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타볼산 -
☆ 2013년 다해 8월6일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
[청주] 저희가 여기서 지내면 -
청주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 영억 라파엘 신부
† 제1독서 : 다니 7, 9 - 10. 13 - 14(또는 2베드 1,16-19)
† 복음 : 루카 9, 28ㄴ - 36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만 따로 데리고
높은 산에 오르셨다. 그리고 그들 앞에서 모습이 변하셨는데,
그분의 얼굴은 해처럼 빛나고 그분의 옷은 빛처럼 하얘졌다”
(마태 17,1-2).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은 공관 복음이 공통적으로
전하는 이 말씀에 따른 것이다. 곧, 예수님께서 일부 제자들 앞에서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모하신 일을 기리는 축일이다.
오늘 축일은 ‘성 십자가 현양 축일’(9월 14일)의 40일 전에 지낸다.
교회의 전승에 따라,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변모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40일 전에 일어난 사건이라고 이해하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십자가 수난과 죽음의 결과인
영광스러운 부활을 미리 보여 주시고자 거룩한 변모의 표징을
드러내셨다. 1457년 갈리스토 3세 교황이 로마 전례력에 이 축일을
도입하였다.
★ 다니엘 예언자는 환시를 통하여 천상 옥좌의 장면을 본다. 학자들의
견해에 따르면, 환시에 소개된 ‘사람의 아들 같은 이’는 이스라엘 백성을
가리키며, 모든 민족들이 하느님을 섬기게 하는 중재 역할을 맡게 된다.
그러나 동시에 그를 다가올 구세주, 곧 예수 그리스도를 예고하는
것으로 보기도 한다(제1독서).
★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산에 오르시어
기도하시던 중에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하신다. 뒤이어 구름이 일고
그 속에서 “이는 내가 선택한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하는 소리가 울린다(복음).
◈ 오늘의 묵상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는데, 그 얼굴 모습이 달라지고 의복은 하얗게
번쩍였다.”
예수님께서 변하셨습니다. 그 변하신 모습이 평소의 모습과는 너무도
다르고 특별하여 우리는 이를 ‘거룩한 변모’ 또는 ‘영광스러운 변모’
라고 부릅니다. ‘거룩한 변모’는 예수님의 본디 모습입니다. 천상에서
부터, 영원에서부터, 태초부터 이미 지니셨던 그분의 참모습입니다.
그런데 그 모습이 다시 드러나고 있습니다.
사람은 참으로 다양한 모습을 지니고 있습니다. 살인마처럼 보이는
자도 있고, 천사처럼 느껴지는 사람도 있습니다. 빛이 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둠의 그늘 속에 파묻힌 사람도 있습니다. 또한 탐욕에
젖어 정신없이 바쁜 모습을 지니는가 하면, 모든 것을 잃고 망연자실한
모습을 드러내기도 합니다. 그러나 사람이 지닌 가장 근본적인 모습은
‘하느님의 모상’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본디의 모습으로 거룩하게 변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우리도 ‘거룩한 변모’를 할 수 있을까요? 다시 한 번 복음
말씀을 되새겨 봅시다.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는데, 그 얼굴 모습이 달라지고 의복은 하얗게
번쩍였다.”
예수님에게서 그분 본연의 거룩함이 드러나는 때가 언제였습니까?
바로 기도하실 때였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스스로가 거룩하게 변모하려면 기도해야 합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이 ‘겉모습’에 초점을 맞춥니다. 그래서 옷도 화려한
것을 입고, 화장도 열심히 하며, 심지어 얼굴을 뜯어고치기도 합니다.
그러나 정작 사람의 가장 고유하고 근본적이며 아름다운 모습은 바로
하느님의 모상으로서 지니는 거룩함입니다. 그 모습은 바로 기도하는
동안에 드러납니다.
