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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사는 최철미님으로부터 22일 아침 일찍 이메일이 왔다. 춘하추동 방송 블로그에 들어가보니 복혜숙 님에 관한 글을 새로 올린것을 보고 생각나 철미님의 아버지 최세훈
아나운서가 복혜숙 님과 나눈 대담 글을 보낸다는 것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영화배우이자 1966년 당시 영화인 협회 명에회장. 복혜숙여사와 MBC 아나운서실장시절 최세훈의 대담으로 그때까지의 영화와 영화인들에 관한 자세한 얘기가 있어 재미도 있고 그 시대를 이해 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는 내용으로 최철미님 에게 고마운 마음을 담아 올린다.
최초의 방송극 출연 복혜숙 1925년 시험방송 "새벽종"
그때 그시절 초기 영화와 영화배우 이야기 복혜숙 특별대담 최세훈아나운서 1966년
아리랑 5월호
최세훈 대담 시리즈
〈그 첫 번째 손님·복혜숙 할머니〉 마누라 또 하나 생겨 좋으시겠수
우리네 영화의 산 역사 복혜숙 할머니를 모셨다. 옛 여배우의 스카우트와 물의를 일으켜 왔던 여배우들의 스캔들. 그리고 그 사생활의 뒷얘기와 대낮 암실에서 여배우의 양말을 벗긴 기자 때문에 벌어졌던「찬영회」사건 등, 옛날에서 오늘에 이르기 까지 영화가의 뒤안길을 더듬어 보는 첫 번째 화제※
생긴 소녀가 나와 문을 따주며 『어디서 오셨죠?』 ―깜찍하다. 다 오구―헌데 방이 이렇게 누추해서 어쩐다! 최세- 언젠가 텔레비전의《누가나일까요?》란 프로에서도 봤습니다만 신일선 여사와 포옹하는 장면을 보구 눈두덩이 후끈거리더군요.
그때 거기에서 오랜만에 만났으니 감개가 무량할 밖에. 더불어 활약하던 주연 여배우였죠?
내가 토월회란 신극단체에서 연극을 하고 있을 때 함흥에서 뽑은 얌전하구 예쁜 아가씨가 바로 신일선 씨였어. 한땐 영화를 그만두고 이북으로 간 신모와 만담도 했는데, 서로 소식은 알고 지냈지만 그 이후 직접 만난 것 그때 TV에서 처음이었어요. 서로 늙어서 해후 하니 반갑구 또 옛날 생각이 나 그만 나두 모르는 사이에 덥썩 부둥켜 안구 말았다니까―.
방송까지 활약이 대단하신 걸루 알구 있는데요? 복혜- 연극이 먼저였지. 이화학당시절을 거쳐 일본 「요꼬하마」에 있는 여자기예전문학교에 다닐 무렵, 유학생끼리 토월회를 만들어서 연극공부를 했어요. 아마 열 다섯쩍 이었을 게야. 토요일에 연극이나 영화구경을 하구 월요일에 만나서 토요일 보았던 연극영화에 대한 감상과 토론을 한다 해서 토월회라 이름 지었던 거지만. 헌데 이젠 글렀어. 모두 늙으니까 잘 보이질 않는단 말야. 몇 년 전만 해두 대본을 볼 순 있었는데 이젠 영 글자 보기가 힘들거든. 언젠가 참《우리 5남매》란 프로에 나간 일이 있는데 손주 같은 녀석들과 같이 출연하다 보니 내가 그대로 할머니지. 그날 개런티로 녀석들의 눈깔사탕이나 오징어 값을 대주다 보면 외려 모자란다니까─.
예순 셋이 되었으니, 꼭 마흔 여덟 해 동안 이 짓을 해온 셈인가. 바로 엊그제 같은데 말야─.
콘테스트를 한다든가 하진 않은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힘드니까 얍사하게 생긴 남자분들이 여장을 해서 여배우 노릇을 하기두 했었어. 콘테스트를 해봤자 지금처럼 개화된 시절이 아니었으니 선 듯 응모자가 있어야 말이지. 가믐에 콩 나듯 슬그머니 뽑아 올리면 그게 곧 여배우였어.
케이스가 대부분이었겠죠. 그렇기 때문에 여배우는 연기력보다는 희소가치루 한몫을 본게 아닐까요?
