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역문첨록
장수 현감(長水縣監) 정공(鄭公) 묘갈명 병서(幷序)
하동 정씨(河東鄭氏)는 세상의 저명한 성씨로서 휘 국룡(國龍)이 고려조(高麗朝)에 벼슬하여 광정대부(匡靖大夫) 밀직부사(密直副使)에 증직되었는데, 이 분이 공의 비조(鼻祖)이다. 그 뒤에 함양(咸陽)으로 이사하여 살았는데 그 연대는 자세히 알 수가 없으나 판도판서(版圖判書) 휘 지의(之義) 이후로 함양에 묘소가 있다.
함길도 병마우후(咸吉道兵馬虞候) 휘 육을(六乙)이 이시애(李施愛)의 난에 죽고 가정대부(嘉靖大夫) 한성부 좌윤(漢城府左尹)에 증직되었는데, 공에게는 고조(高祖)가 된다.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 우의정에 증직되고, 시호가 문헌(文獻)인 휘 여창(汝昌)은 세상에서 일두선생(一蠹先生)이라고 칭하는데 우리나라의 다섯 현인 중의 한 사람으로 공자(孔子)의 묘정(廟庭)에 함께 모셨으니, 이분이 공의 증조(曾祖)이다.
조(祖)인 휘 희설(希卨)은 호조 정랑에 증직되었으며, 고(考)인 휘 언남(彦男)은 무공(武功)으로 관작의 품계가 동지(同知)에 이르렀는데, 정랑공이 아들이 없어서 데려다가 후사(後嗣)로 삼았다. 생부(生父)는 희삼(希參)인데 현감을 지냈으며, 조는 여관(汝寬)인데 생원으로 문헌공의 막내아우였다. 동지공이 언양 김씨(彦陽金氏) 휘 중홍(重泓)의 딸에게 장가들어 가정(嘉靖) 신해년(1551, 명종6) 8월 13일에 공을 낳았다.
공의 휘는 대민(大民)이며 자는 중립(中立)이다. 나이 25세에 처음으로 동부 참봉(東部參奉)을 제수받았는데, 이는 대개 훌륭한 분의 자손에게 내리는 법전을 적용한 것이다. 자리를 옮겨 영숭전(永崇殿), 문소전(文昭殿), 집경전(集慶殿) 등 세 전의 참봉(參奉)을 역임하고 얼마 후 군자감(軍資監)의 참봉(參奉), 직장(直長), 주부(主簿)에 승직되었다가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 장례원 사평(掌隷院司評)으로 전직되었다.
병술년(丙戌年, 1586, 선조 19) 겨울에 운봉 현감(雲峯縣監)에 제수되고, 신묘년(辛卯年, 1591, 선조 24) 봄에 곡성 현감(谷城縣監)에 제수되었으며, 갑오년(甲午年, 1594, 선조 27) 여름에 장수 현감(長水縣監)에 제수되었다. 이상은 공이 역임한 관직을 순서대로 열거한 것이다.
공이 항상 스스로 말하기를, “내가 관직에 나온 것은 실로 훌륭한 선조의 여음(餘蔭) 덕분이다. 만약 이것을 빙자하여 몸만 살찌우려고 한다면 나는 사람도 아닐 것이니, 장차 어떻게 지하에 가서 말을 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그리하여 임소(任所)에 있을 때에는 대부분 청렴하고 근실하다는 이름을 남겼다.
운봉(雲峯)에 있을 때는 유기(鍮器)를 매달 거두어들이는 규정을 폐지하여 추호도 가까이한 적이 없었으며, 곡성(谷城)에 있을 때에는 더욱 이민(吏民)의 마음을 얻었다. 재상 어사(災傷御史)가, 공이 조정에 원조를 하지 않은 점을 거론하면서 공을 억지로 탄핵하려고 하자, 사민(士民)이 이 사실을 듣고 수천 여 명이 몰려와서 공의 덕정(德政)에 대하여 앞다투어 말하였다.
어사가 들어주지 않았더니, 관아의 뜰에 가득 차고 거리에까지 넘치도록 통곡하면서 호소하여 어사가 부득이 그 논핵을 취소하고 말았다. 장수(長水)에 있을 때에 큰 흉년을 만났는데, 고향 친구가 은(銀)을 저당 잡히고 창곡(倉穀)을 빌려 주기를 요구하더니, 가을이 되어 갚을 때가 되자 그 사람이 은으로 그 빚을 갚겠다고 하였다.
