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33:1-4 너희 의인들아
저자는 신자들이 하나님을 찬양하도록 그의 논증을 하나님의 일반 섭리에 둡니다.
저자는 온 세상을 유지하고 보호하며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일반 섭리에 둡니다.
저자는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찬양합니다.
또 경건한 자들이 하나님의 특별 보호로 양육받는 것이 얼마나 필요한가를 보여줍니다
1. 본문 1절은 "너희 의인들아 여호와를 즐거워하라 찬송은 정직한 자의 마땅히 할 바로다" 입니다.
1) 성령의 영감을 받은 저자는 신자들, 곧 의인들이나 정직한 자들을 지적합니다.
그 이유는 신자들만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지 못한 불신자들은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도 불신자들이 불경스러운 입으로 자신의 이름 부르는 것을 기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본 절의 문맥은 왜 이 권면이 신자들에게만 적합한가를 더 분명히 보여줍니다.
많은 사람들이 1절 하반을 "찬송은 정직한 자의 마땅히 할 바로다"라고 해설합니다.
그것은 악인들이나 위선자들이 이 찬송을 시도하다가는 그 행위가 하나님께 찬양이 되기보다 오히려 하나님께 대한 비난이나 불명예로 돌아갈 것이라는 의미처럼 들립니다.
우리에게는 그보다는 그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할 뿐이라는 의미로 들립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은혜로우신 선택으로 자신의 이름이 자신의 사역에 적합한 증인들에 의해 정당하게 찬양 받으시려는 분명한 목적으로 이 세상에 교회를 창조하셨습니다.
이것은 의심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찬송은 정직한 자의 마땅히 할 바로다" 라는 말씀의 참 의미가 있습니다.
그것은 성도들이 더욱 열심히 몰두할 다른 일이 찬송 외에 없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에게 자신의 영광을 찬양하도록 날마다 은혜를 주셨습니다.
또 하나님은 자신의 무한하신 자비를 그 백성들을 위한 특별한 은혜로 주셨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찬양하는데 침묵을 지킨다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었습니다.
또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을 찬양하지 않는 것은 비합리적인 일이었습니다.
그 문제의 요점은 그것이 적용되는 데 있습니다. 찬송하는 것이 의가 되는 그 주요한 활동은 사람들의 마음 속에 심어진 하나님의 의와 자비를 선포하는데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사람들 가운데서 선포하는 것입니다.
시편 33 편
그러기에 우리는 다른 주석가들을 따라 '찬송을 마땅히' 라고 번역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마땅히'라고 번역된 단어를 '원하다' 혹은 '바라다'를 나타내는 히브리어 (아바)에서 파생된 것으로 보면 당연히 '바람직하게' 라고도 번역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신자들을 그렇게 자비롭게 대하신다면 그 신자들이 온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데 전념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선지자가 첫 구절에서 '의인'이라는 명칭을 사용한 후 곧 마음의 내면적인 성실을 포함하는 '정직한 자' 라는 말들을 덧붙였습니다. 여기서 선지자는 참된 의가 무엇인가 혹은 그 참된 의 속에 무엇이 들어 있는가를 정의합니다.
2) 다시 정리하면 "여호와를 즐거워하는 것" 이 의인의 책임입니다.
여기 "정직한 자"는 성도입니다.
(1) 성도들만이 하나님을 참으로 압니다.
성도들은 성령의 사람들이기에 하나님을 찬송할 능력이 있습니다.
(2) 하나님이 성도들을 택하여 세우신 목적이 하나님을 찬송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하나님을 찬송할 책임이 있습니다.
(3) 정직한 자는 하나님의 영광을 그대로 고백할 양심의 소유자입니다.
성령으로 된 하나님의 사람이라면 하나님을 찬송하지 않고 견딜 수 있겠습니까?
무신론자는 진리를 그대로 고백하지 않는 자이기에 부정직한 자입니다.
2. 본문 2절은 "수금으로 여호와께 감사하고 열 줄 비파로 찬송할지어다" 입니다.
기악은 우리의 마음을 즐겁게 합니다. 그러므로 기악은 입으로 노래하는 것 못하지 않은 가치를 가집니다. 그러므로 기악은 예배에 도움이 됩니다.
선지자는 성도들이 하나님을 찬양할 때 가질 간절하고 뜨거운 열정을 나타냅니다.
바로 이 목적을 위해 악기가 사용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선지자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데 성도들에 의해 사람들의 마음과 감성에 생기를 불어넣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생략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적절하게 말한다면 틀림없이 분명한 음성으로만 찬양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윗이 여기에 신자들이 하나님을 더욱 더 찬양하기 위한 방법으로 그들을 자극하는데 곧잘 사용하였던 그런 보조적인 것들을 추가한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특별히 다윗이 하나님의 옛 백성에 대해 말하고 있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그렇습니다.
그러나 이전에 유대인들에게 부과되었던 모든 일들이 무분별하게 오늘 우리들에게 적용될 수 없는 차이가 있다는 사실이 여기서 주목됩니다.
우리는 심벌즈를 치고 하프와 비올라를 연주하며 또 시편에서 자주 언급되는 모든 종류의 악기들이 교육의 일부분이었다는 사실을 의심치 않습니다.
시편 33 편
말하자면 그 악기들의 사용은 율법에 대한 초보적인 교육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악기들의 사용은 성전의 정기적인 예배에 대하여 말합니다.
지금도 만일 신자들이 악기로 그들 자신을 고무하려 한다면 그들이 하나님을 찬양할 때에 그들의 기쁨을 분리시키지 않는 것을 목적으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신자들이 성회로 모일 때 악기들이란 하나님을 찬양함에 다만 향을 피우고 등불을 켜며 또 하나의 율법의 그림자를 따라가는 정도만 유용할 뿐입니다.
교황주의자들은 많은것들과 함께 유대인들로부터 이런 것들을 어리석게 빌어 왔습니다
외적으로 화려한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그런 소리들을 즐거워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사도를 통해 우리에게 추천하신 그 단순성은 더욱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립니다 바울은 성도들의 공적 모임에서 알려진 말로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합니다(고전14:16).
인간의 음성이 비록 대다수 사람들에게 이해되지 못할지라도 생명 없는 모든 악기들을 능가한다는 사실은 확실합니다.
우리는 바울이 알지 못한 말로 말하는 것에 관해 확정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압니다.
그러면 우리는 공허한 소리 외에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우리 귀를 채우는 소리에 대해 무엇이라 말할 것입니까?
어떤 사람이 음악은 사람의 마음을 깨우치고 또 그 사람들의 마음을 감동시키는데 대단히 유용한 것이라는 데 반대할 수 있습니까? 우리도 그 사실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항상 하나님께 드릴 순수한 예배를 모독할 수도 있는 어떤 타락도 주의해야 합니다. 또 인간을 미신으로 몰아넣을 수도 있는 어떤 타락도 그 속에 몰래 기어 들어오지 못하도록 항상 주의해야 합니다.
더욱이 성령 하나님께서는 바울의 입을 통하여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에서 성령에 의하여 보장받을 것 이상으로 나아가는 것은 분별없는 열정일 뿐이라고 말씀합니다 어떤 사람들이 악하고 강퍅스러운 외고집이라고 하더라도 우리는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도는 이 위험성에 대하여 분명히 우리에게 경고합니다.
그러므로 공중예배에서 악기는 선별되어야 하고 또 보조적입니다.
3. 본문 3절은 "새 노래로 그를 노래하며 즐거운 소리로 공교히 연주할지어다" 입니다
"새 노래" 는 신자가 하나님의 위대하신 구원 사건에서 새로운 희열과 감격을 얻어 부르는 노래입니다. 하나님의 은조(恩助)를 힘입을 때마다 새 노래를 발하는 것은 목석이 아닌 감흥 있는 인생의 본문입니다.
후에 선지자가 하나님의 위대하신 사역에 대하여 취급하듯이, 또 특별히 교회의 보존에 관하여 다루듯이, 시편 기자가 의인들에게 새 노래, 곧 귀하고 선택된 노래로 노래하도록 권고하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시편 33 편
신자들이 더욱더 열심히 살아계신 하나님과 하나님의 본성, 또 그 본성으로 행하신 하나님의 사역을 생각할수록 그 신자들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데에 더 노력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선지자가 그때 신자들에게 부르게 했던 노래는 일반 노래가 아닙니다.
오히려 성경전체에서 제시되는 하나님의 속성과 그분의 속성으로 행하신 사역이라는 창조와 구속의 전체 주제의 의미에 부합되는 노래입니다.
하반절에서 선지자는 신자들이 큰 소리로 노래하도록 권고합니다.
4. 본문 4절은 "여호와의 말씀은 정직하며 그 행사는 다 진실하시도다" 입니다.
1) 이제 4절부터는 신자들이 여호와를 즐거워 할 이유가 본격적으로 제시됩니다.
① 하나님은 진실하십니다(4절)
② 하나님은 공의로우시고 인자하십니다(5절)
③ 하나님은 창조자이십니다(6, 7절).
히브리어 원문에는 이 구절 초두에 "왜 그런고 하면"이란 말인 키( )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부터는 찬송의 이유를 보여줍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정직"한 줄을 우리가 아는 이유는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것이 다 성취되는 까닭입니다. 그 "행사"가 다 "진실" 하신 줄 우리가 아는 이유는 그 행하신 것이 정확하게도 하나님의 약속하시고 명하셨던 일들의 이행이기 때문입니다.
5. 성경에서 의와 정직은 단순히 인간의 윤리나 도덕에 관련된 말이 아닙니다.