- 매일 미사 -
◈ [청주] 머물러야 할 곳 | 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3년 다해 8월6일 주님의 거룩한 변모축일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는데 그 얼굴 모습이 달라졌다.>
(루카9,28-36)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예수님께서 기도하실 때 그 얼굴 모습이 달라지고 의복이 하얗게
번쩍이는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하였습니다. 베드로가 그 모습을
본 후 “스승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저희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스승님께, 하나는 모세께,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루카9,33) 하였습니다. 우리가 머물고 있는 삶의
자리가 그런 초막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머물고 싶은 곳에 초막을 짓겠다는 베드로의 마음이 어찌 베드로만의
마음이겠습니까? 사실 베드로와 제자들은 현시를 통해 천상행복을
앞당겨 체험한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지금 머물고 있는 자리가
초막이 되기를 희망합니다. 제자들이 구름 속에서 “이는 내가 선택한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하는 하느님의 음성을 들었듯이
앉은 자리가 예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꽃자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시러 산에 오르셨는데 성경에서 산은 하느님의
현현이 이루어지는 곳을 말합니다. 모세도 야훼하느님을 높은 산에서
만났습니다. 엿새 동안 구름이 시나이 산을 덮고 이레째 되는 날
하느님께서 구름 속에서 모세를 부르셨습니다(탈출 24,16). 그렇다면
오늘도 산에 올라 하느님과의 만남을 이뤄야 하는데 그곳이 어디입니까?
무엇보다도 성체성사를 통해 당신의 끊임없는 사랑과 현존을 보여주시는
미사가 봉헌되는 곳이요, 성체조배와 기도가 이뤄지는 곳입니다. 성당이
그런 곳임을 잊지 않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는 세상의 마지막 날에 드러날 예수님정체의
일시적인 현현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겪게 되시는
수난과 죽음이 그 자체로 끝나 버리는 것이 아니라 부활의 영광에로
이어져 간다는 확신을 제자들에게 보여 준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는 우리에게 도 주님을 따르는 길에 있어서 혹 어떤 어려움이
온다 하더라도 끝까지 감당할 수 있는 힘과 위로를 준다고 하겠습니다.
사실 “내적인 사람은 빛을 받을 때 넘어지거나 곁길로 나가는 일이 없고
실망하지도 않습니다. 그는 먼데서 자기 본향을 보면서 온갖 역경을
참아내고 이 세상 것들로 인해 슬픔에 젖지 않으며 하느님 안에서
견고해집니다. 마음을 낮추어 시련을 감수 인내하고 겸손으로 모든
것을 견디어 냅니다”(나폴리의 성 요한).
이제 “저희가 여기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할 수 있는 곳이 우리 성당이기를
바라고 또한 다른 곳이 아닌 주님을 철저히 따르는 우리 각자가 머무는 곳,
삶의 자리이기를 희망합니다. 사랑합니다.
- 청주 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 영억 라파엘 신부 -
◈ [인천]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언젠가 제 방에 놀러온 후배 신부가 무엇을 유심히 쳐다보고 있습니다.
그리고는 저를 보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형! 나 이것 마음에 드는데 저 주면 안 돼요?”
후배 신부가 갖고 싶은 물건을 보니, 아는 수녀님으로부터 받은
선물이었습니다. 저 역시 받은 선물이라서 차마 후배 신부에게 주기가
힘들더군요. 만약 다른 곳에서 구입해서 쉽게 구할 수 있는 물건이라면
흔쾌히 허락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물건은 저를 생각해서 어떤
분이 직접 만드신 세상에서 하나밖에 없는 것이라 차마 줄 수가
없었습니다. 또한 만들어주신 분의 정성과 사랑을 생각하니 쉽게 다른
사람에게 양도할 수 없더군요.
아마 모든 사람이 그렇지 않을까요? 제물에 욕심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 물건에 깊은 의미가 담겨 있다면 애지중지하면서
잘 보관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에 반해서 쉽게 얻은 것이라면 어떨까요?