공이 말하기를, “나는 친구를 살려 주었는데, 친구는 나를 더럽히려 하는가?” 하면서 즉시 받았던 은못을 도로 내주었는데 봉함한 것을 뜯어보지도 않고 그대로 있었다. 그 사람이 부끄러워하면서 물러갔다. 정유년(丁酉年, 1597, 선조 30)에 공이 집에서 생활하고 있을 때에 왜적이 재차 쳐들어왔다.
세 고을이 도체찰사의 분부로 황석산성(黃石山城)으로 들어가게 되어 공이 노약자들을 데리고 산성에 들어갔다. 성이 함락되자, 공의 부모가 모두 그들의 흉악한 칼날에 걸려들고 말았다. 공이 즉시 체백(體魄)을 모셔다가 임시로 선영(先塋)의 곁에 모셔 두고 그대로 머물면서 떠나지를 않았다.
사람들이 모두 “임시로 안장을 하였으니 적이 가는 길을 조금 피했다가 훗날 장지를 마련하라.”고 하자, 공이 울면서 말하기를, “불초한 내가 이미 어버이 시신 곁에서 죽지 않았으니 죽어도 남은 죄가 있는데, 더구나 내 몸만 편하자고 안전한 곳으로 가서 살기를 도모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이에 간수하기를 더욱 근실히 하여 겨울이 다 갈 때까지 잠시도 떠나지 않았다. 무술년(戊戌年, 1598, 선조 31) 2월 10일에 연해 지역을 마구잡이로 약탈하던 적이 과연 불의에 습격해 와서 공이 그때 죽었다. 그 해 12월 모일에 고을 북쪽 공산(邛山)의 신좌을향(辛坐乙向)의 언덕에 장사 지냈다.
아, 공은 대현인의 후손으로서 마땅히 복을 받아야 할 터인데 2대가 연이어 다 제대로 죽음을 얻지 못하니, 하늘의 보답이 어찌 차마 이럴 수 있단 말인가. 애처로울 뿐이다. 공이 군수 임희무(林希茂, 1527~1577)의 딸에게 장가들어 1남 1녀를 낳았는데, 아들 홍서(弘緖)는 문과에 급제하여 이제 막 성균관 학정(成均館學正)이 되었다.
초취(初娶)는 증 도승지 양사형(楊士衡)의 딸로서 3남 1녀를 낳고, 재취는 사인 임진상(林眞㦂)의 딸로서 1녀를 낳았다. 딸은 방원진(房元震)에게 시집갔는데 찰방을 지냈고 2남 2녀를 낳았다. 학정(學正)의 장남은 광한(光漢)인데 생원이고, 2남은 광현(光睍)인데 일찍 죽었고, 3남은 광연(光淵)인데 진사이다.
광한은 같은 고을 사람 박위(朴葳)의 딸에게 장가들어 3녀 1남을 두었는데, 장녀는 이상영(李商英)에게 시집가고, 나머지는 모두 어리다. 광연은 참판 박명부(朴明榑)의 딸에게 장가들어 2남 3녀를 낳았는데, 모두 어리다. 장녀는 이교(李皦)에게 시집가서 2남을 두었는데, 경(坰)과 채(埰)이다. 막내딸은 곽문완(郭文浣)에게 시집갔다.
찰방의 장남은 명욱(明煜)인데 진사이다. 양사제(梁士悌)의 딸에게 장가들어 3남 2녀를 두었는데, 모두 어리다. 2남은 명소(明熽)인데 생원이다. 심기원(沈沂源)의 딸에게 장가들었는데 현재 자녀가 없다. 장녀는 이창(李悵)에게 시집가서 자녀 약간을 두었다.
2녀는 김강(金茳)에게 시집갔으나 후사가 없다. 내외의 손자(孫子)와 증손자(曾孫子)로 남녀가 30여 인이나 되니, 참으로 많다고 하겠다. 이미 정해진 하늘의 뜻이 있다면 아마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이에 명을 쓴다. 명은 다음과 같다.