이것은 성령의 열매입니다. 또 이런 열매는 하나님이 선물로 주셔야 합니다.
그러므로 '의인'이나 '정직한 자' 란 하나님의 택한 백성에게만 주어지는 명칭입니다(1).
의인이나 정직한 자란 단순히 인간이 착하고 순수해서 붙이는 명칭이 결코 아닙니다.
의인이나 정직한 자는 오히려 '허물의 사함을 얻고 그 죄의 가리움을 받은 자' 입니다.
의인과 정직한 자는 '여호와께 정죄를 당치 않은 자'입니다.
다시 말하면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한 자입니다.
그들이야말로 "경건치 않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의롭다 칭함을 받는 자" 입니다.
그들은 '일한 것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행복 자' 입니다(시32:1,2, 롬4:4-8).
본 시편은 바로 이런 신자들이 "하나님의 기업으로 빼신바 된 백성"이라고 선언합니다
이런 신자들이 "여호와로 자기 하나님을 삼은 나라" 라고 말씀합니다.
이런 신자들을 "복이 있도다" 라고 말씀한 것은 당연합니다(12).
그러므로 의인이나 정직한 자들이 찬양 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1-3).
찬양의 대상은 오직 하나님뿐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존재 자체와 하나님의 속성과 그 하나님의 일하심이 교회의 노래여야 합니다.
시편 33 편
시33:5-9 저는 정의와 공의를 사랑하심이여
박윤선 목사님은 이 시편 주제를 "자기 택하신 백성에게 보호자이신 여호와를 즐거워하고 경외하여라" 고 하셨습니다.
1. 본문 5절은 "저는 정의와 공의를 사랑하심이여 세상에 여호와의 인자하심이 충만하도다" 입니다.
1) 이 말씀은 앞 절 말씀에 대한 확증입니다.
또 하나님께서는 그의 속성으로 인하여 정의와 공평을 사랑하신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고집 센 감정이 인간의 방법대로 하나님을 재촉하여 악한 계획을 하시도록 할 수 없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언뜻 보기에는 이 말씀이 다만 하나님의 일반 추천인 것처럼 보입니다.
또 이 사실이 실제에 있어서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말씀처럼 보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자신의 모든 사역에서 정의의 가장 완전한 규칙을 지키신다고 고백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왜 사람들은 조금 전에 언급되었던 새 노래에 대하여 일상적인 일이 아닌 것처럼 말합니까? 우리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먼저 대부분 세상사람들이 하나님의 정의에 대하여 그들의 눈을 닫는 것이 얼마나 악한 일인가 하는 사실이 너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그 사람들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하나님의 섭리를 무관심하게 지나쳐버리거나 그런 일들이 우연히 일어난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때때로 이런 일반적인 사실보다도 더 악한 잘못이 있습니다.
우리의 소원들이 성취되지 않으면 우리는 곧 하나님의 정의에 불평을 터뜨립니다.
또한 모든 사람들이 비록 '하나님께서 모든 일을 공의롭게 처리하신다' 는 처세술을 쓴다 할지라도 백 명 중 한 명 정도가 겨우 그것을 확고하게 마음속으로 믿을 뿐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 진리가 선포되자 곧 '그것은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린다' 라고 모든 사람들이 정중하게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였을 것입니다.
이제 역경에 처한 사람들이 정중히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이 지점에 도달하기란 매우 어렵습니다. 같은 방식으로 하나님께서 공의로우시다는 사실을 깨닫는 그런 정도로 대단한 것입니다.
시편 33 편
또한 번영 속에서도 그 사람들은 그 사실을 깨닫는 데서 곧 실패하고 맙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공의로우신 의를 통치하시는 분이시라는 사실을 사람들에게 깨우쳐주기 위하여 선지자가 하나님은 정의를 사랑하신다고 확증하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철저하게 이 진리를 깨달은 사람은 그 자신이 많은 유익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2) 다른 사람들은 이것을 하나님께서 인간 안에 있는 공의를 사랑하신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본문의 의미와 너무 동떨어집니다.
여기서 성령의 의도하시는 바는 많은 사람들의 가슴속에 깊이 자리잡은 불경스러운 독에 반대되는 하나님의 영광을 옹호하려는 것입니다.
이 절의 둘째 부분에서 시편 기자는 하나님의 탁월성에 대한 다른 부분 곧 "세상에 여호와의 인자하심이 충만하도다" 라는 말씀을 추천합니다.
하나님의 의는 우리로 하여금 정당하게 하나님을 찬양하도록 깨우칩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자비하심은 더욱 강력한 동기입니다.
그 이유는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자비하심에 대한 경험을 가질수록 그 사람은 더욱 하나님을 경외하고 싶은 강렬한 감동을 받기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 이야기는 하나님께서 온 인류에게 널리 베풀어 주시는 모든 하나님의 은혜에 관하여 계속 진행됩니다.
영감을 받은 시편 기자는 우리가 시야를 돌리는 곳 어디서나 하나님의 은혜를 만나게 된다고 선포합니다.
2. 본문 6절은 "여호와의 말씀으로 하늘이 지음이 되었으며 그 만상이 그 입 기운으로 이루었도다" 입니다.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사역을 더욱 면밀히 생각하도록 분발시키기 위하여 선지자는 우리 앞에 세상 그 자체의 창조를 제시합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의 창조주이시며 또한 구성자이시라는 것이 알려지기 전까지는 하나님께서 인간들을 돌보신다는 사실을 누가 믿겠습니까?
또한 세상이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으로 통치되고 있다는 사실을 누가 믿겠습니까?
그러나 세상의 우주는 하나님의 섭리의 직접적인 결과에 의하여 우리를 인도합니다.
그러나 과거에 세상을 창조할 때에 나타났던 동일하신 하나님의 능력에 의하여 세상이 오늘날까지 유지되고 있다고 결론을 내릴 만큼 그렇게 모든 사람들이 정당하게 생각하거나 혹은 그런 건전한 판단력을 소유하지 않았습니다.
시편 33 편
이와 반대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땅 위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하여 하늘에서 방관만 하고 계시는 게으른 방관자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만일 세상이 하나님에 의하여 유지되며 보존되고 있다는 사실을 확고하게 믿지 못한다면 아무도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셨다고 참으로 믿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지혜롭게 또 적절하게 선지자는 자연의 계속적인 질서 안에서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확고성을 우리들의 마음 속에 심어주기 위하여 태초로 되돌아가게 합니다.
비유로 선지자는 세상 전체 조직에 '하늘'이라는 용어를 사용합니다.
그 이유는 천국의 모습이 모든 창조물들보다 우리에게 더 감탄을 자아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선지자는 즉시 "그 만상" 이라고 덧붙입니다.
그 표현으로 성경의 일상적인 방법에 따르면 선지자는 별들과 혹성들을 뜻합니다.
만일 하늘에 이 장식들이 없다면 하늘은 어떤 의미로는 삭막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늘이 "하나님의 말씀" 으로 창조되었다는 말 속에서 선지자는 하나님의 능력을 크게 증대시키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다른 도움이나 수단을 필요하지 않고 또 많은 시간과 노력을 필요하지 않은 채 다만 하나님의 고갯짓만으로 숭고하고 장엄한 일을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비록 시편 기자가 "여호와의 말씀"과 "그 입 기운"이라는 말씀을 모든 외적인 방법들과 또 하나님 편에서의 고통스러운 노력의 모든 생각에 대한 반대로 제시하였을지라도 우리는 참으로 분명히 이 구절에서 세상은 하나님의 독생자의 영원하신 말씀에 의하여 창조되었다는 것을 추론합니다.
고대의 해설가들은 놀랄만한 재간으로 이 구절을 사벨리안들을 대적하는 성령의 영원한 신성에 대한 증거들로 사용하였습니다.
그러나 다른 곳들 특별히 이사야 11장 4절의 "입술의 기운"이라는 말씀은 "말"이외의 다른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거기에는 그리스도에 관하여 "그 입의 막대기로 세상을 치며 입술의 기운으로 악인을 죽일 것이며" 라고 말씀하기 때문입니다.
거기서 "그 입의 막대기" 라는 말이 강력하고 효과적인 말이 풍유적으로 나타나듯이 같은 방법으로 다른 목적, 곧 하나님의 말씀과 인간들의 입술로부터 나오는 공허한 소리들을 구별하려고 곧이어 나오는 구절에서 "입술의 기운"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신성을 증명하는데 있어서 우리는 감히 이 본문으로 사벨리안들을 대적하는 데 강요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신성을 증명하는 것과 같은 그런 방법으로 그리스도의 말씀에 의하여 하늘을 지으신 것을 충분한 것으로 여겨야 합니다.
시편 33 편
만일 '말씀'과 '기운'이라는 용어들이 동의어라면 이 하나님의 위(位)가 분명히 나타나지 않을 것이라고 어떤 사람은 반대할 것입니다.
여기에 대하여 우리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기운'이라는 용어는 '말씀'과 '영' 사이의 구별들이 분명히 나타나는 다른 곳들에서처럼 여기에서는 그렇게 단순하게 사용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 입 기운"이란 말은 바로 그 발언을 위하여 비유적으로 사용되었습니다.
마치 하나님께서 숨을 내쉬자마자 혹은 하나님께서 이루시기를 원하신 것을 말로 선포하시자 마자 하늘이 생기고 또 수없이 많은 다양한 별들이 그 하늘에 수놓아졌다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참으로 이 유사성이 인간들로부터 빌어온 것이라는 점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때때로 다른 곳에서도 세상은 하나님의 독생자, 곧 후에 육체로 나타나신 분의 영원한 말씀에 의하여 창조되었다고 가르칩니다.
