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묵황야차
혈로를 뚫고 남문으로 나오니 마침, 방화 放火 임무를 끝낸 담비 일행이 동쪽에서 달려오고 있었다.
뒤를 돌아보니 돌식이가 적군 십여 명에 포위되어 싸우고 있는데, 그 형세가 대단히 위태로워 보였다.
을지 미앙을 말에 태운 체, 호위하는 백 부장과 함께 담비에게 인계시킨 후,
중부는 다시 오던 길을 뒤돌아 말을 몰아, 장창을 쥐고 홀로 투혼 鬪魂을 불태우는
정돌식 쪽으로 묵황도를 거칠게 휘두르며 적병들을 짓밟기 시작하였다.
묵황도가 번쩍일 때마다 적병의 날카로운 비명이 한 군 진영에 울려 퍼진다.
이각을 적 진영에서 좌충우돌 左衝右突로 마구잡이로 큰 칼을 휘두르며 적 진영을 헤집고 질주하고 있으니,
이중부의 그 모습이 마치, 정수리부터 발끝까지 붉은 피를 뒤집어쓴 혈영인 血影人처럼 기괴 奇怪한 모습이다.
등과 어깨에는 유시 流矢를 두 대나 맞았으나, 화살을 뽑을 틈도 없이
유시에 꽂힌 채로 칼을 휘두르며 싸우고 있었다.
자신의 상처에서 흘러나온 선혈 鮮血과 적병들의 붉은 피가 뒤섞여 전신을 검붉은 피로 목욕한 듯하고,
붉게 충혈된 두 눈에서는 독살 毒殺스러운 살기 殺氣가 줄기줄기 쏟아져 나온다.
마치, 붉은 야차 夜叉와 같은 이중부의 괴이하고 험악스러운 모습을 마주한 적병들은
감히 대적 對敵하지 못하고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선다.
용력이 뛰어난 힘 좋은 돌식이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적의 기병 騎兵 두 명을 창으로 연거푸 찔러 낙마 落馬시키고는 이중부의 곁으로 다가왔다.
중부와 돌식이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남쪽으로 거칠게 말을 몰아가며 장창과 묵황도를 마구 휘둘렀다.
그 위맹함에 놀란 적병들도 더는 막지 못하고 길을 터 주고 만다.
중부와 정돌식의 위세에 눌린 주위의 병사들이 몸을 사리며 주춤거리자,
인근의 또 다른 적병들이 몰려 온다.
어깨와 등에 화살을 한 대씩 맞은 분노한 중부의 묵황도가 조선세법을 위맹스럽게 펼치며,
적 진영을 질풍노도 疾風怒濤 마냥, 거침없이 마구 누비며 달리니 이중부와 정돌식이 지나간
뒤쪽은 부상자가 속출하며 아수라 阿修羅장이 되어버린다.
이중부의 거친 묵황도와 정돌식의 기다란 분노의 장창이 초원의 밤하늘을 붉게 물들인다.
그러나 남쪽 출입구까지는 눈에 뻔히 보이는 멀지 않은 거리지만, 좀처럼 다가가지 못하고 있었다.
적이 만든 진형 陣形이 가동되어 두 사람을 가두어 버린 것이다.
팔진도 八陣圖에 갇혀 버린 것이다.
적병들이 길을 터주고 또, 새로운 병사들이 나타나고 하던 것이 진을 형성하는 과정이었다.
천지풍운 용호조사 天地風雲 龍虎鳥蛇의 여덟 가지 모양으로 형성된,
진법 陣法에 걸려 생문 生門을 찾지 못하고 헤매고있는 위험한 처지다.
오히려 적병들에게 떠밀려 옆으로 밀려나는 상황이다.
그렇게 팔진도에 갇혀 싸우다 보니 일반인에 비해 배 이상의 뛰어난 용력과 무예를 지닌 두 사람이지만,
힘의 한계를 서서히 느끼고 있었다.
진형에 갇힌 안쪽에서는 대등한 병력이라도 파진 破陣 하기가 어렵다.
그러면 바깥에서 진형을 파괴하여야만 하는데,
고립무원 孤立無援한 적진 敵陣에서 도와줄 아군이 있을 리가 없다.
더구나, 팔진도가 가동되자, 저 멀리 새로운 장수가 무거운 철퇴를 들고 나타나 싸움터로 다가오고 있었다.
