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드베터 씨는 조급해서 나지막이 투덜거렸다. 옆자리의 남자가 일어나 앞을 지나갈 때 헛디디면서 앞좌석에 모자를 떨어뜨려 줍기 위해 몸을 굽혔기 때문이다.
그것은 <한 마리의 참새도……>라는 영화의 클라이맥스 때였다. 이 옛 스타의 감동과 아름다움의 대드라마를 리드베터 씨는 1주일 전부터 보고 싶어하고 있었다.
캐서린 로열 - 리드베터 씨 의견에 의하면 세계 으뜸가는 영화배우다 - 이 출연하는 영화로, 금빛 머리의 여주인공이 마침 노여움으로 일그러진 쉰 목소리를 내고 있는 참이었다.
“안돼. 그럴 바엔 굶어죽는 게 낫지. 그러나 나는 굶어죽지 않아. 이 말을 기억해 두란 말이야. 한 마리의 참새도 떨어지지 않아……”
리드베터 씨는 조급해서 고개를 양옆으로 움직였다. 이런 사람이 다 있담! 왜 영화가 끝나기를 기다리지 못한단 말인가. 더욱이 이토록 기막힌 장면에서 나가다니.
아, 겨우 제대로 됐다. 귀찮은 신사는 나가 버렸다. 리드베터 씨는 뉴욕의 팬 슈라이너 창가에 서 있는 캐서린 로열을 화면 가득히 볼 수 있었다.
그녀는 이번에는 기차를 타고 있었다. 그 팔에 어린아이가 안겨 있다. 미국에는 어쩌면 저토록 기묘한 기차가 있을까, 영국 기차와 조금도 비슷하지 않다. 아, 산의 오두막에는 아직 스티브가 있었다. 영화는 점점 진행되어 감동적이고 거의 종교적인 결말이 났다.
불이 들어오자 리드베터 씨는 만족스러운 한숨을 쉬었다.
그는 눈을 껌벅이며 천천히 일어났다. 그는 영화 속에서 재빨리 빠져나오지 못했다. 여느 때의 산문적인 현실로 돌아오기 까지 늘 얼마쯤의 시간이 걸렸던 것이다.
그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날 오후는 당연히 사람이 그리 많지 않았다. 모두 경마에 가 있었다. 리드베터 씨는 경마도 카드놀이도 술도 담배도 좋아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영화를 보고 즐기는 정력이 남아 있었던 것이다.
사람들은 모두 나가느라 바빴다. 리드베터 씨도 그 뒤에 따르려 했다. 그러자 그의 앞좌석에 앉아 있는 남자가 의자에 파묻혀 자고 있는 것이 보였다. 리드베터 씨는 <한 마리의 참새도……> 같은 영화가 상영되는 도중에 잠자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생각하자 화가 났다.
그의 다리가 길을 막고 있었으므로 화난 어느 신사가 잠든 남자에게 말했다.
“실례합니다.”
리드베터 씨는 출구에서 뒤돌아보았다. 무슨 소동이 일고 있는 것 같았다. 수위……그리고 몇 사람……그의 앞좌석 남자는 자고 있었던 게 아니라 틀림없이 술에 취해 있는 것이리라.
그는 좀 머뭇거리다가 그대로 나가 버렸다. 그리하여 그날의 대사건, 세인트 레저에서 85대 1로 이기는 따위의 일보다 훨씬 큰 사건을 놓치고 말았던 것이다.
수위가 말을 걸고 있었다.
“왜 그러십니까, 손님……몸이 불편한 모양이군……여보시오, 여보시오, 왜 그러십니까?”
다른 한 사람이 소리지르며 손을 치웠다. 그리고 새빨갛고 진득한 반점을 보았다.
수위가 낮은 목소리로 외쳤다.
“피다!”
그리고 좌석밑에 뭔가 누르스름한 게 떨어져 있는 것을 보았다.
“아니, 이것은! ab---ABC다!”
< 삽 화 >
캐스트 씨는 리걸 극장에서 나오자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아름다운 밤이다……참으로 아름다운 밤이다!
브라우닝의 시 한구절이 머리에 떠올랐다.
하느님은 하늘에 계시니 세상은 평화롭도다.
그는 이 구절이 좋았다.
그러나 이것은 진실이 아니라고 느낄 때도 흔히 있었다.