3. 본문 7절은 "저가 바닷물을 모아 무더기같이 쌓으시며 깊은 물을 곳간에 두시도다" 입니다.
여기서 시편 기자는 세상 전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 전체 중에서 자기가 이해할 수 있는 부분만을 말합니다.
선지자는 우리가 지구상에서 볼 수 있는 전조(前兆)와 놀라운 이적을 찬양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유동체(流動體)이며 번하기 쉬운 물의 요소들을 응결된 무더기로 쌓으시고, 또 그것을 원하시는 대로 하신다는 것입니다.
물이 땅위보다 높은 곳에 모여 있다는 것을 자연 철학자들이 고백하고 또 경험이 솔직하게 말합니다.
그렇다면 물이 유동체이고 또한 본래 흐르는 성질을 가졌는데 어떻게 넓게 퍼져서 땅을 덮지 않을 수 있으며 또한 땅이 더 낮은 곳에 위치하였는데 어떻게 물에 젖지 않고 마른 그대로 남아 있을 수 있습니까?
여기에서 우리는 인간의 행복에 항상 관심을 기울이시는 하나님께서 물을 어떤 보이지 않는 울타리 안에 가두시고 그 울타리들을 오늘까지 닫고 계시다는 사실을 분명히 깨달을 수 있습니다.
선지자는 물이 마치 견고한 무더기이며 또한 단단한 물체라도 되는 것처럼 지금도 계속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고 있다고 격조 높게 선포합니다.
성령께서 예레미야 5장 22절, 욥기 38장 8절에서와 같은 여러 구절들에서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이 증거들을 인용하고 있는 것은 결코 무의미한 것이 아닙니다.
시편 33 편
하반절에 부연되는 말로 선지자는 같은 사상을 되풀이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광활한 물을 바다로만 제한하셨습니다.
또한 신비하고 불가해한 능력으로 지구의 내부에 그 물을 숨겨두셨습니다.
물의 요소들을 비교하려는 사람은 누구나 그 본성이 땅 위에 흘러 덮으려는 것인 그 끝이 없는 깊이와 또 측량할 수 없는 그 바다의 만(灣)이 그 아래 숨겨져 있을 것이라는 본질에 그것이 반대되는 것으로 생각할 것입니다.
따라서 그렇게 많은 텅 빈 해협들과 해안만들이 순간마다 지구를 휩쓸어 덮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이 그처럼 거대하다는 사실을 나타내줍니다.
때때로 어떤 도시들이나 들판들은 휘말려든다 할지라도 여전히 지구는 그 본래의 장소에 그대로 보전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쉬지도 졸지도 않으시다는 말씀이 실제합니다.
4. 본문 8절은 "온 땅은 여호와를 두려워하며 세계의 모든 거민은 그를 경외할지어다" 입니다.
시편 기자는 온 세상이 그 세상을 존재하게 하시고 또한 그것을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통치에 공손하게 순종해야 하는가에 대한 정당한 이유가 있다고 결론짓습니다.
"여호와를 두려워하며" 와 또 "그를 경외할지어다" 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위대하신 능력을 존경하고 또 숭배한다는 바로 그런 의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우리의 존재를 부여받고 또한 우리의 신분이 의존되어 있는 그 하나님께 경배하지 않는 것은 아주 큰 무감각의 증거입니다.
5. 본문 9절은 "저가 말씀하시매 이루었으며 명하시매 견고히 섰도다" 입니다.
이 부분은 창1:3, 시107:25, 사48:13절을 참고해야 합니다.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시자 곧 세상이 나타났다는 사실과 또 하나님의 명령으로 세상이 유지되었다는 사실을 확증하면서 이 두 가지 일들에 대하여 언급합니다.
만일 세상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인하여 존재함을 받지 못하였다면 세상이 한 순간에 창조되었다는 것으로 충분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창조에서 하나님께서는 위대한 방법으로 배열하지 않았으며 하나님의 말씀의 측량할 수 없는 능력을 증명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친히 말씀하시듯이 그렇게 빨리 그 일이 이루어지도록 명령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명하시다"라는 단어는 하나님의 말씀이 고개 한번 끄덕하시는 것이나 혹은 소원 이상의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확증하며 또 '말씀하신다' 는 것은 명령하신다는 것과 같은 뜻입니다.
시편 33 편
그러나 이 고개 한번 끄덕이시는 것이나 혹은 명령 속에 하나님의 영원하신 지혜가 그것 자체를 나타내고 있다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할 것입니다.
여호와는 정의와 공의와 인자하신 하나님이십니다(1-11).
1)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는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함께 합니다(5).
하나님의 속성은 분리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사람이 알든 모르든, 인정하든 부인하든 하나님은 그 신실함으로 인해 정직과 진실을 잃지 않습니다(4).
하나님의 속성은 인간의 반응과 지식에 제한되지 않습니다.
오직 여호와는 스스로 계시기 때문입니다(출3:14).
여호와 하나님은 홀로 창조하시고 홀로 구원하십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성부만도 아니고 성자만도 아니고 성령만도 아닌 오직 삼위일체 하나님이십니다.
2)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6, 7).
이 사실만으로도 하나님을 경외할 충분한 이유가 됩니다(8).
말씀으로 명하시매 모든 만물이 순종했기 때문입니다(9).
3) 모든 피조물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창조된 것처럼 우리의 순종 역시 하나님 말씀 앞에 있어야 합니다 열방의 도모와 민족들의 사상은 하나님을 거스리거나 대적합니다. 그 도모와 사상은 하나님에 의해 폐해지거나 무효케 될 것입니다(10).
그러나 하나님의 도모와 그분의 뜻은 영원하시기에(11), 순종이 지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마음은 철학과 헛된 속임수에 노략질 당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렇게 되는 것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골2:8).
그리스도는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모든 이론을 파하십니다(고후10:5).
이것이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와 인자하심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교회의 노래입니다.
시편 33 편
시33:10-12 여호와께서 열방의 도모를
인류 역사에서 민족들의 사상은 "무효케" 되어 골동품들로 남아 있습니다.
그것들은 시간이란 바닷가에 깨어진 뱃조각들처럼 남아 있을 뿐입니다(10).
그러나 "여호와의 도모" 곧 주의 말씀은 영원히 변치 않아 반석 같이 의지합니다(11).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성도들은 영원토록 망하지 않습니다(12절, 요일2:17).
1. 본문 10절은 "여호와께서 열방의 도모를 폐하시며 민족들의 사상을 무효케 하시도다" 입니다.
세상의 창조를 간단히 취급한 후에 시편기자는 이전의 주제, 곧 매일 일어나는 사건들이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증거들로 이해된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 되돌아갑니다.
선지자는 사람들에게 행복한 결말을 입증하거나 가져다 주기보다는 사람들의 계획을 파쇄하시는 적으로 하나님을 보여주어야 하는 것에 대하여 사람들이 놀라지 않도록 그 성도들을 위로하기 위하여 최대의 위대한 능력을 나타냈던 한 실례를 선택합니다.
인간들이 계속 모든 법과 공의에 도전하고 또 그것을 대적하려고 획책하는 일이 얼마나 많으며 또 그들이 포악하게 선한 사람과 신분이 낮은 사람들을 짓밟는 권세를 그들의 손에 넣고 그들의 간계로 어떻게 온 세상을 뒤엎으려 하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만일 그런 악한 감정들의 다양성을 가진 인간들이 허가되지 않은 무엄함으로 우리를 향하여 활동하도록 허락되었다면 어떤 피조물들이 우리보다 더 비참하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들의 간계를 산산이 부서뜨리는 것이 자신의 일이시며 또 그들의 결심을 무로 돌아가게 하신다고 하늘에서 선포하실 때 그들이 극도로 요란스럽게 분발하는데도 우리가 조용히 있어서는 안 되는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공공연히 인간들의 계획이 헛되게를 기뻐하시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방종을 제어하시려고 그 인간들의 계획을 깨뜨리신다고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들은 곧 그들의 소원대로 성공한 모든 일에 당황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공정을 침범하고 정직한 자와 순결한 자를 괴롭힌 것처럼 그들은 하나님을 친히 대적하여 싸우는 일에 실패합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보호하심이 그 대적들의 격노를 반대하려고 우리에게 이루어진다고 생각하는 것은 대단히 필요합니다.
시편 33 편
또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모든 겸손을 경멸하면서 분별 없는 방종으로 몰입할 때에 선지자는 개개인을 말할 뿐만 아니라 또한 전 국민들에 대하여 말합니다.
선지자는 아무리 사람들이 음모를 꾸미고 또 큰 군대로 이것저것을 획책하여도 하나님께서 다수를 극히 작은 수로 만드시는 것은 너무도 쉬운 일이기에 그들의 목적은 무효가 될 것이라고 선지자는 확증합니다.
그러나 비록 악인들의 방자함을 대적하여 선한 소망으로 우리를 강하게 하시는 것이 이곳에서 하나님의 뜻일지라도 하나님께서는 동시에 하나님의 명령과 안내 없이는 아무것도 취하지 말도록 우리에게 경고하십니다.
2. 본문 11절은 "여호와의 도모는 영영히 서고 그 심사는 대대에 이르리로다" 입니다.
1) 선지자는 자기가 하나님의 무한하신 능력 속에 우리의 믿음을 세우려는 그러한 방법으로 하나님의 무한하신 능력을 찬양합니다.
