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의 과거 / 은희경 / 문학과지성사
시간이 빛의 속도로 지나간다. 그런데 그 시간을 기억하는 것은 시간이 지나갈수록 어려운 일이다. 나이가 먹어감에 따라 생기는 자연스러운 것을 떠나, 같은 기간에 발생하는 일이나 사건의 양을 감당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래서인가 시절을 담은 소설이 인기다. 82년생 90년생 등과 같은. 이 소설도 같은 분류에 속할 수도 있겠다 싶다.
김유경은 중학생 때 빌려본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 딱 한군데 밑줄이 그어져 있었다. "군대의 비극은 섞인다는 것이다."로 시작하는 말을 가슴에 품고, 고등학교를 마치고 상경하여 여대 기숙사 1학년의 삶을 시작한다. 1977년 봄이다. 다름이 있어야 섞임이 있다. 다름을 체험할 것이란 부품 꿈을 가지고 시작한 기숙사 생활은 살처럼 지나 2017년 모두 다른 지점에 가 있지만 사는 게 비슷해 보이는 나이에 이르러 등장인물들은 비슷한 내리막길을 향한다.
소설은 1977년에 여대 기숙사를 근거로 아기자기하게 펼쳐지는 여대생들의 삶을 40년 후에 되돌아보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60대 초반 스러져가는 빛이 아니라 지금의 빛이 가장 눈부셨던 순간을 과거라는 이름으로 불러낸다. 빛의 과거는 어두움이다. 그러나 빛들의 과거에 어두움은 존재하지 않는다.
은퇴를 앞에 둔 사람이면 보통 한창 피어오르던 그 시절을 되돌아보게 될 것이다. 내가 가장 활기차게 타오르던 때는 언제였을까···.
책에서 이야기하는 1977년은...
고상돈, 홍수환, 김승욱, 리영희 등의 이름과 의료보험, 제1회 대학가요제, 이리역 등등이 새겨진 해였다.
혼자라는 건 어떤 공간을 혼자 차지하는 게 아니라 타인의 시선에서 벗어나 익명으로 존재하는 시간을 뜻한다. 84
회피야말로 가장 비겁한 악이다. 애매함과 유보와 방관은 전 세계의 소통에 폐를 끼친다. 171
그 시절 우리에게는 수많은 벽이 있었다. 그 벽에 드리워지는 빛과 그림자의 명암도 뚜렷했다. 하지만 각기 다른 바위에 부딪혀 다른 지점에서 구부러지는 계곡물처럼 모두의 시간은 여울을 이루며 함께 흘러갔다. 어딘가에 도달하기 위해서 말이다. 그때 우리 모두는 막연하게나마 앞으로 다가올 시대는 지금과 다를 거라고 믿었다. 193
젊고 희노애락이 선명하고 새로 시작하는 일도 가능했던 시절이었다. 그 시절의 인생이 더 나았을까. 꼭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욕망이나 가능성의 크기에 따라 다른 계량 도구를 들고 있었을 뿐 살아오는 동안 지녔던 고독과 가난의 수치는 비슷할지도 모른다. 인생을 그것들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해도 나에게만 유독 빛이 들지 않았다고 생각할 만큼 내 인생이 나빴던 것도 아니다. 그리고 이제 세상이 뭔가 잘못되었다면 그 시스템 안에서 살아남으려 했던 나의 수긍과 방관의 몫도 있다는 것을 알 나이가 되었다. 278
과거의 빛은 내게 한때의 그림자를 드리운 뒤 사라졌다. 281
어쨌든 우리 모두 각기 다른 지점에 가 있었지만 사는 게 비슷해 보이는 나이에 이르렀고 또한. 비슷한 내리막길을 향하고 있었다. 332
기억이란 다른 사람의 기억을 만나 차이라는 새로움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한 사람의 기억도 시간이 흐르면서 새로운 모습으로 되돌아오기도 한다. "차이 나는 것만이 반복되어 돌아온다"라는 말처럼. 3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