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youtu.be/xNy_Sero-xg
<마가복음 6:31-34,53-56> 31 이르시되 너희는 따로 한적한 곳에 가서 잠깐 쉬어라 하시니 이는 오고 가는 사람이 많아 음식 먹을 겨를도 없음이라. 32 이에 배를 타고 따로 한적한 곳에 갈새 33 그들이 가는 것을 보고 많은 사람이 그들인 줄 안지라 모든 고을로부터 도보로 그 곳에 달려와 그들보다 먼저 갔더라. 34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그 목자 없는 양 같음으로 인하여 불쌍히 여기사 이에 여러 가지로 가르치시더라.
53 건너가 게네사렛 땅에 이르러 대고 54 배에서 내리니 사람들이 곧 예수신 줄을 알고 55 그 온 지방으로 달려 돌아 다니며 예수께서 어디 계시다는 말을 듣는 대로 병든 자를 침상째로 메고 나아오니 56 아무 데나 예수께서 들어가시는 지방이나 도시나 마을에서 병자를 시장에 두고 예수께 그의 옷 가에라도 손을 대게 하시기를 간구하니 손을 대는 자는 다 성함을 얻으니라.
요즘 트로트 가수로 최고 전성기를 보내는 임영웅이라는 가수가 있지요. 그를 따라다니는 중년여성 열성팬들이 무척 많다고 합니다. 공연하는 곳이면 어디든지 전국을 따라 다닐 정도로 열정적이라고 하더군요. K-pop 그룹의 선두 주자라고 할 수 있는 방탄소년단 팬들은 전세계에 널려 있습니다. 이 팬들은 공연을 보려고 비행기를 타고 외국을 다닐 정도이지요. 도대체 어떤 매력이 있기에 사람들이 그리 몰려들며 따라다닐까요? 그 많은 시간과 엄청난 돈을 써가면서까지 그렇게 쫓아다녀서 도대체 무엇을 얻어내는 걸까요?
그런데 예수님도 이들 못지 않은 인기를 누리신 것 같습니다. 예수님 가시는 곳마다 많은 사람들이 따라다니면서 몰려들었지요. 31절 후반부에 보면 ‘이는 오고 가는 사람이 많아 음식 먹을 겨를이 없음이라.’ 조용히 식사하실 겨를도 없을 정도였다는 거죠. 그래서 32절에 보면 ‘이에 배를 타고 따로 한적한 곳에 갈새’ 무리들을 떠나서 배를 타고 한적한 곳을 찾아가고 있는데, 33절을 보면 ‘그들이 가는 것을 보고 많은 사람이 그들인 줄 안지라. 모든 고을로부터 도보로 그곳에 달려와 그들보다 먼저 갔더라.’ 당시에 배는 노를 젓거나 돛단배 수준이어서 속도가 빠르지 못했지요. 예수님과 제자들이 배를 타고 가는 것을 먼 육지에서 지켜보면서 그 배를 따라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면서 심지어 33절 마지막에는 예수님이 타신 배보다 먼저 앞서는 자들도 있었다는 겁니다. 이 정도면 방탄소년단이나 임영웅 못지 않은 인기를 누리신 거 아닙니까?
