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orges Rouault (1871~1958)
The Workman's Apprentice (Self-Portrait)〉(1925)
파리에 있는 Musee National d'Art Moderne 소장
Self-Portrait 1926
1871. 5. 27 프랑스 파리~1958. 2. 13 파리.
파리 출생. H.마티스, P.피카소 등과 함께 20세기 전반을 대표한다.
가구 세공사의 아들로 태어나 어려서부터 예술적 재능을 나타내어, 10세 때부터 그림공부를 시작하였다.
그러나 가난한 집안 형편 때문에 14세 때부터 공예미술학교 야간부에 다니면서 주간에는 스테인드 글라스 업자의 견습공으로 일하였다.
유년시절의 경험은 후에 루오의 오묘한 색채발현에 큰 도움을 주었다.
90년 국립미술학교에 입학, 엘리도로네(1828∼91)와 G.모로에게 사사하였다.
그곳에서 마티스, A.마르케 등과 알게 되었고, 서로 자유로이 자기의 재능을 계발해나갔다.
93년 최초의 대작 《연자매 돌리는 삼손》, 94년 《어린 그리스도와 박사들》을 발표하였다.
이때부터 성서·신화를 주제로 한 독자적인 작품이 나오기 시작하였으나, 정신·경제·건강면에서 고난의 시기가 계속되어
가톨릭에 기울었다.
1903년경부터 모로가 국가에 기증한 아틀리에에 만들어진 모로미술관의 관장이 되었다.
모로풍인 종래의 그의 작풍은 이때부터 변하기 시작하여, 격렬하고 동적인 분방한 선과 심청색(深靑色)을 주조로 한
수채화나 과시화(고무 수채화)를 주로 그리게 되었다.
주제도 창부·어릿광대 등 사회의 밑바닥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을 등장시켜, 인간의 내면 깊은 곳을 바라보려는 경향이
점점 짙어졌다.
1908년경부터 재판관이나 재판의 정경을 그려, 악덕·위선에 대한 혐오를 격렬한 색면(色面)과 굵은 선으로 표현했다.
10년 첫 개인전을 열었다. 그가 다시 종교적인 테마로 돌아선 것은 13년경부터인데, 이에 관한 판화제작에 몰두하여
명작 《미제레레:Miserere》(1917∼27)의 연작(連作)을 그렸다.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독자적인 것으로 그의 예술이
확립되고, 20세기의 유일한 종교화가로 전개되기 시작한 것은 이 시기부터이다.
29년 S.디아길레프의 발레 《방탕한 아들》의 장치와 의상을 담당하였고, 48년 아시성당의 스테인드 글라스 제작에
종사하였다.
이 밖에 꽃의 정물도 잘 그렸으나, 어느 작품에서나 독자적인신비성은 순수의 적·황·녹을 주로 하는 중후한 마티에르와
자유롭고 힘찬 선의 울림 속에서 일종의 엄숙감을 자아내게 한다.
그림이 점점 순수한 회화성을 강조하기 시작한 20세기에 있어서 루오는 끝까지 인간애의 정신을 관철시켰다.
TEACH US HOW TO PRAY - John Wesley
Jesu,thou sovereign Lord of all, The same through one eternal day, Attend thy feeblest followers’ call, And O instruct us how to pray! Pour out the supplicating grace, And stir us up to seek thy face. We cannot think a gracious thought, We cannot feel a good desire, Till thou,who call’dst a world from nought, The power into our hearts inspire; And then we in the Spirit groan, And then we give thee back thine own. To help our soul’s infirmity, To heal thy sin-sick people’a care, To urge our God-commanding plea, And make our hearts a house of prayer, The promised intercessor give, And let us now thyself receive.
Jesus bleibet meine Freude
"이 사람들이 바로 나요 우리들이요 인간들이다."
A. 쉬아레스의 성시(성시)를 근거로 그린 미제레레(비애). 루오의 작품경향을 잘 보여주는 판화 연작(連作)
인간 군상들이 그리스도의 자비와 은총을 갈구하며 궁극적으로 고통에서 벗어나 구원으로 나아가려는 갈망을 읽을 수 있다.