그는 혼자서 미소 지으며 자기가 묵고 있는 <블랙스완>까지 걸어갔다.
그는 층계를 올라 침실로 갔다. 그곳은 2층의 좁은 방으로, 포장된 안뜰과 차고를 내려다볼 수 있었다. 방에 들어가자 갑자기 그의 미소가 사라졌다. 소매 끝 가까이에 더러운 것이 묻어 있다. 뭔가 싶어 만지니 그것은……축축하고 뻘건……피였다.
그는 주머니에 손을 넣어 뭔가를 꺼냈다. 길고 가느다란 칼이었다. 그 칼날도 찐득찐득하고 빨갛다.
캐스트 씨는 한참동안 거기에 앉아 있었다. 그 눈은 쫓기는 짐승같이 한 번 방안을 둘러보았다. 그 혀는 열병 환자처럼 입술을 핥았다.
캐스트 씨는 말했다.
“내 죄가 아니야.”
그는 마치 누구와 싸우고 있는 것 같았다. 초등학교 학생이 교장 선생님께 호소하는 것 같았다. 그는 다시금 혀로 입술을 핥았다. 그리고 다시 소매 끝을 확인하듯 만져 보았다.
그 눈은 방 안쪽의 세면기를 보았다.
이윽고 그는 옛날식 주전자에 있는 물을 세면기에 따랐다. 외투를 벗고 소매 끝을 주의깊게 누르며 씻었다.
아! 물이 새빨갛게 되었다!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그는 얼어붙은 듯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문이 열리고 뚱뚱하고 살찐 젊은 여자가 손에 주전자를 들고 들어왔다.
“실례합니다, 손님. 더운 물을 가져왔어요.”
그는 그 때서야 겨우 입을 열었다.
“고맙소……벌써 물로 씻어 버렸소.”
왜 그는 이런 말을 했을까? 곧 여자의 눈이 세면기 쪽으로 갔다.
그는 화가 난 듯 말했다.
“손을……손을 베어서…….”
그리고 나서 침묵이……그렇다, 꽤 긴 침묵이 이어진 다음 겨우 그녀는 말했다.
“네, 그러세요.”
그녀는 문을 닫고 나가 버렸다.
캐스트 씨는 돌로 바뀌어 버린 것 같았다.
마침내 왔다!
그는 두 귀를 세웠다.
사람 목소리, 외침 소리, 층계를 올라오는 발소리라도?
그는 다만 자기 가슴의 고동 소리를 들었을 뿐이었다.
이윽고 그는 별안간 얼어붙은 듯한 부동자세에서 활발한 동작으로 옮아갔다.
그는 외투를 입고 소리나지 않게 문으로 다가가 열었다. 바에서 들려오는 언제나의 소음 말고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는 층계를 기듯이 내려왔다.
아무도 없다. 행운이었다. 그는 층계 밑에서 멈춰 섰다. 어느 쪽으로 가야 좋을까?
그는 결심했다. 복도를 돌진해 가서 마당으로 통하는 문을 지나 밖으로 나왔다. 두 운전자가 자동차를 수리하여 경마의 승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캐스트 씨는 급히 마당을 가로질러 거리로 나왔다.
처음 모퉁이에서 오른쪽으로 돌아……그리고 왼쪽으로……그리고 또 오른쪽으로…….
역으로 가는 위험을 저지를 것인가?
그렇다. 여기에는 군중이 있다. 임시 열차가 있다. 만일 운이 좋으면 잘될 것이다. 만일 운이 좋다면…….
< 삽 화 >
크롬 형사는 리드베터 씨의 흥분된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형사님, 생각해 보면 심장이 멈출 것 같습니다. 그놈은 줄곧 내 옆에 앉아 있었을 테니까요!”
크롬 형사는 리드베터 씨의 심장 상태에 대해서는 아주 무관심하게 말했다.
“분명히 말씀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그 사나이는 끝날 무렵에 나갔단 말입니다. 그 영화…….”
리드베터 씨는 반사적으로 중얼거렸다.
“<한 마리의 참새도……>입니다. 캐서린 로열의.”
“그는 당신 앞을 지나, 그리고 헛디뎌…….”
