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9일
주일 낮에 일기를 적고 카페에 올렸습니다.
집을 나와서는 영천에 전날 작업 마무리를 하였고 경주로 순회 전도를 가려고 하다가
여름이라 바다가 있는 포항으로 전도를 떠났습니다.
경주로 가다가 영천 외지에서 충성대를 보았는데 그곳은 육군3사관학교 였습니다.
정문을 지키는 늠름한 한명의 군인의 기에 눌려 연고없이 가까이 접근을 할 수가 없었는데
1978년 개교를 하고 2011년까지 4만명에 육군장교를 배출하였다고 하며 그곳을 나온 장교들이 지금 이 나라를 불철주야
지키고 있다는 생각에 든든한 생각이 들었으며 충성대의 이름처럼 우리도 주를 위하여 충성된 주의 군사가 되기를
바랬습니다.
"처녀에 대하여는 내가 주께 받은 계명이 없으되 주의 자비하심을 받아서 충성스로운 자가 된 내가 의견을 말하노니"
- 고린도전서 7장 25절 -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 - 고린도전서 4장 2절 -
"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음에 참여할지어다 하고" - 마태복음 25장 23절 -
충성대를 지나 조금 달리니 영천 고경면 산 중턱에 범상치 않은 묘지가 보여서 시간을 내어 가봤더니 그곳은
국립영천호국원으로 6.25참전 용사와 6·25참전 경찰과 국가유공자들이 묻히는 국립묘지였습니다.
그곳에는 월남참전군인들을 비롯하여 학도병,소방,철도공무원,종군기자 기타 참전자들도 작전에 참여한
사실이 확인되면 안장을 신청할 수 있는 곳이였는데 납골당에는 참전용사 부인의 유골도 함께 안치하고 있었습니다.
국립 묘지는 깨끗하고 아주 넓었는데 그곳을 둘러보면서 국가를 위해 목숨받쳐 충성한 사람들을 위해서 국가는
국가유공자라는 명예를 주고 국립묘지를 만들어 그들을 영화롭게 대우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하물며 이 땅에 국가들도 나라의 충성하고 희생한 국민들을 이렇게 대우해 주는데 하물며 만왕의 왕되신 주와
그의 나라를 위하여 목숨 받쳐 충성하고 헌신한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이 땅에서 주는 부귀영화보다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영화를 주시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실 천국에서 주 하나님을 뵈옵고 영원토록 행복하게 산다는 것만으로도 크나큰 영광이 아니겠습니까!
또한 국립영천호국원에는 소방이나 종군기자 처럼 그 당시에 전투 요원이 아닌 사람들도 있었는데 저는
그것을 보면서 하나님의 사역에 있어서도 저 처럼 현장에서 사역을 하지 않더라도 받은 은사대로 교회에서 봉사를
하거나 헌금을 하고 선교사나 저 같은 사역자를 후원으로 중보 기도로 돕는 사람들도 천국의 유공자로 인정된다는
감동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성도들은 받은 달란트가 다를 뿐이지 주를 위하여 충성한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천국의 유공자일 것입니다.
그곳은 호국의 성지로 불리기도 하였는데 국립영천호국원이 위치한 이 지역은 1950.6.25 북한이 기습 남침한 낙동강
최후 방어선이였으며 당시 영천대회전의 승리로 인천상륙작전 교두보 확보와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한 곳으로서 옛부터
충의와 호국의 유서깊은 고장이였던 것입니다. 영천, 알면 알수록 참으로 의미있는 지역입니다.
영천에서 국도로 포항을 가려면 경주 안강읍을 지나가게 되는데 마침 안강읍 장날이라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었으며 근처에는 양동마을 팻말이 보였는데 양동마을은 물포럼 전도를 하러 경주에 갔다가 정상급 인사들이 양동마을을 방문한다는 것을 알게되어 처음 알게 되었던 곳입니다.
그래서 어떤곳인지 궁금하여 양동마을로 가게 되었고 입장료 4천원을 내고 들어 갔더니 진짜로 1500년~1800년까지의
가옥들이 그대로 보전되어 있었습니다. 사실 조선시대의 성벽은 하나님의 은혜로 생생하게 보았기에 소원을 풀었었지만
그 당시에 건물은 보지 못하여서 많이 아쉬웠는데 하나님께서 이번에는 조선시대 마을 자체를 그대로 보여주셨습니다.