선지자는 여기에서 하늘에 숨겨진 하나님의 계획을 천거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얼마동안 떨어져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하나님을 경외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성경 모든 곳에서 의와 진리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증명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의인과 선인들을 돌보시며 또 그의 종들이 불법으로 억압당하고 있을 때 언제나 그의 백성들을 구원하시려 하십니다.
선지자의 말은 이 모든 것이 분명하고 확고하게 남을 것이라는 점을 의미합니다.
이렇게 하여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그 나라들의 계획을 허사로 돌리실 때 그 말로(末路)가 어떻게 되는가를 선포합니다.
그들이 분별 없이 모든 질서를 뒤덮었기 때문입니다.
2) 그러면 먼저 말씀의 거울 속에서 하나님의 계획을 보는 것을 배우십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성취하겠다고 결정하신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하나님께서 약속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우리가 확인하였을 때 우리는 즉시 선지자가 여기서 말하고 있는 것에 대한 확고성을 상기하도록 하십시다.
많은 사람들이 혹은 오히려 모두가 그렇듯이 나라들이 때때로 수많은 장애물로 인하여 그것의 과정을 방해하려고 애를 씁니다.
많은 간계들이 무위(無爲)로 돌아가게 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 안에 있으며 때때로 하나님의 싫어하시는 것이라고 많은 사람들이 생각할 때 우리는 또한 앞에서 나타난 선언을 기억하십시다.
성령께서는 틀림없이 우리의 믿음이 실제적인 지식 속에서 실천하도록 하였습니다.
시편 33 편
그렇지 않으면 선지자가 여기서 하나님의 뜻에 대하여 말하는 것은 냉엄하고 열매가 없는 것일 뿐입니다.
그러나 일단 우리가 이것에 대하여 확신하게 될 때 하나님께서는 그의 이름을 부르는 종들을 지켜주실 것이며 또 그들에게서 모든 위험을 제거하여 주실 것입니다.
악인들이 그들을 대적하여 행하는 악이 어떤 것이든 간에 그들의 노력과 시도는 우리를 두렵게 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음모를 즉각 반대하시므로 그들의 어떤 기교도 하나님의 계획을 좌절시킬 수 없기 때문입니다.
3. 본문 12절은 "여호와로 자기 하나님을 삼은 나라 곧 하나님의 기업으로 빼신 바 된 백성은 복이 있도다" 입니다.
이 절은 앞 절 말씀과 아주 잘 일치합니다.
만일 그 계획이 우리에게 언급되지 않았더라면 하나님의 계획의 확고성에 대하여 말씀된 것을 관찰하는 것이 우리에게 아무 유익이 없을 것입니다.
선지자는 하나님의 보호를 받는 자들은 복 받은 사람들이라고 선포하면서 자기가 방금 말하였던 그 계획이 항상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있는 비밀이 아니라 교회의 존재와 보호 속에서 나타납니다.
또 거기에서 보여질 수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깨닫게 해 줍니다.
이렇게 하여 우리는 그것은 하나님의 능력에 대하여 냉담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그것을 그들 자신의 현실적인 유익에 적용하는 사람들만이며, 그 사람들은 하나님을 세계의 통치자로 바르게 깨닫고 있다는 것을 압니다.
더구나 시편기자가 우리를 향하신 신의 사랑의 근원을 언급하면서 모든 우리의 축복을 '여호와는 우리의 하나님' 이라는 이 속에 두었을 때 선지자는 이 한 말씀 속에서 무엇이나 인생을 행복하게 하기 위하여 늘 갈망된다고 이해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구원에 관심을 갖기 위하여 우리를 하나님의 날개 아래 품어주시기 위하여 우리의 필요를 충족시켜 주시기 위하여 모든 위험 속에서 우리를 도와 주시기 위하여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셨을 때, 이 모든 것은 그에 의하여 이루어진 무리의 입양에 의존합니다.
그러나 인간이 그들 자신의 노력과 수고로 그렇게 큰 축복을 얻는다고 생각하지 않도록 다윗은 그것이 우리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인정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로우신 선택이 사랑의 근원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을 분명하게 우리에게 가르쳐줍니다.
시편 33 편
아담이라는 사람은 최초에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어야 하는 바로 그 목적을 위하여 창조되었다는 것은 참으로 진실입니다.
그러나 죄로 인하여 분리 되어진 것은 우리에게서 그 큰 축복을 빼앗아 갔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값없이 양자로 삼으실 때까지 우리는 모두 날 때부터 비참한 상태에 있습니다.
또 우리에게는 행복으로 들어가는 다른 출입구가 없으며 혹은 행복을 얻는 다른 방법들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다만 유일한 방법은 하나님께서 그의 기뻐하시는 뜻에 따라서 아무 가치도 없는 무리들을 선택하셔야 하는 그 방법 이외에는 다른 길이 없습니다.
선지자는 여기서 하나님에게 돌리고 있는 것을 마치 인간들이 하나님을 그들의 주권으로 선택한 것처럼 인간들에게로 옮기는 이 구절을 타락시킨 일이 얼마나 어리석은가를 나타냅니다.
우리는 우상들로부터 참 하나님을 구별하는 것은 믿음으로 된다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이 원리는 항상 신속하게 이루어집니다.
우리는 만일 하나님께서 그의 은혜로 우리를 제지하시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분에게 전혀 관심을 갖지 않습니다.
시편 33 편
시33:13-17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감찰하사
하나님은 모든민족을 지배하심에서 사람들의 마음을 밝히 아시고 판단하십니다(13-15) 하나님께서는 오늘날까지 하나님을 믿지 않고 군대를 의지한 민족들을 모두 다 패망케 하셨습니다(16, 17).
고대의 국가들도 군대를 의지하다가 망한 일들이 많지만 근래에 이르러서 나폴레옹의 군국주의나 나치스 독일의 군국주의는 모두 다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1. 본문 13-14절은 "(13)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감찰하사 모든 인생을 보심이여
(14) 곧 그 거하신 곳에서 세상의 모든 거민을 하감하시도다" 입니다.
1) 시편 기자는 이어서 동일한 주제를 취급합니다.
인간의 일들은 여기저기서 우연히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목격하는 모든 일들은 하나님께서 은밀히 인도하시고 지도하신다는 것입니다.
이제 선지자는 여기서 모든 일들에 대한 하나님의 감찰을 추천합니다.
우리는 그 보기를 배워야 하며 또한 믿음의 눈으로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섭리를 관찰해야 합니다.
계속 우리 눈앞에 그것에 대한 분명한 증거들이 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분명한 증거들에 아무것도 보지 못합니다.
또 그들의 우맹은 모든 것을 맹목적인 우연 속에서 일어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더 윤택하고 풍요하게 복을 내려 주실수록 우리는 생각을 하나님께로 향하는데 더욱 인색합니다.
그러나 터무니없이 우리를 둘러싼 외적 상황들에 확고하게 그것들을 고착시킵니다.
선지자는 여기서 이 비열한 행위를 꾸짖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을 하늘에 게으른 상태 그대로 밀폐시키는 것 이상 더 큰 무례가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마치 하나님께서 무덤 속에 매장되어 있다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어떤 일을 보시지도 않고 또 그 일에 관심을 가지시지도 않는다면 하나님의 생활은 과연 어떤 종류의 생활이 되겠습니까?
또한 거룩한 저자는 '보좌'(칼빈) 라는 말에서 그 속에 무엇이 함축되어 있는가 하여 사색과 이해의 하나님을 박탈하는 것은 얼마나 불합리한 도취인가를 보여줍니다.
시편 33 편
선지자는 이 낱말에서 천국은 쾌락주의자들이 몽상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게으르게 계시거나 향락에 도취되어 있는 궁전이 아니라 왕궁으로서 이곳에서 하나님은 모든 세상을 다스리시는 그의 통치를 실행하시는 곳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만일 하나님께서 우주를 통치하시기 위하여 그의 보좌를 하늘의 성소에 지으신다면 하나님께서 결코 땅의 일들을 게을리 하는 것이 아니라 최고의 이성과 지혜로서 그들을 다시리신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2) 이 두 구절은 하나님께서 땅위의 모든 일을 섭리하시는 사실에 대하여 진술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절대적 주권으로 이 세상 사람들의 심사를 통찰하시고 다스리십니다.
그것은 은밀히 되는 일이기에 인간들은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땅위의 모든 일이 다 우연히 되는 줄 압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거처를 그렇게 하늘에 국한시키고 하나님의 활동이 그 밖에는 미치지 못하는 것으로 생각함은 여호와를 무덤에 매장함과 같은 망동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늘에" 계시다 함은 하나님의 왕좌를 거기 정하셨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 대주재 되시는 왕으로 거기 계신 것 인만큼 하나님께서 땅위의 모든 일을 섭리하신 것은 확실합니다(Calvin).
2. 본문 15절은 "저는 일반의 마음을 지으시며 저희 모든 행사를 감찰하시는 자로다" 입니다.
사람의 심령과 그 행사를 바로 아시는 분은 사람 마음을 지으신 분 뿐 이십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아무리 악인들이 교활하며 사기적이고 은밀한 책략으로 하나님 앞에서 그 자신들을 움츠리며 또 동굴 속에 숨으려 해도 하나님의 눈이 그들의 캄캄한 은신처를 꿰뚫고 말 것이라는 사실을 성도들에게 분명하게 확신시키려는 분명한 목적에서 추가되었다고 보입니다.
또 시편 기자는 바로 그 창조로부터 하나님께서 인간들의 간계와 행위들을 보응하시고 심판하시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을 입증합니다.
