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고향은 경기도 수원 영화동 이다 . 어린시절 우리들은 6.7.13.살까지 어율려서 수원 영화동 연무대.북문.서문.남문.봉화대.활터.를 노는냐고 몰려 싸돌아 다니다 여름엔 더우니 넒은 개울에서 풍덩 거리고 미역 감기다.당시엔 수원의 골짜기 광계산 에서 부터 내려 오는 맑은 개울물이 화홍문 아치 밑으로 흐른다 아이들은 미역을 ( 여름에 목욕 ) 감고 논다 7.8 살의 어린 나는 동네 언니 오빠들을 졸졸 따라 다니면서 잘 놀았다. 술래 잡기등을 하고 놀고 좋았다 .우리들은 어린시절 놀던 그 장소가 그렇게 유명 하고 사연 깊은 역사가 있는곳 인줄은 몰랐다 후에 학교에서 배우고 TV 에 자주 오르고 하니 알었지 어린것이 무엇을 알겐는 가다 .오늘날의 수원은 유네스코에 등제가 벌써 오래전에 되어 있다 그것은 효자 ( 뒤지에 갇혀죽은 사도 세자의 아들 ) 정조 임금님이 도읍을 화성 수원으로 옮길라고 정성들여 그 시절의 장인들이 쌓은 성벽이 오늘날의 뚜껑 없는 박물관이 되었다 모두 보수공사를 해서 깔금 해졌다 ( 너무 길어서 생락 정조 임금님의 효심은 아시죠 ) 우리들은 어린 시절엔 참 재미있게 놀았다 그러다 내가 12살인지에 용인으로 이사를 왔다 ( 엄마의 사정으로 ) 용인은 당시 인구는 7~8만도 않되었다 육군 3군 사령부가 들어 서더니 용인은 갑자기 위성 도시가 되었다 수도인 서울을 버스로 50분이면 간다 그것은 영동선의 개통으로 서울이 가까워 진것이다 .
인구가 팽창하니 오늘날엔 인구가 용인이 140만 가까이 된다 한다 나의 어린시절엔 나는 동네 오빠 언니 또래 들과 참 재미있게 지냈다.항상 친구들은 나를 불으러 왔다 .어디 가던지 그것은 내 아버지의 말씀도 컷다.아버지는 항상 내게 " 오복아?, 그 누구 하고도 싸우지 말고 니 주장 내세우지 말고 같이 어울리고 나이 너 보다 더 먹은 사람이 하자는 대로 해라 나쁜것 아니면 그리고 먹을것 있으면 ( 당시는 가난한 농경 사회였다 ) 혼자 먹지말고 나누어 먹고 잘지내라 어린 시절은 너에게 중요한 훗날 모태가 되고 추억이란다 , 언제나 말씀을 그렇게 하셨다 의학을 전공하신 아버지의 말씀이다." 보고 싶어요 아버지, 언제나 항상 자유.평등 .신뢰.를 알아 듣지도 못하는 어린 자식들에게 말씀 하시고 특히 거짓말은 엄격 하시고 용서를 않하셨던 아버지 였다. 아버지는 항상 과일을 사도 한접씩 사신다 100개씩 그리고는 딸들과 누어 있는 어린 아가 에게도 공평하게 10개씩 나누어 주신다. 니거는 니가 챙기라는 그런 말씀과 일종의 권리와 내것의 교육이 었던 것이다.사실 당시에는 하우스 라는 것이 없어 제철 이나 과일 맛을 본다 여름에 과일인 참외.복숭아 포도 자두등 ( 자두는 적으니 20개 ) 다른 과일은 10개씩 자식인 아이들에게 앞에다 이거" 네것이니 잘 가지고 관리 잘하고 먹어라 하면 ,어린 년년생인 딸들 우리은 본인 앞으로 정말 어린 눈으로 쳐다봐도 커다란 과일이 바구니로 한 아름이다 항상 그래셨다 삶은 계란도 항상 10개씩 나누어 주셨다 유일하게 나누어 먹은것이 수박이다 쪼개서 빙둘러 앉아서 조잘 대면서 나누어 먹는 그 맛은 시원하다 우물에 매달아 놓았다가 식구들이 모두 모이면 꺼내서 나누어 먹는다 아련한 돈주고도 못사는 나의 어린시절의 추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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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그전의 우물은 이제 어느 동네도 없다 있어도 드물다 어디를 가더라도 우물은 없다. 그것도 그 옛날 사는 방식의 소중한 사람들의 목숨줄인 물의 추억이다.