는 집들도 모두 강한 바람에서 살아남기 위한 방법이었다.
그 골목길에도 빈집은 얼마든지 있었고, 허물어져 가는 마을을 살리기 위한 몸부림도 여러 군데에 보였다. 모자이크 타일을 붙인 벽화거리도 그 하나다.
등대산으로 올라가는 길은 호젓한 조릿대 숲길.
흙길이 오랜만에 따뜻하고 폭신하게 발바닥을 위무한다.
능선에 오르면 멀리 그리고 넓게 펼쳐진 짙푸른 바다.
옮기는 걸음 따라 조금씩 각도를 달리 하면서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신기한 돌섬들.
삼각형 돛으로도 보이고 상어의 꼬리처럼도 보이는 무인도와, 하얀 등대 하나만 달랑 서 있는 또 다른 돌바탕… 그냥 신비롭기만 하다.
등대산 정상에는 거대한 등대탑이 서 있다.
어제 저녁에 보았던, 흰 LED 불빛을 사방으로 내리 쏘고 있던 바로 그 등대다. 관리하는 상주직원은 없는 것 같았고, 등대탑 안으로 들어갈 수도 없었다. 마당에 서있는 기념물에 다음과 같은 설명이 있다.
“거대 건축물을 많이 짓기로 유명했던 고대 그리스의 프톨레마이오스 2세의 명령으로 지은 파로스섬의 등대… 높이 1백 미터가 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이 등대 건물은 이집트 북부 알렉산드리아 항구 앞에 서 있었다. 세계의 7대 불가사의 중 하나로 꼽히는 이 거대 건축물은 몇 차례의 지진으로 무너지기 전까지 지중해를 건너 그리스 본토에까지 그 불빛이 보였다.”
이 등대산의 등대가 그 건축물을 흉내 내어 지었다는 뜻인지 확실치 않은 이 안내문과 함께, ‘파로스의 등대’의 원래 모습을 상상하여 복원한 미니어쳐가 세워져 있다.
이 꼭대기에서도 사방이 잘 내려다보이고 우리가 하룻밤을 묵었던 작제거리와 추자항 전체가 아름답게 조망되고 있었다.
이미 태양은 머리 위 높이 떠올라 강한 바람을 뚫고 일행의 두터운 겉옷들을 벗겨내고 있다. 하늘은 눈이 시리도록 푸르고 바닷물 또한 그렇다.
(추자교)
이제 추자교를 향해 걷는다. 이 다리를 건너면 아랫섬으로 들어가게 된다.
윗섬은 면적으로는 아랫섬의 삼분의일이나 될까 한 작은 섬이지만 추자도 아래윗섬 전체를 통틀어 부(富)가 집중되어 있는 듯. 면사무소도 윗섬에 있고 관광안내소도 윗섬에 있다.
어제 저녁 식사를 한 <오동여식당>의 주방 아저씨 말로는, 한 때 추자면 전체 인구가 6천8백 명이나 되던 시절도 있었는데 그 때는 등대산 구경 다니는 사람이 하도 많아서 산 전체에 사람이 허옇게 뒤덮였었다고.
‘바랑케 쉼터’.
‘바랑케’도 불가사의한 단어에 속하지만 ‘벼랑’과 관계있는 말일 것으로 추측한다.
이 높은 곳에서는 윗섬과 아랫섬 사이의 좁은 해협(?)과 추자교와 아랫섬 전체가 다 보인다. 뿐 아니라 발 디디고 선 자리 좌우(동서)의 바다도 보인다.
이런 탁 트인 전망 때문에 바다 가운데의 섬을 여행하려는 것일 것이다.
추자교를 건너기 직전에 발전소가 있다. 이 전력으로 아래-윗섬 전체에 전기를 공급하는 모양이다. 다리를 따라 굵은 파이프가 달리고 있는데 파이프 겉면이 새카만 그을음으로 뒤덮였다. 석유화력발전에서 생기는 ‘미세먼지’일까?
발전소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추자군도에서 두 번째로 큰 섬인 횡간도에도 마을이 있고, 거기에도 따로 발전소를 지었었단다. 작은작제 거리에 전시된 근현대 사진들에서 알게 되었다.
(철거한 옛 추자교의 머릿돌. '추자교'라 한글로 쓴 글씨가 아직 남아있다.)