그 이유는 사람들이 각각 그들의 가슴 속에 복잡한 비밀을 가지고 있으므로 각각 다른 마음들의 놀라운 변화가 있으며 또 이 큰 다양성이 최대의 혼란스러운 불명료를 낳는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유능한 재판관이 될 수 없거나 그 자신의 일을 알지 못하시도록 그의 눈이 현혹되거나 또한 어두워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함께" 라는 부사로써 선지자는 사람들의 마음이 같은 순간에 형성된 것이 아니라 그들 모두가 하나로 이루어졌습니다.
또한 단 하나의 예외도 없다는 사실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시편 33 편
그래서 그들의 마음을 만드신 분으로부터 그들의 마음에 관한 지식을 감추려 하거나 혹은 움츠리려고 하는 사람들은 참으로 어리석은 자들이라는 사실을 나타냅니다.
그 내용은 또한 인간들이 그들 자신의 생각의 잘못된 책략으로 그들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권위를 삭감해 그들에게는 우연히 일어난 것으로 보이는 사건들을 하나님께서 그의 은밀하신 섭리로 다스리지 못하시도록 할 수 없다는 뜻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참으로 우리는 인간들이 그들의 무익한 희망을 가슴에 품으면서 어떻게 하나님의 능력을 탈취하며 또한 그것을 다른 피조물들에게로 전가하는 것을 곧 그들이 자신을 보호할 외적인 방법들이나 도움을 받고 있는 한 하나님의 도움은 필요 없다고 생각하면서 한때는 이 대상에게로 또 다른 때는 저 대상에게로 전가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3. 그러므로 그것은 16절과 같은 결론이 나옵니다.
곧 "많은 군대로 구원 얻은 왕이 없으며 용사가 힘이 커도 스스로 구하지 못하는도다" 는 말씀입니다.
영감 받은 저자는 인간의 생명의 안전은 그들 자신의 힘에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복에 달려 있다는 사실을 가르치려고 의도하고 있습니다.
선지자는 다른 사람들보다 특별히 '왕'과 '용사'를 지칭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평민 계급이 아니고 고위층들로서 그들은 자신을 향한 화살의 모든 위험에서부터 벗어나 있다고 생각할 뿐만 아닙니다.
만일 어떤 역경이 일어났을 때 그것으로부터 용이한 구원을 다짐하기 때문입니다.
그들 자신의 힘을 믿는 건방진 확신으로 도취되어 자신들이 멸망하리라고는 거의 생각하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큰 권세에 대하여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있는 일반 백성들의 어리석은 찬사로 그 교만 속에 계속 빠져서 더욱 강퍅하여집니다.
그러므로 만일 왕이 그의 군대로도 구원을 받지 못하고 또한 용사가 그 자신의 힘으로도 구원을 받지 못한다면 그들이 위험에 노출되었을 때 인간들은 헛되이 하나님의 섭리를 무시하고 그들 주위에서 인간의 도움을 구한 것입니다.
이것으로부터 중요한 결론이 나옵니다.
곧 강한 자나 약한 자를 막론하고 그들이 하나님의 보호에 의지하는 것을 배울 때까지는 그 신분들이 모두 비참하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어떤 때에 보이는 힘으로 구원을 받는 듯이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배후에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도우심이 있다는 사실을 우리가 기억합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는 때에는 백약이 무효합니다.
시편 33 편
4. 본문 17절은 "구원함에 말은 헛것임이여 그 큰 힘으로 구하지 못하는도다" 입니다.
선지자는 말이라는 이름 아래 비유에 의해 어떤 도움을 의미합니다.
그 뜻은 일반적으로 그들의 생명이 이 땅 위의 방법들에 의하여 잘 보호받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바로 위험의 절정에서 모두 다 실망을 당하게 되며 또 비참하게도 그들의 완전한 원상 회복에 속임을 당함으로써 하나님께서 그 속에서 그들의 어리석음을 분명히 보여주신다는 것입니다.
왕들이 쓸데없이 칼로 무장하지도 않으며 말들이 불필요하게 많은 것도 소용이 없으며 하나님께서 인간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하여 주신 재물과 재산이 만일 그것을 사용하는 올바른 방법을 깨닫지 못한다면 불필요하다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대다수의 사람들은 인간적인 공격에 에워싸이면 더욱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떠나 모든 장애물로부터 안전한 피난처에 있다는 잘못된 상상으로 자신을 확신시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광증을 실망시키시는 데에서 가장 정당하게 행사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사가 때때로 아무런 효과 없이 사라지고 마는 이유인데 그것은 세상이 그 은혜를 주시는 분으로부터 그 은혜를 분리시킴으로써 하나님의 복을 역시 정확하게 박탈하기 때문입니다.
군대의 힘이 비록 강할지라도 전쟁에 실패하는 일은 역사상에 종종 있습니다.
그렇게 되는 것은 하나님을 제외한 군대가 복을 받지 못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반대로 하나님을 모신 군대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런 말씀은 교회를 향한 비유적 어법이기도 합니다.
시편 33 편
시33:18-22 여호와는
이 시인은 결론적으로 하나님을 신앙하는 자만이 구원을 받는다고 역설합니다(18-22).
이 점에 있어서 시인은 여호와를 신앙함에 대하여 여러 가지 용어를 사용하였습니다.
"경외한다"는 말이 한번 있고(18절 상반), "바란다"는 말이 세 번 나오고(18절 하반, 20절 상반, 22절 상반) "의지한다"는 말이 한번 나옵니다(21절 하반).
이것을 보면 구약도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받는 방법이 신앙이라고 가르칩니다.
이 여러 가지 용어가 표시하는 것과 같이 신앙은 이론만이 아니고 가장 진실한 의미에서 하나님을 두려워함과 의지함과 바라봄입니다.
두려워하는 것, 의지하는 것, 바라보는 것은 모두 다 인격을 전적으로 움직여서 됩니다
1. 18-19절은 "(18) 여호와는 그 경외하는 자 곧 그 인자하심을 바라는 자를 살피사
(19) 저희 영혼을 사망에서 건지시며 저희를 기근시에 살게 하시는도다" 입니다.
1) 인간들이 자신들의 최상의 방어들이 때로는 아무 유익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을 보여준 후 혹은 오히려 인간들이 그 최상의 방어들을 의지하였을 때 완전히 무가치하다고 생각하였다는 사실을 보여준 후 시편 기자는 이제 다른 한편으로 신자들이 큰 권세를 가진 사람들도 아니고 또 많은 재물을 가진 사람들도 아니지만 그들이 다만 하나님의 은혜로 충분한 보호를 받으며 또 영원히 안전할 것이라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선지자의 뜻은 왕들과 용사들이 무적의 힘에서 아무 도움을 받을 수 없는 반면에 마치 하나님께서는 죽음에서 성도들의 생명을 참으로 회복하여 주신 것처럼 기근과 결핍 속에서 성도들의 생명을 지키시는 이 비교에 의하여 확실히 실증됩니다.
우리는 선지자가 세상의 모든 힘을 그렇게 과소평가하는 이유를 더 잘 알 수 있습니다
분명히 인간들이 쇠약해지거나 혹은 절망 속에서 비탄에 빠져 들어가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교만을 버리고 그들의 생각을 오직 하나님께로만 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그들의 생명이 오직 하나님의 보호에 의존한다는 것을 깨닫게 하려는 것입니다.
더욱이 하나님의 눈은 경외하는 자를 살피신다는 말씀 속에서 선지자는 하나님의 손과 힘이 그들을 보호하기에 충분하였다고 말한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설명합니다.
약한 사람들의 마음속에 하나님께서 이 보호를 모든 개인들에게 확대시키실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선지자가 하나님을 성도들의 안전을 돌보시는 파수꾼과 감독자로 소개했을 때 성도들 중 한 사람도 두려워할 이유 없고 한 순간도 더 망설일 이유가 없습니다.
시편 33 편
만일 그 사람이 하나님의 보호 아래 조용히 있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그를 도우시려고 그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으로부터 선지자가 조금 전에 말한 "여호와로 자기 하나님을 삼은 나라 곧 하나님의 기업으로 빼신 바 된 백성은 복이 있도다" 라는 말씀이 진실인 사실이 더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 없이는 우리가 소유한 모든 힘과 부가 헛것이 될 것이며 거짓되고 또 멸망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에 반하여 하나님의 단 한번의 보살핌으로 그의 백성들을 보호하시고 곤궁함을 채워주시며 기근 때에 먹이시고 죽음에 처하였을 때 다시 살려 주십니다.
전 인류가 하나님의 섭리로 말미암아 유지되고 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아버지의 관심이 특별히 자기 자녀들 외에는 아무에게도 기울이시지 않으며 하나님의 자녀들은 자신의 빈곤이 참으로 하나님의 관심을 받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2) 다시 하나님께서 기근이나 곤핍할 때에 하나님께서 경건한 자들의 생명을 보존하실 치유책을 준비하시고 계신다는 것이 확증되었을 때 우리는 성도들이 그들의 마음이 극도의 가난 속에서 절망하지 않고 오히려 무덤에서라도 그들의 소망을 하나님께로 향할 때 하나님의 섭리에 대해 마땅히 드려야 할 영광을 그에게 돌려야 한다는 가르침을 우리가 받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때때로 그의 종들에게 잠깐동안 굶주리는 고통을 주신 후 그들을 채워주시는 때가 있고 죽음의 흑암으로 덮으셨다가 생명의 광명으로 회복하실 때도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죽음이 비록 눈앞에 다가올 때에라도 우리의 신뢰를 하나님께 확고하게 두기 시작하기만 하면 됩니다.
