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와이 병상의 李承晩 大統領🇰🇷
JP는 1962년 11월 미국 중앙정보국(CIA) 초청으로 미국으로 가는 길에 하와이에 내려 태평양 사령관의 안내로 일본으로부터 기습(1941. 12. 7)을 받았던 현장을 둘러보고 이승만 전 대통령의 병문안을 갔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호놀룰루 동쪽 산기슭에 있는 요양원에 입원하고 있었습니다. 와이키키 해변이 멀리 내려다 보이는 핑크빛 3층 건물의 202호였습니다.
병원장의 안내로 병실에 들어가니, <프란체스카> 여사가 맞이해 주었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두 팔을 깁스 한 째로 천정에 묶여 있었습니다.
왜 이렇게 되셨느냐고 물으니, 어제 "내가 왜 여기에 누워 있느냐, 나는 서울로 갈 거야!"라며 소리치다 침대에서 떨어져 팔이 부러졌다는 것이었습니다.
JP는 老대통령을 한참 지켜보다가 너무 안타까워 손수건으로 흐르는 눈물을 닦았다고 합니다.
JP는 호주머니에서 2만 달러가 든 봉투를 꺼내 <프란체스카> 여사에게 드리면서 "이 돈은 서울을 떠나올 때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께서 이보다 열 배를 드려도 모자랄 텐데 부족하지만 <프란체스카> 여사님께 전해 드리라며 챙겨주신 것입니다."라고 박정희 대통령의 인부를 전했다고 합니다.
봉투를 받아 든 <프란체스카> 여사는 목이 멘 듯 말을 못 하고 눈물만 주르르 흘리더니, 잠시 후 눈물을 닦고 나서 박정희 의장에게 감사한 마음을 전해달라고 하더랍니다.
그 당시 2만 달러는 한국의 지도자가 만질 수 있는 최고 액수였다고 합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JP는 너무 가슴이 아파 외면하였다고 합니다.
일국의 영부인이셨던 할머니가 허름한 옷을 입고 부군의 간병을 하는 모습이 너무 애처로웠던 것입니다.
연금도 없이 남의 나라의 신세를 지며 살아가려니 얼마나 고통스러웠을 것인가.
분명히 조국이 있고 그 조국광복을 위해 일생을 바쳤고 건국을 하였으며 6. 25 전쟁에서 풍전등화 같은 나라를 지켜낸 영웅을 간병하며 조국이 아닌 남의 나라의 병실에서 눈치를 받아가며 사는 푸른 눈의 <프란체스카> 여사를 두고 떠나려니 너무 가슴이 아팠다고 합니다.
그래서 옆방에 나와서 박정희 의장에게 그런 사정을 말씀드리니, 모셔왔으면 좋겠다는 말씀을 하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병원장을 만나 한국으로 모시겠다는 의사를 전달했더니, 병원장은 "지금 상태로는 비행기를 탈 수가 없고 가다가 운명하실 수 있다며 건강이 회복되면 그때 모셔가라고 만류하여 <프란체스카> 여사에게 그 뜻을 전하였는데 건강이 회복되지 않아 살아서 돌아오지 못하고 1965년 7월 23일 차가운 시신으로 고국 땅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날 박정희 대통령은 이효상 국회의장과 조진만 대법원장, 정일권 국무총리와 함께 이승만 대통령의 유해를 영접하였습니다.
그 당시 세간에서는 박정희 대통령이 이승만 대통령을 못 들어오게 막았다는 소문이 있었는데 그것은 새빨간 거짓말이었습니다.
요즘 말로 하면 좌파들이 박정희 대통령을 음해하기 위해 퍼뜨린 가짜뉴스였던 것입니다.
이승만 대통령의 유해는 65년 7월 21일 밤 11:00시에 미군 수송기에 실려 호놀룰루 공항을 출발하여 23일 오후 3시 김포공항에 도착하였습니다.
수송기 안에는 6.25 전쟁 때 가장 친하게 그리고 적극적으로 한국을 도왔던 <밴플리트> 장군이 항께 타고 왔습니다.
<밴플리트> 장군은 플로리다 고향집에서 이승만 대통령의 서거 소식을 듣고 73세의 노구를 이끌고 바로 하와이로 달려왔으며 유해 운구를 위해 미군 수송기를 협조해 주는 등 여러 가지를 도와준 은인입니다.
그리고 미공군 장병들은 이승만 대통령의 운구를 맡아 수송기에 정중하게 모시고 영결식까지 해주었습니다.
그들은 외국 원수의 유해에 대한 예의도 깍듯하게 했다는 미담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런 모습에서 선진국이라는 인상을 받게 되는 것 같습니다. 과연 우리는 그렇게 할 수 있을까?
※ 솔직히 이승만 초대 대통령께서 미국과《韓美防衛助約~한미방위조약》
을 체결하지 못했다면 지금의 자유 민주주의 대한민국이 존재할 수 있었을 까요?
3,4 공화국 政治秘史에서
맹승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