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글,편집: 묵은지
한 사람의 위인(偉人)이 탄생(誕生)되기 까지에는 그를 위한 많은 조력자(助力者)가 있게 마련입니다. 우리가 알고있는 위대한 천재(天才) 과학자(科學者) '아인슈타인'도 그의 '상대성(相對性) 이론(理論)'이나 그밖의 훌륭한 과학에 대한 연구(硏究)가 단순히 그 혼자만의 성과(成果)가 아니었으며 그의 부인이었던 '밀레바 마리치(Mileva Maric)'의 도움이 없었다면 자칫 연구의 성공(成功)을 이루지 못했을거라는 얘기는 노벨 물리학상(物理學賞)까지 받은 그의 연구실적(實績)과 그동안 물리학계(物理學界)에 끼친 지대(至大)한 업적(業績)을 생각했을때 묵은지로서는 또다른 새로운 충격(衝擊)이 아닐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아인슈타인의 연구 파트너로서 또는 아내로서 살았던 밀레바는 아인슈타인의 그 알려진 명성(名聲)만큼이나 모든 것이 같이 비례(比例)하지는 않았습니다. 세인(世人)들에게 너무나 잘알려진 아인슈타인은 많은 사람들이 익히 알고있는 위대한 과학자(科學者)였지만 그의 곁에서 연구를 위해 열심히 도와주었던 부인 밀레바는 남편 명성의 그늘에 가린 그저 한낱 한 사람의 불행(不幸)한 여인일 뿐이었습니다.


밀레바는 수학(數學)과 과학(科學)에 재능(才能)이 많은 그 역시 유능(有能)한 여성 공학도(工學徒) 였습니다. 하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여자로서 공학도는 사회적(社會的) 인식(認識)이 그렇게 호의적(好意的)인 편은 아니었습니다. 아인슈타인과 학교 동기(同期)로 학습(學習)과 연구활동을 같이하다 밀레바의 뛰어난 재능에 빠진 아인슈타인은 밀레바를 향한 끈질긴 구애(求愛)로 사랑이 싹트기 시작 하였고 결국 임신(姙娠)을 하게 되었습니다. 나이가 네살이나 연상(年上)인데다 신체(身體)의 장애(障碍)를 이유로 집안의 반대가 심했던 것을 뒤로하고 아인슈타인은 임신을 이유로 밀레바와 결혼(結婚)을 강행(强行)하였으며 이들의 결혼은 두사람에게 많은 변화(變化)를 가져왔습니다. 이들 부부(夫婦)는 일심동체(一心同體)로 연구에 탄력(彈力)을 받기 시작하면서 결혼 2년이 지날 즈음에는 유명 학술지(學術誌)에 5개월 사이 무려 5편의 논문(論文)을 발표(發表)하는 놀라운 연구 실적(實績)을 올리기까지 하였습니다. 이는 가정생활(家庭生活)의 경제적인 문제를 해결(解決)하기 위해 일주일 내내 직장(職場)일로 시달리는 당시의 아인슈타인의 형편으로는 그러한 연구자체가 아내 밀레바의 적극적(積極的)인 도움없이 혼자서는 불가능(不可能)한 일이었습니다.

이렇게 세기(世紀)의 물리학자 아인슈타인의 탄생은 그의 부인인 밀레바의 노력이 더해진 결과라는 것이 밝혀졌기에 많은 사람들이 그녀에 대한 관심(關心)이 높았습니다. 위대한 천재 과학자 아인슈타인의 아내였던 '밀레바 마리치'는 세르비아인으로 1875년 12월 19일에 '티텔'에서 태어났으며 선천적(先天的)으로 한쪽 다리가 약간 불편한 신체적(身體的) 조건(條件)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비교적 부유(富裕)한 가정 속에서 공부를 잘하였으며 당시의 여자로서는 넘보기 힘든 취리히 공대(工大)에서 유일(唯一)한 여성 공학도로 물리학과 수학의 중등학교(中等學校) 교원(敎員) 양성과정(養成課程)을 배우게됩니다. 이 곳에서 동급생(同級生)이었던 아인슈타인을 만나게 되었고 재학중(在學中)에 아인슈타인의 아이를 임신하는 바람에 밀레바는 졸업(卒業)을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딸아이를 낳았고 '리제를(Lieserl)'이라는 이름도 지어 주었습니다. 그러나 이 딸은 1903년 여름, 확실하게 알려진 것은 없으나 남의 집으로 입양(入養)을 보냈거나 아니면 병(病)으로 죽었다는 말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렇게 첫 딸을 잃었지만 뒤이어 1904년에 큰 아들인 '한스(Hans)'를 낳았고 1910년에는 작은아들인 '에두아르트(Eduard)'를 낳게 되는데 나중에 이 작은아들이 스무살 되던 해에 심한 '조현병(調絃病)'을 진단(診斷)받게 됩니다. 그러나 이미 1914년에 밀레바의 운명(運命)은 비극(悲劇)으로 기울고 있었으니 그동안 불안(不安)하던 결혼생활 끝에 바람둥이인 아인슈타인과 이혼(離婚)의 빌미가 된 사건(事件)이 벌어졌습니다. 밀레바는 두 아들과 함께 때마침 1차 대전의 발발(勃發)로 스위스 취리히로 피신(避身)하게 되는데 이틈을 탄 아인슈타인은 친척(親戚) 누이뻘인 미망인(未亡人) '엘자(Elsa)'와 사랑에 빠지게됩니다. 정신없이 불륜의 사랑놀이에 빠져있는 아인슈타인 덕에 생활비(生活費) 조차 끊긴 밀레바는 남편의 불륜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되었습니다. 밀레바는 자신의 명예(名譽)를 뒤로 하면서까지 남편의 명성을 위해 노력한 보람도 없이 1919년 아인슈타인과 결국 이혼을 하게 되었고 밀레바는 두아들과 생업(生業)의 현실(現實)에서 힘들게 살아야 했습니다.