예를 들어 길을 가다가 사은품으로 받은 것이라면? 마트에서 원 플러스
원 행사 상품으로 구입한 것이라면? 그때에는 아무리 물건에 욕심 많은
사람이라도 달라는 사람에게 쉽게 줄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에 대해 생각해 봅니다. 우리는 이 믿음을 어떻게 얻었습니까?
믿음은 주님의 선물입니다. 결코 시장이나 백화점에서 돈 주고 쉽게 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귀한 주님의 선물이기에 이 믿음을 잘 보관하고 또
성장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는 것입니다. 함부로 버리고 포기할 것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이 믿음을 너무나 쉽게 내려
놓는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즉, 가톨릭교회 안에서 현재 신앙생활을
잠시 쉬고 계신 분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렇다면 믿음이 부족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주님의 말씀을 제대로 듣지
않기 때문입니다. 믿음을 주신 분의 목소리를 듣지 않기 때문에, 이
믿음의 중요성도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제대로 듣고 그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 바로 우리의 믿음을 소중하게 간직하고 성장시키는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오늘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을 맞이해서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거룩하게
변모하시는 장면을 우리에게 전해줍니다. 모세와 엘리야와 이야기를
나누시면서 하얗게 변모하시는 예수님의 모습, 그 순간이 너무나
영광스럽고 좋아서 베드로가 나서서 세상의 기준을 내세워 이곳에 눌러
지내자고 이야기하지요. 바로 그 순간 하늘에서 소리가 납니다.
“이는 내가 선택한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주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자기 멋대로 살려는 제자들을 향한 경고인
것이지요. 주님의 말씀을 들으며 살 때, 우리들이 받은 그 귀한 믿음을
내 안에 간직하여 더욱 더 성장시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행복이 꼬리에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내가 꼬리를 따라다닐
때마다 꼬리는 계속 내게서 멀어지기만 할 뿐이었다. 그런데 내가
바쁘게 움직이니 꼬리는 내가 가는 곳이면 어디든 따라왔다
(웨인 다이어).
알렉산드르 이바노프의 '거룩한 변모'
남자의 본심
어떤 부부 모임 특강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날 강사로 오신 분께서
참석한 부부를 향해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집니다.
“먼저 여기에 계신 형제님들께 묻겠습니다. 내가 다시 태어나도 지금의
내 아내와 결혼을 하시겠습니까?”
그런데 아무도 손을 들지 않는 것입니다. 장내가 조용해졌지요. 바로
그 순간 한 형제님께서 손을 번쩍 든 뒤에 말합니다.
“저는 지금 내 아내와 살겠습니다.”
그러자 여기저기에서 대단하다는 감탄사가 쏟아지기 시작했지요.
잠시 뒤에 강사가 이 형제님께 묻습니다.
“정말로 대단하시네요. 그렇다면 만약 아내가 형제님을 싫다고 한다면
어떻게 하시겠어요?”
이에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이렇게 말씀하시네요.
“그럼……. 저야 뭐 고맙지요.”
아내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것인지 잘 판단이 되지 않네요. 그런데
주님께 대한 사랑은 이렇게 왔다 갔다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변함없는 사랑을 주시는 주님, 우리역시 변함없는 사랑으로 주님
앞에 나아갈 수 있도록 항상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 인천 교구 성소 국장 조명연 마테오 신부 -
◈ [기타]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2013년 다해 8월6일 연중 제18주간 화요일 복음묵상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는데, 그 얼굴 모습이 달라지고 의복은 하얗게
번쩍였다.” (루카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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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이다. 이는 교회의 전승에 따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시기 전 40일을 앞두고 당신의 부활하신 모습을
상징적으로 미리 제자들에게 보여주신 것이라는 믿음을 기념하는
날이다.
오늘은 우리의 모습에 대해 생각해보고 싶다.
요즘 개인적으로, 이해를 하면서도 거부반응을 보이는 일이 있다.