아버지는 긴긴 겨울엔 메밀묵 과 찹쌀떡을 사서 나누어 주시고 내겐 항상 너보다 약자에겐 잘하고 오늘날 까지 내가 아는 사람이 많고 그들이 내게 잘하는것도 내 아버지에게 배운 영향이 크다 항상 자기 주장 내 세우지 말라고 하시고 너 보다 강하고 잘난 인간이 너에게 부정하게 하면 너의 권리를 찿으라 하셨다 .내 아버지 말씀은 사실 당시는 어린 나이에 그게 무슨 말씀인가 모르고 살었다. 나이를 먹어 새록 새록 말씀이 내게 모태가 되어 그대로 실천을 하니 인간사 사회 생활이라 피곤해서 피한다 포기하고 그러니 내가 평화 주위자에 아는 사람이 많어지고 모두 잘 하고 잘 지 낸다 남이 잘하기를 바라면 않된다 내가 먼저 잘해야지 내가 어려움에 직면 할땐 도와주는 이에 나도 한결 같이 더 불어 같이 맹목적으로 잘해야 된다 일방적으로만 바라면 절대 안된다.내 아버지의 가르침에 어린시절 6살때 엄마의 도움으로 깨우친 한글에 만화책에 아버지가 사다주시는 동화책에 아버지의 서재에서 나는 일찍히 읽었던 현대 문학 고대 문학 정치등 에서 어린 내겐 엄청 어렵고 이해가 않되는 무수히 많은 이름모를 책들과 전집들 등 다양 하게 읽고 했던 기억 항상 생각이 난다. 아버지는 내게 동화책을 자주 사다 주시면 책을 읽고 감명 받었던 독후감을 써오라 하셨다. 당시엔 지겨웠다 .어린 시절엔 여름엔 금붕어와 식물 ( 꽃종류) 사오셔서 잘 기르라고 상대를 사랑 하는 마음과 상대를 이해 하는 마음과 배려 하는 마음을 갖고 살으라고 모두 지금의 내겐 그시절 어린 6 살부터 배운 아버지의 말씀이 나의 인생살이 에서 정말 좋은 재산이 되어서 착한 남편 하고도 40녀년의 끈을 이어온다.그것은 소중한 가정 이라서다.한쪽이 이해 하고 포기 하고 살면 된다 .잠시 이야기 하다 보니 여기 까지 왔다.
나이먹을 수록 장르가 길어 진다. 사실 나는 부여에서 살은지가 오래 되었다.그것은 그렇수밖에 시집이라고 와서 삶을 영위하니 아마 죽어서도 나는 신씨네 산에 묻힐 것이다. 못간다 .이제는 더 하다.나이가 노땅의 60이 넘어서 달리고 있다 .내 아버지의 맏자식인 나는 엄마의 생신에 친정엘 같다.물론 기껏 오래 있다 온다는 것이 2~3 전날이다.엄마의 생신은 한참 더위에 태어 나셨다.양력으로 8월 초에 태어나신 엄마 그래서 기쁠때 해먹는 맛있는 떡과 음식은 그날 해서 먹고 만다 나는 그때에는 엄마 생신 3 일전에 친정엘 같다 너무 더운 날씨다.에어컨을 켜도 더워서 입고간 옷을 벗고 단스를 뒤져서 편안하게 보이는 엄마의 얆은 옷으로 갈어 입었다 .편안하고 흰색 바탕에 약간의 간격이 떨어져 있는 조그마한 무늬의 그런 여름옷이다 .감촉도 약간 거칠고 살에 않닿고 그냥 좋다. 웃도리는 외리가 라운드에 단추가 앞으로 잠그기 좋게 간격으로 주르륵 있다 목밑으로 단추가 바지는 칠부에 헐렁하고 입고 있기가 편하고 좋았다.넉 넉한 고무줄 바지는 입으니 시원 하고 편했다.그런데 여 조카가 " 7일 있다 생일 이란다.나는 큰 고모가 되어서 그 소리를 듣고 한다는 소리가" 정인아 뭐니 생일 이라고 일주일 있다 고모가 생일 축하 해줄께 가자 , 하고는 13살의 정인 .성진 12살 우리 딸 고 일학년 일찍 학교 보냄의 16살의 3 명 의 아이들을 데리고 집에서 좀 떨어진 햄버거 가게로 같다 나는 큰 고모라고 아이들이 원하는것을 주문을 했다.피자 콤비네이숀 .감자 튀김 .스파게티 치킨.햄버거. 그리고 콜라까지 아이들은 좋다고 아우성이다 큰 고모 최고라고 아이들이 좋아하는 페스트 푸드가 나오자 환호성이다.나는 " 어서 먹어라 천천히 콜라 마시면서 , 음식은 탁자로 하나가 되었다. 직원은 내게 와서 묻는 다 " 생일 인가요 ? ,그래서 나는 " 여기 정인씨 생신이래요 ㅋㅋ 그래서 축하 파티 해주러 왔어요 ?,제가 고모에요 , 하고 인척 사항을 이야기하니 이상하게 직원인 그녀는 나를 자꾸 쳐다 본다.