마상 위의 덩치가 일반 병사보다 머리 하나가 더 붙은 것처럼 커 보인다.
평소 같으면 하찮게 여길만하였으나, 힘이 빠져 지친 현 상태로는 부담스럽게 느껴진다.
두 사람 모두 많이 지쳐 있다는 뜻이다.
각자 들고 있는 묵도와 장창도 이제 무거워지기 시작하더니 동작이 서서히 둔해져 간다.
팔진도의 위력이 나타난 것이다.
이를 알아차린 적병들의 공격이 더욱 신랄하게 변하였다.
위기일발 危機一髮의 순간,
주위의 여러 개의 게르가 불이 붙어 타오르고 곧이어, 남쪽 목책 木柵 출입문이 활짝 열린다.
그리고 주변에서 “천부장님 힘내세요”라는 함성이 일어나더니,
십여 명의 기마병들이 칼과 장창을 휘두르며 팔진도 중, 용 龍 형상의 한 모퉁이를 부숴버리고,
이중부와 정돌식 주위로 몰려왔다.
어둠 속 불빛으로 얼핏 보아도 안면이 있는 아군 我軍 병사들이다.
인솔자는 고적 탕후 庫狄 湯厚 백부장이었다.
그저께 밤 전투에서 싸우다 낙오되어 적 진영에 숨어 있던 병사들이 위급한 순간에 나타나,
주위에 불을 지르고 목책 문을 열어젖히고, 바깥에서 팔진도의 한 부분을 뚫어 버린 것이다.
낙오병 落伍兵들의 도움을 받아 다시 힘을 얻은, 중부와 돌식은 간신히 혈로를 뚫고 적진을 빠져나왔다.
구사일생으로 탈주하여 일행 십여 명이 시오리 가령 도주하자, 담비로부터 이야기를 전해 들은
서누리와 가마우지가 급히 백여 명의 병사를 이끌고 마중 나왔다.
두 장수도 마음대로 막아내지를 못하였는데, 새로운 지원병이 나타나자,
적들은 추격을 포기하고 화살만 몇 대 날리고는 철수해 버린다.
낙오병들이 위기의 순간에 갑자기 나타난 것은, 목책 망루를 세울 때,
망루 아래 지하에 비밀 공간을 만들어 두었다는 것이다.
그 지하 기지 地下 基地를 알고 있었던 고적 탕후 백부장이 병사 열두 명과 이틀 동안 숨어 있었는데,
밖이 혼란한 틈을 이용하여, 지하에서 나와 적을 기습하여 팔진도를 깨뜨리고, 목책 문을 열었다는 것이다.
위기의 순간에 적절하게 나타난 충직한 병사들이다.
그러나,
목책 망루 望樓 모서리에서 긴 머리카락을 바람에 날리며,
처음부터 조용히 이들을 지켜보는 눈이 있었음을 피아간 彼我間,
그 누구도 알아채지 못하고 있었다.
구사일생으로 도주한 이중부와 일행들은 여명이 밝아 올 무렵에야 을지 담열 소왕 게르에 도착할 수 있었다.
미앙은 병상에 누운 아버지의 손을 잡고 나직이 울고 있었다.
등에 꽂힌 화살을 뽑지도 못한 채 중부가 급히 막사에 들어가니, 을지 소왕이 이중부의 손을 더듬어 잡고는
“고맙네” 하더니, 힘겹게 숨을 한 번 더 몰아쉬고는
“이제 우리 흉노의 앞날이 자네 어깨에 달려있네, 부디 몸조심하게”하고는 고개를 떨구더니 이내 숨을 거두었다.
이미 숨이 경각 頃刻에 달해있었으나, 이중부의 얼굴을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보고,
생사 生死의 위험을 무릅쓰고 도산검림 刀山劍林을 뚫고, 자신의 귀한 무남독녀 딸을 구해준
고마움을 사례 私禮 하고자, 생명의 진기 盡氣가 다하였으나, 초능력적인 정신력을 발휘하여
그때까지 버티고 있었던 것이었다.
이중부는 의도는 어찌 되었던간에 을지 담열 소왕 덕분에 조선세법을 득취 得取하여,
무술인들이 꿈에도 그리는 도검술의 최강자가 되었으며, 그로 인하여 천부장이되었고 ,
자신의 명성을 초원에 날리게 되었다.