헛디딘 체해 보인 겁니다. 지금은 알겠습니다. 그리고 나서 모자를 주우려고 앞좌석 쪽으로 몸을 굽혔지요. 그때 아마 그 가엾은 사람을 찔렀을 겁니다.“
“아무 소리도 듣지 못했습니까? 부르짖는 소리라든지, 신음 소리라든지?”
리드베터 씨는 캐서린 로열의 커다란 쉰 목소리밖에 듣지 못했지만 상상력을 발휘해 신음 소리를 하나 꾸며냈다.
크롬 형사는 그 신음 소리를 곧이듣고 상대방에게 다음 말을 재촉했다.
“그리고 나서 그는 나갔습니다.”
“그 남자의 생김새를 말할 수 있습니까?”
“아주 컸습니다. 적어도 6피트는 되었을 겁니다. 큰 남자였지요.”
“흰 편입니까, 검은 편이었습니까?”
“저……분명치 않습니다. 머리가 벗겨졌던 것 같습니다. 인상이 아주 나쁜 녀석이었지요.”
“다리를 절지 않았습니까?”
“그렇군요. 네, 그 말을 듣고 보니 절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검은 편이었으니 혼혈이었을지도 모릅니다.”
“그 전에 불이 켜졌을 때는 자리에 있었습니까?”
“아니오, 영화가 시작되고 나서 들어왔습니다.”
크롬 형사는 고개를 끄덕이고 공술서에 서명시킨 다음 리드베터 씨룰 돌아가게 했다.
그는 비관적으로 말했다.
“저런 사람은 좋지 않은 증인입니다. 조금만 유도하면 어떻게든 말하지요. 문제의 남자가 어떤 생김새였는지 전혀 알고 있지 못합니다. 수위를 부릅시다.”
수위는 긴장해서 군대식으로 들어와 부동자세로 앤더슨 서장 쪽을 보았다.
“그럼, 제임즈 씨. 당신 이야기를 들어 봅시다.”
제임즈 씨는 허리를 굽혔다.
“네, 알겠습니다. 영화가 끝났을 때였습니다. 몸이 불편한 손님이 있다는 말을 듣고 가보니 그 손님은 2실링 4펜스짜리 좌석에 파묻혀 있었지요. 다른 손님들이 주위에 서 있었습니다. 그 손님은 몸이 불편한 것 같았습니다. 곁에 서 있던 손님 한 분이 몸이 불편한 소님의 외투에 손을 갖다 대는 게 내 주의를 끌었습니다. 피였습니다. 그 손님은 분명히 죽어 있었지요, 칼에 찔려서, 그리고 나서 좌석 밑에 떨어져 있는 철도 안내서를 보았습니다. 실수가 없도록 건드리지 않고 곧바로 경찰에 사건이 일어났다고 신고했습니다.”
“잘하셨습니다. 당신은 아주 훌륭하게 행동하셨습니다.”
“고맙습니다.”
“그 5분쯤 전 2실링 4펜스짜리 좌석에서 나가는 사람을 보지 못하셨습니까?”
“많이 있었습니다.”
“그들의 인상을 말씀하실 수 있습니까?”
“아주 어렵군요. 한 분은 제프리 패널 씨였습니다. 그리고 젊은 분인 샘 베이커가 부인을 데리고 나갔습니다. 그 밖에는 특히 기억에 남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거 유감이군요. 좋습니다, 제임즈 씨.”
“네.”
수위는 인사를 하고 나갔다.
앤더슨 서장이 말했다.
“의사의 자세한 보고는 들었네. 이번에는 피해자를 처음 발견한 남자를 불러 주게.”
그때 경관 한 사람이 들어와 경례했다.
“에르큘 포아로 씨와 또 다른 한 분이 오셨습니다.”
크롬 형사가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래, 좋아. 들어오려면 오라고 해.”
< 던캐스터 살인 >
포아로 바로 뒤에 따라 들어갔기 때문에 나는 크롬 형사가 하는 말의 뒷부분을 들을 수 있었다.
그도 서장도 난감하여 침울해 있는 듯 보였다.
앤더슨 서장이 머리숙여 인사하며 말했다.
“잘 오셨습니다, 포아로 씨. 또 당했습니다.”
아마도 그는 크롬의 말을 우리가 들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역시 ABC 살인입니까?”
“그렇습니다. 대담하기 이를 데 없지요. 뒤에서 덮치듯 등을 찔렀습니다.”
