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20년 5월 2일 서울 경복궁. 일제(日帝)는 조선 임금이 살던 왕궁에서 대중을 상대로 하는 ‘경성시민대운동회’를 개최했다. 조선의 정신을 꺾으려는 의도였다. 하지만 일제의 계획은 뜻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바로 엄복동(嚴福童·1892~1951) 때문이었다.
“뭐야, 엄복동? 대체 엄복동이가 뭐하는 자이기에 조선인들이 이 난리인가.”
일제는 바짝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1910년 한일합병조약 체결 이후 우민정책(愚民政策)을 실시하며, 조선의 문화를 말살하고 민족의식의 성장을 억누르는 데 총력을 기울여 왔던 터였다. 하지만 조선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한반도 전역에서 의병(義兵)활동이 끊이지 않았고 애국계몽운동이 봇물처럼 번져갔다. 여기에 1919년 3·1운동이 펼쳐지자 일제의 불안감은 극에 달했다. 거기에 엄복동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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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3년 전조선자전차대회에서 우승한 엄복동 선수의 모습.
- “그게. 저…, 자전거 선수입니다. 변변한 자전거 하나 없어서, 항상 낡아빠진 중고 자전거를 타고 나오는 선수인데…. 그게 희한하게도 대회에 나오기만 하면 매번 일본 선수들을 제치고 일등을 하는 바람에 조선인들이 영웅으로 떠받드는 선수입니다.”
“뭐야? 그러면 대책을 세워야 할 것 아닌가. 빨리 대책을 세우시오, 대책을.” 일제는 조급했다. 조바심을 내며 경성시민대운동회를 준비하던 일제는 엄복동을 꺾고, 그것을 통해 조선의 정신을 꺾기 위한 흉계를 마련했다.
대회는 1920년 5월 2일 열렸다. 날씨는 화창했다. 출전 선수는 8명. 일본은 엄복동을 꺾기 위해 ‘당대 최고수’로 꼽혔던 모리 다카히로 선수를 일본 열도에서 긴급 공수했다.
엄복동은 쟁쟁한 일본 선수들 틈에 끼어 스타트를 끊어야 했다. 하지만 외롭진 않았다. 영국 라지(Large)사가 동양 지역 판촉을 위해 보내준 2대의 자전거 중 한 대가 그와 함께 달리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무로 된 림에 고정식 기어가 달려있고 브레이크는 장착돼 있지 않은 이 경주용 자전거는 훗날 창원경륜공단 자전거문화센터 개장 기념으로 2008년 9월 5일 열린 ‘바이크 쇼’에 전시돼 1억원을 호가하는 가치를 지닌 것으로 평가받는다.
조선의 자존심이 걸린 이날 대회는 운동장을 40번 도는 이른바 ‘사십회 자전거 경주’. 8명의 주자는 신호와 함께 힘차게 페달을 밟았다. 윤곽은 경기 중반에 이르면서 확실하게 드러나기 시작했다. 엄복동이 안장 위로 엉덩이를 높이 치켜들면서 쏜살같이 앞으로 치고 나간 것이다. “올라간다!” 관중들은 환호했다. ‘엄복동이 엉덩이를 들었다’는 말은 당시의 유행어로, 이는 곧 조선이 일본을 제치고 앞으로 나감을 의미했다. 그가 엉덩이를 들면 관중들은 “올라간다”고 소리지르며 응원했다. 과연 엄복동의 엉덩이는 조선을 실망시키지 않았다. 바람처럼 앞을 가르고 치고 나간 엄복동은 2위로 달리던 일본 선수를 무려 5바퀴 차로 앞서며 완벽하게 따돌렸다. 운동회장은 ‘흥분의 도가니’로 돌변했다. 동아일보 1920년 5월 3일자(3면)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전하고 있다.
‘여덜사람이 용긔를 다하야 주위를 돌새, 다른 선수들은 불행히 중도에서 다 너머 뒤로 떨어지고, 오즉 선수 엄복동(嚴福童)군과 다른 일본 선수 한 사람만 그나마 승부를 질하게 되엿난대, 그것도 엄복동군은 삼십여회를 돌고, 다른 일본 사람이 엄군보다 댓회를 뒤떠러져, 명예의 일등은 의심업시 엄군의 엇개에 떠러지게 되엿는대….’