추자교 다리는 한 번 무너졌던 것을 다시 지은 것이다. 무너진 옛 다리는 교두석만 남기고 아예 모두 철거했다.
다리의 이쪽과 저쪽에 넓게 펼쳐진 어마어마한 갯바위 위에서는 낚시를 즐기는 사람이 많다. 이 일대가 추자 사람들이 권하는 낚시 포스트이기도 하다.
그리 길지 않은 다리를 건너면 드디어 아랫섬에 도착.
갑자기 긴 산길이 시작된다.
그런데 이 흙길이 아주 로맨틱하기 짝이 없다. 초입에서는 잠깐 오르막이지만 그 다음부터는 평평하고 나지막한 능선을 따라 고즈넉한 숲길이 이어지는 것이다.
말을 삼가고, 이국적인 수종이 빽빽한 산길을 따라 잠시 걷는다.
마삭줄·아이비 따위 기는 식물이 덮은 위로 동백·비자나무와 키 큰 소나무들이 섞인, 또 한 번 ‘절반의 제주도’라는 느낌을 즐긴다.
이윽고 약간의 아쉬움을 남기며 묵리 고갯마루에 닿는다.
걸어오는 도중에 상수원 보호구역이 보였는데 왼쪽 아래로는 직사각형으로 넓은 담수장이 있다. 바닷물을 퍼올려 담수화하는 공정이 여기서 이루어지고 있는 듯.
묵리고개에서는 돈대산으로 오르는 길로도 분기된다.
‘돈대’란 번덕·버덩, 즉 ‘높은 곳의 넓은 터’를 말한다 - 고 생각했으나
중국인을 위한 한자표기는 ‘炖坮’로 되어 있다. 그렇다면 이 산 봉우리에도 등대나 봉화대가 있었던 것일까?
(이 사진은 일정 마치고 예초리에서 버스를 타고 돌아올 때 찍은 것.)
돈대산 가는 길을 버리고 오른쪽으로 꺾어 묵리 마을로 내려간다.
이곳도 마찬가지로 좁은 골목에 다닥다닥 붙은 작은 집들과, 대서리보다 더 잘 쌓인 돌담.
하지만 윗섬의 마을들에 비해 조금은 넓은 마당을 누리고 있다고 봐야 할까.
작은 묵리마을을 지나면 신양2리·신양1리로 이어진다.
바다의 시야를 가로막으며 옆으로 길게 선 것은 필요 이상으로 높은 방파제다.
감각적으로는 거의 제주도 서귀포의 강정리 해군 기지를 방불케 하여 답답해 보이는데, 긴 ‘작제’를 보호하려면 어쩔 수 없는 일이었겠다.
‘작제’는 역시 바닷가를 뜻하는 옛 전남 해안지방 말이었음을 알게 된다.
윗섬의 추자항을 ‘작은작제’라 불렀다면 이곳 아랫섬의 신양항이 ‘큰작제[大作只]’였을 것. 그래서 추자십경에도 <장작평사(長作平沙, 큰작제의 모래밭)>가 들어있다. 지금은 모래밭이라기보다 부두로서 접안(接岸)시설이 들어서 있지만.
신양리 항구는 윗섬의 추자항보다 더 길고 넓다. 하지만 추자항이 물류와 여객운송의 중심항으로 신양항보다 더 확고한 듯. 이 큰 항구가 한산하기만 하다.
('바람이 머무는 섬, 추자도-바람 곳'.
난간에는 조기들이 바람을 타고 올라가는 조형물.)
('후풍 갤러리 까페'. 아직 공사중. 벽 왼쪽에는 추자십경을 새긴 글씨.)
(점심 먹은 '봉이네' 식당 뒤 편 솔숲.)
아랫섬은 면적은 넓지만 여행자들에게는 불편할 정도로 서비스 업소가 거의 없다시피 하다. 민박집도, 음식점도, 편의점이나 카페…등도 거의 윗섬에 집중되어 있는 것이 ‘도농불균형’의 양상은 여기서도 예외 없는 듯. 면사무소가 윗섬 대서리에 있어서 그럴까?
점심은 신양리의 <봉이네>라는 식당에서 육개장으로 먹기로 했다.
섬 동네에 와서 육개장이라니. 하지만 이미 두 끼를 연달아 해물로 먹은 산골사람들의 입맛은 벌써 육지음식을 찾는다.
