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1.27 정암(승렬)재경지회장을 비롯 호산(신복)대전지회장, 청연(두량)사무국장, 야운(이환)씨족문화연구위원, 벽천(윤기)총무가 태복 종친의 안내로 관산재를 찾았다. 네 분 종친 모두 처음이라고 한다.
야운(이환) 씨족문화연구위원은 아래의 글을 남겼다. '뒤쪽 배롱나무는 정원수로 많이 식재되고 있는데 김천권에서는 굉장히 보기가 드물다고 한다. 희귀나무이다. 본 배롱나무는 전체적인 수형 뿐만 아니라 밑동부터 여러 갈래로 올라온 가지가 멋스러움을 자아낸다. 표피색도 배롱나무의 특유의 매끄러움을 간직하고 있다. 운곡에서 딱 한 그루라고 한다. 붉은 꽃이 피기라도 하면 백여일을 피고 지고를 하는데 이젠 재각을 대표하는 명물이 되었다. 1930년 전후 장흥에서 가져와 심었다고 추정하니 100여년 수령이다.'
운곡인근에서는 좀처럼 보기힘든 배롱나무를 재각우측 화단에 식재하셨다. 추정컨대 장흥을 방문하셨다가 가져온 것이라 사료된다. 또한 최근까지 위씨 어르신들만은 옛 한복을 즐겨 입으시고 갓을 쓰시고 상투를 트신 분들이 유독 많았다. 이것은 장흥거주 선조들이 추구한 전통적인 양반문화를 운곡에 정착시키고 꽃피우고 싶었기때문이다. 부장공의 증손 춘환公(24세) 후손들은 임진왜란 이후 입향한 운곡에서 장흥의 전통 문중문화를 몹시 그리워하셔서 면장公(휘 성량) 할아버지 (1863~1938)께서는 여러 차례 본관 장흥을 방문하셨다. 매번 갈 때마다 장흥에 산재한 재각과 전통문화가 무척 부러웠다. 1935(乙亥)년에야 이르러 신축한 재각을 관산재(冠山齋)라 이름 지으셨다. '장흥 관산을 절대 잊지 말라. 근본을 결코 잊지 말라'는 뜻이다. 조선 세종조 관북으로 이거한 성균생원公의 후손들도 월명사(月明祠)를 세우는 등 장흥의 문중문화를 함흥에 꽃피웠다. 이것이 바로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증거이다. (벽천)
살아보니 피는 물보다 진한게 사실이란걸 확실히 느끼며 나날을 보내고 있습니다.
좋은글 잘보고 갑니다.
형님 잘보고 갑니다
관산재가 있음으로써 운곡마을이 위씨마을세임을 느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