“엄복동, 엄복동!” 관중들은 경복궁이 떠나갈 듯 ‘엄복동’을 외쳤다. 그런데 갑자기 뜻하지 않은 일이 생겼다. 심판석에서 느닷없이 ‘경기 중지’를 선언한 것이다. 어안이 벙벙해진 관중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멍하니 바라만 보고 있었다. 그런데 우승은 ‘따놓은 당상’이었던 엄복동이 분을 이기지 못했다. 흥분한 엄복동은 단상 위로 뛰어올라가 우승기를 잡아 뽑아서는 그대로 부러뜨려 버렸다. 당시 상황에 대해 동아일보는 이렇게 전하고 있다.
‘엇지된 일인지 심판석에서는 벼알간 중지를 명령함에 엄군은 분함을 이의지 못하야 “이것은 꼭 협잡으로 나를 일등을 안이 주려고 하난 교활한 수단이라!” 부르지즈며 우승긔 잇는 곳으로 달려드려 “이까진 우승긔를 두엇다 무엇하느냐”고 우승긔대를 잡아꺾으매….’
엄복동은 단번에 우승기를 꺾어 부러뜨렸다. 그러자 일본 사람들이 가만히 있지 않았다. 그들은 기다렸다는 듯 일시에 몰려들어 엄복동을 마구 두드려팼다. 엄복동이 피를 흘리며 쓰러지자 이번엔 조선인들이 가만 있지 않았다. “엄복동이 일본인들에게 매를 맞는다”며 일제히 가세해 경기장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신문은 패싸움이 벌어진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전했다.
‘엽헤 잇든 일본 사람들이 일시예 몰녀들어 엄군을 구타하야 엄군은 마참내 목에 상처를 내고 피까지 흘니게 되매, 일반 군중들은 소리를 치며 엄복동이가 마저 죽는다고 운동장 안으로 물결가치 달녀드러 욕하는 자, 돌 던지는 자, 꾸짓는 자 등 분개한 행동은 자못 위험한 지경에 이르럿스나, 다행히 경관의 진력으로 군중은 헤치고, 회는 마침내 중지가 되고 마럿는대, 자세한 뎐말은 추후 보도하겟스나 우선 이것만 보도하노라.’
- 고물 자전거로 첫 출전부터 우승! 우승!
일제 울린 조선 최고 스포츠 스타
‘하늘엔 안창남, 땅엔 엄복동’ 노래 불리며 민족 희망으로
일본, 최고선수 긴급공수 자존심 대결… 경기 무효 소동도 -
- 암울했던 일제 치하에 엄복동은 조선 민족의 희망이었다. 고국의 하늘을 최초로 비행한 안창남(安昌男·1900~1930)이 ‘하늘의 영웅’이었다면, 고국의 도로를 페달로 질주한 엄복동은 ‘땅의 영웅’이었다. 이 두 사람을 기리기 위해 당시 퍼졌던 노랫가락이 ‘하늘엔 안창남, 땅엔 엄복동’이란 구절이다. 당시 유행했던 ‘이팔청춘’이란 노래에 맞춰 애창되던 ‘엄복동 노래’는 다음과 같다.
‘이겨라 이겨라/ 엄복동 선수 이겨라/ 와 이겼다/ 일본놈들을 물리치고 이겼다/ 만세다 엄복동 최고다/ 떴다 보아라 안창남의 비행기/ 내려다 보아라 엄복동의 자전거.’
독일 사람 드라이스(Drais K.B. von)가 1818년 목마의 바퀴를 개량해서 만들었다는 자전거가 국내에 소개된 것은 1884년경이다. 고 이규태 전 조선일보 고문은 “미국 공사관 무관을 지낸 해군장교 포크가 1884년 제물포(인천)~서울까지 자전거를 타고 왔다는 기록이 있으며, 1886년 미국 선교사 다리지엘 벙커가 자전거를 탔다는 기록도 있다”고 소개하기도 했다.