정 국장, 열심히 지도를 뒤져가며 길을 찾는 한 편으로 일행이 밥 먹을 곳을 알아내고 예약하는 등의 일도 해야 하니 얼마나 바쁜지.
물질하는 할머니들이 오전 일을 끝냈는지 어구와 수확을 담은 작은 수레를 끌고 항구에 나타났다. 십여 명.
검은 해녀복으로 온몸을 감쌌지만 큰 키와 쭉 뻗은 체격 등이 매우 건강해 보인다.
선두의 나이 든 해녀에게 사진을 찍어도 좋겠느냐고 물으니 “얼굴만 빼고…”라 답하면서 바삐 지나간다. 겨우 뒷모습을 담을 수 있었다.
신양항 선착장 한 옆에 있는 ‘해녀휴게소’에서 점심도 먹을 겸 잠시 쉴 모양이다.
우리도 점심 먹고,
다음 행선지로 걸음을 옮긴다.
여기서 한 중대한 결정을 내리게 되었다.
일행 중 발이 아프다고 호소하는 여성 두 명을 배려하여 18-1코스 전체를 걷지 않고 아랫섬의 동쪽 끝 예초리까지만 걷기로 한 것. 황경한이라는 신유박해 때의 순교자 무덤을 거쳐 ‘예초 기정길’을 걷고 예초리에서 버스를 타고 숙소로 귀환하기로.
사실은 나도 조금씩 꾀가 나기 시작하던 무렵이다. 강한 바람에 지지 않으려고 용을 쓴 탓인지, 점심 후의 식곤증인지, 온몸에 힘이 들어가서 어깨까지 결려오는 상태인지라 이 결정이 내심 반갑다.
신양리 마을을 빠져나가 아스팔트 도로를 잠깐 걷고 다시 흙길을 밟게 된다.
밭 가운데 야자수가 몇 그루 서 있는데 제주도만큼 싱싱하게 자랄 수 있는 환경은 아닌 듯, 안쓰러운 건강상태다.
이 흙길은 이 섬에 한 줌이나 될까 한 얼마 안 되는 밭을 지나가는 길.
도중에 또 우물을 만났다. 시멘트로 틀을 친 우물인데 1988년에 만들었다고 새겨져 있다. 밭작물에 줄 농업용수인 게다.
(성지로 조성중인 황경한 묘.)
황경한은 정약용의 조카딸 되는 여성 정난주와 황씨 남성 사이에 난 아들이다.
두 돌을 맞기도 전에, 천주교도로서 박해를 받아 어느 집의 노비로 전락한 어머니 정난주의 품을 벗어나 이 섬의 어느 집에 맡겨졌다고 한다.
황경한이 장성한 후 출생의 사연을 듣고 그로부터 천주교도가 되었고, 끝내 순교하였다는 이야기가 서려 있다.
그의 묘가 이 언덕 꼭대기에 있고 최근에 이곳을 성지로 꾸미는 작업이 시작되었다.
‘황경한이 어머니를 그리워하여 흘린 눈물’이라는 샘이 묘지 바로 아래에 있기도 하다.
이 언저리는 아랫섬의 동쪽 끝 산 위에 해당하여 일출을 바라보기에 가장 좋은 장소라고.
‘모진이해수욕장’이라 이름 붙은 곳, 몽돌해안이다.
‘모진이’라는 이름도 신비롭다.
‘모난 돌’이 깔렸을 것 같은 이름이지만 동글동글하게 깎인 돌들로 가득하다.
바닷물에 씻기기를 수십억 년을 되풀이한 끝에 만들어졌을 돌들이, 아직도 모자라는지 밀려오는 바닷물에 잠겼다가 되 나가는 물살에 ‘자그르르, 자그르르…’ 구르는 소리를 내며 여전히 쓸리고 씻기고 닦이고 깎이어 나가고 있었다.
거제도 몽돌해안과는 달리 돌이 검은 색은 아니었다.
닦을 수(修).
“등에 핏자국이 설 정도로 때려 가르친다”는 뜻을 가진 상형문자다. 변하여, “도덕과 품행을 높이기 위하여 단련한다”는 뜻으로 쓰인다.
겉에 묻은 때를 닦아(깎아)내면 빛나는 속이 드러나 보이기 때문이다.