또한 육체적 결함과 고통이 정신적 가치와 위상에는 손상을 주지 않음은 물론이고 오히려 그것이 더 인간을 위대하게 하고 견고하게 함을 일깨워 준다.
쉬아레스는 "예술가란 사랑을 가장 아름다운 형태로 만들어 고통 받는 이에게 나누어주는 사람"이라고 말한 적이 있는데 이런 면에서 둘은 서로 잘 통했으리라.
이 판화들을 보니 갑자기 84년 당시 '덕수궁미술관'에서 열렸던 '루오전'이 생각난다. 그 때 너무나 큰 감동을 받아 지금도 기억이 생생한 판화 연작 '때론 눈먼 이가 눈뜬 이를 인도하다'를 여기서 다시 보니 죽마지우를 만난 듯 반갑다.
가장 높은 단계의 영성은 가장 밑바닥 현실을 반영하는 것이라는 그의 예술철학이 바로 그의 독창적 예술을 낳았고 그만의 개성과 천재성을 구축하는 토양이 되었다. 그의 종교화는 종교적 틀에서 벗어난 세속적 종교화다. 그래서 사회에서 손가락질 당하고 외면된 사람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We Think We Are Kings from Miserere (by Andre Suares), (Nous croyant rois from Miserere) 1923
Negro Porter, from the series "Les Réincarnations du Père Ubu" 1918
Petite Banlieue: Le Chien devant la Porte 1929
작품명 : 미세레레 - 앞 못보는 사람도 때로는 눈 뜬 사람을
위로했다. 판화
작품명 : 미세레레 - 학대받고 능욕당했지만 그는 입을 열지 않았다, 판화
나를 이름답게 하는기도
날마다 하루 분량의 즐거움을 주시고 일생의 꿈은 그 과정에 기쁨을 주셔서 떠나야 할 곳에서는 빨리 떠나게 하시고 머물러야 할 자리에는 영원히 아름답게 머물게 하소서.
누구 앞에서나 똑같이 겸손하게 하시고 어디서나 머리를 낮춤으로써 내 얼굴이 드러나지 않게 하소서.
마음을 가난하게 하여 눈물이 많게 하시고 생각을 빛나게 하여 웃음이 많게 하소서.
인내하게 하소서. 인내는 잘못을 참고 그냥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깨닫게 하고 기다림이 기쁨이 되는 인내이게 하소서.
용기를 주소서. 부끄러움과 부족함을 드러내는 용기를 주시고 용서와 화해를 미루지 않는 용기를 주소서.
음악을 듣게 하시고 햇빛을 좋아하게 하시고 꽃과 나뭇잎의 아름다움에 늘 감탄하게 하소서.
누구의 말이나 귀 기울일 줄 알고 지켜야 할 비밀은 끝까지 지키게 하소서.
사람을 외모로 평가하지 않게 하시고 그 사람의 참 가치와 모습을 빨리 알게 하소서.
사람과의 헤어짐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되 그 사람의 좋은 점만 기억하게 하소서.
나이가 들어 쇠약하여질 때도 삶을 허무나 후회나 고통으로 생각하지 않게 하시고 나이가 들면서 찾아오는 지혜와 너그러움과 부드러움을 좋아하게 하소서.
삶을 잔잔하게 하소서. 그러나 폭풍이 몰려와도 쓰러지지 않게 하시고 고난을 통해 성숙하게 하소서.
건강을 주소서. 그러나 내 삶과 생각이 건강의 노예가 되지 않도록 하소서.
질서를 지키고 원칙과 기준이 확실하며 균형과 조화를 잃지 않도록 하시고 성공한 사람보다 소중한 사람이 되게 하소서.
언제 어디서나 사랑만큼 쉬운 길이 없고 사랑만큼 아름다운 길이 없다는 것을 알고 늘 그 길을 택하게 하소서.