구한말~일제강점기의 자전거는 일명 ‘자행거(自行車)’라고 불렸던 부유층의 교통수단이었다. ‘가마꾼 없이 스스로 가는 수레’라고 해서 ‘자행거’라 불렀다 한다. 넘어질 듯, 넘어질 듯 보이다가도 이내 씽씽 달리는 ‘자행거’를 당시 사람들은 일종의 서커스 곡예처럼 여기며 신기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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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엄복동 선수가 타던 자전거. 영국 라지사가 제작했다. / photo 연합
- 기묘한 탈거리였던 ‘자행거’를 보고 신기해 하기는 고종(高宗·1852~1919) 황제도 마찬가지였다고 한다. 고 이규태 전 조선일보 고문은 생전에 에비슨의 회고록을 인용해 다음과 같은 일화를 소개했다. “세브란스 의과대학 설립자이자 선교사인 의사 올리버 에비슨은 궁궐에 자주 출입할 수 있었다. 당시 미국 공사였던 호레이스 알렌의 주선으로 옻이 오른 고종 황제를 치료한 것이 계기였다고 전한다. 어느날 황제가 에비슨에게 ‘궁궐에 올 때 말을 타고 오느냐, 가마를 타고 오느냐’고 물었다. 에비슨은 ‘더러 걷기도 하고 인력거를 타기도 하는데, 오늘은 자전거를 타고 왔다’고 답했다. 그러자 황제는 ‘자전거가 어떻게 굴러가며, 어떻게 생겼기에 넘어지지 않느냐’고 꼼꼼히 물었다. 황제는 에비슨의 답을 듣고도 이해가 되지 않았던지, 시종에게 ‘자전거를 볼 수 있도록 가져오라’고 명했다. 황제는 대령한 자전거를 이리저리 살펴보고 나더니 ‘어떻게 해서 넘어지는 것을 막을 수 있는가’라고 재차 물었다. 에비슨이 ‘처음에는 균형잡기가 어렵지만 오래 타면 넘어지지 않는다’고 답했지만, 황제는 잘 가늠이 되지 않는 표정이었다. 에비슨이 코트 자락을 접고 안장에 앉아 궁궐 내정을 빙글빙글 돌며 타는 모습을 보여주자 황제가 웃으며 매우 즐거워했다. 에비슨은 황제가 행여 타보자고 할까봐 마음 졸였다고 한다.”
패망한 나라, 주인 잃은 조선 국민에게 희망과 위안을 준 엄복동은 1892년 서울에서 아버지 엄선양과 어머니 김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10대 때 평택의 ‘일미상회’라는 자전거포에서 점원으로 일하다 자전거를 배운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엔 서울~평택을 오가던 자전거 행상이 있었는데 엄복동 역시 그들처럼 서울~평택을 자전거로 오가며 실력을 키웠다고 한다. 요즘으로 치면 ‘자출족(자전거로 출퇴근하는 사람)’이었던 셈이다.
아마추어로 시작한 그가 선수로서 명성을 날리게 된 것은 1913년 4월의 ‘전조선자전차경기대회’였다. 경성일보와 매일신보사가 서울 용산 연병장에서 개최한 이 대회는 서울(용산), 인천, 평양의 3곳에서 벌어진 전국 규모의 대회로, 당시로선 경이적인 규모인 10만명의 관객이 운집했다고 한다.
엄복동은 이 대회에 중고 자전거를 몰고 처녀 출전, 우승을 차지하는 이변을 낳았다. 당시엔 자전거 선수를 일류(一流), 이류(二流), 삼류(三流)로 구분해 등급을 매겼는데 정상급을 뜻하는 일류 선수는 운동장 40바퀴를 돌았고 2류는 30바퀴를 도는 방식으로 경기가 진행됐다. 최고 실력자들이 모인 이 대회에서 ‘느닷없이’ 우승을 차지한 엄복동은 일약 조선 민족의 영웅으로 떠올랐다. 이후 자전거 경기는 한·일 두 나라 사이의 민족전 양상을 띠게 됐는데 여기서 그의 진가는 유감없이 발휘된다. 1922년 5월 장충단 자전차경주대회 우승, 1923년 마산 전조선자전차경기대회 우승, 1925년 상주 조선팔도자전거대회 우승, 1928년 전국운수조합대회 우승 등 엄복동은 이후 벌어진 자전거 대회에서 거의 예외없이 1등을 차지하면서 조선의 민족 의식을 고취시켰다. 동아일보 1925년 6월 9일자(3면)는 단평(短評) 코너에서 이렇게 비꼬았다.
“일본 상인들은 목전 자전차 경주에서 조선인에게 일등을 빼앗겨서 분하다 하야, 일본에 잇는 선수들을 전부 초치(招致)하야 자전차경주회를 연다고. 또 지면 분사(憤死)나 할는지.”
- 조선 대중에게 자전거가 어느 정도 보급된 시기는 1900년대 초로 보인다. 1905년 12월 제정된 ‘가로관리규칙(街路管理規則)’에 “야간 등화 없이 자전거 타는 것을 금한다”는 내용이 있는 것으로 미뤄 이 시기 이미 밤중에 자전거를 타는 인구가 어느 정도 있었다는 것을 추정할 수 있다.