이 돌들은 바닷물에 그 거죽을 심하게 깎인 세월로 하여 이렇게 동글동글하고 예쁘게 갈려 만들어졌다.
사람보다 훨씬 일찍 세상에 나서 닦기[修]를 시작했고, 인류가 사라진 후에도 이 돌들은 수행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선배 돌님’들을 주워 바닷물에 물수제비를 몇 개 뜬 후 일어섰다.
이제 예초리로 향한다.
다소 가파른 숲길을 따라 오르고 다시 더욱 가파른 시멘트 포장도로를 오르는데, 이 언덕은 양지바른 곳이어선지 민묘가 많이 들어서 있다.
매우 소박한 무덤들이 많고, 가장 소박한 묘비는 바로 이 사람의 묘다.
이제부터는 다소 아슬아슬하고 전망 좋은 능선길의 연속이다. 바다 위에 흩어진 여러 개의 돌섬들이 가장 많이 보이는 위치이기도 하다.
신대산전망대에서는 줄잡아 십여 개의 여(礜·礖, 돌섬)가 한 눈에 들어온다.
제주관광공사의 <추자탐험>이 발행한 안내도에는 추자군도 마흔두 개의 섬이 모두 기록되어 있는데 참 ‘여’가 많기도 하다.
‘오동여’는 섬 도착 첫 날 저녁을 먹었던 식당 이름이기도 한데 이곳 아랫섬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다.
왼쪽 가장 가까이에 ‘뫼 山’자를 닮은 큰 섬은 ‘검은가리’. ‘가리’는 ‘칼’의 고어다. 요즘의 지도에는 흑검도라고 표기되어 있다. 바위섬이지만 식물이 꽤 자라고 있어서 검게 보인 탓에 불린 이름인 듯.
‘큰보름여·작은보름여’(‘보름’은 ‘바람望’의 뜻)’, ‘쇠머리’는 우두도(牛頭島), ‘쇠코’, ‘큰덜섬·작은덜섬’, ‘구멍섬’, ‘상섬’, ‘두령여’, ‘납덕이’, ‘큰미역섬·작은미역섬’, ‘시루여’, ‘개린여’…
대해 가운데에 난데없이 솟아오른 돌덩이들. 정말 신기하지 않은가.
어제 쾌속선이 윗섬에 들어올 때도 직선으로 부두를 향하지 않고 둥글게 곡선을 그리며 들어왔던 것은 아마도 숨어있을 암초를 피하려고 그랬는지?
‘예초리 기정길’로 들어선다.
‘기정’은 ‘절벽·벼랑’의 전남 해안지방 말이란다. 부산의 기장군(機張郡)의 이름도 혹시 이 ‘기정(또는 기장)’의 이두식 표기가 아닐까?
“이 길은 제주올레가 특별히 발굴해낸 벼랑 위 숲길”이라는 안내가 붙어 있다.
바닷가 특유의, 한 방향으로 휜 나무들의 숲이 이어지는 좁은 길.
여러 수종이 섞인 원시림이지만 후박과 비자나무의 숲은 볼만했다. 제주도 명물인 비자나무가 이 하(下)추자도의 벼랑 위에서 강풍을 견디며 자생하고 있는 것. 과연 제주올레가 ‘식생환경의 동질성’을 주장하며 이 코스를 발굴해낼 만했다.
벼랑길이로되 숲에 바람이 가려서 비교적 아늑하고 걷기 편한 짧은 길.
가끔 시야가 터진 곳으로 내려다보이는 벼랑의 암벽이 무시무시한데, 그런 중에도 강풍과 높은 파도를 마주하고 바위 위에 서서 낚시를 하고 있는 사람들은 참 용기가 대단하다.
저런 험한 파도를 뚫고 헤엄치는 물고기여야 비로소 맛이 있다는 걸까.
역시 아쉬움 남기고 오늘 일정의 종착점 예초리의 시가지, 선창가로 내려섰다.
신양리나 마찬가지로 이 동네도 한산하기만 할 뿐, 바람을 피해 커피숍에라도 들어가 앉고 싶었으나 그럴 만한 가게라고는 없다.
유리로 칸막이를 둘러친 버스정류소도 지면과 벽 사이의 틈을 나무조각으로 막아 놓은 것을 보면, 이 동네 사람들에게도 이 바람은 찬 모양이다.