-삶의 기도중에서-
▲ '트리오(좌)' 1943 유채 72×87cm 릴미술관 소장. '푸른색 배경의 피에로(우)' 1943. 유채 59×45cm 루오재단 파리. 이번 전시품 중 가장 돋보이는 작품들
'트리오(세 명의 광대)'와 '푸른색 배경의 피에로'는 보면 그런 점을 확연히 드러난다. 루오는 광대나 피에로를 인간사를 벗어난 자유의 상징인 동시에 수난을 당하는 그리스도의 또 다른 모습으로 보았다. 순간순간 목숨을 걸고 관객을 즐겁게 하기 위해서 혼신을 다하는 모습은 마치 성자의 모습과 닮아 있다.
루오는 그리스도를 많이 그렸지만 위의 두 작품에서 보듯 고단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끝없는 동정과 애정을 보낸다. 그건 그가 어린 시절 가난하여 14세 때부터 공예미술학교 야간부에 다니면서 주간에는 '스테인 글라스' 수공업 견습공으로 일했던 경험이 작용했는지 모른다.
▲ '예수 그리스도와 어부들(1937)' 유채 68.5×127.5cm 파리 시립미술관 소장
'예수 그리스도와 어부들' 이런 작품 앞에 서면 고개가 절로 숙여진다. 종교를 떠나서 그 장엄하고 경건한 종교적 풍경에 압도당한다. 이 그림의 배경이 되는 이야기 즉 예수가 일자무식의 어부를 제자로 삼았다는 점은 루오 그림의 주제와도 맥이 닿는다. 호수처럼 푸른빛과 노을처럼 붉은빛이 대조를 이루어 신비하고 신령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Fille de Cirque
TITLE: August from Cirque de L'etoile Filant CATEGORY: Prints MATERIALS: Aquatint etching SIZE: h: 12 x w: 8 in / h: 30.5 x w: 20.3 cm
TITLE: Madame Louison from Cirque de L'etoile Filant WORK DATE: 1935 CATEGORY: Prints MATERIALS: Aquatint etching SIZE: h: 12 x w: 8 in / h: 30.5 x w: 20.3 cm
긴 고통의 낡은 변두리에서
受難(수난)에서(풀에 샘물이 속삭이듯)
그리스도교적 夜景
그리스도 안에 모여
1951년, 교황 비오 12세는 80세가 된 조르주 루오에게 그레고리오 대교황 훈장을 수여했다. 교황 훈장은 교회에 공헌한 평신도들에게 주어지는 것으로, 훈장 수여는 루오의 예술 세계에서 짙게 드러나는 종교적 메시지를 교회가 인정하는 모습의 하나로 볼 수 있다.
미술평론가들은 루오를 명백히 종교미술 화가로 일컫진 않는다. 그는 교리나 복음의 내용을 직접적인 주제로 해서 작품을 만든 것이 아니라, 복음적인 메시지를 그 시대의 살아있는 상징들을 통해 드러냈기 때문이다. 하지만 루오는 20세기 화가 중 종교적 색채를 가장 짙게 뿜어낸 작가임에는 틀림없다.
독실한 가톨릭신자였던 그는 특히 “보는 사람이 감동을 받아서 예수님을 믿게 할 수 있는 예수님의 초상화를 그리고 싶다”고 전한 바 있다. 이번 호에 소개된 ‘성안(그리스도의 얼굴)’을 비롯해 예수의 얼굴과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를 많이 그린 것도 루오 자신의 소망을 잘 드러낸 모습이다.