세상의 도움의 무위성(武威性)을 경험으로 알게 될 때까지는 우리의 마음이 계속 세상의 도움에 말려들고 있으며 또한 그것들과 결합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선지자는 신자들을 두 가지 표적으로 특징짓는데 그것은 인생의 완전성을 포함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경건히 주를 섬기는 것이며 우리는 그분의 은혜에 의지하는 것입니다.
위선자들은 그들에게 필요한 것을 하나님께 구할 만큼 그들의 믿음을 큰 소리로 자랑하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조금도 맛보지 못하였습니다.
반대로 성도들은 그들의 온 마음으로 하나님을 경외하고 섬길 때에 이 애정은 믿음으로부터 솟아 나오는 것입니다.
또 성도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바른 예배의 주요한 부분이 이 속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 성도들은 살아 계신 하나님, 곧 그분의 자비를 의지합니다.
그러니까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는 어떤 사람입니까?
그 사람은 여호와 밖에 다른 것은 무엇이든지 두려워하지 않는 자입니다.
시편 33 편
하나님은 자기를 두려워하는 자와 함께 하시는 법입니다.
그 이유는 그런 신자만이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신자를 기뻐하십니다(히11:5, 6, 사66:2).
19절에서 보는대로 신실한 자도 어떤 때에 사망과 같은 곤란에 빠지는 일이 있습니다.
그 이유는 그런 어려움이 지나간 뒤에 평안을 더욱 감사하게 하려는 까닭입니다.
어떤 때에는 그 신실한 자가 죽기도 합니다.
그것은 신자가 영광의 몸으로 부활하게 되려는 까닭입니다.
그 신자는 일시동안 기근에 빠지는 일도 있습니다.
그것도 그 신자가 후에 거기서 건짐이 될 때에 더욱 감사하게 하려는 까닭입니다.
2. 20절은 "우리 영혼이 여호와를 바람이여 저는 우리의 도움과 방패시로다" 입니다.
시편기자는 지금까지 하나님의 섭리에 관하여 말하였습니다.
특별히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을 보호하시는 신실하신 보호에 대하여
말하였습니다. 그 선지자는 자신의 입으로부터라기보다는 성령의 입으로 말합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 선지자는 전 교회의 이름으로 우리의 복지를 하나님께 맡기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선포하는 노래를 높이 부릅니다.
이렇게 앞에서 교리의 열매가 모든 신실한 신자들에게 설명되었습니다.
그 결과로 그들은 주저하지 않고 확신과 기쁜 마음으로 그들 자신을 하나님 아버지의 보호에 맡길 수 있는 것입니다.
이 문제에서 시편 기자는 자신에 관하여는 특별히 아무것도 언급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동일한 믿음에 대한 고백에서 모든 경건한 자들이 그와 연합합니다.
선지자가 하나님과 하나된 것같이 그의 교회와도 하나입니다.
여기에는 주의해야 할 "영혼" 이라는 단어가 강조됩니다.
이것이 히브리인들 사이의 일반적인 화법일지라도 마치 신자들이 '우리는 하나님을 우리 온 마음으로 신실하게 신뢰하며 그분을 우리 방패와 도움으로 여긴다'고 말하는 것처럼 그것이 성실한 열정을 나타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총체적으로 말하면 "영혼이 여호와를 바란다"는 말은 진실하게 인격의 내부에서 간절히 여호와를 바라보는 신앙을 가리킵니다.
3. 본문 21절은 "우리 마음이 저를 즐거워함이여 우리가 그 성호를 의지한 연고로다"
입니다.
본 절에 두 번씩 사용된 불변화사 (키)는 히브리어에서 여러 의미를 가집니다.
그것은 여기서 이중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시편 33 편
우리가 단정적으로 설명한다면 신자들이 기쁨과 소망 속에서 기뻐한다는 의미입니다.
이 두 가지가 동일한 문맥에서 그렇게 언급되는 것은 적당합니다.
분명히 하나님께서는 항상 우리의 기쁨이 되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신 이름이 우리의 보호를 위한 난공불락의 요새와 같이 될 것입니다.
신자들이 계속적으로 끈질기게 하나님을 부를 수 있는 것은 어디에서 옵니까?
그들은 슬픔과 비통 속에서도 하나님의 은혜에 만족하여 그들의 기쁨을 지속하기에 충분한 이 위로를 항상 갖기 때문이 아닙니까?
당연히 신자들이 먼저 그들의 마음이 하나님 안에서 기뻐한다는 것을 확언합니다.
그 이유는 세상의 유혹에 끌리어 방황했던 것으로부터 떠나 그들이 모든 운명의 변화에도 동요하거나 망설이지 않고 인생의 모든 복을 자유와 하나님 아버지의 복을 기뻐하는데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후에 두 번째 절에서 '그들이 그의 성호를 의지하였다' 고 덧붙입니다.
그러나 만일 어떤 사람이 (키)라는 불변화사를 이유나 혹은 원인을 나타내는 '때문에'라는 의미로 이해한다면 그 의미는 곧 우리의 희망이 하나님께 고착되어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편에서 계속적으로 즐거운 일을 우리에게 주시려고 동일하게 준비하실 것이라고 적절하고 품위 있게 표현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인간들이 슬픔으로 압도당하고 있을 때 도 걱정과 슬픔과 근심으로 쇠약해질 때 그들이 어리석음에 대한 보상을 받으리라는 것을 그들의 경험이 틀림없이 증명합니다.
그들이 하고 싶은 대로 그들의 기만된 망상들 속에서는 기뻐하지 않고 하나님께 그들의 소망을 두면서 기뻐하지 않는 것 이상 더 그들이 어려움을 겪을 일이 없을 것이라는 사실을 압니다. 우리가 알고 또 늘 체험하는 대로 의심은 근심과 슬픔을 가져오고 참 신앙은 참 기쁨의 샘과 같습니다.
4. 본문 22절은 "여호와여 우리가 주께 바라는 대로 주의 인자하심을 우리에게 베푸소서"입니다.
1) 마침내 거룩한 저자가 모든 성도들을 위해 기도로 이 시의 끝을 맺습니다.
그 내용은 하나님께서 그들이 하나님의 복을 헛되이 의지하지 않았다는 것을 그 결과에서 느낄 수 있도록 해달라는 것입니다.
한편 선지자의 입을 통하여 이 기도의 규칙을 말씀하여 주심으로써 성령께서는 구원이 어떤 다른 곳에서 찾아질 수도 없고 또한 소망되어질 수도 없는 때에 거룩한 은혜의 문이 우리를 위하여 열려졌다고 가르칩니다. 이 구절은 다른 친절한 위로를 주고 있는데 우리의 소망이 우리의 진로 중에서 약해진다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하신 그의 자비를 중단하지 않고 끝까지 계속 베푸시지 않을 것을 두려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시편 33 편
2) 특별히 이 구절은 주님을 바라보는 신앙이 얼마나 효과적인 것을 암시합니다.
우리는 주님을 바라보는 것인 만큼 주님의 복을 거둡니다.
예수님도 복음서에 종종 말씀하시기를 "네 믿음대로 되라"고 하셨습니다(마9:29).
5. 우리는 하나님의 기업으로 빼신 바 된 백성입니다(12-22).
1) 침 삼킬 동안도 놔두지 않는 주의 사랑은 결코 빗나가는 일이 없습니다(욥7:19, 20). 그러나 구원의 믿음은 모든 자의 것이 아닙니다(살후3:2).
그 믿음은 택한 백성에게만 주어집니다. 택한 백성은 "여호와로 자기 하나님을 삼은 나라" 입니다. 택한 백성은 "하나님의 기업으로 빼신 바 된 백성" 입니다(12).
그리스도의 죽음은 이 택함 받은 백성만을 위한 죽음입니다.
'모든 자를 위해 죽으셨지만 효력은 택함 받은 백성에게 만 있다' 는 주장은 사실이 아닙니다. 그리스도는 유기된 자를 위해서 죽으신 적이 없으십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오직 아버지께서 주신 자만을 위해 죽으셨습니다(요17:9, 12).
예수라는 이름 자체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입니다(마1:21).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게 될 것입니다(행13:48).
그러므로 그 백성은 한 명도 잃지 않으십니다.
2) "하나님의 기업으로 빼신 바 된 백성"에게서 찾으시는 열매는 하나님만 최고의 상급인 줄 아는 것과 하나님만 경외하는 것입니다.
비록 세상의 모든 거민이 참된 구원의 능력과 관계없는 것에 주목하고 많은 군대와 힘센 용사와 말들을 의지할지라도 우리는 하나님만 의지하고 경외해야 합니다(13-17).
남유다가 전쟁도 없고 식물의 핍절도 없는 애굽을 의지하여 그곳으로 가고자 할 때 '너희의 두려워하는 칼과 너희의 두려워하는 기근이 애굽으로 따라가 너희로 죽게 할 것이라' 고 하신 주의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렘42:13-16).
하나님 외의 것을 힘으로 삼으면 그것은 우리에게 힘이 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사망의 지름길입니다. 그것은 영적 부도이며 파산입니다.
3) 하나님만 경외하는 택한 백성은 오직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바랍니다(18).
우리의 도움과 방패이신 하나님만 영적 사망과 기근에서 건질 수 있습니다(19, 20).
그러므로 하나님의 이름을 의지한 자의 마음은 즐겁습니다(21).
하나님을 참되게 바라는 자에게 하나님은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그 하나님은 자기 백성에게서 그 인자하심을 거두시지 않습니다(22).
