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개 요
지리산 남부능선
노고단에서 천왕봉으로 이어지는 지리산 주릉의 길이는 실측거리로는 25㎞밖에 되지 않지만 가슴
으로 느끼는 감동의 거리가 더해져 100리길이라 한다.
그 감동의 근원이 대연릉의 파노라마다. 동서로 끝간데 없는 하늘벽을 이루고 격랑으로 치솟은
모습은 장관 그 자체이며. 바로 그 광경을 가장 잘 볼 수 있는 곳은 어딜까. 혹자는 웅석봉이라
말하고 있고 또 다른 이는 광양의 백운산이라고도 한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니다. 그곳에서 봐도 지리 주릉의 장쾌한 모습은 조금도 덜하지 않는다.
하지만 많은 이들이 지리 북쪽의 삼정산(1182m)과 남쪽의 삼신봉(1289m)을 최고의 전망대로 꼽고
있으며 주릉과 가까이 있으면서도 사위가 막힘 없어 그 장대한 모습을 한눈에 담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 두 산에 올라보면 손에 잡힐 듯 성큼 다가온 지리 주릉의 모습이 탄성을
연발케 한다.
남부능선은 주릉과 T자를 이루며 남쪽으로 뻗어있다. 좀더 구체적으로 보면 주릉의 영봉인
영신봉에서 뻗어나와 삼신봉과 내삼신봉,그리고 형제봉 신선봉을 거쳐 하동의 악양 평사리에서
섬진강을 만나 그 맥을 다할 때까지의 구간을 말한다. 물론 협의의 남부능선은 영신봉~삼신봉 구간이다. 이런 연유로 이 능선을 타면 꿈결같이 흘러가는 주릉의 모습을 어느 곳보다
생생하게 느낄 수 있으며 조망의 즐거움에 매료된 사람들은 일부러라도 이 능선을 찾곤 한다.
그러나 이 능선은 조망의 즐거움만 가득한 곳이 아니다. 그에 못지않게 근대사의 아픔과 애환이
곳곳에 서려있는 곳이다. 특히 이념갈등의 비극적 상흔은 지리의 어느 곳보다 더하다. 1951년
12월 2천여명에 이르는 이영회부대의 빨치산들이 군경토벌대의 막강한 화력에 밀려 수많은
사상자를 내고 숨어 들어간 골짜기도,또 그 이듬해 1월 마지막 토벌작전을 위해 화력공세가
10여일 동안 퍼부어진 곳도 이 능선 좌우의 거림골과 대성골이었다. 남부군 사령관 이현상 역시
부근의 지계곡인 빗점골에서 최후를 맞았으며 망실공비 정순덕이 겨우 목숨을 부지해 최후의
빨치산으로 남게 된 계기가 된 곳도 이쪽의 골짝(거림골)이었다. 그래서 남부능선은 가슴으로
걸어야 제대로 느낄 수 있다는 말이 설득력을 가지고 있다.
국립공원에서 세워놓은 이정표만 잘 따르면 별다른 어려움 없이 등로를 이어갈 수 있음에도 불구
하고 의외로 찾는 사람이 많지 않다는 것이다.
산행기점과 종점의 해발이 높고 삼신봉 이후의 대부분의 능선구간이 기복이 별로 없다는 점이다.
겉보기엔 도상거리가 15㎞에 이르고 높이도 1000m가 넘는 고봉준령이지만 실제로 산을 타보면 크게 힘들지 않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삼신봉에 서면 지리산 주릉이 한눈에 들어온다. 오른쪽이 천왕봉쪽이고 왼쪽이 반야봉,노고단
쪽이다. 파노라마 사진이 안내돼 있어 하나하나 대조해 보면 조망의 즐거움이 배가된다.
청학동[靑鶴洞]
도인촌(道人村)이라고도 하며 지리산 삼신봉(三神峰: 1,284m)의 동쪽 기슭 해발고도 800m에
자리잡고 있다. 이곳은 예로부터 천석(泉石)이 아름답고 청학이 서식하는 승경(勝景)의 하나로
꼽혀왔으며, 주민 전체가 갱정유도(更定儒道)를 신봉한다.
일명 일심교(一心敎)라고도 하는 이 신흥종교의 정식 이름은
'시운기화유불선동서학합일대도대명 다경대길유도갱정교화일심
(時運氣和儒佛仙東西學合一大道大明多慶大吉儒道更定敎化一心)'이다.
집단생활을 하는 이들의 가옥은 한국 전래의 초가집 형태를 띠고 있으며, 의생활도 전통적인
한복차림을 고수하고 있으며 미성년 남녀는 머리카락을 자르지 않고 길게 땋아 늘어뜨리며, 성인
남자는 갓을 쓰고 도포(道袍)를 입는다.(백과사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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