그래도 한 시간에 한 대씩 버스는 잘 다닌다.
40분 정도 기다려서 버스가 도착.
요금은 1천원인데, “경로우대는 없느냐”니까 “제주시민이라면 우대해드립니다.”
그렇지, 이곳은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추자면이었던 것.
버스가 달리는 길은 아스팔트 도로를 달리는 경로여서 걸으면서 보지 못한 곳도 경유하므로 볼 곳은 다 본 셈이 되었다. 하지만 정 국장이 몇 번 입에 올린 <예초 에코하우스>라는 산길 옆 펜션은 구경해보지도 못하고 통과.
예초리를 벗어나기 직전에 스무 명이 넘어 보이는 중학생들을 태운다.
하굣길의 아이들은 모두 요즘 유행인 검정색 ‘패딩 코트’를 입고 있는 것이, 도무지 80 킬로미터나 떨어진 낙도의 풍경 같지 않다. TV와 인터넷과 스마트폰의 승리?
“우리 때는 말이야”로 이야기를 시작하는 사람들은 모두 ‘꼰대’라지만 그 ‘꼰대 티’를 잠시 내자면,
우리들 젊은 시절은 앞뒤좌우아래위 모두 꽉 막혀 있던 시절이었다.
미국에서 무슨 노래가 유행하는지 몇 달이나 지나서야 겨우, 그것도 AFKN(주한미군 전용 방송)이나 ‘불후의 명DJ’ 김동욱씨가 개인적 네트워크로 입수한 음원을 통해 얻어들을 수 있었다.
‘실시간 동영상’에, 최첨단 유행정보라니, 꿈도 못 꿀 일이었다.
70년대 사진을 보라, 내 말이 거짓인가.
초가집에, 남자는 북한군 같은 상고머리에, 여자는 쪽진 머리에 흰 저고리 검정 치마, 손으로 쓴 촌티풀풀 현수막, 형편없는 ‘뻐~스’…
숙소로 돌아오니 살 것 같다. 그만큼 바닷바람은 얼얼했던 것.
저녁 식사를 하는 식당에서 주인장이 알려준다. 제주에서 출발하여 해남 가는 배는 오늘 강풍으로 결항했고, 내일도 배가 뜰지 어떨지 반반이란다. 내일 아침 열 시가 돼야 알 수 있단다.
어디를 가든 그 지방 특산을 한 가지씩은 꼭 사는지라, 어물가게에 들렀다.
참굴비가 열 마리 한 두름에 50만원 하는 특상품부터 있다. 이런 굴비를 사먹는 사람은 어떤 사람들일까. 나하고는 거리가 멀다.
고추장굴비 한 병에 2만5천원. 이거라도 살 생각인데 내일 배가 안 뜨면 곤란하다.
기다렸다가 내일 아침에 사겠다고 약속했다.
(어물가게 앞에 붙은 '한국인의 밥상' 최불암씨의 휘호. 필체가 훌륭하다.)
뜨거운 물에 샤워하고 나니 비로소 정신이 좀 제대로 돌아온다.
기억이 사라지기 전에 여행기를 쓸 생각으로 컴퓨터를 앞에 놓고 앉았으나 진도가 잘 나가지 않아 덮고 누워버렸다.
마지막 날. 12월 19일.
아침에 또 해물뚝배기 백반으로 식사. 오분자기 두 마리와 홍합 등이 섞인 매큼한 국이 속을 풀어준다.
아직도 바람은 차다.
정 국장은 부둣가에서 낚시를 한다며 나갔다. 꼭 손맛을 좀 봐야겠다는 것.
숙소 창문으로 내려다보니 바람이 자못 강한데 저러다가 물속으로 떨어지지 않을까 염려스럽기까지 하다.
우리가 타야할 배가 제주항을 출발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다행이다.
서둘러 배 탈 준비를 하고,
어물가게에 들렀으나 어제 대화하던 그 주인이 없다. 가게문은 열어놓고 어딜 나간 것인지. 전화를 해도 받지 않는다. 이런 낭패가 있나…
배가 도착하고, 수많은 손님이 내리고(어제의 결항으로 쌓였던 승객이 많았던 듯), 다시 떠날 때까지도 어물가게 주인은 나타나지 않았다.