아까 얘기한 신일선씨두 함흥공연에서 슬그머니 뽑아낸 여배우중의 하나지만 석금성씨두 그렇게 해서 여배우로 나왔지. 이택균씨가 바로 그분의 아들이지만―. 아마 석금성씨는 작가 이서구씨가 발탁 했을게야.
무래두 오늘에 비해 원시적이었겠죠?
장한 생각이 들 때였어. 그러니 개런티랍시고 받구 영화에 나간다는 것두 아예 생각할 수 없었지. 또 돈을 받구 출연한다는 것을 치사스럽게 생각하던 예술족들이었구. 촬영두「세트」장이 따루 있어야 말이지. 남의 집을 빌려야 겨우 찍을 수 있었어. 그때「단성사」 옆에 공터가 있었는데 곧잘 거기에다 간단한 「세트」를 세워 놓구 촬영하기두 했었지.
희소가치루 몇 되지 않았기 때문에 연애소동이랄까, 연애쟁탈전이랄까, 그런 일들이 많았지 않았습니까?
적었으니 터 놓구 연애할 수 없었거든. 자칫 잘못 소문이 나다간 가운데 방 타기루 혼났지. 여배우들이 연극인이나 영화인과 연애랍시구 하기 시작한 것은 초창기에서 좀 중간쯤 내려와서야. 아마 그 첫 케이스가 내 기억으로는 전창근씨와 류계선씨였을걸. 하여간 류계선은 그때 연출가인 전창근씨와 좋아지낸다 해서〈가운데 방〉탔으니까―. 내가 전창근씨에게 따졌지. 그랬더니 전창근씨 대답이 어땠는지 알어.「그래 내가 무식한 여배우하구 연애나 하는 사람인줄 아슈」- 그랬는데 글쎄 나중에 알구 보니까 둘이 살지 않겠느냐 말야. 참 음흉한 사람이라니까. 거 왜 뒷구멍으루 호박씨 깐다는 얘기 있잖어. 꼭 그를 두고 한 얘기였지. 김 모 배우가 박 모씨의 마누라를 가로챈 것두 바루 그 무렵이지만….
뛰어들어 요절을 냈었지. (김 모 배우의 이름을 밝히기를 꺼리는 듯 자꾸만 딴데로 화제를 돌리는 복할머니)
여자관계가 굉장했다는데…?
열기가 대단한 사람이었지. 《아리랑》이란 영화를 찍을 때의 얘긴데 주연 여배우가 바루 신일선씨─. 헌데 라운규씨, 대본엔 그런 장면이 없는데두 어떻게나 열기가 대단했던지 그만「커트」감의「러브 신」을 벌이구 말잖어. 그 때의 「러브 신」이라야 겨우 손목이나 잡는 정도였는데 말야. 겨드랑을 보인다든가 「비너스」의 조각품일지라두 어떻게 검열이 심했던지 치우라구 야단이었지. 그러니 러브·신이야 뻔했어. 기술적으루 다루어진 것으루는 여자에게 향한 손을 클로즈·업 시킨다든가, 고목을 사이에 두고 두 남녀가 빙빙 돌며 술래 놀이 하는 정도가 고작이었으니까.
차라리「키스·신」이라는 표현이 적합 하겠군요─? 그때두 역시 오늘날처럼 부둥켜 안고 입술을 부비거나 그런「키스·신」은 할 수 없었지. 아까두 얘기 했지만 고작 고목을 사이에 두고 두 남녀가 빙빙 술래놀이 하는 모습을 묘하게 카메라루 잡는 정도였어.
「러브·신」을 대신했다는 얘기겠죠. 얘기가 다소 비약한 감이 없잖습니다만 적어두「로미오와 쥴리엣」과 같은 격렬한 연애랄지 외설적인「키스·신」의 등장은 아무래두 해방 후가 되지 않겠습니까? 제가 어디선가 들었거나 읽은 기억입니다만《운명의 손》 이란 영화에서든가요, 최초의「키스·신」이 윤인자씨와 이 모씨 사이에 이뤄졌는데 그 뒷얘기가 좀 괴상하더군요. 입을 맞춰본 여배우 왈「 무슨 사내가 뭐 그래」─그건 곧 남배우의 입내음이 지독했다는 투덜거림이라는 건데…?
