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 17:18]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 같이 나도 저희를 세상에 보내었고...."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 같이 나도...보내었고 - 제자들의 사역은 그리스도의 사역에 근거한다. 강조법으로 사용된 '나를'과 '나도' '보내심'의 상관 관계를 명확히 밝혀주고 있다. 즉 예수가 성부로부터 사명을 부여받아 세상에 오심같이 자신도 역시 제자들에게 서명을 주어 세상에 보내신다.
예수가 성부에게서 받은 사명을 제자들도 수행하게 된다. 그렇지만 제자들 스스로 그 사명을 수행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말씀을 근거로 활동하시는 성령에 이끌림을 받을 때에야 제자들은 그 사명을 온전히 수행할 수 있다. 특히 혹자는 본 구절 가운데서 '보내신 것같이'가 방법에 있어서 유사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인격의 유사성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본절에서 두번 반복된 '보내다'의 헬라어 '아포스텔로'는 '펨포'와는 달리 어떤 사명을 부여해서 보내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보내신 것같이'는 사명을 주는 방법에서 뿐 아니라 보내시는 자의 인격이 동일함을 가리킨다. 한편 본절에서 두번 언급된 '보내다'는 헬라어 본문에서 둘 다 부정과거형으로 사용되었다. 그렇다면 여기서 하나의 문제가 발생한다. 즉 제자들이 사명을 부여받아 보냄을 받아 활동한 것은 오순절 성령 강림 이후의 일이다.
그런데 예수는 제자들에게 이미 이전에 사명을 주어 보내셨던 것처럼 말씀하시기 때문에 모순된 진술을 하고 계시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예수는 공생애 초기에 제자들에게 사도적 임무를 부여하셨다. 그렇지만 이 임무는 지속적인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예수는 20:21에서 부활하신 후 제자들에게 다시 현재형을 사용하시어 '보내노라'고 말씀하셨다.
본절은 과거에 제자들에게 부여하신 사도적 임무와 직접적인 연관이 있고 더 나아가서 제자들이 이 후에 그 사명에 따른 삶을 살게 될 것을 암시한다. 구약의 한 예로 다윗은 왕으로서 인정되는 기름 부음을 받았으나 실제로 왕으로서의 임무를 시작한 것은 몇 년이 지나서야 가능했다.세상에 - 예수는 자신 뿐 아니라 제자들이 사명을 부여받은 사역의 장소를 지칭하여 '세상'이라는 말을 언급하셨다.
요한에게 있어서 '세상'은 하나님의 나라와 대립된 영역을 뜻하며 어떤 때에는 사단에 의해 대표되는 집합적인 인격체로 묘사되기도 한다(14:27). 이처럼 요한은 '세상'을 주로 그리스도와 대립된 것으로 설명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 '세상'을 사랑하시어 독생자를 보내셨다.이런 점에서 예수는 이 사랑의 계명을 수행하기 위해 세상에 오셨으며 또한 자기 제자들에게도 동일한 계명을 주셔서 세상에 보내셨다.
예수는 제자들이 서로 하나가 되고 또한 그 안에서 서로 사랑해야 한다고 명령하시고, 기도에서도 제자들과 그들의 말을 통해서 예수를 믿게 될 사람들을 위해 간구하신다. 이와 같은 말씀들은 자기에게 속한 사람들에게 대한 사랑을 강조한 것이지만) 제자들이 세상으로 가야 한다는 사명도 함께 강조되고 있다.
이 사명에 따라 세상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룩하는 사랑의 공동체로 초대되어야 한다. 따라서 세상을 향한 제자들의 파송은 모든 성도들에게도 세상을 그리스도에게로 초대하는 동일한 사명을 갖게 하는 의미를 지닌다..
[요 17:19]"또 저희를 위하여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하오니 이는 저희도 진리로 거룩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이다..."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하오니 - 예수는 10:36에서 자신이 성부에 의해 거룩하게 되심을 언급하셨으나 본 구절에서는 자기 스스로 거룩하게 하신다는 표현을 사용하신다. 그렇지만 여기에 어떤 모순이 있는 것은 아니다. 70인역(LXX)에서 '거룩하게 하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하기아조'는 다음 두 경우에 사용되었다.
(1) 제사 임무를 수행하는 제사장들을 성별하는 경우에 사용하였으며 (2) 또 하나는 희생 제물에 대한 성별을 언급할 때 사용되었다. 본절에서 예수의 거룩하게 하심은 두 개의 의미를 모두 가졌는데, 인류의 죄를 대속하시는 희생 제물이 되심과 동시에 그 예식을 집행하는 대제사장이 되신다는 뜻이다.
예수의 거룩하게 하심은 갈보리의 언덕을 바라보는 것이며 그의 죽음을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혹자는 예수께서 '내가 내 자신을 아버지께 거룩하게 하여 드린다'라고 말씀하지 않는다는 것을 근거로 하여 구약의 희생적 개념에 적용하는 것을 반대한다.그러나 그는 자의적인 죽음과 속죄적 죽음으로서의 거룩하게 하심을 부인하지는 않는다.
바렛은 '위하여'라는 말에 강조점을 두어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또는 '많은 사람을 위한 대속물' 등과 같은 성만찬적인 용어와 같은 맥락에서 해석한다. 예수의 거룩하게 하은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사랑과 같은 자의적인 대속적 죽음이다. 혹자는 이를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그리스도의 '자아 성화'(自我聖化)의 비밀이라고 설명했다.
저희도 진리로 거룩함을 얻게 하려 함 - 예수의 죽음은 제자들의 죄를 씻는 일차적인 목적에 머물지 않고 '히나'가 이끄는 또 하나의 목적을 제시한다. 그 목적은 제자들의 복음 사역을 위해 그들을 거룩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제자들의 거룩은 예수와 같은 방법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제자들의 성결은 아버지의 은사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것이다.