TV를 통해서 보게 되는 연예인들뿐만 아니라, 지인들 사이에서도
좀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외모에 공을 들이고 있는 모습이 쉽게 눈에
들어온다.
물론 아름답게 젊음을 유지하고픈 마음은 모두의 마음일 것이다.
하지만 남녀 가리지 않고, 안면 근육의 움직임이 어색할 정도로
이물질을 집어넣으면서까지 젊음을 유지하고자 하는 모습을 보면
서글픈 생각마저 든다.
심지어는 이러한 세상의 흐름 때문인지, 광고의 효과인지는 모르겠지만,
젊음 자체로 한없이 예쁘게만 보이는 이 십대 친구들마저 똑 같은
모습을 좇고 있다는 것은 뭐가 잘못되어도 크게 잘못되었다는 생각이다.
지상외모주의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은 일반적이나, 그러면서도 외모에
신경을 쓰지 않으면 모든 분야에 있어서 불리한 대우를 받는다는
이야기도 일반적이다.
이 모두가 이 시대의 가슴 아픈 자화상일지도 모른다.
나의 고리타분한 성격 때문인지는 몰라도, 그런 모습을 보이는 이들에게
그들이 원하는 만큼 후한 점수를 주지 못하고 있음을 고백한다.
교회가 오랜 세월 동안, 사용하는 라틴어 표현이 있다.
‘’IMAGO DEI’(이마고 데이, ‘The Image of God’)가 그것이다.
‘하느님의 모상(模像)’이라고 번역하고 있다.
모상이란 모습이 닮았다는 이야기다. 즉, 우리 모두는 하느님의
닮은 모습으로 창조되었다고 교회는 가르치고 있다.
그렇다면, 하느님의 어떤 모습을 닮았다고 하는 것일까?
매일 우리는 거울 앞에 선다.
그 안에서 자신의 무엇을 보고 있는가?
젊음이나 늙음인가? 아니면 아름다움이나 추함인가?
늙음도 은총이라는 말을 언젠가 한 적이 있다.
아름다움은 내면에서 만들어져야 한다고 말한 적도 있다.
주름진 얼굴의 승려나 수도자의 눈에서 맑은 아름다움을 본다.
가진 것 없지만, 사랑하는 가족들과 나누는 따뜻한 웃음 소리에서
아름다움을 본다.
한평생 허리가 굽어지도록 시장통 모퉁이에 앉아 두부를 팔아 모은
전 재산을 불우한 학생들을 위해 내놓는 할머니의 수줍은 눈빛에서
참된 지혜의 아름다움을 본다.
조금만 관심을 갖고 주위를 둘러보면 참된 아름다움을 그리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는 세상이라는 것에 감사한다.
아무리 우리가 발버둥을 친다고 해도 우리의 육체는 시간과 함께
늙어간다. 순리를 받아들이려는 마음에 아름다움은 주어진다.
자연스러움의 의미를 이해하려는 마음에 아름다움은 주어진다.
더 중요한 것과 덜 중요한 것을 구별하려는 마음에 아름다움은
주어진다.
욕망이 만든 아름다움은 거짓이다.
선하고 옳은 마음이 만든 아름다움만이 변하지 않을 아름다움이다.
하느님께서 당신과 닮을 꼴로 만드신 사람들인 우리.
그런 우리가 그분을 더욱 닮아가는 삶을 사느냐 마느냐는, 결국
참된 아름다움을 얻느냐 마느냐를 뜻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우리 모두는 너무도 고귀하고 소중한 하느님의 자녀들이다.
우리 모두의 아름다운 변모를 꿈꾸어 본다.
- 사이타마 교구 오타(太田)본당 주임
김 대열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 -
https://www.facebook.com/WithfatherPinetree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 [수도회] 영광 - 십자가 - 영광
2013년 다해 8월6일 주님 거룩한 변모 축일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는데, 그 얼굴 모습이 달라졌다."