조르주 루오(Georges Rouault, 1871~ 1958)는 예수의 얼굴이 새겨진 베로니카의 수건을 회화로 재현하였다. 루오의 ‘성안(聖顔)’에서 예수는 두려움에 가득 찬 큰 눈을 뜨고 마치 로마 군인의 채찍질에 의해 상처받은 듯 거친 붓 터치와 원색의 색채로 할퀴어져 있다. 예수의 얼굴 어디에도 절대적인 권능과 위엄을 찾아 볼 수 없다. 대신 예수는 눈을 크게 뜨고 두려움과 공포에 질려 있다. 베로니카의 수건 속에 있는 얼굴 저변에는 능욕당하고 십자가에 못박혀 죽어야만 했던 그리스도의 고독과 불안, 두려움이 겹쳐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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聖顔(성안)
예수그리스도
『 "거룩한 얼굴"』
Ecce homo
Sainte Face (1946)
거울 앞의 娼婦
그리스도의 수난은 무거운 짐을 진 힘들고 고된 자들과 고통을 함께 나누기 위해 기꺼이 받아들인 최대치의 사랑을 의미한다. 루오는 수난 중의 그리스도를 통해 광대, 창녀 등 사회 밑바닥에서 살아가는 어둠 속 가난하고 고통 받는 사람들에게 미치는 하느님의 사랑을 표현하고자 하였다. 그리스도가 권력, 돈, 명예 등을 약속하는 전지전능한 절대 신이 아니라 우리와 함께 고통을 나누는 ‘사랑’의 실체라는 것을 보여주고자 하였다. 루오에게 있어 그리스도는 ‘사랑’ 그 자체이다. 베로니카는 ‘사랑’이 믿음, 확신, 용기의 근원이라는 것을 보여주었다.
▲ 루오가 생전에 쓰던 유품 붓, 팔레트, 물감, 나이프 등 미술 도구
조르주 루오(Georges Rouault 1871-1958) 삶의 발자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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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전시실에 설치된 '조르주 루오의 두상' 석고 |
| 1871년 5월27일 '파리코뮌' 와중 출생
1885년 낮에는 스테인드글라스 견습생으로 밤에는 '파리 장식미술학교'에 다님
1890년 '국립 미술학교'에 입학하여 스승 '모로(G. Moreau)'에게 큰 영향을 받음
1893년-1895년 2번에 걸친 로마상 수상 실패 후, 본인 개성을 살리는 그림을 추구
1898년 스승 모로 타계로 육체적· 정신적 공황 상태에 빠짐
1902년 '모로미술관'의 초대 관장이 됨
1908년 '마르트 르 시다내르'와 결혼, 4명의 자녀를 둠
1910년 첫 개인전 '드루에갤러리'에서 개최
1914년 1차 세계대전이 발발
1917년-1926년 10년 동안 루오는 화상 '볼라르'가 요청으로 판화작업 시작
1926년 문인·화가에 대한 회고와 추억을 담은 '회상록(Souvenirs intimes)' 완성
1927년 보들레르의 시집 '악의 꽃' 삽화 완성
1928년 1921년부터 연작 '미제레레' 중 58점 완성
1930년 런던, 뉴욕, 시카고 등에서 전시. 1931년 '서커스(Cirque)'를 완성
1939년 '수난(Passion)' 완성. 제2차 세계대전 발발.
1939년-1947년 작품 반환 승소 후 심경에 변화가 와 318점 소각
1945년 '앗시(Assy)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 밑그림 제작
1948년 '취리히미술관'에서 대 회고전. '미제레레(Miserere 悲哀)' 발간.