예수는 제자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며 자신의 사역을 계승하여 지상에서 그 사역을 감당할 수 있도록 거룩하게 되기를 간구하면서 그들을 위해 죽음을 맞는다. 한편 본 구절에서 '진리'는 17절 상반절의 '진리'와는 달리 관사가 없다. 이를 전치사 '엔'과 함께 부사적 용법으로 해석한다면 그 뜻은 '진실로'가 된다.
그러나 이 해석을 취할 경우 본 구절의 의미가 상반절과 잘 어울리지 않는다. 따라서 여기서 '진리'는 17절 상반절의 '진리'와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으나 관사가 생략된 것으로 이해된다. 결국 제자들은 예수가 자신을 거룩하게 하시는 것과는 다른 방법, 즉 예수에 의해 선포된 아버지의 말씀으로 거룩하게 되는 것이다.
[요 17:20]"내가 비옵는 것은 이 사람들만 위함이 아니요 또 저희 말을 인하여 나를 믿는 사람들도 위함이니...."
이 사람들만 - 이 말은 단순히 예수를 믿는 사람들과 분명하게 구분되는 사람들로서 예수의 열 한 제자들을 가리킨다. 바렛은 이 사람들을 예수와 함께 만찬에 참석했던 사람들이라고 주장하지만 가룟 유다는 제외시켰다. 그런데 본장의 기도가 만찬에서 행해진 것인지 분명하지 않으나 18:1을 볼 때 만찬에서 행해진 것으로 추정된다.
공관복음서는 예수가 만찬 후 곧바로 겟세마네 동산으로 가신 것으로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저희 말을 인하여 - '말'(로고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제자들에게 계시된 하나님의 메시지 전체를 드러내는 복음적인 가르침을 의미한다. 이런 의미에서 제자들에 의하여 전달된 메시지 역시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이며 본질적으로 '진리'이다.
제자들이 거룩하게 되는 것은 원문상 진리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반면 성도들의 믿음은 제자들의 말을 '통하여' 이루어질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제자들의 믿음이 예수께서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것에서 기인하듯이 그들의 보내심을 받음을 통하여 믿음을 가진 새로운 신자들이 생겨날 것이다.
예수께서는 '내가...내 교회를 세우리니'라고 말씀하실 때 제자들에 의하여 이루어질 지상 공동체로서의 교회를 이미 바라 보고 있었다. 그리고 바울은 복음 전파자의 사명을 강조하기 위해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라고 진술했다. 이처럼 교회의 기초는 말씀이며, 이 말씀이 전파될 때 교회는 형성된다.
믿는 사람들 - '믿는 사람들'은 현재분사형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미래적 의미로 파악하는 것이 타당할 것 같다. 미래적 의미를 현재 분사로 나타내는 용법은 히브리어 또는 아람어 어법의 영향을 받은 것이므로 이 말은 '믿게 될 자들'로 번역하는 것이 더 분명한 뜻을 나타낸다. 그래서 많은 영역 성경들은 미래형으로 번역했다.
[요 17:21]"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아버지께서 내 안에...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 본절에는 '히나'가 이끄는 세 가지의 목적절이 나온다. 이 세 목적절은 모두 20절의 '내가 비옵는 것은' 에 연결된다. 본문은 그중 첫번째 '히나'절로서 성도 공동체의 연합을 성부와 성자의 일체성에 근거하여 간구하는 내용이다.
아버지는 아들 안에 있어 그의 일을 하시며 또 아들은 아버지 안에 있으므로 두분은 하나로 존재하고 일하신다. 예수는 제자들이 하나가 되도록 기도하셨듯이 저들의 증거를 통해 얻게 될 사람들, 즉 교회 역시 하나가 되도록 기도하신다. 그러나 하나됨이 의미가 제도적이거나 조직적인 차원에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
교회의 구성원 모두가 주체성을 상실한 채 기계적으로 통합되는 것을 의미하지도 않는다. 아버지와 아들이 존재 양식에 있어서 각각 독립적이나 그 본질에 있어서는 완전한 일체를 이루듯이 교회내의 각 지체들도 나름대로의 다양한 특성을 지니는 가운데 통일성을 띠는 것이다.
. 그러나 성도들이 하나님 안에 있는 것은 아들이 아버지 안에 있는 것과는 질적 측면에서 엄연히 구분된다. 우리 안에 있게 하사 - 이는 두번째 '히나'가 이끄는 목적절이다. 예수는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라는 사실을 전제하고서 어버지와 아들을 하나로 묶어 '우리 안에' 이는 역으로 아버지와 아들도 우리들 안에와서 거처를 삼으시고 함께 하신다는 점을 시사한다
세상으로...믿게 하옵소서 - '히나' 가 이끄는 세번째 목적절은 앞의 두 목적절의 결과로 등장한다. 성도 공동체가 하나님과 그리스도 안에서 일체를 이룸으로써 세상이 이를 통해 믿음을 갖게 되기를 간구하시는 내용이다. 물론 이는 세상 전체가 믿음을 갖게 되리라는 뜻으로 이해될 수는 없다.
다만 세상 사람들 중에는 지금은 비록 불신 가운데 있지만 장차 믿음과 구원에 이르게 될 자들도 있다는 뜻으로 이해된다. 세상을 감동시키는 성도들의 하나됨은 성도들의 배후에서 하나가 되도록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불가항력적인 능력과 모든 은혜에 의한 것이다. 결국 성도들은 예수와 하나님 안에 거하는 풍성한 은혜와 연합한 증거들을 드러냄으로써 세상을 믿음으로 인도하는 사역을 감당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