<루카 9,28ㄴ-36
<영광 - 십자가 - 영광>
타볼산은 팔레스티나의 여러 산 가운데 아름답기로 유명한 산입니다.
이 산은 갈릴래아 산악지역 남쪽에 위치한 에스드렐론 평야에 위치해
있는데, 정상의 높이가 575미터이지만 평야 가운데 위치해 있다 보니
꽤나 높고 웅장해보입니다.
1954년 산 정상에 오르는 차도를 닦았는데 산 정상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가파르고 꼬불꼬불한 길을 따라 한참을 올라가야 합니다.
현재 산 정상에는 꽤 넓은 성터가 있고 주님의 거룩한 변모를 기념하기
위한 아름다운 성당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루카 복음사가는 예수님의 변모 사건을 꽤나 세밀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시러 간부급 제자 세 명(베드로
요한 야고보)만을 데리고 타볼산에 오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던 중 제자들은 특별한 광경을 목격합니다. 예수님의 얼굴
모습이 달라지고 입고 계시던 의복이 하얗게 번쩍였습니다.
예기치 않은 상황 앞에 당황해하고 있던 제자들이었는데, 더 놀라운
일이 생겼습니다. 그들 앞에 두 사람이 갑자기 나타났는데, 말로만
들어오던 이스라엘 민족의 영도자 모세와 대 예언자 엘리야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두 사람과 함께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신
것이었습니다.
오래 전부터 정말 궁금했습니다. 예수님의 변모 사건, 대체 무슨
의도일까? 뭐 어쩌라는 걸까?
가만히 생각해보니 예수님의 변모 사건에는 깊은 의미가
담겨있었습니다. 이제 머지않아 예언서에 기록된 대로 예수님은
인간적인 눈으로 볼 때 비참한 최후를 맞이할 것입니다. 적들에게
체포되고 갖은 고초를 다 겪다가 십자가형에 처해질 것입니다.
그 때 예수님의 얼굴은 또 다른 방식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빛나고
위풍당당하고 말씀 한마디에 뭐든 못할 것이 없는 공생활 기간
동안의 승리의 메시아가 아니라 때리면 맞고 순순히 십자가에 못
박히는 한 나약한 인간의 얼굴로 변화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참혹했던 삼일이 지나가면 예수님께서는 원래
지니셨던 영광스런 얼굴을 다시 한 번 회복할 것입니다.
영광-고통-영광의 과정을 거치는 메시아의 운명을 미리 잘 이해하고
있으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핵심제자단 세 명만 데리고 타볼산에 오르셨고, 또
그들이 보는 앞에서 변모하신 이유가 뚜렷해진 것입니다.
비록 짧은 순간이었지만 하느님께서는 아들 예수의 영광스런 모습을
핵심제자단에게 미리 살짝 보여주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특별한 배려를 베푸신 것입니다. 변모 사건은 곧 도래할 예수님 수난의
때, 하느님 아버지께 순명하느라 무기력해질 예수님, 십자가형 앞에
우리 인간과 똑같이 두려워할 예수님 앞에서도 제자들이 그분께 대한
믿음을 잃지 않도록 용기를 주신 사건입니다.
다시 말해서 아들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 사건을 통해 하느님께서는 곧
다가올 아들의 십자가 앞에서 제자들이 당혹해하지 말고 두려워도 하지
말고 당당하게 맞설 힘과 용기를 지니도록 힘을 주신 것입니다.