그런데 당사자에게 그 고마움을 표현하지도 못했는데, 그분은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 고마움과 표현하지 못한 아쉬움이 이중부의 가슴 한 켠에 조용히 자리 잡고 있었다.
을지 소왕의 뛰어난 통솔력과 자신을 신뢰한다는 그 말을 마음속 깊이 간직해 두었다.
다음날,
을지 소왕의 장례를 조촐히 치르고, 패잔병 敗殘兵들은 걸걸추로 소왕을 따라,
서쪽의 항가이산맥으로 이동하였다.
흰 상복 喪服을 입은 을지 미앙은 부친의 무덤을 떠나기가 아쉬운 모양이다.
같은 상복을 입은 위지 율 慰遲 律이 미앙을 위로한다.
위지 慰遲씨와 을지 乙支씨는 본시 한 가문 家門이다.
위지가에서 을지 무특 소왕의 부친(미앙의 조부)이 뛰어난 전공 戰功으로 소왕의 직에 임명되자,
을지 乙支 성씨 姓氏로 창성 創姓하여 독립되어 나온 것이다.
[* 당시에는 위지 성씨나 을지 성씨가 같거나, 비슷한 발음이었을 것으로 보고 있으며,
문자 文字로 표기 表記하는 과정에서 다르게 표현되었다고 보는 견해도 있음.]
이제 홀로된 미앙은 목숨을 걸고 자신을 구출해 준, 이중부를 뒤따라가면서 부친의 무덤을 돌아보고 또 돌아본다.
미련이 남는다.
미련 未練을 떨치기가 그렇게 어렵다.
[* 미련 未練]
미련 未練은 상복 喪服을 다른 말로 표현한 단어다.
삼년상 三年喪을 치루고도 돌아가신 부모님을 그리워하며, 삼 년이란 긴 시간 동안 입고 지내며
시묘 侍墓 살이 하던, 미련 未練 (상복 喪服)을 벗기가 아쉬워서 나온 단어 單語다.
시간과 마음의 여유가 있었던 원시 농경사회 農耕社會에서나 가능한 일이었다.
어원 語源 발생을 생각해 보면, 남녀상열지사 男女相悅之詞에 인용 引用하기에는
적절치 아니하다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한편,
일축왕 진영에서는 지난밤, 이중부 일행의 기습으로 진영이 쑥대밭이 되었고, 백여 명이 다치거나 죽었다.
이중부가 등에는 화살을 두 대나 꽂힌 상태로 온몸에 붉은 피를 뒤집어 쓴
마치, 야차 같은 기괴 奇怪한 모습으로 큰 칼을 마구 휘두르며 자신들 진영을
무인지경 無人之境으로 휘젓고 다니는 모습에 모두가 얼이 빠져 버렸다.
더구나, 커다란 묵황도를 위맹스럽게 휘두르며, 대적 對敵하는 병사들을 마구잡이로
살상 殺傷하는 모습을 보고는 모두 전율을 느끼며 공포감에 휩싸였다.
이후로 이중부가 휘두르는 묵황도가 내뿜는 어마어마한 패도 覇刀의 위력을 보고,
묵황패도 墨荒覇刀 또는 묵황야차 墨荒夜叉라고 불렸다.
초원이 세대교체 世代交替를 원하고 있었다.
이제 초원은 바야흐로 막북무쌍과 묵황야차의 시대로 접어들고 있었다.
* 기원 45년.
극심한 자연재해로 가축들이 목말라 죽고, 초원의 생활 여건이 어려워지자
일축왕은 대인회의를 거치지 않고 한나라에 도움을 요청하였다.
그러자 한과 적대적인 관계인 포노 선우는 분노한다.
그러나 포노 선우의 1만 군사는 일축왕의 5만 군사에 대패하고 수도까지 함락당한다.
48년. 일축왕은 후(後)호한야 선우로 추대되고 한나라 광무제에게 화친을 요청한다.
50년에는 남흉노의 후호한야 선우는 광무제에게 입조 入朝하여 지도를 바친다.
그러자 자존심 강한 몽골의 북 흉노는 이에 반발하여 독립한다.
결국 남, 북 흉노로 분열된다.
- 後漢書 후한서.
- 1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