결국 고추장굴비와 나와는 인연이 없었던 것. 어떤 드라마에서, 출국하는 옛 연인에게 그가 좋아하던 고추장굴비를 들려 보내려고 무리해서 공항까지 달려가는 남자를 보고 ‘그게 그렇게 맛있는 음식인가?’ 생각했던 기억 때문이었는데.
‘특산 하나는 꼭 산다’는 내 원칙이 무너진 것은 괜찮은데, 정인호군에게 한 병 사 주려던 것까지 물거품이 된 것이 아쉽다. 이 젊은이는 어딜 갔다 올 때마다 꼭 내게 선물을 사다 주곤 하기 때문에, 이번에 갚으려 했던 것이…
배에 오르자마자 깊이 잠들어버렸다.
진도대교 끝,
명량해전 관광지에 섰다.
명양(鳴洋), ‘우는 바다’.
<해동지도> 해남현 편에 명양의 설명이 이렇게 실려 있다.
忠武公大捷處 而 水疾如箭故謂之鳴洋(충무공대첩처, 이, 수질여전 고위지명양).
“충무공이 크게 이긴 곳, 물이 빠르기를 화살과 같아서 명양(우는 바다)이라 부른다.”
(해동지도 해남편 부분. 명양이 설명되어 있다.)
이순신 제독의 열두 척 전선으로 1백 척이 넘는 왜의 선단을 격파한 명량대첩은 세계 해전사에도 실린 명승부였다.
해남과 진도 사이 좁은 물목의 빠른 물살을 이용하여 적의 대선단을 거의 전멸시키다시피 했다. 빠른 물살 덕분도 있었지만, 좁은 목에 숨어 있다가 막힌 곳인 줄 모르고 들어온 적선의 퇴로를 차단하고 한 척씩 해치운 뛰어난 방어전술의 승리였다.
이 전투에서 제독은 전사하셨지만, 그 덕분에 한양을 치는 길목인 인천 앞바다로 가려던 왜군은 전의를 상실하고 퇴각했다.
몇 년 전 해남~진도 사이 진도대교 위에 올라서서 ‘울돌목’을 직접 목도한 적이 있고, 당시의 해전 상황을 도해(圖解)한 안내판으로 그의 뛰어난 전술을 이해할 수 있었다.
수백 년이 지난 오늘도 그 때를 상상하면 공(公)의 나라사랑에 목이 멘다.
몇 군데에 사당을 짓거나 광화문 네거리에 동상을 세우는 정도로는 갚을 길이 없다.
‘추자도 올레’를 걷고 돌아와 다시금 그 현장을 지나면서, 또 그 때를 상상하며 감격하는 것은 우리나라 사람이면 누구나 가질 수밖에 없는 정서일 것이다.
물살이 아무리 빠르기로 ‘화살 날아가는 소리’까지 내었을까마는(배를 타고 물 위에서 들으면 그런 소리가 들렸을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해동지도에 이른 대로 살처럼 빠른 것은 사실이다. 그래서 ‘화살대가 부르릉 우는(鳴) 소리를 내며 도는(廻) 물목’이라는 울돌목.
명양(鳴洋)이 ‘명량’으로 변한 것은 아마도 발음 때문이었던 것 같다.
‘명양→명냥→명량’, 그렇게 말이다.
그런데 梁으로 쓴 것은 아무래도 잘못된 선택인 듯하다.
‘량’은 ‘들보 또는 다리(橋梁)’의 뜻으로서 ‘수평으로 설치된 튼튼한 목재구조물’을 말하는 것이므로, ‘명량’이어서는 뜻이 통하지 않는다.
원래의 이름인 ‘울돌목’이나 ‘명양’으로 복원시키는 것이 옳지 않을까?
많은 역사서에 ‘명량해전’으로 이미 바뀐 것을 다시 고치는 수고가 비록 크다고 하지만, 이 유명한 곳의 이름만큼은(이름이라도) 제대로 돌려놓는 것이 공(公)의 은공을 잊지 않는 일의 하나일 듯.
(최태영)
첫댓글 추자도 구경한번 잘 했소이다.^~^
한번 가보고 싶은곳~~
내년 봄 쯤 다녀와야 겠네요...
그런데 배편이 그다지 원활치 않아서
시간에 여유가 없는 사람은 꽤 신경쓰이는 곳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