작품일꺼야. 그 양반 무척 대담했지. 헌데 그 괴상한 뒷얘기라는게 사실인지 아닌지는 잘 모르는 일이지만 아닌게아니라 거 윤인자씨의 입이 좀 거칠긴 좀 한편이지. 입내가 나기루서니 그게 뭐 그처럼 대수롭다구 떠들어 대느냔말야. 솔직해서 사귀긴 좋지만 너무 솔직해서 괜스리 남에게 오해 받는 경우두 많았거든. 하던《운명의 손》은 흥행이 안되고 폭삭 망했는데 그래서 영화인들간엔「운명의 손(手)」이 아니라「운명의 손(損)」으로 화제가 되었던 영화였어.
고운봉씨와두 헤어진 모양이더군 그래. 하여간에 해방전 가장 말썽이 많았던 여배우가 윤인자씨라면 해방 후 그와 맞설 수 있는 여배우를 찾는다면 아마 도금봉씨를 들 수 있을 게야.
뜨거운 관계두 있었다는데…?
강모와의 사이 때문에 나두 진땀을 뺀 일이 있었지. 그러니까 도금봉이와 전북 이리루 무대 인사를 갔을 때라고 기억해. 강 모라는 그 사람두 무척 주착이 없었어. 무엇 때문에 졸졸 따라다니는지 모르겠거든. 그렇지 않아두 색안경을 끼고 여배우를 보구 있는데 전주까지 와서는 같은 여관에 들지 않겠느냐 말야. 영화배우 도금봉과 권투선수 강 모가 그렇구 그런 사이기에 같이 내려왔지─ 그런 소문이「이리」에서두 모를 까닭은 없었을게아냐. 무대에 서기가 무섭게 대체 도금봉과 강 모의 사이는 어떤 사입니까? 하구 질문해오잖아. 참 난처하더군. 우물쭈물 할수두 없구해서 드디어 나는 결심을 했지.
변명할 수 있는데까진 변명하겠다구 말야. 김희갑씨를 팔았어. 아닌게아니라 강 모와 김희갑씨 하구는 서루 팬이랍시구 자주 왔다 갔다 한 사이구 또 강 모가 촬영장까지 김희갑씨를 찾아오군 했엇어요. 그런 관계를 얘기하면서 어쩌다 강 모가 전주에 볼 일이 있어 내려온 시간과 도금봉이 무대인사차 내려온 시기가 같았기 때문에 그렇잖아두 색안경을 끼구 보는 여배우 인지라 도 와 강 이 마치 무슨 특별한 관계가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두 결코 무리가 아닐거라구, 일장 연설을 늘어놓았지. 정말 쥐구멍이라두 찾구 싶은 심정이었어. 최세- 여배우들의 뒷바라지를 도맡아 해준 셈이로군요─.
여배우들의 사생활이지만 가까이 대하구 접해보면 오히려 따뜻한 이해가 앞서는 일이 많아요 더욱이 나두 여자요, 여배우 노릇을 해온 사람이니까─. 예쁘구 착한 여배우가 본의 아니게 사생활이 엉망인 경우두 있는가 하면 외려 좀 거칠구 망난이짓을 하리라 생각한 여배우가 의외루 잘사는 경우도 있었거든. 어떻게 보면 여배우 들은 스캔들의 역사나 훈장처럼 생각하기 쉽지만 실제루 알구보면 전혀 그렇지 않은 여배우두 많았어.
예쁘장한 여배우로 출발했구 지금도 예쁘구 착한 이미지를 그대로 지니구 있는 어머니 배우 김신재씨 같은 분, 아무 말썽 없이 살구계시지 않아요?
없었다지만 속께나 썩혔지. 원체 최인규라는 분 일에만 열중하는 성미여서 생활이구 가정이구 또 여자라는거, 뭐 극성을 부리며 신경 쓰진 않았지. 최인규씨에게 김소영이란 여배우가 나타나자 김신재씨와의 사이가 미묘해져서 서루 어쩌다 마주쳐두 아는체두 않고 피하군 했어. 헌데 김신재씨, 자기 남편과 소문이 난 여자에겐 좀 차게 대했으나 최인규씨에게 만은 하나의 지어미로서 온갖 정성을 다한 여자지. 점심때가 되면 언제나 뜨근뜨근한 점심을 새루 지어서 극장까지 가지고 나타났단말야. 언젠가 이런 일이 있었지. 그러니까 최인규씨가 새로 남녀연기자를 뽑았는데 그때 뽑은 연기자중엔 정창화 신상옥 염매리등의 이름이 떠오르는군. 그 무렵 김신재씨가 남편을 날라주구 간 다음 최인규씨가 나에게 가까이 와서는「신재가 뭬란줄 알아요? 마누라가 또 하나 생겨 좋으시겠수─ 그런단 말예요」하잖어.