인기 연예인들은 자기를 따라다니는 열성팬들을 보면 어떤 마음이 들까요? 반면 예수님은 이렇게까지 열성적으로 따라 다니는 무리들을 보시면서 무슨 생각을 하셨겠습니까? 34절입니다.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그 목자 없는 양 같음으로 인하여 불쌍히 여기사’ 그들이 목자 없는 양 같아서 불쌍히 여기셨다는 겁니다. 목자 없는 양 같다는 게 무슨 뜻일까요? 세상에서의 삶이 불안하고 불완전하다는 거죠. 그래서 내 인생의 목자가 되어줄 뭔가를 붙들려고 꽤나 노력하는데 그게 생각처럼 제대로 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인기 연예인이나 자기 성향에 맞는 정치인들을 따라 다니면서 환호하고 열광하면 좋은 인생의 목자를 붙든 것일까요? 그들이 내 인생을 바른 길로 이끌어 줍니까? 나를 가장 안전하고 행복하게 해 줄 목자는 역시 돈이라고 대부분 생각하겠지요. 그래서 평생 안심해도 될만큼 벌어놓으면 이젠 내 인생이 완벽하게 완성된 겁니까? 어떤 사람은 좋은 강의를 따라다니면서 내 인생의 목자를 찾기도 합니다. 철학을 비롯한 여러 유명한 인문학자들의 강의, 심리학과 정신의학자들이 삶의 고민을 풀어주는 강의, 주식과 부동산 투자에 대한 고수급들의 강의, 심지어 이단종파나 사이비교주들의 허황된 환상을 가지게 하는 강의, 게다가 정치적 이념으로 대중을 선동하는 자들의 강의, 유투브에서 그리고 여러 강연장에서 지금도 수많은 소위 일타강사들이 현란한 말솜씨를 동원해서 외쳐대고 있지요. 하지만 한 시기를 지배했던 유행도 결국 지나가 버리듯이 여러 일타강사들의 강의도 시간이 지나면 밀물이 바뀌어서 썰물이 되어 빠져나가듯이 어느 순간 다 빠져나가고 맙니다.
그런데 첫 번째 본문에서처럼 이렇게 걷든 뛰든 예수님을 따라다닐 정도만 되어도 그나마 다행이지요. 두 번째 본문인 53-56절을 보면 혼자서는 거동도 못하는 중증 환자들이 있습니다. 55절 중간 부분에 이런 말씀이 있지요. ‘예수께서 어디 계시다는 말을 듣는대로 병든 자를 침상째로 메고 나아오니’ 침상째로 메고 나왔다는 것은 들것 침대라면 앞뒤로 두 명, 집에서 쓰는 침상이었다면 네 귀퉁이에 적어도 네 명이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이 중증 환자들에게 이렇게 자기 침상을 들고 다녀주는 착한 사람들이 있었다는 겁니다. 어떤 면에서는 이 착한 사람들은 중증 환자들에게 좋은 목자와도 같겠지요. 그런데 이들이 착하고 선한 마음으로 섬기는 건 맞지만 그렇다고 병을 치유할 수 있는 의술이나 치유의 기적을 일으키는 신통력이 있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이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의 것은 그냥 데려다 주는 것일 뿐입니다.
56절에는 이런 말씀도 있지요. ‘아무 데나 예수께서 들어가시는 지방이나 도시나 마을에서 병자를 시장에 두고 예수께 그의 옷 가에라도 손을 대게 하시기를 간구하니’ 병자들을 예수님 지나가실만한 시장 길목에 두고, 예수님께서 지나가실 때에 제발 저기 누워있는 저 환자의 옷이라도 한번 손을 대달라고 간구했다는 것이지요. 아파 누운 중증환자도 목자 없는 양이지만, 이들의 침상을 메고 온 이 착한 사람들이 예수님께 간절히 호소하는 이 절박함을 보면 이들도 역시 목자 없는 양과 같은 겁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에게는 이렇게 배를 타고 가시는 예수님을 멀리 육지에서 보고 그 배를 따라 걷고 뛰면서 예수님께 나아가려는 사람들이 있었고, 병들어 움직이지도 못하는 중증환자를 침상째로 들어 메고 와서 예수님께 제발 옷이라도 한번 만져달라고 간구하는 착한 사람들이 있었지요. 그리고 이들에게 침상째 실려 온 중증 환자들도 있습니다. 이들에게는 모두가 간절한 절박함이 있지 않습니까? 중병에 걸려 고통스럽고 두려운 절박함도 있지만 뛰어다닐만큼 몸이 건강해도 삶에 드리워진 가난과 배고픔과 무지함과 번민과 두려움과 억울함과 무능함과 그 어떤 것으로도 채워지지 않는 공허감으로 인해 목자 없는 양과 같은 절박함이 있지요.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너에게는 어떤 절박함이 있는가? 너에게도 이들이 지니고 있는 이런 절박함들이 있는가? 혹시 나는 몸도 건강하고, 돈도 재산도 있을만큼 있고, 인간관계도 좋고, 하는 일도 잘되고, 교회도 잘 다니고 있어서 별 다른 절박함을 느낄 일이 없다고 생각되시나요? 