"여호와여 우리가 주께 바라는 대로 주의 인자하심을 우리에게 베푸소서."
시34: 다윗이 아비멜렉 앞에서
모름지기 세상에서 말하는 장수상이란 끝까지 그 용맹을 포기하지 않는 자입니다.
비굴하더라도 최소한 돈키호테 식의 용맹이라도 갖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일반 군인이더라도 전시에는 어느 정도는 "임전무퇴"의 정신을 갖습니다.
시편 34편 주제는 "다윗이 아비멜렉 앞에서 미친 체하다가 쫓겨나서 지은 시"(다윗의 시, 다윗이 자신을 내쫓는 아비멜렉 앞에서 자신의 모습을 변장하고 떠났을 때에 - 칼빈) 입니다.
이 일이 인간적으로는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비굴한 모습입니다.
그러나 성령하나님과 다윗은 이 일을 무한하신 하나님의 은혜로 높이 평가합니다.
1. 다윗은 하나님의 특별하신 구원에 대하여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구원에서 모든 성도들을 향하시는 하나님의 영원한 은혜를 찬양하는 기회로 삼습니다.
그 구원으로부터 모든 성도들이 하나님을 신뢰하고 경건함을 공부하도록 권고합니다.
인생을 행복하게 보내는 유일한 방법은 하나님을 섬기고 그 하나님을 경외하면서 세상에서 거룩하고 악의 없이 걸어가는 것이라는 사실을 확인합니다.
그러면서 이 시편 제목에서 다윗이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특별한 실례를 찬양하고 있다는 사실이 분명해집니다.
2. 사무엘상 27장 2절(사실은 삼상21:11,12절임에 틀림없다) 에 기록된 대로 다윗이 사울을 제외한 그의 모든 원수들의 가장 치명적인 자로 생각한 아기스 왕에게로 쫓겨갔을 때, 다윗이 그 아기스 왕으로부터 피할 수 있을리라는 가능성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다윗이 자신의 생명을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입에서 침을 흘려 보기 흉하게 하고 외양을 꾸미어 미친 사람으로 가장하는 것뿐이었습니다.
이것은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먼저는 그 아기스왕은 자기가 승리하리라는 기대가 무너지자 참고 견디었던 손해와 그 왕이 받았던 불명예를 모두 다윗에게 돌려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 다음에는 다윗을 대적하여 가슴에 맺힌 증오를 불태웠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천둥 번개를 동반한 소낙비를 피하려고 동굴에 들어갔다가 사자 떼를 만난 경우입니다.
바울의 경우 추위를 모면하려고 불을 피우다가 독사에 물린 경우입니다.
시편 34 편
그러므로 그 자신의 기대와 또 다른 사람들의 기대와는 달리 자신이 도망가도록 허용되었다는 점에서 다윗은 자기를 향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놀랄만한 실례가 나타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합니다.
그것은 전 교회의 일반적인 교훈에 유용할 것입니다.
3. 아기스 왕 대신에 여기서는 아비멜렉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또 아비멜렉이라는 이름이 팔레스틴의 통치자들에 대한 일반적인 칭호였다는 것은 가능한 일입니다.
아비멜렉이 가드왕들의 일반적인 칭호인데 반하여 아기스는 그의 특별한 이름이었을 것입니다.
아비멜렉이란 단어는 '아버지'와 '왕'이 붙어 있는 말입니다.
마치 애굽의 통치자들을 바로라 부르고, 또 로마의 황제를 로마인들 가운데서 최초로 황제의 권력을 탈취한 쥴리어스 시저이의 이름을 따서 시이저라고 불렀던 것처럼 우리는 다윗이 태어나기 오래 전, 아브라함 시대에 그랄을 통치하였던 왕들을 아비멜렉이라고 불렀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이름이 그들의 후손들 가운데 시대를 계승하여 세습적으로 내려왔습니다 또 팔레스틴의 모든 왕들의 일반적인 이름이 되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4. 칼빈이 '모습' 으로 번역한 히브리어 (타암)은 '음미, 분별'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이를 적절하게 해석하면 다윗은 어리석게 보였고 볼품도 없었습니다.
그것이 파생된 그 동사가 '맛보다' 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적절합니다.
또 그것은 때때로 이성이나 분별, 그리고 모든 지각들로 변형됩니다.
따라서 다윗은 그 자신을 광인으로 꾸몄습니다.
그러므로 '분별' 이라는 그 용어는 매우 적절합니다.
이제 비록 다윗이 미묘한 책략으로 도망하였을지라도 다윗 자신은 하나님의 손에 의해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안전을 위장하여 미친 덕으로 돌리지 않습니다(지략, 화려한 권모술수).
오히려 다윗의 원수들의 잔인성이 하나님의 은밀하신 영향력으로 연화(軟火)되어 이전에 다윗을 향하여 분노의 불길을 태우던 그 아기스왕이 술책으로 인하여 진정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아기스가 전 왕국에 대해 위험스런 적으로 알았고, 또 아기스가 그렇게도 많은 손실을 당하였던 용감한 사람을 경멸하고 다윗을 내쫓았다는 사실은 도저히 기대할 수 없었습니다.
시편 34 편
5. 이것은 다윗이 성령의 인도 아래 그 자신을 가장 한 것이 아닌가 입니다.
다윗의 변장 출현으로 두 가지 일들이 함께 연결됩니다.
그것은 곧 미친 것처럼 꾸민 것과 이 가장으로 인한 좋은 결과입니다.
이 시편 기록에 역사하신 동일한 성령께서 이 전략을 다윗 속에 암시하셨습니다.
또 다윗이 아기스왕을 속이도록 다윗에게 지시하셨습니다.
비록 하나님께서 때대로 그의 백성들을 구원하시지만 그들은 방법을 선택하는데 잘못을 범하거나 혹은 그 방법들을 적용하는데서 범죄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구원은 하나님의 사역이었기에 그 속에 모순은 없습니다.
변명의 여지가 없는 일, 곧 중간에서 일어난 죄는 다윗에게 돌아가야 합니다.
이런 방법으로 옛 야곱은 하나님의 은혜와 흡족한 기쁨에 의한 복을 받았습니다.
그 복을 얻는데 이용된 그 어머니의 간계도 그녀가 저지른 범죄였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때때로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사건들이 일어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도구들로 사용하는 성도들이 그 의무에서 빗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히려 비난받을 다윗을 무죄로 하려고 애쓰는 것은 지나친 일일 것입니다.
그 이유는 생애를 완전히 하나님께 맡기지 못함으로서 자신과 또 그 자신이 지배받았던 성령의 은혜를 악한 자들의 조롱거리가 되게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절대적으로 주장하지는 않습니다.
그렇지만 이 속임수에 허약에 대한 증거가 나타납니다.
다윗은 그의 모습과 말을 변화시킴으로서 죽음을 피하였습니다.
그러기에 만일 다윗이 여기서 하나님의 은혜를 크게 나타낸다고 언급되어야 한다면, 다윗의 과오는 다윗의 책임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더욱 뚜렷하게 나타내기 위하여 다윗이 상황을 분명하게 언급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다윗이 하나님을 이러하신 분으로 인식하기에 자신도 찬양하고 다른 사람들도 찬송하자고 권고하는 것입니다(1-3).
시편 34 편
시34:1-6 내가 여호와를 항상 송축함이여
박윤선 목사님은 이 시편의 주제를 "여호와를 찬송하고 다른 사람을 권하여 여호와를 경외하게 함"이라 하였습니다.
1. 본문 1절은 "내가 여호와를 항상 송축함이여 그를 송축함이 내 입에 계속하리로다"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이 내려주셨던 선하심을 자기 전 생애 동안 기억할 것을 다짐합니다.
동시에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찬양합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이 계속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도록 날마다 도와 주십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영원히 기억해야 한다고 말씀되어진 그 복은 이러한 찬양에 의해 일반적이고 공통적인 다른 복으로부터 구별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성도들이 주목해야 할 규칙입니다.
성도들은 때때로 하나님께서 어떤 복을 주셨는가에 대한 기억을 되살려야 합니다.
그러나 만일 어떤 때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어떤 위험으로부터 보호하시기 위하여 하나님의 능력을 더욱 뚜렷하게 나타내셔야 한다면 그들은 더욱 더 자신들의 감사를 성실하게 증명하게 될 것입니다.
이제 만일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한가지 은혜만으로도 우리의 모든 생애를 하나님에게 감사함으로 우리가 마땅히 하나님에 대한 찬양을 그칠 수 없다면 무수한 복을 우리들에게 무더기로 안겨주실 때에야 얼마나 더하겠는가?
다윗은 앞에서 말한 그 찬양이 많은 위선자들이 자랑하는 그들의 공허한 혀의 수다로부터 그들의 입술에서 계속되고 있다는 것을 구별하기 위하여 다윗은 제2절에서 자신의 찬양은 그의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왔다는 사실을 덧붙입니다.
2. 본문 2절은 "내 영혼이 여호와로 자랑하리니 곤고한 자가 이를 듣고 기뻐하리로다"입니다.
여기서 '영혼' 이란 생명의 영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애정의 좌소(座所)를 말합니다.
마치 다윗이 항상 자기의 온 마음으로 자랑하는 근거를 하나님 안에서만 가질 것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위대한 구원을 결코 망각하는데 빠져들지 않을 것으로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2절에서 다윗은 이것을 자신의 감사의 열매로 고통과 비참함이 소망의 근거를 끌어낼 것이라고 자세히 설명합니다.