새루 뽑은 연기자중에 미모의 염매리라는 아가씨가 있었는데, 바로 그 여자를 두고 한 엄포라 할까─. 도데체 최인규라는 사람, 여자에 대해서두 이만저만한 배짱이 아니었지.「그래 제까짓 것들이 죽자살자 날 쫓아다녔지 내가 저희들 따라다녔나」─어떤 새로운 여자와의 뜨거운 소문이 날 때마다 그는 그렇게 오히려 호통을 치더란 말야.
연애두 해보시지 않았겠어요. 이제 할머니 연애시절을 좀 얘기해 주시지요.
한번 못해 봤대서야. (눈을 감는다 무엇을 깊이 회상하는 것일까─) 허지만 내가 젊은 여배우일 쩍엔 너무너무 엄했구 희소가치였던지라 연애다운 연애를 해본일이 없었지. 지금 생각해 보면 좀 후회스럽기두 하지만 연애랍시구 제대루 한번 못해보구 살짝 늙어버린 셈이랄까─. 억울하다면 망녕이라구 하겠지. 정말이지 나는 이제 늙었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낄 수 있구, 대본의 글이 도대체 아물아물 잘 보여야 말이지. 기분은 아직 안그런데 말야─.
6·25후 굉장한 말썽거리였죠?
그 많은 연극 영화인들, 특히 여배우의 결혼식에 내가 참석하지 않은게 꼭 두사람 있었어. 바루 최은희씨와 김학성씨의 결혼과 김지미씨와 홍성기씨의 결혼이었지. 환영하지 않는 결혼식에 나갈 필요는 없었으니까 말야. 도대체 그때 최은희나 김지미의 나이가 결혼할 나이가 아니었거든. 최은희가 김학성과 결혼한게 열 아홉이었어. 그 전에 벌써 약혼을 했다가 파혼했던 경력을 가진 최은희이긴 하지만, 여배우의 나이 열 아홉, 대관절 남자에 대해 무엇을 어떻게 알구있단 말야 김학성이란 사람, 촬영조수 시절엔 졸다가 기계를 냅다 뒤엎은 일도 있는 그런 사람 이었는데 최은희와의 관계는《새로운 명세》영화에서였어. 그땐 김학성이두 촬영기사였지. 그래서 영화인들은 그들의 사이를 두고《새로운 명세》에서 새로운 명세를 했다구 수근거렸거든. 그 후 무척 고생들을 말이 했지.
그들의 사이가 금이 가기 시작한건 6·25후 피난 부산에서라구 생각돼. 김학성인 사진기자루 종군하다가 다리를 다쳐서 의족을 짚고 다녔는데 피난 부산에서 최은희는〈희망〉이라구 하는 다방을 경영했거든. 헌데 다리를 다쳐 절룩거린 남편이 걸핏하면 다방을 경영하는 아내를 때리기 일수였나봐. 남자라는 것을 알 듯 모를 듯 한 나이에 시집을 가서 과연 남편을 어떻게 알았겠느냐 말야. 무섭구 싫구 두려울 뿐만 아니라 징그럽기두 하지 않았겠어. 바루 그 점이지. 나이 어린 여배우가 시집가면 얼마 가지 않아 곧 두려움을 갖기 마련 아니겠어.
결국 그런 케이스란 말인가요?
복혜- 김지미가 홍성기씨한테 시집간게 몇 살 땐줄 알어? 겨우 열일곱이었단 말야. 아마 내가 무엇보다 그 결혼을 반대했고 그래서 결혼식에두 참석하지 않았지만 내가 알기로는 김지미가 비록 아이는 어려두 무척 이해가 깊고 무던한 여자였어. 더구나 홍성기씨란분의 성질이 무디기 짝이없단 말야. 목욕을 자주 하기를 하나 발을 한번 제대루 씻나, 세상에 원 그런 게으름뱅이가 또 있을까 싶다니까. 이민자씨두 마찬가지야. 아마 김진규씨하군 같은 고향에다 쭉 같은 단체에서 일해 왔을거야. 처음은 그렇게 얌전하구 예쁘구 착한 여자더니 한번시집을 가구 남자라는 것을 알고부턴 전남편에 대한 인식이 그대로 좋아질 까닭이 없지 않겠느냐 말야. 대변자 같으시군요 (웃음)─.