비록 꿈결같이 짧은 한 순간의 기억이었지만 이 짤막한 영광의 순간에
하느님의 목소리와 모세와 엘리야의 증언이 덧붙여져 아들 예수가
자신에 대해 예언하는 것을 제자들이 거부하지 말고 받아들여야 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는 내가 선택한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오늘도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 사건은 우리 주변에서 계속 일어나고
있습니다. 아직도 세계 도처에서 예수님께서는 세상과 우리 인간의
죄로 인해 고통당하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십니다. 무자비한 폭력이
무죄한 어린 양을 짓밟습니다. 악이 선을 능가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얼굴이 있습니다. 영광스럽게
변모하신 주님 얼굴입니다. 언젠가, 그리 멀지 않은 어느 날 영광스런
얼굴의 주님께서 반드시 승리하실 것입니다. 빛나는 광채를 지닌
주님께서 세상의 악을 정복하실 것입니다. 그때 끝까지 인내한 우리도
비참하고 나약함에도 불구하고 영광스럽게 빛나는 주님 얼굴을 닮아있을
것입니다.
- 살레시오회 한국 관구 부 관구장 양승국 스테파노신부 -
◈ [기타]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
2013년 다해 8월6일 연중 제18주간 화요일
사람은 직책에 따라서 변하는 것이 있습니다. 군에서 장군이 되면 변하는
것이 100개가 넘는다고 들었습니다. 은행에서도 지점장이 되면 그에
따른 혜택이 있습니다. 부제가 사제가 되면 변하는 것이 많습니다. 가장
큰 변화는 미사를 집전하는 권한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보좌 신부에서
본당 신부가 되면 또 변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본당의 모든 재정에 대한
결재 권한이 있습니다. 본당의 모든 행사에 대한 최종 책임을 지게 됩니다.
사목회의를 주재하며, 본당의 예산을 집행합니다. 수련장의 원장 신부를
처음 해 보았습니다. 직원들의 복지를 신경 쓰고, 급여를 집행합니다.
수련장의 시설을 관리합니다. 수련장을 찾는 사람들에게 좋은 인상을
주도록 하고, 피정 및 교육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개발합니다. 때로는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직책이 그 사람의 인격처럼 여겨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 사람의 직책과 그 사람의 인격이 늘 함께 하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직책을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인격에 문제가
있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은 직책은 그리 크지 않지만 인격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기도 합니다. 인격에 비해서 과분한 직책을 가진 사람들은 때로
사회적인 물의를 일으키기도 합니다. 대학 교수가 제자들을 성추행했다면
그는 직책은 교수라고해도 인격은 교수라는 직책을 담을 수 없을 만큼
부족한 것입니다. 국가 정보원이 국내 정치에 관여를 하고, 대선에
불법으로 개입을 했다면 이 또한 그 직책을 담을 만큼의 인격이
갖추어지지 않은 것입니다.
22년 사제생활을 하면서 저 자신을 돌아봅니다. 과연 나는 주님께서
불러주신 성직자의 길을 충실하게 걸어가고 있는지, 거룩한 성사를
집전할 만큼 나의 인격은 성숙한지 돌아봅니다. 많은 신자들이 기도하고
걱정을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독선과 아집에 갇힌 사제, 강론을 성실하게
준비하지 않는 사제, 말을 함부로 하는 사제, 재정을 투명하게 운영하지
않는 사제, 복음 말씀과 기도에 충실하기 보다는 세상의 것들에 신경을
쓰는 사제, 자신의 건강을 돌보지 않고 음주를 지나치게 하는 사제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농부들은 봄에 씨앗을 뿌립니다. 작은 씨앗 안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우리는 잘 모릅니다. 그 안에는 큰 나무가 될 가능성, 맛있는 과일을
열매 맺을 수 있는 가능성, 수십 배 수백 배의 결실을 맺을 수 있는
가능성이 있습니다. 농부는 그 가능성을 믿기에 기쁜 마음으로 씨앗을
뿌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에 태어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아주 작고 여린 모습으로 세상에 태어납니다. 어떤 아기도 누군가
하루만 돌보아 주지 않으면 살 수 없을 만큼 약한 모습으로 태어납니다.
그런 아이가 나중에 군인이 되기도 하고, 판사가 되기도 하고, 선생님이
되기도 하고, 운동선수가 되기도 합니다. 아이들에게는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부모님들은 그 아이들 안에 있는 가능성을 살려주고,
키워주는 것입니다.