“이번에는 찔렀습니까?”
“그렇습니다. 방법을 좀 달리했지요. 머리를 치고, 목을 조르고, 이번에는 칼을 썼습니다. 아주 재간 많은 녀석입니다. 보시고 싶으시면, 여기 의사의 보고서가 있습니다.
그는 포아로 쪽으로 서류를 밀어 보내며 덧붙였다.
“ABC가 피해자의 발치 쪽에 있었습니다.”
포아로가 물었다.
“피해자의 신원은 파악됐습니까?”
“알아냈습니다. ABC 녀석, 이번에는 좀 실수를 했습니다. 글쎄, 그것이 우리들에게 위안이라면 위안일 수도 있습니다만, 살해된 건 얼스필드(Earlsfield), 조지 얼스필드라는 남자입니다. 직업은 이발사지요.”
“이상하군요.”
서장이 암시를 주었다.
“글자를 하나 건너뛰었는지도 모르지요.”
내 친구는 이상한 듯 고개를 흔들었다.
크롬 형사가 말했다.
“다음 증인을 부를까요? 집에 가고 싶어합니다만.”
“그렇군……그렇게 하게.”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나오는 개구리의 하인을 꼭 닮은 중년 신사가 안내되어 들어왔다. 그는 몹시 흥분한 나머지 목소리를 높이고 있었다. 그는 날카롭게 말했다.
“이토록 놀란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나는 심장이 약합니다. 아주 약합니다. 하마터면 죽을 뻔했지요.”
크롬 형사가 물었다.
“성함은?”
“다운즈(Downes)입니다. 로저 이매누얼 다운즈입니다.”
“직업은?”
“하이필드 남학교의 교장입니다.”
“그럼, 다운즈 씨, 사건을 한 번 들어봅시다.”
“나는 간단히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영화가 끝나 나는 좌석에서 일어났습니다. 내 왼쪽 좌석은 비어 있었지만, 그 옆에 어떤 사람이 앉아서 자고 있는 것같이 보였습니다. 그 사람의 다리가 방해되어 지나갈 수 없었기 때문에 좀 비켜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래도 그는 움직이지 않아서 나는 다시……네, 좀더 큰소리로 부탁했습니다. 그런데도 아무 대답이 없었지요. 나는 그 사람의 어깨를 잡아 흔들었습니다. 그러자 몸이 좌석에 한층 더 파묻혀 버렸기 때문에 아주 깊이 잠들었거나 몸이 불편한 게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나는 ‘이분이 아픈가 봅니다. 수위를 불러 주십시오.’ 하고 소리쳤습니다. 수위가 왔습니다. 내가 그 사람의 어깨에서 손을 떼자 손이 빨갛게 젖어 있었습니다……나는 그 사람이 칼애 찔려 죽었음을 알았습니다. 그때 수위가 ABC 철도 안내서를 봤지요……여러분, 그 순간이 얼마나 무섭던지! 어떻게 되는 게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나는 내내 심장이 나빴으니까요.”
앤더슨 서장은 아주 신기한 듯 다운즈 씨를 보고 있었다.
“당신이 얼마나 행운아였는지 아시겠지요?”
“압니다. 다행히 심장마비를 일으키지 않았지요!”
“아직 내 말뜻을 모르는 모양이군요, 다운즈 씨. 당신은 자리를 하나 비워두고 앉아 계셨다고 했지요?”
“처음에는 살해된 사람 바로 옆에 앉아 있었습니다만, 빈 자리 뒤에 앉으려고 하나 옮겼지요.”
“당신은 피해자와 키가 비슷합니다. 게다가 같은 털목도리를 하고 계셨지요.”
다운즈 씨는 긴장하며 말하기 시작했다.
“잘 기억하지 못합니다만…….”
앤더슨 서장이 말했다.
“제 얘기는, 그 점이 당신에게 행운이었다는 겁니다. 아무튼 범인은 당신 뒤를 밟다가 잘못을 저지른 셈입니다. 그는 잘못 알고 다른 사람의 등을 찔렀습니다. 저는 무엇이든 걸겠습니다. 다운즈 씨, 만일 그 칼이 당신을 노리고 있었던 게 아니라고 한다면 말입니다!”