절박함이 없는 분들에게 억지로 느끼라고 강요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나의 번영과 평탄한 삶이 든든한 반석 위에 서 있는 건지, 아니면 언제고 꺼져버릴 모래 위에 서 있는 건지는 한번쯤 돌아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요즘 새벽기도회에서 요한계시록을 읽어가고 있는데 소아시아 일곱 교회 각각에게 보내는 메시지가 2장과 3장의 내용이지요. 그중에 마지막 교회가 라오디게아라는 교회인데 그 교회의 문제점을 지적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3:17-18절 말씀이지요.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사람들 중에는 경력이 쌓여가면서 나는 이제 완벽하고 완전한 전문가 경지에 들어섰다고 자부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분명 남보다 높은 수준에 올라가 있으면서도 여전히 나는 부족하고, 여전히 많은 허점들과 불완전함들을 보여서 항상 더 노력해야하고 더 변화되어야 한다고 겸손한 사람이 있지요. 라오디게아교회 성도들은 육신의 삶이 평탄하니까 이 정도면 괜찮은 수준에 도달했다는 자만심에 빠졌던 겁니다. 이런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예수님께서는 눈을 바르게 떠서 진정한 현실을 제대로 보고 회개하라고 권면하셨지요.
오늘 예배에 오신 여러 성도님들은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에게 나온 무리들과 같습니다. 내 삶에 어디에선가 목자 없는 양 같은 불완전함과 절박함이 있기 때문이지요. 다른 곳에서 이 불완전함과 절박함을 채우거나 해결할 수 있다면 여기에까지 오셨겠습니까? 물론 심심해서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 오셨을 수도 있고, 이 세상보다 더 좋다는 천국 가는 티켓을 확보하려고 오셨을 수도 있지만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지적하신 말씀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안목으로 우리 자신을 들여다 보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처참함 같이 이 세상 속에서의 우리의 삶이 때로는 얼마나 비루하고, 얼마나 순수하지 못하고, 여전히 많은 죄와 불의에 얽혀있고, 얼마나 많은 거짓과 가식으로 내 삶을 치장하고 있는지 다 드러납니다. 절박해지지 않을 수 없는 거죠. 특히 연세가 많은 분들은 세월의 흐름과 함께 세상을 떠날 순간이 더 가까워집니다. 그럴수록 예수님의 부활의 손길이 더 절박해질 수 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절박한 마음으로 예수님을 따르거나 예수님의 손길을 간구하는 자들을 예수님은 결코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34절 중간에 보면 ‘그 목자 없는 양 같음으로 인하여 불쌍히 여기사 이에 여러 가지로 가르치시더라.’ 그리고 56절 끝부분도 보면 ‘예수께 그의 옷 가에라도 손을 대게 하시기를 간구하니 손을 대는 자는 다 성함을 얻으니라.’ 참된 생명과 구원의 길을 가르치시는 예수님, 그리고 예수님의 손길을 간구하는 자들에게 손을 대주시고 성함을 얻게 하시는 예수님, 이처럼 가르치셨다, 또 성함을 얻게 하셨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지니신 죄와 어두움과 죽음의 권세를 이기신 부활의 생명력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여전히 현실은 목자 없는 양 같이 방황하고 두렵게 하는 현실이지만 참 생명과 구원의 목자이신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예수님 주신 생명력으로 이 목자 없는 양 같은 현실을 참고 인내하면서 바른 진리와 구원의 길을 걸어가게 하고, 궁극적으로는 모든 것을 극복하고 승리하게 하시는 예수님의 손길이 지금도 우리와 함께하고 계심을 오늘의 말씀은 우리에게 선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가장 분명하고 확실하신 우리의 생명과 구원의 선한 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