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에서 온 어머님 편지
/김규동
꿈에 네가 왔더라
스물세 살 때 훌쩍 떠난 네가
마흔일곱 살 나그네 되어
네가 왔더라
살아 생전에 만나라도 보았으면
허구한 날 근심만 하던 네가 왔더라
너는 울기만 하더라
내 무릎에 머리를 묻고
한마디 말도 없이
어린애처럼 그저 울기만 하더라
목놓아 울기만 하더라
네가 어쩌면 그처럼 여위었느냐
멀고먼 날들을 죽지 않고 살아서
네가 날 찾아 정말 왔더라
너는 내게 말하더라
다신 어머니 곁을 떠나지 않겠노라고
눈물어린 두 눈이
그렇게 말하더라 말하더라.
//1925년 함경북도 출신 시인으로 해방 얼마 뒤 본격적으로 문학을 공부해 보자는 생각으로 평양에 새로 만들어진 김일성대학 조선문학과로 편입을 한다. 김규동 시인은 졸업을 했더라면 2회가 된다. 그러나 문학관계 책을 구해 읽을 도리가 없었다. 결국 그는 이 일로 서울행을 결심하게 된다. 서울 가서 책도 좀 구해오고 스승 김기림 선생도 만나자는 것이 월남의 동기였으니이데올로기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 이렇게 해서 그가 월남한 것이 1948년, 부친은 몇 해 전에 작고하고 어머니와 두 누이, 그리고 아우 하나를 북에 두고서였다. 늦게 가도 2~3년이면 다시 고향에 갈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영원한 이별이 되는 줄 알았더라면 아마 월남을 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그는 말한다. "어머니를 두고 어떻게 내려왔겠어요?" 20년도 훨씬 지난 뒤에 시인은 어머니를 위에서 위와 같이 노래하고 있다.
"1972년 무렵에 하루는 꿈을 꾸었는데, 너무도 선명하게 북에 있는 어머니가 저한테 편지를 보냈어요. 그런데 그 편지를 글씨로 쓴 게 아니라 목소리로 보내왔어요. 어머니는 배우지 못한 여인인데, 그 배우지 못한 어머니의 말씀이지마는 한 마디 한 마디 전부가 내가 쓰는 시보다도 더 감격이 오는 말씀이에요."(2006, '문학사계' 18호) 시인은 잠에서 깨었는데 그 말씀이 너무나 선명해서 급히 연필을 찾아 가지고 종이에 적었다고 했다. 그리고 그걸 '한국일보'에 찾아가서 내어놓았고, 그것이 그 다음 날 발표가 되었다고 했다.
분단의 아픔은 지금도 계속 진행중이고, 어리석은 김정은 추종자들은 그를 찬양하며 적화를 꿈꾸며 분단을 더욱 고착화 시키고 있다. - 이해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