1958년 2월13일 파리 자택에서 사망. 국장으로 장례 거행 |
일명 “미세레레46”이라는
명제가 붙은 피에타상을 연상시키는 그림 아래 적혀있다는 “의인은 향나무처럼
치는 도끼에 향기를 묻힌다.”는 글귀
"세 명의 법관들", 1920년, 조지 루오(Georges Rouault, 1871-1958), 캔버스에 유채, 76 x 105.5cm, 뒤셀도르프 북라인-웨이스트팔렌 미술관, 독일
20세기 종교미술을 대표하는 프랑스 화가 조지 루오의 초기 작품으로, 특유의 어둡고 투박한 마티에르 느낌이 강렬하게 다가온다. 이들 법관들은 인품과 정의로움 보다는 자신의 아집과 지식의 상아탑에 갇힌 경직된 모습으로 묘사된 점이 인상적이다. 전형적인 부르주아의 안정적인 녹색 실내에는 무거운 갈색 복장의 법관들이 역시 두텁고 검은 윤곽선으로 묘사됨으로써 전체적으로 아름다운 조형적 조화를 이룬다. 1908년경부터 재판관이나 재판의 정경을 그려, 악덕 ·위선에 대한 혐오를 격렬한 색면(色面)과 굵은 선으로 표현했다. 1910년 첫 개인전을 열었다. 그가 다시 종교적인 테마로 돌아선 것은 1913년경부터인데, 이에 관한 판화제작에 몰두하여 명작 《미제레레 Miserere》(1917∼1927)의 연작(連作)을 그렸다.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독자적인 것으로 그의 예술이 확립되고, 20세기의 유일한 종교화가로 전개되기 시작한 것은 이 시기부터이다. 1929년 S.디아길레프의 발레 《방탕한 아들》의 장치와 의상을 담당하였고, 1948년 아시성당의 '스테인 글라스' 제작에 종사하였다. 이 밖에 꽃의 정물도 잘 그렸으나, 어느 작품에서나 독자적인 신비성은 순수의 적 ·황 ·녹을 주로하는 중후한 마티에르와 자유롭고 힘찬 선의 울림 속에서 일종의 엄숙감을 자아내게 한다. 그림이 점점 순수한 회화성을 강조하기 시작한 20세기에 있어서 루오는 끝까지 인간애의 정신을 관철시켰다.
루오는 제1차 세계대전을 계기로 인간의 비참한 모습과 그리스도의 자비를 대조적으로 나타내는 화집을 만들기로 결심한다. A. 수아레스의 성시(聖詩)를 근거로 그린 <미제레레Miserere:비애> 연작(連作)을 탄생시킨 것이다.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독자적인 것으로 그의 예술이 확립되고, 20세기의 유일한 종교화가로 전개되기 시작한 것은 이 시기부터이다. 인간 군상들이 그리스도의 자비와 은총을 갈구하며 궁극적으로 고통에서 벗어나 구원 으로 나아가려는 갈망을 읽을 수 있다. 또한 육체적 결함과 고통이 정신적 가치와 위상에는 손상을 주지 않음은 물론이고 오히려 그것이 더 인간을 위대하게 하고 견고 하게 함을 일깨워 준다. 수아레스는 "예술가란 사랑을 가장 아름다운 형태로 만들어 고통 받는 이에게 나누어주는 사람"이라고 말한 적이 있는데 이런 면에서 둘은 서로 잘 통했으리라. 가장 높은 단계의 영성은 가장 밑바닥 현실을 반영하는 것이라는 그의 예술철학이 바로 그의 독창적 예술을 낳았고 그만의 개성과 천재성을 구축하는 토양이 되었다. 그의 종교화는 종교적 틀에서 벗어난 세속적 종교화다. 그래서 사회에서 손가락질 당하고 외면된 사람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주인공으로 등장 한다.
'미제레레'라는 명칭은 4세기 라틴어 번역본 '불가타 성경'의 시편 50편 구절인 "미제레레 메이, 데우스(miserere mei, Deus:주여 불쌍히 여기소서)"에서 기원한다. 루오는 이 판화집의 본문을 따로 만들지 않고 직접 지은 시구나 성서 구절에서 뽑아 제목만 붙였다. 미제레레 연작은 첫 구상에서 출판까지 27년이 걸릴 만큼 우여곡절도 많았다. 처음 구상은 <미제레레와 전쟁>이라는 제목에 50점으로 구성된 동판화 작품 집으로 루오는 100점이 넘는 밑그림을 바탕으로 1921년부터 동판화 제작을 시작해 1926년 58점을 최종 완성했다. 1927년 58점의 동판화가 인쇄되었지만, 2차 세계대전 과 출판업자의 갑작스런 사고사(1939년)에다 미완성 작품에 대한 소유권 소송이 겹치 며 출판이 지연되었던 것이다. 결국 1948년 파리의 한 출판사에서 <미제레레> 판화집 이 간행되며 세기의 명작은 빛을 보게 되었다. <미제레레> 연작은 루오에 대한 프랑스인들의 깊은 애정을 설명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작품이기도 하다. 세계대전이 끝난 뒤 2번의 전쟁에 지친 프랑스 국민들에게 전쟁의 비참함을 바라보는 날카로운 시선과 인간에 대한 성찰이 깊은 울림을 일으켰던 것이다. 많은 화가들이 현실을 외면하고 추상의 세계로 도피할 때도 그는 현실세계 속 인간 으로 이어진 끈을 놓지 않았고, 후세에 '정의로운 화가'로 기억될 수 있었다.