복혜- (웃으며) 대변자라 해두 별 수 없지. 같은 선배로서 그런 생활을 이해못한다면 내 얼굴에 침 뱉기 아냐. 모든 게 다 옳구 잘했다는 건 아니지. 그렇다구 덮어놓구 비난만 할 수 없는게 내 입장이 아니겠어.
그리고 또 김혜정 양 까지두 할머니는 그런 개념으루 이해하신다는 얘기겠죠?
스캔들에 대해 분명히 얘기하구 싶은 건 대부분 여배우들의 바깥어른들은 안사람이 화려한 직업을 가진 여배우이구 보니 질투가 심하구 또 벌이가 시원찮은 남편들이구 보니 열등의식이 앞선단 말야. 모 여배우의 전남편은 걸핏하면 놀음 으루 재산을 축냈지. 돈을 벌지 못하면 용돈은 몰라두 안사람이 애써 번 돈을 축내진 말아야 할게 아니냐, 그런 얘기지.
들춰낸 것 같군요. 이제 할머니의 얘기를 좀 들려줬으면 하는데요, 어떻습니까? 옛날 영화 출연의 개런티 관계는─.
일본 사람이 감독한 영화에 나갈 때 처음으로 일금 백원의 개런티를 받은 기억이 나요. 더구나 그 개런티가 감독의 아내를 저당 잡힌 돈이라구 들었을 때 우리나라의 예술가뿐이 아니라 초창기의 일본 예술가들 에게두 배고픈 직업이었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어.
골칫거릴 때가 많은데요, 기자─기사라고 해두 좋겠죠─나 여배우간에 얽힌 에피소드 랄지 그런 일은 없었습니까?
기사는 극성이었어. 한 3년 전 만해두 자기에 대한 기사가 형편없이 났다 해서 나를 찾아와 방을 뒹굴며 호소하는 여배우들이 있었는데 요즈음 그런 일이 별루 없더군 그래. 옛날, 그러니까 해방 전의 사건으루 특기할만 건 아무래두 찬영회 사건이라 할 수 있지.
그 그룹을「찬영회」라 했었지. 왜 그런 얘기가 있잖어. 기생방에서 기생의 노는 꼴이 마땅찮으면「저년 버선을 벗겨라」그랬거든. 말하자면 발에 감싼 버선을 벗기는게 여자에겐 무엇보다 큰 수치루 알았지. 헌데 언젠가 조경희라는 여배우가 모 영화기자에게 양말을 벗기웠단 말야. 그것두 암실에서 말이지. 대낮 암실에서 여배우가 양말을 벗기웠으니 배우들의 분노가 가만있을 까닭이 없었지.
그렇게 해서 일어났다는 말씀이죠? 복혜- 배우들이 안국동 근화국민교 옆에 있는 신문사루 달려가서 때려 부수구 말았지. 헌데 일이 참 묘하게 되구 말았거든. 그 무렵 때마침「광주학생사건」이 터졌단 말야. 배우들의 분노는 단순히「찬영회」멤버의 하나가 암실에서 여배우의 양말을 벗긴 사실을 두고 터졌던 건데 고등계 형사들의 날카로운 신경은 그게 곧「광주학생사건」과 관련이 된 것으루 알았거든. 그래 배우들이 속속들이 종로경찰서루 붙들려갔지. 다짜고짜 갈기더군. 취조실로 밀어넣기 무섭게 이놈이 철썩, 저놈이 철썩─나는 기겁을 하여 형사의 바짓 가랭이를 붙들고 늘어졌지.「때리려거든 날 때리라」구─ 그땐 어떻게 그런 용기가 솟았는지 몰랐지. 하두 그토록 극성을 부렸더니 취조형사가 날 보고 뭐라구 한지 알어.「네가 짠·다크나 된 줄 아느냐」─그러면서 호통을 치지 않겠어.
어떤 사람들이었습니까?
〈승방비곡〉을 쓴 최상덕씨두 그 멤버였어.
벗긴 기자가 바루 그 두 분 중의 한 사람이었나요?
양말을 벗길만큼 극성스럽지두 않았으니까─.
조르는 것 같군요. 할머니께선 요즘도 영화인들의 뒷바라지에 여념이 없으시겠지만─.