아인슈타인은 1921년 노벨물리학상을 수상(受賞)하였고 그 상금(賞金) 전액(全額)을 밀레바에게 위자료(慰藉料)로 주었습니다. 하지만 이 돈에 대해 일각(一刻)에서는 공동연구(共同硏究)에 대한 함구(含垢) 조건(條件)으로 건네준 것이라는 소문(所聞)도 있었습니다. 밀레바는 이때 받은 돈을 작은아들 에두아르트의 정신병(精神病) 치료(治療)에 거의 쓴 것으로 알려졌으며 에두아르트는 평생 병원에서 지내다 1965년 결국 죽음을 맞이 하였습니다. 밀레바는 1948년 72세의 나이로 취리히에서 사망을 하였으며 아인슈타인은 1933년 미국으로 망명(亡命)을 하여 뉴저지에서 살다 유태인이자 저명인(著名人)의 자격(資格)으로 1955년 이스라엘 건국(建國) 7주년 기념사(記念辭)를 준비하는 도중에 76세의 나이로 자택(自宅) 근처 병원에서 눈을 감았습니다. 밀레바가 아무리 조력자로서 아인슈타인의 연구를 도왔다고는 하나 분명한 것은 세계 물리학의 커다란 위업을 쌓은 것은 당연히 아인슈타인이었고 지금도 세상 사람들은 상대성이론(相對性理論)하면 아인슈타인을 떠올리고 그의 위대한 업적에 큰 박수를 보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위대한 천재과학자이며 세계 물리학의 발전(發展)을 위한 위업을 쌓았다 할 지라도 아인슈타인의 사생활(私生活)은 그리 모범적(模範的)이지 못했으며 그로인해 한 여인은 뼈저린 고통(苦痛)과 함께 평생(平生)을 마음의 상처(傷處) 속에 살아야 했습니다. 더군다나 사랑하는 사람의 그 위대한 명성을 쌓기까지의 조력자로서 헌신적(獻身的)으로 노력한 보람도 없이 한 순간에 버림을 받은 자신의 신세(身世)를 한탄(恨歎)하는 밀레바 마리치의 운명(運命)은 묵은지는 물론, 보는이들로 하여금 가슴을 먹먹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인지 흔히들 하는 말에 자고(自古)로 세상을 움직이는 큰 인물은 쾌락(快樂)을 즐기는 것도 남다르다 라고 하는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자신의 욕망(慾望)을 채우기 위해 그 어떤 것도 가차없이 버리는 아인슈타인도 별수없이 여자나 밝히는 속물(俗物)인간으로 보여졌습니다.

1905년에 발표된 아인슈타인의 논문(論文)인 빛이 입자(粒子)로 이루어져 있다는 가설(假設)의 '광양자설(光量子說)' 과 빛의 속도(速度)에 견줄 만한 속도로 움직이는 물체(物體)를 다루는 역학이론(力學理論)인 '특수상대성이론(特殊相對性理論)' 등은 아인슈타인이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하는데 큰 기여(寄與)를 하였습니다. 논문이 발표된 이때는 밀레바와 결혼을 한지 불과 2년 정도가 되었을 때이며 아인슈타인은 특허사무소(特許事務所)에 다니는 직장인(職場人) 신분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사람의 사랑과 열정(熱情)이 넘쳐났던지 세상이 깜짝 놀랄정도로 대단한 다수의 연구논문을 유력 과학지에 발표를 하였던 것입니다. 이 논문들은 아인슈타인의 이름으로 발표가 되었고 아인슈타인은 이로인해 일약 세계적인 물리학의 권위있는 과학자가 되었습니다. 물론 밀레바는 유명세를 떨치고 있는 자신의 남편인 아인슈타인을 바라 보면서 매우 흡족(洽足)해 했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묵은지의 마음이 애닳게도 그늘 속에 가려진 여인(女人)인 밀레바의 행복은 여기까지였고 이후부터의 그의 인생은 한 남자의 배신(背信)으로 자신의 과학자로서의 포부(抱負)와 행복한 미래를 향한 꿈과 희망(希望)도 모두 날려버린채 한없는 원망(怨望)과 슬픔으로 비극적인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