그때도 나는 모르고 있었다 직원인 그녀는 우리에게 다시 다가 오더니 저" 사진 찍어 드릴까요?,그런다 .아이들은 좋다고 한다.그래서 한컷 찰칵 우르르 얼굴을 맞대고 두컷 찰칵 아이들은 큰 고모가 최고라 한다.나는 " 예쁜 아가들아 어서 먹어라 그리고 니가 태어난것을 축하 한다.노래 불러라 어서 촛불도 끄고 .피자위에서 촛불이 살랑 거린다 .정인이는 입으로 후우 불더니 촛불을 껐다 나는 " 천천히 콜라 마시면서 먹어라 많이 먹지말고 양것 먹어라, 그랬더니 아이들은 맛있게 조잘거리면서 먹는다 " 큰고모 이것 다 못먹어요 ? , 한다 ,나는 " 걱정말고 먹어라 남으면 싸가지고 가자 어서 먹어 너희 아빠가 자주 사오잖니 ,그랬더니 아이들은 피자를 먹으면서 고개를 끄덕인다. 정인아빠는 아버지의 첫 아들이다. 딸 5명 낳고 얻은 소중한 남동생 이다. 녀석 때문에 나는 친정이 생겼다. 애지중지 기른 아들이라 그런지 좀 내겐 그는 인간미가 없다. 그래도 나는 출가 외인이라 어쩌다 일년에 두 세번 같다 오는 친정이라 그냥 눈치만 보다 온다. 모두가 평화로운것이 좋다. 할말은 많지만 아이들이 음식을 다 못먹어서 음식을 싸달랬다. 직원인 그녀은 나를 다시 의 아아 하게 쳐다보고 있길래 나는 눈치가 없었다.나는 그때 까지도 몰랐다 " 가야되요 음식 싸주시고요 금액이 얼마 나왔나요 ?' 하고 물어보니 따끔하게 많이 나왔다 그녀는 " 생일 축하해요 ? 머그컵 이에요 4개 드릴께요 ? 그리고 아까 찍은 사진은 여기 에다 주소 적고 가면 사진 보내드릴께요 ㅎㅎ, 그런다. 나는 친절한 그녀에게 " 고맙습니다 정인아 ? 주소 대고 연락처 알려 드려라 ,하니 정인이는 또박 거리고 그녀에게 주소를 알린다 우리들은 모두 일어나서 얼마 안되는 거리의 엄마집 으로 걸어오는데
길가던 사람들이 이상하게 나를 자꾸 쳐다본다. 정말 이상하다 했다. 내가 시골에서 와서 그렇게 촌티가 디룩 나 나 하고 7~8 분 거리의 친정으로 왔다 아이들은 "할머니 ,하고 현관안에서 마주친 친정엄마에게 " 할머니 큰고모가 정인 언니 생일 미리 축하 해주었어 맛있고 좋았어요 여기 햄버거 있어요 잡수세요 ?, 그리고는 어린 아이는 고사리 손으로 엄마에게 내민다 엄마는 웃으시면서 " 좋았겠다 신났어 ? 아이구 우리 예쁜 정인이 성진이 , 하시고는 엄마는 나를 쳐다 보시면서 하시는 말씀이 " 아니 너는 왜 벌건 대낮에 내 잠옷을 입고 돌아 다니니 나원 참 언능 벗어 이놈아 너 그러고 밖을 돌아 다녔니 너 보고 미친년인가 보다 했겠다.이그 오복아 ? 언능 벗고 갈아 입어라 , 그러시는 것이었다 그때서 나는 햄버거 가게 여직원 그리고 길거리에서 마주친 사람들의 표정을 앗차 ! 알었다.아니 그럼 조카 아이들도 몰랐다는 것인지 참 나원 나는 잊지 못할 한여름의 모시메리의 리사이틀을 거리 활보와 햄버거 가게에서 길거리로 멋지게 했구나 포토 찰칵 까지 ㅋㅋㅋ 정말 편안한 여름날의 옷 모시메리 잠옷을 벌건 대낮에 입어보고 사진을 찍고 동네길을 활보하고 모르면 약이되고 모르면 그냥 모르는 것이다 .엄마의 한여름의 생신은 그렇게 잘 지냈다.그때 엄마 나이가 78 이 셨는지요 내 나이는 50 살 정도 인지 엄마 나이는 올해 90살이시다.오래 사세요 ?, 항상 죄송합니다 어머니 내 어머니
부여에서 못 떠나고 있는 당신의 맏딸 오복 이에요 . 흑흑흑흑 흑 2020 .11 14 오후 7시가 넘어 가고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