요즘엔 영화인 협회도 명예회장일 뿐인데도 왜 그토록 가야할때가 많은지 모르겠거든. 우리이동회의 부인회 회장 노릇두 하구 있는데, 옛날 이 혜화동을「백동골」 이라 불렀지. 그래「백동부인회」라구 했는데 언젠가 신문에의 연금을 전달했더니 글쎄「백동부인회」를「동백부인회」라구 신문에 내지않어. 산 증인이신 할머니께선 오래오래 사시면서 이제 편안하셔야죠. 너무 긴 시간을 빼앗았습니다. 그럼─. 복혜- 나야 뭘─어째 나만 떠들어댄 것 같아 너무 미안하구만 그래 우리 집에 온 귀한 손님인데─.
편집 후기
춘하추동방송과 인연을 맺은지 5년여,
이메일, 전화 또는 만남을 통해서 쉼없이 수많은
자료를 보내주시고 2015년 6월 21일에는 아버지의 글을 모아 책을 간행하고 아버지가 살아계실때 아버지와 인연 을 맺었던 분들을 모시고 출판기념회흘 열어 참여자들로부터 칭송을 받았다. 아버지 세상을 뜬지 30 여년, 이제 어린 딸 최철미 님 자신이 돌아가실때의 아버지 나이가 되었건만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토록 아버지에 대한 존경과 깊은 사랑으로 늘 아버지를 기린다.
그동안 춘하추동방송에 보내주신 史料만 해도 엄청 많아서 춘하추동방송에 큰 도움을 주었고 또 불로그를 열어 아버지가 남긴 시와 수필, 역사서등을 올려놓아 아버지 문집 출판과 함께 아버지를 기리는 사이트로 자리매김 했다. 아버지 가신지 30여년이 지나도록 긴세월 아버지를 기리며 여러 일을 하는 자손들이 많지 않음을 생각할 때 최철미님 참으로기특하고 자랑스럽다. 춘하추동 방송에 올린 글 모두 연결했다.
유경환(유카리나)여사님 글
이런 이야기를 기록으로 남겼다는게
놀랍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연예인들의 사생활 특히 그분들의 '사랑' 이야기에 관심이 쏠리는건 당연한 일이겠지요. 하지만 무슨 일이든 너무 드러내는 것 보다는 에서처럼) 어디에서도 들어보기 힘든 방송계, 연예계의 이야기들을 읽으며 그 시대의 시대상을 상상해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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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혜숙은 1904년에 태어나 1970대 초까지 까지 쉼없는 없는 활동으로 최고의 방송연기인이고, 영화인이고, 연극인으로 살았다. 삶의 마지막 길에서는 창덕궁 낙선재에 출입하시면서 이방자 여사와 칠보 장식물을 만들며 세월을 보내면서 1981년까지 영화에 출연하는 등 생이 다 할 때까지 하시던
일에 삶을 불살랐다. 여러 분야에서 최고의 인기와 함께 선각자의 길을 걸어오신 복혜숙은 1982년 10월 5일 79세를 일기로 세상을 뜨셨다. 아래 사진은 실질적으로 TV시대를 연 결정적인 인기드라마 아씨에 출연했을때의 모습과. 홍진기사장으로부터 공로표창을 받는 모습이다.
최세훈 아나운서 관련사진
위는 1967년 방송4사 아나운서실장이 좌담회에 출연한 사진이고 아래는 위 4분 아나운서살장이 함께한 박종세 아나운서 겷혼사진으로 그시절 이름있던 아나운서들을 본다. 박종세 신랑, 신부를 중심으로 왼쪽, 장기범, 이광재, 전영우, 김영호, 오른쪽으로 최새훈, 최계환, 이병열 아나운서의 모습이 보인다.
위는 왼쪽부터 최세훈 실장, 강찬선 아나운서, 임택근 아나운서 (당시 MBC상무) 강영숙 아나운서이고. 아래는 두번째부터 최세훈, 장기범, 강영숙 아나운서다.
아래 1957년 남산방송국으로 옮겨 처음 실시한 아나운서 온파레이드를 마치고 촬영한 사진으로 앞줄 왼쪽부터 송영필, 강익수, 장기범, 임택근, 박종세,최세훈, 이규영, 강영숙, 전영우,황우겸, 유석춘, 강찬선, 김동만, 최계환, 최두헌, 문복순, 장금자, 유창경, 김준철, 최만린, 이현숙, 윤영중, 조영준, 이본, 이광재, 한경희 아나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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