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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들어가는말
필자는 818 만행이후 1977년 1월 JSA 제 1소대장(818만행시 투입소대)으로 보직되
어 818 만행에 대하여 소대원들로부터 현장
감있는 설명을 들었다.
필자는 2020년에 우연히 JSA에서 중대장으
로 모신 김문환 선배(육사 26기)를 뵙게되었
고, 최근에는 818 관련 자료까지 보내주셨다
따라서 지난 20년 이상 집필을 해온 필자는
한미군사동맹차원에서 46년전 818만행을
재조명하여 역사적 교훈을 윤석열 정부와
애국민들에게 알려서 기존의 한미군사동맹이 포괄적 한미동맹으로 발전에 밀알이 되길 바란다.
■ 당시 국내외 상황
미국은 1965년부터 월남전에 약 50만여명
이 투입하였고, 한국군 2개사단도 월남에 투
입된 상태여서 한반도는 북한군 남침도발에
취약한 상황이었다.
월남전으로 인한 한반도 안보취약기에 설상가
상으로 세 가지 크나큰 상황이 발생하였다.
첫째, 미중관계 정상화다.
미중관계는 1972년 정상화를 하였으며 197
9년 미국은 중국과 정식수교하였다.
이런 미중관계 정상화는 북한의 불법도발을 중국이 견제할 수 있다는 긍정적 측면도 있
으나 중국( UN 상임이사국으로서 거부권)은
주한 UN군 사령부 해체를 집요하게 요구할 수 있다.
※ 주한 UN군 사령부가 해체되면 북한의 불
법남침시 UN 16개국은 한국에 자동참전이
어렵게 되니 UN군 사령부 해체는 한국안보
에 치명타가 될 수 있었다.
둘째, 주한미군 철수 분위기다.
1960년대말 미국내 반전분위기는 1973년
월맹과 미국은 파리평화협정을 체결한후 주
월미군철수를 독촉했으며 이러한 분위기는
주한미군도 안전지대가 결코 아니었다.
닉슨 대통령은 1969년 닉슨 독트린을 발표
후 1971년 한국내 미 7사단이 철수 하였다.
카터 대통령은 1975년 월남의 패망으로 인
하여 미국내 염전 분위기가 팽배해지자 19
77년 주한미군을 향후 4~5년간 완전철수
하겠다는것을 발표했다.
셋째, 북한군의 갑작스런 전력증강이다.
미 정보부서에 의하면 1976년 북한 군사력
은 1970년에 비해 육군은 21개 사단이 41
개 사단으로 대폭 증강되었다.
전차도 1970년에 비해 80%가 확대되어 약
2000여대에 이르고, 북한군 대포도 12400
여문에 이르렀다.
★ 소결론
당시 미중 관계 정상화와로 인한 주한 UN사
가 해체될 수 있다는 우려와 주한미군철수 분위기로 인한 전력공백 그리고 북한군의 갑
작스런 전력증강등 최악의 안보상황이었으며 이런 상황에서 1976년 북한군에 의한 818
만행이 발생하였다.
■ 818 만행 개요
북한군에 의한 818 만행은 1976년에 발생
한후 어언간 46년이 지났다.
당시 유엔군 제 3초소는 돌아오지않은 다리
동편에 위치하여 북한군 JSA 출입 감시기능
을 갖고 있었다.
반면 유엔군 제 3초소는 주변 북한군 4개초소
로 둘레 쌓여 일명 고립된 외딴초소(Isolated
remote post)로 불렀다.
따라서 유엔군 제 3초소는 북한군에 의한 한
미 근무병의 납치시도를 방지하기 위하여 항
상 비상탈출로 인근에 비상트럭이 대기한다.
게다가 유엔군 제 3초소는 인근 미루나무
(둘레 5~6m, 높이 12m)로 인하여 유엔군 제 5초소에서 관측이 어려워 미루나무 가지
치기가는 연례작업이었다.
따라서 유엔사측은 평상시 작업의 일환으로
JSA 경비부대의 지원하에 KSC(한측 작업
요원)요원을 투입하였다.
그런데 북한군은 유엔사측의 가지치기를 트집
삼자 당시 현장에 있던 한ᆞ미군 중대장은 고
심끝에 한측작업요원에게 가지치기를 계속할 것을 지시한다.
8.18 시 현장에 북한군은 2차에 걸친 증원 후 공격을 시작하였는데 이는 주한미군철수를
위한 미군 괴롭히기 작전의 연속(1975년 핸
드슨 소령 피격사건으로 목뼈가 부러짐)이었
다.
당시 북한측 도발 책임자 박철은 미군 중대장
보니파스 대위 앞으로 가더니 갑자기 이 새끼
죽여라하고 고함을 치자
당시 한국 경비병 수보다 3배많은 북한군들은 도끼와 몽둥이로 한ᆞ미군 가리지 않고 폭행
을 가해 미군 보니파스 대위와 바렛중위는 두
개골이 도끼에 맞아 후송도중 사망하였다.