※ 이보세상 <isadora의 미술사이야기>중에서.
Miserere, 1923 하느님, 당신의 사랑으로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Les ruines elle-meme onto peri, 1926 폐허조차도 사라져 버렸다.
Are we not all convicts?, 1926 우리 모두 죄인이 아닙니까?
Solitaire, en cette vie d'embuches et de malices, 1922
The condemned man was led away, 1922 유죄선고를 받은 자는 떠나버리고......
En tant d'ordres divers, le beau metier d'ensemencer une terre hostile/ In so many different domains, the noble task of sowing in a hostile land, 1922 여러 분야와 마찬가지로, 가장 좋은 직업은 척박한 땅에 씨 뿌리는 것.
Homo homini lupus, 1926
Squelette, 1927
De profundis/From depths of soul, I cry to you, O Lord, 1927 깊은 수렁에서... 루오는 파리 코뮌에 반대하는 세력이 파리를 폭격할 때 파리의 어느 지하실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가구 제조공이었고, 할아버지는 미술에 관심이 많아서 오노레 도미에의 석판화 작품을 여러 개 갖고 있었다. 나중에 루오는 자신이 "도미에한테서 최초의 교육을 받았다"고 말했다. 1885년 그는 파리 장식 미술 학교 야간부에 들어갔다. 1885~90년에 그는 유리 제조공의 작업장에서 견습을 했다. 그가 나중에 화가로서 갖게 된 화풍은 샤르트르 대성당의 스테인드 글라스를 비롯한 중세 스테인드 글라스 유리창을 복원한 경험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 분명하다. 1891년 그는 국립 미술 학교인 에콜 데 보자르에 들어가 젊은 앙리 마티스와 알베르 마르케를 비롯한 동료들과 함께 공부하면서 상징주의 화가인 귀스타브 모로의 총애를 받게 되었다. 1898년 모로가 죽자 그의 그림을 소장하기 위해 작은 미술관이 파리에 창설되었는데, 루오는 이 미술관의 관장이 되었다. 루오의 초기 화풍은 아카데미 양식에 입각한 것이었다. 그러나 1898년경 심리적 갈등을 겪고 난 후 부분적으로는 빈센트 반 고흐와 폴 고갱 및 폴 세잔의 영향을 받아 새로운 방향으로 발전하여, 1905년 가을 전람회가 열릴 때쯤에는 강렬한 색채를 제멋대로 사용하기를 좋아하는 야수파 화가들의 동조자가 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날 때까지 그는 주로 종이에 수채화 및 유화 물감으로 그렸으며 푸른색을 많이 썼고 극적인 조명과 강렬한 형태 및 활달한 필치가 특징적 이었다. 루오의 미술은 종교적 관심과 함께 발전했다. 그는 1895년경에 열렬한 로마 가톨릭 교도가 되었으며 가톨릭 지식인인 조리스 카를 호이스만과 레옹 블루아를 사귀게 되었다. 그는 부검찰관인 또다른 친구를 통하여, 도미에가 그랬듯이 파리 법정에 자주 드나들기 시작했고, 그곳에서 신의 은총을 잃은 사람들을 자세히 관찰했다. 그가 즐겨 다루는 주제는 매춘부와 비극적인 모습의 광대 및 무자비한 판사로 바뀌었다. 루오는 수채화를 완전히 포기하지는 않았지만, 1914년부터는 차츰 유화를 많이 그렸다. 그는 물감을 풍부하고 두텁게, 그리고 감각적으로 사용했으며 단순하고 위풍당당한 형태를 추구했다. 한편 화려한 색채와 검은색의 굵은 윤곽은 스테인드 글라스를 연상시켰다. 그의 주제는 좀더 뚜렷하게 종교적 색채를 띠게 되었으며, 구원의 가능성이 훨씬 더 강조되었다. 1930년대에 그는 그리스도의 수난을 다룬 훌륭한 연작을 그렸다. 대표적인 작품은 〈조롱당하는 그리스도 Christ Mocked by Soldiers〉·〈성스러운 얼굴 The Holy Face〉· 〈그리스도와 대제사장 Christ and the High Priest〉 등이다. 