그런데 알고보니 양동마을을 안동 하회마을과 함께 2010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이번에 등재가 되기도 하였는데
오래 전부터 선비와 여러 인물을 배출한 양반 마을로서 영남지역을 여행하는 선비들은 전부 유서가 깊은 이곳을 방문을
하였다고 하며 흥성대원군도 이곳을 다녀 갔었고 찰스왕세자도 다녀 가기도 하였는데 규모나 역사나 모든 방면에서
한국 최대 규모의 대표적 조선시대 마을이였는데 마을은 약 520년 전 형성되었고 현재 월성손씨 40여 가구, 여강이씨
70여 가구가 마을을 계승하고 있었습니다.
혹시나 하여 그곳에 할머니와 오래된 가옥 아래에 사시는 마을 사람에게 이 건물들이 1500년도 그 당시에 건물이냐고
물었더니 전부 그렇다고 하여서 더욱 놀랐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역사가 깊은 양동마을에도 교회도 있었는데 그곳에서 민박집과 약과와 감주를 팔며 그 교회를 나가는
할머니에게 듣기로는 교회가 원래는 마을 가까이 있었으나 유교적인 양동마을을 문화재로 지정하기 위하여 마을 초등학교 뒤편으로 옮겼으며 교단은 통합이고 교인은 40명된다고 알려주었습니다.
양동교회 할머니가 감주와 약과를 파셔서 밥도 먹지 않았기에 전 재산인 7천원을 주고 사먹는데 7천원은 오늘 작업 마무리를 하였던 금액의 10%의 해당하는 금액이며 이것을 사먹으면 수중에는 돈이 전혀 남아있지 않게 되지만 작업 상태를 보고 오늘 입금을 해주기로 하였기에 믿음으로 사먹었습니다.
그런데 양동마을을 나와서 포항으로 가야 했지만 입금이 들어오지 않아서 잠시 망설였습니다.
왜냐하면 포항으로 가면 찜질방에 자야하는데 입금이 들어오지 않으면 낭패인 것입니다.
그런데 조금후에 흠집복원비 7만원이 입금되어 포항으로 가라는 하나님의 사인으로 믿고 돈을 찾고 바로 포항으로
출발하였습니다.
포항에 도착하고 시청 근처에 작은 장날이 열려서 복음을 전하였고 시내와 죽도시장과 동성로 같은 번화가에서 복음을
전하는데 네비게이션에 영일해수욕장이 보여서 그곳으로 가서 복음을 전하는데 시간은 조금 늦었지만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마이크를 잡고 복음을 전하는데 전화가 걸려와서 전화를 급하게 받다가 그만
마이크가 파손이 되었습니다.
마귀의 공격인지 아니면 거리에서 외치는 것을 부담스러워 하는 저를 하나님의 징계하셨는지 꼴돌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영일해수욕장에는 대한민국 최초의 해상누각이 있었고 해가 가장 빨리 뜨는 곳이라는 설명이 있었으며 포항에서 살고있는
외국인들 국기들도 새겨져 있는데 제법 많은 나라 사람들이 포항에 살고있는 것 같았으며 실제로 외국인들을 쉽게
볼 수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멀리 외국이나 국제 행사에 가지 않더라도 우리가 살고있는 지역에서 얼마든지
세계인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해변가에는 인디안 사람이 인디안 복장을 하고 악기를 연주하는데 옆에서 장사하는 우리나라 사람이
자신의 장사가 안되서 그런지 연주를 못하게 하여서 많이 아쉬웠습니다.
해변가를 거닐며 전도지를 나누어 주었으며 9시 반까지 차량으로 포항 이곳저곳에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피시방에서 일기를 적고 잠을 잘 수 있는 선교사 센터 같은 곳을 찾지못하여 근처 찜질방에서 잤습니다.
첫댓글 천국의 유공자와 양동마을 부분에서 새롭게 글을 추가하여 올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