문헌공의 그 제사를 / 文獻之祀
공이 계승하였고 / 惟公是承
청렴하고 공평한 그 정사를 / 廉平之政
공이 잘도 펼쳤네 / 惟公是能
지위도 낮고 장수도 못하였으니 / 位卑無年
어쩌면 그렇게도 명이 박하단 말인가 / 何命之屯
공이 죽은 마당에 / 惟公之死
부모를 위하여 죽었으니 / 死於其親
죽어도 부끄러움이 없고 / 死而無愧
죽었어도 살아 있는 듯하네 / 其死猶生
혹시라도 믿지 못하겠거든 / 有或不信
이 명을 살펴보기를 청하노라 / 請考斯銘
--------------------------------------------------------------------------------------------------------------------------------------------------------
[原文]
鄭大民 墓碣銘[鄭蘊]
河東之鄭爲世著姓, 有諱國龍, 仕麗朝, 贈匡靖大夫、密直副使, 寔公之鼻祖也。 其後徙居咸陽, 年代不可詳也, 而自版圖判書諱之義以下, 墓在咸陽。 咸吉道兵馬虞候諱六乙, 死於李施愛之亂, 贈嘉靖大夫、漢城府左尹, 於公爲高祖。 贈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右議政、諡文獻諱汝昌, 世稱一蠹先生, 乃東國五賢之一也, 從祀孔子廟庭, 於公爲曾祖。 祖諱希卨, 贈戶曹正郞。 考諱彦男, 以武功爵階同知, 正郞無子, 取以爲後。
生父曰希參, 縣監。 祖曰汝寬, 生員, 乃文獻公季弟也。 同知娶彦陽金氏諱重泓之女, 以嘉靖辛亥八月十三日生公。
公諱大民, 字中立。 年二十五, 初授東部參奉, 蓋用象賢之典也。 移永崇、文昭、集慶三殿參奉, 俄陞軍資監奉事、直長、主簿, 轉司憲府監察、掌隷院司評。 丙戌冬, 除雲峯縣監。 辛卯春, 除谷城縣監。 甲午夏, 爲長水縣監。 此公之歷官序次也。 公常自言曰: “我之通籍實荷賢祖先餘蔭, 若欲因以肥己, 我則非人, 將何以有辭於地下乎?” 是以在所多以淸謹名。 其在雲峯, 廢鍮銅器朔捧之規, 秋毫不敢有所近。 在谷城, 尤得吏民心, 災傷御史謂公無援于朝, 欲勒置劾啓中, 士民聞之, 來集者幾千餘, 爭訟公德政。 不從則盈庭溢街, 痛哭呼訴, 御史不得已寢其劾。 在長水, 遭歲大凶, 有鄕里故舊質白金, 求糶倉穀, 及秋當糴, 其人欲以其銀當其債。 公曰: “我活故人, 故人欲以汚我耶?” 卽以銀錠還之, 封誌宛然, 其人赧而退。
歲丁酉, 公方家食, 値倭鋒再動, 三邑以都體察分付, 當入黃石山城, 公扶老幼入城。 及城陷, 公二親俱罹凶刃, 公卽奉體魄, 權厝于先塋之側, 仍留不去。 人皆謂“旣已權安, 當少避賊路, 以爲後日營葬地”, 公泣且言曰: “不肖旣不死親尸傍, 死有餘罪。 況敢私便其身, 圖就乾淨地求活?” 於是看守益勤, 經冬不小離。 戊戌二月十日, 沿海縱掠之賊, 果不意衝襲, 公乃死之。 以其年十二月某日, 葬于郡北邛山辛坐乙向之原。 嗚呼! 公承大賢之後, 宜有餘慶之及, 而連世俱不得其死, 天之報施一何忍此? 可哀也已。
公娶郡守林希荗之女, 生一男一女: 男曰弘緖, 登文科, 纔試成均館學正。 初娶贈都承旨楊士衡之女, 生三男一女。 再娶士人林眞㦂之女, 生一男。 女曰房元震, 察訪, 生二男二女。 學正長男光漢, 生員: 次光睍, 早夭; 次光淵, 進士。 光漢娶鄕人朴葳之女, 有三女一男: 女長適李商英, 餘皆幼。 光淵娶參判朴明榑之女, 有二男三女, 皆幼。 女適李曒, 有二男: 坰, 埰。 季女適郭文院。 察訪之子曰明煜, 進士, 娶梁士悌女, 有三男二女, 皆幼。 曰明熽, 生員, 娶沈沂源女, 時無子女。 長女適李悵, 有男女若干: 次女適金茳, 無後。 內外孫曾孫男女三十餘人, 噫! 多矣哉! 已定之天, 其在斯乎! 是爲銘。 銘曰:
文獻之祀, 惟公是承。 廉平之政, 惟公是能。 位卑無年, 何命之屯? 惟公之死, 死於其親。 死而無愧, 其死猶生。 有或不信, 請考斯銘。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