이무렵 그는 자신의 초기 작품에 다시 손을 대어 작업하는 습관을 갖게 되었는데, 예를 들어 〈늙은 왕 The Old King〉의 경우 그 제작 연대는 1916~36년이다.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 사이에 루오는 파리의 미술상인 앙브루아즈 볼라르의 권유로 볼라르가 쓴 〈페르 위뷔의 환생 Les Réincarnations du Père Ubu〉과 루오 자신이 쓴 〈별똥별 소동 Le Cirque de l'étoile filante〉, 샤를 보들레르가 쓴 〈악의 꽃 Les Fleurs du mal〉 및 루오가 그림 설명을 단 찬송가 〈미제레레 Miserere〉에 삽화로 넣을 판화의 제작에 많은 시간을 바쳤다. 이 작업의 일부는 얼마 동안 미완성인 채 남아 있다가, 나중에 출판되었다. 1929년에 그는 세르게이 디아길레프가 제작한 세르게이 프로코피예프의 발레 〈방탕한 아들 The Prodigal Son〉을 위해 무대 배경과 의상을 디자인했다. 1937년에는 태피스트리 연작을 위한 밑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제2차 세계대전중 그는 인상적인 어릿광대 연작을 그리기 시작해 전쟁이 끝난 뒤에도 계속하였는데 그 대부분은 사실상 자화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또한 꽃이 있는 정물화도 몇 점 그렸다. 그가 평생 동안 그린 작품의 3/4은 인물화이기 때문에, 정물화는 예외에 속한다. 1947년 그는 볼라르의 상속자들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1939년에 미술상 볼라르가 죽은 뒤, 상속자들이 그대로 소유하고 있던 자신의 수많은 작품을 되찾기 위해서였다. 그는 이 소송에 이겨서 팔려고 내놓은 적이 없는 작품에 대한 예술가의 소유권을 확립했고, 그후 미완성이라고 여겨지는 작품 315점을 공개적으로 불태웠다. 그는 생애의 마지막 10년 동안 자신이 쓰는 그림물감의 색조 범위를 넓혀 초록색 계통과 노란색 계통을 추가했고, 거의 초자연적인 분위기를 갖는 몇 점의 풍경화를 그렸다. 〈밤의 성무일과 Christian Nocturne〉는 그 좋은 예이다. 20세기 파리 유파의 주요 예술가들 가운데 루오는 적어도 2가지 점에서 특징있는 인물이었다. 하나는 프랑스에서는 거의 지지받은 적이 없는 표현주의를 실천했다는 점이고, 또 하나는 그가 근세에 가장 설득력있는 종교화가였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 2가지 진술에는 유보 조건이 필요하다. 루오는 같은 시대에 스칸디나비아나 독일에서 활동했던 일부 미술가들만큼 격렬한 표현주의자는 아니었다. 몇 가지 점으로 볼 때, 그의 작품에서는 19세기의 사실주의와 낭만주의가 뒤늦게 꽃을 피웠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그는 교회의 공식 화가가 아니었다. 죄악과 구원에 대한 그의 관심은 주로 개인적인 것이었다. R. McMullen 글 | 金碩禧 옮김 <자료출처: 아름다운 미술과 세상 / 순순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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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돌출한 이마에서 형이상학의 소재를 찾습니다
어떻게 이런 좋은 자료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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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어둡고 깊은 心底의 형이상학은 처음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