한국군 중대장 김문환 대위외 한국병사들도 크게 부상 당했다.
예컨데 북한의 이러한 8.18의 치밀한 도발은
한반도 공산화에 걸림돌이 되어온 주한미군은
철수시키고 UN사령부는 해체시키기 위해 국제사회에 압박하기 위한 것으로 판단된다.
■ 818만행 직후 심각한 전운이 조성
818만행 직후 심각한 전쟁분위기가 조성되었
다.
미국 안보리는 대응조치(자위권 발동)를 결정, 미국전략자산 전개결정, 주한유엔군 사령관에
게 작전계획수립 지시하였다.
미국 안보리는 일본에 배치된 F-4전투기와 미드웨이 항모의 한국배치, 미국 아이다오에 있는 F111(핵무기 탑제 가능) 한국에 배치 및 미 의회가 전쟁비상대권을 승인하는냐등이 검토의제가 되었다.
한국에는 데프콘 4가 데프콘 3로 격상되었는
데 한국에서 데프콘 3 발령은 1953년 정전
협정후 처음있는 일이었다.
※ 데프콘 3가 발령되자 한국군은 155마일
전선에 진지투입과 실탄이 지급되어 만반의
전투준비태세에 돌입하였다.
박정희 대통령은 8월 19일 삼사관 학교 생도
들의 임관식 유시에 "미친개에게는 몽둥이가 필요하다는 격양된 말씀"을 하셨다.
■ 북한 도발에 대한 작전계획 마련
북한 도발에 대한 대안은 3가지 방안, 즉,아무
대응도 하지 않은것, 대규모 보복공습을 하는
것 그리고 작전의 진행과정에 의미있는 대응
을 하는것이었다.
※ 참고로 1975년 6월 JSA 미군 부지휘관인
헨드슨 소령은 북한군 피격으로 목뼈가 부러
졌음에도 군정위에서 항의외에 아무런 조치
를 않했으나 중립지역인 JSA 지역에서 발생
한 8.18 만행은 미국의 자존심을 크게 손상시
킨 사건으로 그냥 넘어갈 수 없었다.
주한 UN군 사령부는 심층깊은 토의끝에 대규
모 병력과 무기를 전개하여 힘을 과시하는 상
징적 조치로 818만행의 불씨가 된 미루나무
를 절단키로 하였다.
즉 적에게 막강한 전력을 과시하고 상징적인
미루나무를 절단하여 적이 조직적으로 대항
하지 못하여 굴복시키는 계획이었는바 이는
손자병법에 전쟁을 하지않고 이기는것이 최
선의 방책이라는것과 동일한 개념이다.
UN군 사령부는 미루나무 절단작전을 위해 미 전략자산 전개를 포함한 다음과 같은 세부 작
전계획을 하루만에 완성한후 미 대통령은 통
신으로, 한국 대통령께는 대면보고로 승인을
받고 그후 8시간만에 작전을 개시하였다.
1.작전개시 : D일 H시(8월 21일 07시)
※ H를 07시로 택한것은 아침출근시간을 기
습적으로 활용하기 위함이다.
2.작업부대 : JSA 경비요원들이 권총으로 무장 경호하에 미 2사 공병대원이다.
※ 미루나무 제거를 위한 작전회의에 김문환
중대장도 직접참여 했고 네이팜탄으로 제거
하느냐등을 고려했으나 전기톱으로 짜르기
로 결정하였다.
이에 미2사단 공병대원은 JSA 군인 군복을 압고 들어가서 사전 정찰을 하기도 했다.
3. 작전보안
미루나무 절단작업은 북한에 사전통보하지
않으며 미루나무 절단작업 개시되면 즉시 통
보한다.
4. 지원부대
JSA 경비부대 35명 무장병력을 미루나무 짜
르는 인근지역에 배치, 미 2사단 보병 1개중
대(몽둥이 휴대)와 한국군 1사단 수색대대
1개중대(조직적 무장)를 공동경비구역(JSA)
인근지역에 배치,
작업이 개시되면 한ᆞ미군이 탑승한 헬기가
남쪽 비무장지역 인근을 선회하면서 작업병
력을 감시한다.
두 개의 탱크대대와 한 개의 기갑 보병부대를
비무장 지대 남쪽과 임진강 남쪽에 배치한다.
포병부대도 작전을 지원하기 위해 배치한다.
한국군 공수부대 00명은 돌아오지않은 다리 지역을 봉쇄하기 위하여 돌아오지 않은 다리
의 동편 좌우측에 배치한다.
한미 1군단장의 지휘를 받는 한국군 3군과
지역내 미군은 유사시 즉시 전투에 돌입할 수
있는 태세를 갖춘다.