다운즈 씨의 심장은 처음 시련에는 견디어 냈으나 이번에는 어림도 없었다. 다운즈 씨는 의자 속에 파묻혀 입을 벌린 채 얼굴이 보랏빛이 되어 버렸다. 그는 헐떡였다.
“물……물……”
물컵이 와서 그것을 마시고 있는 동안 겨우 얼굴빛이 본래대로 돌아왔다. 그는 말했다.
“나를? 나를 왜 노립니까?”
크롬 형사가 말했다.
“아마도 그렇지 않을까 하는 겁니다. 그 이상은 달리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당신 말은 그러니까……음, 그 사나이……그……그 인간의 탈을 쓴 악마……피에 굶주린 미치광이가 내 뒤를 밟으며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는 말입니까?”
“아무래도 그런 것 같습니다.”
교장 선생은 화를 내며 말했다.
“하지만 대체 어째서 나를?“
크롬 형사는 왜 당신이어서는 안 되느냐고 하고 싶은 것을 참으며 말했다.
“유감스럽지만 미치광이가 하는 짓은 그 이유를 따져 봐야 헛일입니다.”
다운즈 씨는 가슴을 쓸어내리면서 말했다.
“아, 놀랐습니다.”
그는 일어섰다. 그는 갑자기 나이를 먹어 노쇠해 버린 것 같이 보였다.
“더 볼일이 없다면 돌아가고 싶습니다. 아무래도 몸이 좋지 않은 것 같습니다.”
“네, 좋습니다, 다운즈 씨. 경관을 시켜 모셔다 드리도록 하지요, 만일의 경우를 위해서.”
“아, 아니……아니, 괜찮습니다. 그럴 필요없습니다.”
앤더슨 서장은 무뚝뚝하게 말했다.
“그럼, 좋도록 하십시오.”
그 눈은 옆을 보면서 말없이 크롬 형사에게 묻고 있는 것 같이 보였다. 크롬 형사도 다른 사람이 알아차리지 못하도록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다운즈 씨는 벌벌 떨면서 나갔다. 앤더슨 서장이 말했다.
“눈치채지 못해 다행이었어. 두 사람이었지, 음?”
“네, 이곳의 라이스 형사가 수배해서 집 쪽을 감시하기로 되어 있습니다.”
포아로가 물었다.
“ABC가 자신의 실수를 알게 되면 다시 범행을 저지르리라고 생각합니까?”
앤더슨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있을 수 있는 일입니다. ABC는 순서를 지키는 녀석인 것 같으니가요. 순서대로 되지 않으면 화가 나겠지요.”
포아로는 생각깊게 고개를 끄덕였다.
앤더슨 서장이 초조해 하며 말했다.
“녀석의 생김새를 알 수 있으면 좋을 텐데요. 여전히 짐작도 되지 않으니.”
포아로가 말했다.
“정말입니다.”
“그렇게 생각합니까? 그건 사실 그렇지요. 정말이지 누군가 머리에 눈이 있는 사람은 없을까 여겨질 정도입니다.”
포아로가 말했다.
“뭐, 참는 수밖에 없지요.”
“자신이 있으신 것 같군요, 포아로 씨. 무슨 근거라도 있습니까?”
“있습니다, 앤더슨 서장. 녀석은 지금까지 실수를 하지 않았습니다만, 이제 곧 하게 될 겁니다.”
“그 정도의 이야기라면……:
서장은 콧소리를 내며 입을 열려는데 방해물이 나타났다.
“<블랙스완>의 볼 씨가 젊은 여자분과 함께 왔습니다. 얼마쯤 참고가 될 일을 이야기하겠다고 합니다.”
“들여보내게, 들여보내. 참고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좋아.”
<블랙스완>의 볼 씨는 몸집이 크고 머리가 둔해 보이는 둔중한 남자였다. 그는 맥주 냄새를 심하게 풍기고 있었다. 그와 함께 온 동그란 눈의 뚱뚱한 젊은 여자는 분명 흥분해 있었다.
볼 씨는 천천히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귀중한 시간을 방해하는 게 아니라면 좋겠습니다만, 이 계집애 메리가 뭔지 알려 드릴 게 있다고 해서……”
그래도 메리는 아무렇지 않은 듯 소리죽여 웃고 있었다.
앤더슨 서장이 말했다.
“아가씨, 무슨 일이오? 아가씨 이름은?”