독특한 기동성을 가진 자전거는 특유의 기능을 인정 받아 정부에서도 사용됐다. 1908년 11월 13일자 황성신문엔 ‘군부(軍部)가 1908년 긴급한 공사에 사용하기 위해 자전거 2대를 구입했는데 이는 영위관(領尉官) 및 고원대청직(雇員待廳職)이라도 급한 공사가 있으면 사용할 수 있다’는 기사가 실려 있어 이 시기 관청에서 공무로 자전거를 사용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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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의정부 녹양동에 있는 엄복동 동상. / photo 이경호 조선영상미디어 기자
- 이 시기 자전거 상인들은 자전거를 홍보하고 이용 인구를 늘리기 위해 거액의 상금이 걸린 대회를 자주 열었다. 국내 첫 대회는 1906년 4월 22일 지금의 을지로 7가 동대문운동장(서울운동장) 동쪽에 있던 훈련원에서 개최됐다. 이곳은 조선의 신식군대였던 ‘별기군(別技軍)’이 한때 훈련을 받았던 곳이다. 대한매일신보 1906년 4월 7일자엔 이 대회 상금이 100원(圓)이었으며 외국인도 참가했다는 내용의 기사가 실려 있다. 그 당시 쌀 한 가마의 평균 가격이 5원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100원이란 당시 상금은 적지 않은 액수임을 알 수 있다. 이 대회에서 육군 참위(參尉=소위)였던 조선인 권원식(權元植)은 일본인 요시가와(吉川)와 우승을 다퉜지만 아쉽게도 우승을 차지하진 못했다.
이듬해인 1907년엔 한·일 자전거 상점이 주최한 자전거 대회가 열렸고 1908년엔 외국인이 참가한 가운데 자전거 대회가 개최됐으며 1909년에도 일일신문사(日日新聞社) 주최로 훈련원에서 자전거 대회가 열렸다.
이때까지만 해도 자전거 대회는 관계자들끼리 즐기는 친목회 성격이 강했다. 그랬던 것이 ‘무명’ 엄복동의 1913년 ‘전조선자전차경기대회’ 우승을 계기로 한·일 민족전 양상으로 변모하게 된 것이다.
‘민족의 영웅’ 엄복동은 나이와 체력 저하를 이유로 1929년 경기장을 떠났다. 하지만 그의 위대함은 그 이후에 빛이 난다. 1932년 4월 20일 열린 ‘전조선남녀자전거대회’ 1만미터 경주에 41세의 고령으로 참석한 것이다. 결과는 우승이었다. 수년간의 훈련 공백과 40대의 나이도 그 앞에선 무색했다. ‘엄복동 선수 노익장’ 소식을 접한 조선 반도는 또 한번 열광의 도가니에 빠졌다. 하지만 그 이후 엄복동의 대회 기록은 전해지지 않고 있다.
영웅의 말년은 비참했다. 젊어서 번 돈을 모두 탕진한 뒤 광복을 전후해 경기도 동두천과 연천 부근에서 떠돌이 생활을 하던 그는 한국전쟁 당시 동두천 부근의 한 야산에서 비행기 폭격을 맞고 횡사한 것으로 알려졌다.
서서히 잊혀져 가던 자전거 영웅이 되살아난 것은 27년 후인 1977년. 대한사이클연맹이 민족의 긍지와 자부심을 드높인 그를 기리기 위해 1977년부터 매년 자전거 대회를 개최한 것이다. 하지만 비용 부담과 사이클에 대한 낮은 관심으로 인해 1999년 22회 대회를 끝으로 엄복동 자전거 대회는 막을 내리고 말았다.
의정부시는 대한사이클연맹의 건의를 받아들여 1986년 녹양동 벨로드롬 경기장 입구에 현재 엄복동 선수를 기리는 동상을 세웠다. 하지만 마라톤 영웅 손기정에 비견될 만한 자전거 영웅 엄복동은 이후 세간의 주목을 받지 못한 채 서서히 잊혀지고 말았다. ▒
/ 이범진 기자 bomb@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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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암울했던 일제 치하에 엄복동은 조선 민족의 희망이었다. 고국의 하늘을 최초로 비행한 안창남(安昌男·1900~1930)이 ‘하늘의 영웅’이었다면, 고국의 도로를 페달로 질주한 엄복동은 ‘땅의 영웅’이었다. 이 두 사람을 기리기 위해 당시 퍼졌던 노랫가락이 ‘하늘엔 안창남, 땅엔 엄복동’이란 구절이다. 당시 유행했던 ‘이팔청춘’이란 노래에 맞춰 애창되던 ‘엄복동 노래’는 다음과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