5. 지휘체제 단일화
지휘체제는 단순하며 즉각적인 대응이 가능하
도록 비에라 JSA 대대장~ 브레디 미 2사단
장~스틸월 UN군 사령관으로 단일화하였다.
6. 작전명 최종확정
본 작전계획은 1976년 8월 20일 오후 11시 45분 최종기한으로 정한 15분전에 작전명은
미국의 전설적인 나뭇꾼의 이름을 따서
Operation Paul Bunyan으로 승인되었다.
■ 작전 성과 및 교훈
1. 작전성공
미루나무 절단작전개시는 전군 비상발영 하
에 서부전선 중심 대규모 작전준비와 동시에 상징적 조치로 8.18.미완수 작업을 8월 21
일 오전 7시에 개시되었다.
작전개시직전 JSA 한측 중대장 김문환 대위
는 돌아오지 않은 다리 중간(JSA내 MDL)
에서 메카폰으로 북측 4초소를 향해 통보했다
통보내용은 UN군 사령부 작업단이 지난 수요
일 실시한 작업을 마무리하기 위하여 공동경
비구역에 들어가 마무리 작업을 완료후 작업
지역을 떠날것이라고 방송(또한 UNC JDO 가 북한군 JDO에게 통신으로 동시에 통보함)
했는데 이는 막강한 한미전력의 배치하에 UN사의 일차적 목표를 알려주기 위함이었다.
미루나무 절단은 미 2사단 공병대원이 JSA
한미경비부대원 경계하에 실시하였는데 당초
20분을 예상했으나 여름 나무에 물이차서
40분이상 소요되었다.
작업개시와 더불어 미 2사단장 브레디 소장의
지휘통제기는 6대의 코브라 공격헬기의 엄호
하에 JSA 남쪽지역을 선회비행하면서 JSA
대대장과 지휘통제를 유지하였다.
8월 21일 07시 Operation Paul Bunyan
작전이 개시되자 JSA 지역내에는 미루나무
절단작업이 개시되었음을 방송하고, 김문환
대위는 돌아오지않은 부근에서 대북 멧시지
를 방송하자 북한군 제 4초소 병사들은 허둥
지둥한 모습을 보였다.
북한군 150여명은 북한군 4초소 북쪽뚝을 따
라 남쪽으로 배치하였으나 아무런 명령을 못
받았는지 한ᆞ미군을 보고 이러다할 저항은 없었다.
미 2사단장 헬기가 MDL에 너무 가까이 접
근하자 북한군은 자동화기를 발사하였고 이
에 미군 코브라 레이다가 적의 총위치를 번쩍
이자 북한군은 기겁하여 은폐하였다.
북한군의 총격으로 미 2사단장 헬기에 약간
손상이 있었으며 북한군이 계속 총격을 가하
면 전면전으로 확전 될 수도 있었다.
예컨데 UN군 사령부의 대북 강경응징태세하
에 미루나무 절단은 성공적으로 이루어졌고
추가로 북한군 5.6 초소앞 5m정도의 장대
차단기도 제거하였다.
2. 작전성과
첫째, 가장 큰 성과는 UN군 사령부의 대북 강경응징태세가 북한 김일성의 사과, 즉 미래
에는 이런 불행한 일이 재발하지않도록 양측
이 노력하자는 뜻을 이끌어냈다는 것이다.
둘째, 본작전은 1953년 휴전이후 최초의 성
공적인 한미연합작전이었으며 한국군의 확
고한 임전태세를 보여주는 계기가 되었다.
셋째,8.18.과 8.21.은 카터의 주한 미군철수
백지화에 기여하였고 한미동맹강화의 계기가
되었는데 이와관련 사실은 다음과 같다.
8.18 만행은 북한군의 호전성을 전 세계 알리
는 계기가 되었다.
8.18과 8.21 작전은 카터의 주한미군 철수 공약에 대해 반대 입장에 있던 주한미군 장성
들이 주장에 힘을 실어주었다.
특히 카터의 상글러브 장군의 소환 후 미의회 청문회에서 싱글러브 증언은 의원들이 한반도 현실을 알고 미군부 입장에 힘을 실어주어 카
터의 주한미군철수 공약이 후퇴되는 데 기여
하였다.
1976년 8.18만행 2년후 1978년 한미연합
군이 창설이 되었는데 여기에서 818만행시 JSA 에 근무한 한국군의 용맹성도 일조했을
것이다.
3. 작전 교훈
본 작전의 소중한 교훈은 다음과 같다.
첫째, UN군 사령부는 한 구루 미루나무 절단
에도 전면전같은 최악의 상황에 대비했다는
것이다.
둘째, 작전개시는 고도의 비밀유지하에 오전
7시(출근시간)에 기습적으로 실시하여 북한
군의 조직적인 대응을 어렵게 했다는 것이다.