“메리예요, 메리 스트라우드예요.”
“그럼, 메리 양, 말해 보오.”
메리는 동그란 눈을 주인 쪽으로 보냈다. 볼 씨가 거들었다.
“손님방에 더운 물을 가져다 드리는 게 이 아이의 일이지요. 우리 집에는 손님이 여섯 분쯤 계셨습니다. 경마에 온 손님과 장사로 오신 분들이지요.”
앤더슨 서장이 초조해 하며 다그쳤다.
“그래서?”
볼 씨가 말했다.
“그럼, 이제 네가 말해. 무서워할 것 없어.”
메리는 가쁜 숨을 몰아쉬고 신음까지 하면서 숨이 끊어질 듯 말을 꺼냈다.
“문을 두드렸는데 대답이 없었어요. 다른 때는 손님께서 ‘들어와요’하지 않으면 들어가지 않습니다만, 아무 말도 없기에 들어가 보니 손을 씻고 있었어요.”
그녀는 잠시 사이를 두고 깊은 숨을 쉬었다.
앤서슨 서장이 말했다.
“계속하오, 아가씨.”
메리는 주인 쪽을 보았다. 그리고 그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자 거기에서 용기를 얻은 듯 다시 말하기 시작했다,
“‘실례합니다, 손님. 더운 물을 가져왔어요.’하고 제가 말하자 ‘고맙소……벌써 물로 씻어 버렸소’라고 대답했어요. 그래서 무심코 세면기 안을 보니, 글쎄 굉장했어요, 속이 새빨갰지요.”
앤더슨 서장이 날카롭게 말했다.
“새빨갰다고?”
볼 씨가 끼어들었다,
“이 애가 그 남자는 외투를 벗어 소매 끝을 손에 들고 있었는데, 그것이 푹 젖어 있더라는 거예요. 응, 그렇지?”
“네, 그래요, 아저씨.”
그리고 아가씨는 다시 이야기를 계속했다.
“그리고 그 손님 얼굴을 보니 아주 이상했어요. 너무나도 이상해서 전 깜짝 놀라 버렸지요.”
앤더슨 서장이 다시 날카롭게 물었다.
“그게 몇 시였지?”
“5시 15분 좀 지났었다고 생각돼요.”
앤더슨 서장이 덤빌 듯 말했다.
“세 시간이나 전의 일이란 말이오? 왜 곧바로 말하러 오지 않았소?”
볼 씨가 말했다.
“그걸 그때 바로 듣지 못해서요. 또다시 살인이 있었다는 뉴스를 듣고 나서야 이 애가 세면기 속의 것은 피였을지도 모른다고 떠들어대서, 내가 무슨 일이냐고 물어 겨우 이 사실을 알았던 겁니다. 이상하게 생각되어 2층으로 올라가보니 방에는 아무도 없었지요. 그래서 몇 사람에게 물어보자 가운데 마당에 있던 젊은이가 거기를 몰래 빠져나가는 한 사람을 봤다는 겁니다. 인상을 물어보니, 역시 그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메리가 경찰에 알리는 게 좋겠다고 아내에게 말했습니다. 그런데 메리도 아내도 찬성하지 않았기 때문에 내가 함께 오게 된 겁니다.”
크롬 형사는 종이를 한 장 그쪽으로 밀어 놓으며 말했다.
“그 남자의 인상을 말해 주시오. 되도록 빨리, 시간이 없으니까요.”
“중키에 허리가 구부정하고 안경을 쓰고 있었어요.”
“옷차림은?”
“검은 계통의 양복을 입고 테 넓은 중절모를 쓰고 있어 초라한 느낌이었지요.”
그녀는 더 이상 보태지 못했다.
크롬 형사는 캐묻지 않았다. 여기저기로 전화가 걸려졌지만, 형사도 서장도 그리 낙관하고 있지 않았다.
크롬 형사는 그 남자가 가운데 마당을 빠져나갈 때 가방도 수트케이스도 갖고 있지 않았다는 사실을 생각해 냈다.
그는 말했다.
“거기에 단서가 있어.”
두 경관이 <블랙스완>으로 파견되었다.
볼 씨는 우쭐한 기분과 남에게 인정받은 인물이 된 듯한 만족감으로, 그리고 메리는 얼마쯤 울듯한 기분이 되어 그들을 따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