오늘은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축일입니다. 암행어사가 비록 남루한
옷차림을 하고 있지만 몸속에는 임금의 명을 수행하는 ‘마패’를 가지고
다니듯이 예수님께서도 사람이 되시어 신적인 권능이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오늘 ‘거룩한 변모’를 통해서 하느님께로부터 오셨음을
보여주십니다. 예수님께서 거룩하게 변화된 모습을 보여주시는 것은
제자들에게는 희망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면 제자들 역시 그렇게
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선생님은 늘 제자들에게 먼저
모범을 보여주십니다. 제자들은 선생님의 모습을 따라하면서 어느덧
성장 할 수 있습니다.
훌륭한 스승은 제자들의 현재의 모습만 바라보지 않습니다. 비록
지금은 보잘 것 없고, 초라할지라도 그들 안에 있는 가능성을
키워주십니다. 그런 스승이 참다운 스승입니다. 지금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은 모두 하느님의 모습을 닮은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그들
모두에게는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그것을 믿고, 사랑의 물을 준다면, 나눔의 거름을 준다면,
믿음의 빛을 비추어 준다면 그들은 변화될 것입니다. 그들 안에 있는
불신, 분노, 미움의 잡초를 뽑아준다면 그들은 모두 거룩한 모습으로
변화 될 것입니다.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서울] 3 영들의 대화 장면
하늘나라가 세상에서 가상이 아니라 실제 일어나고 있다면 어떨까요.
뻥하고 정신 나갈 수도, 도망갈 수도, 눈 감을 수도 있겠지요?
베드로 요한 야고보 3 인물들이 하늘나라의 모습을 보았다고 중언합니다.
오늘의 성경구절을 거부하지 않으려면 증인 3 분의 증언을 믿읍시다.
죽은 두 영들과 살아계신 예수님의 영, 3 영들의 대화 장면을 기뻐합시다.
베드로 여기에 아예 머물겠다는 것처럼 우리도 영의 대화를 확신 합시다.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는데, 그 얼굴 모습이 달라지고 의복은
하얗게 번쩍였다. 그리고 두 사람이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들은 모세와 엘리야였다.(루카 9,29~30)”
- 이기정 사도 요한 -
◈ [대구] 단순한 진리
예수님께서 영광스런 모습으로 변모하십니다. 모세와 엘리야도
영광에 싸여 나타납니다. 그들의 모습을 본 베드로는 예수님께 초막
이야기를 합니다.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 이야기는 우리에게 ‘부활의 영광’을 전해 줍니다.
부활하면 저렇게 영광을 누린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흥미로운 게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모세와 엘리야 그리고 베드로와
나눴던 이야기의 내용입니다.
먼저 모세와 엘리야와의 대화 내용을 보면 이렇습니다. 그들은 영광에
싸여 있는데 이야기하고 있는 건 예수님께서 세상을 떠나실 일입니다.
수난과 죽음이겠지요. 영광에 싸여 있는 이들이 수난과 죽음을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제 시선을 돌려 베드로를 봅시다. 초막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요?
영광에 싸여 있지 않은 이들은 ‘예수님의 영광을 보고’ 영광만을 붙들려고
합니다. 흥미로운 것은 부활의 영광을 누리기 위해 앞으로 나아가야 할
사람은 영광만 보고, 이미 영광 안에 있는 이들은 수난과 죽음을
이야기한다는 것입니다.
부활의 영광을 누리기 위해 앞으로 나아가야 할 우리! 혹시 수난과 죽음은
생각하지도 않은 채 영광만 꿈꾸고 있는 건 아닌가요? 일상 안에서 고통
없이 잘 되기만을 바라고 있지는 않나요? 한 가지 단순한 진리를 기억합시다.
부활은 수난과 죽음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 이수환 신부(대구대교구 원평천주교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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