셋째, 지휘통제는 JSA 대대장ㅡ미 2사단장
ㅡUN군 사령관으로 단일화 시켜 모든 노력
을 일관성있게 조치했다.
■ 818 만행 후속조치와 미담사례
1. 후속조치
• 보니파스 대위와 바렛 중위
미육군성은 보니파스에게는 동성훈장을, 바렛
중위에게는 퍼플 허트를 수여하였다.
대한민국은 보니파스에게 충무무공훈장을 바
렛중위에는 화랑무공훈장을 수여했다.
그러나 보니파스 대위와 바렛 중위의 기념비
와 별도의 추모행사가 없는것은 매우 아쉬운
부분이다
• 김 문환(육사 26기. JSA 중대장)
스틸웰 사령관(대장)은 김문환 대위에게 먼
저 거수경례를 한후 미 육군성 메달을 수여
하였다. 여기서 미군 사성장군이 한국 대위
에게 거수경례를 했다는것은 김문환 대위의
용맹성과 한미 전우애를 높이 평가한 발로다.
※ 북한의 818만행으로 심한 상처를 입은 김
문환 중대장외 많은 병사들은 병원치료를 거
부한후 8월 21일 미루나무 절단에 가담한것
은 주한미군을 감동시킨 진정한 참군인의 모
습으로 보인다.
2. 미담 사례
• 스틸웰 대장(리건 대통령 군사보좌역)
리건 대통령의 군사보좌역을 한 스틸웰 대장
은 생활고에 시달리는 마르시아를 군무원으
로 취직시켜 정년까지 일을 하도록 하였다.
• UN군 사령관
UN군 사령관은 10주기를 맞이하여 마르시아
와 세 자녀 그리고 바렛 중위 부인을 초청하였
다. 그리고 JSA 켐프는 켐프 보니파스로, 미
군식당은 바렛홀로 명칭이 바뀌었다.
• 마르시아
8.18.사건 시 머리에 큰 부상을 당한 남편 보니파스 중대장을 짚차에 태워 후송하며 살
리려 한 김문환 중대장을 잘 아는 보니파스
중대장 부인 마르시아 여사는 재혼하지 않고 독신으로 세 자녀를 양육하고 슬하에 손자ᆞ
손녀 다섯을 둔 강한 어머니다.
마르시아는 얼마전 남편 보니파스의 카운터 파트너인 김문환 대위 쌍둥이 손주 4살을 기
념하여 본인이 손수 수놓은 이불 두 개를 선
물하였다.
• 김 문환(1976년 JSA 중대장)
46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마르시아와 교류를
이어가고 있는데 이는 영원한 한미동맹의 상징이다. -끝
한국문화안보연구원. 부원장. 김명수 박사
2022년 5월 30일
첫댓글 능화의 자세한 사건 전말을 읽고 많은 감동을 받습니다. 그놈들의 호전성과 막무가내식 만행을 응징하였다 하니 속이 후련합니다. 우리의 안보 태세를 다시 점검하는 시간을 가져야겠네요.
46년 전 북한군 818도끼만행사건을 현장감있게 전해주어 잘 읽었습니다. 당시 전쟁이 이렇게 쉽게 일어나나 하고 생각했지요.교훈을 통하여 북한군을 이해하고 장차 국지전에 참고해야 해겠네요
당시 GOP작전 강화했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자세한 상황과 그 후속 얘기까지 알게 되어 고맙습니다.
DEFCON 3가 발령되었을 당시 3군단 예비사단의 공병대대 작전보좌관으로 근무하고 있던 때의 기억이 생생합니다.
토끼를 휘두르는 미친개와 같은 것들에게는 보다 강력한 응징만이 그런 재발을 방지할 수가 있지요.
1969년의 닉슨독트린 이후 국가안보의 위기상황에서 박정희 대통령의 우리의 자주국방 강화 시책과 10월유신 등의 용단이 내려졌지만, 결과적으로는 용공 종북주의자들로 밝혀진 위선적인 민주화 무리의 반대와 극렬시위가 격화되고 1970년대 말 나라가 누란의 위기에 처하기도 했지요.
능화께서 상기사켜주신 818도끼만행 응징작전에서와 교훈과 같이 매맞을 짓을 하는 북괴와 용공, 종북 주의자들은 말이 필요없는 힘으로 다스려야합니다~
당시의 나는 25사단 213포병대대 작전보좌관으로써 일촉즉발의 사격준비를 했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인접부대에선 전쟁이 발발할줄 알고 병사 1명이 행불되는 상황이 벌어졌는데 나중에 찾고보니 부대앞 하수구에 숨어 있었다고 하더군요. 일종의 전쟁공포증이었습니다. 해프닝이었지만 우리 군이 참고해야할 경험이라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