시편 34 편
우리가 이미 '곤고한' 혹은 '비천한'이라고 번역한 (아나빔)이라는 히브리어는 일반적으로 모든 고통받는 자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교만의 냄새를 풍기는 대신에 고통으로 인하여 비천해지고 또 고통에 복종함으로서 쫓겨나서 바로 진토에까지 전락할 만한 준비를 갖춘 자들을 의미합니다.
이것들은 그의 기쁨의 참여자들이 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이 그것을 냉정하게 설명한 것처럼, 단순히 동정심에서 온 것이 아니고 다윗의 실례에서 깨닫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그의 은혜에 대한 일반적인 증거를 주셨습니다.
그들이 슬픔으로부터 회복될 것입니다. 그들이 높이 들어올림을 받을 것입니다.
따라서 이 기쁨이 소망으로부터 솟아나며, 그들의 구원에 대한 보장을 받았습니다.
그러기에 그들이 기쁨으로 하나님을 의지하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3. 본문 3절은 "나와 함께 여호와를 광대하시다 하며 함께 그 이름을 높이세" 입니다.
시편 기자는 감사가 될 다른 결과를 계속 보여줍니다.
다윗은 동일한 헌신에 대한 자신의 보기에 의해 다른 사람들을 권유합니다.
그보다도 더욱 성도들이 진심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도록 그들을 초대하고 권유하면서 그들이 그와 함께 이 일에 연합하도록 부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 중의 어떤 사람에게 도움을 주시는 많은 실례들로부터 풍요한 소망이 있다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각 사람이 자기가 받은 은혜를 설명할 때 모두 하나가 되어 용기를 얻고 또 공공연한 방법으로 하나님께 찬양을 드려야 합니다.
우리는 인간들이 우리의 감사에 대한 증인들이 되게 하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우리의 본을 따르도록 하기 위하여 하나님께 공공연하게 감사를 드립니다.
4. 본문 4절은 "내가 여호와께 구하매 내게 응답하시고 내 모든 두려움에서 나를 건지셨도다" 입니다.
다윗은 여기서 자기가 기쁨에 관하여 말한 것을 더욱 분명하고 충분히 설명합니다.
첫째로 다윗은 자신의 기도가 응답되었다는 사실을 말합니다.
둘째로 다윗은 이것을 모든 경건한 자들에게 적용합니다.
귀중한 증거로 격려를 받은 그들이 기도하도록 자극을 받게 하려는 것입니다.
"여호와께 구하매" 라는 말씀 속에 함축된 것은 다음 구절에서 분명해집니다.
어떤 곳에서는 그것이 다른 의미들로 이해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섬기는데 그 마음을 성실하게 기울이고 또 그 생각을 하나님에게로 향하였다는 것입니다.
시편 34 편
여기서 그것은 다만 도움을 위하여 하나님에게만 의지한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응답하셨다는 것이 곧 따라 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님은 기도와 탄원에 응답하시는 분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그의 두려움'이라는 말로는 마음을 몹시 불안하게 하는 이유와 위험들에 대한 효과를 갖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다윗은 틀림없이 공포로 인하여 두려워하고 동요되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마치 먼 거리에서 또 높은 곳에서 그 위험들을 관찰하는 것처럼 그의 위험들을 조용하고 침착한 마음으로 바라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걱정으로 인하여 비참하게 고통을 받게 되어 그 두려움과 공포를 정확하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보다 더욱 복수(復數)를 사용함으로서 다윗은 한가지 방법을 크게 두려워할 뿐 아니라 또한 여러 가지 걱정으로 고통을 받았음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한편 잔인한 죽음이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을 보았으며 불신자들이 하나님의 자녀들을 그들의 즐거움의 대상으로 만들 듯이, 다윗의 마음은 아기스가 만족을 위하여 자신을 사울에게 보내지 않을까 하여 공포에 떨고 있었습니다.
자기가 이미 발견되었고, 또 한번 배신을 당하였으므로, 자기는 피할 수 있을지라도, 사울에게 고용된 자객들이 사방으로 그를 에워싸고 기다리지 않을까 하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골리앗의 죽음과 아기스 군대의 멸망, 이 두 가지에 대하여 아기스가 다윗에게 품은 증오 역시 다윗에게 많은 두려움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특별히 그의 적이 그에게 분노를 즉각 터뜨릴 수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하는 것과 아기스의 잔인성이 그를 간단히 죽임으로서 달래어질 수 없다고 다윗이 생각할 만한 충분한 이유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심사숙고해 볼 때입니다.
만일 언젠가 우리를 에워싼 위험들 때문에 두려워할 때 우리의 나약함으로 인해 하나님을 부르지 못하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하여 특별히 이것을 지적해야 합니다.
그 영웅적 자질이나 용감성이 다른 사람들을 능가한다고 알려진 다윗도 모든 공포와 놀라움을 격퇴할 만한 강인한 심장을 가지지 못하고 때때로 크게 불안해 하고 두려움에 떨었습니다.
5. 본문 5절은 "저희가 주를 앙망하고 광채를 입었으니 그 얼굴이 영영히 부끄럽지 아니하리로다" 입니다.
5절과 6절이 4절과 연결되어 해석되어야 한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말하였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하면서 다른 사람들이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기 위해서 자유롭고 두려움 없이 그에게 가까이 나아가도록 한가지 실례를 제시하였습니다.
시편 34 편
이제 그는 그들이 올 것이라고 말하며 또한 행복한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고 말합니다.
처음의 두 동사는 히브리어에서 과거 시제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문장이 곧 그들이 다윗을 바라보아야 할 때, 또 그에게 쏟아 놓아야 할 때 그들의 얼굴이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을 것이라고 설명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동사들을 미래 시제로 번역하였습니다.
다윗은 과거에 일어났던 일들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신에게 나타났던 복의 열매를 추천하고 있습니다.
어떤 주석가들은 '그에게' 라는 단어를 다윗을 말하는 것으로 해석하고 있음을 압니다.
그 이유는 곧 다윗이 3인칭으로 말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한편 다른 사람들은 더 타당성 있게 그것을 하나님 자신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나하루)라는 히브리어 동사에 관하여 또한 견해의 차이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그것이 (오르) 어근에서 파생됐다고 생각하여 '교화된다'로 번역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단어의 당연한 의미는 이곳에 대단히 적절한 것으로 보입니다.
마치 인간이 고요하고 자비로우신 하나님의 얼굴을 볼 수 있는 거울이 이제 나타날 것이며, 가난하고 고통 당하는 사람들이 지금부터 그들의 눈을 하나님께로 돌리고, 또 불확신이 그들을 더 이상 지체시키거나 게으르게 하지 못할 것이기에 마음껏 하나님께 호소할 것이라고 말한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만일 어떤 사람이 '교화하다'라는 단어를 더 좋아한다면, 그 뜻은 이렇습니다.
곧 이전에 흑암 속에서 초췌해진 사람들에게 빛이 갑자기 비추인 것처럼 그들의 눈을 하나님께로 돌릴 것이며, 또 수치로 내쫓김을 받고 압제를 받던 사람들이 기쁨으로 그들의 모습을 되찾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느 경우든지 그 뜻은 본질상 같습니다.
6. 본문 6절은 "이 곤고한 자가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그 모든 환난에서 구원하셨도다" 입니다.
다윗은 여기서 자신의 실례 속에 들어있는 중요한 것이 성도들을 매우 크게 격려하고 있다는 사실을 더욱 강조하여 표현하기 위해 모든 성도들에게 자신에 관한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이 불행한 사람이 부르짖었다' 라고 그들은 말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모든 가난한 사람들이 그에게 부르짖도록 초청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다윗 속에서 모든 성도들의 공통 은혜에 속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관찰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때에 다윗의 기도를 들어주신 것처럼 오늘도 다윗과 같은 믿음을 가지고 탄식과 소원, 울부짖음으로 자신에게로 향하고 있는 모든 고통 당하는 자들의 기도를 들어주시기를 기뻐하시고 또한 준비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시편 34 편
시34:7-10 여호와의 사자가
다윗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에게 여러 가지 권면과 소망을 보여줍니다.
①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라 합니다.
② 여호와께 피하면 복이 있다고 합니다.
③ 여호와를 경외하면 복이 있다고 합니다.
1. 본문 7절은 "여호와의 사자가 주를 경외하는 자를 둘러 진치고 저희를 건지시는도다" 입니다.
다윗은 여기서 모든 성도들을 향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은혜를 일반적으로 말합니다.
또 다윗은 인간의 생명이 무수한 위험들 앞에 노출되었을 때, 하나님은 그들을 구원하실 능력이 있으시다는 사실을 가르쳐 줍니다.
특별히 이리들 가운데 있는 양 같은 갖가지의 죽음으로 둘러싸여 있는 성도들은 끊임없이 어떤 다가오는 위험의 공포로 괴로움을 당합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하나님의 종들이 천사들에 의하여 보호를 받는다고 가르칩니다.
또한 다윗은 하나님의 종들이 그 천사들의 방어를 받고 있다고 확언합니다.
시편 기자의 뜻은 비록 성도들이 많은 위험에 부딪칠지라도 하나님께서 그 생명의 신실한 보호자가 되실 것이라는 확신을 갖게 될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이 소망에 더욱 확고히 서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안전하게 보호하시는 자들을 하나님은 천사들의 힘과 사역에 의하여 지키신다고 논리에 맞도록 덧붙입니다.
하나님의 힘만이 참으로 이것을 성취하기에 충분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허약에 대한 자비로써 하나님은 천사들을 사역자들로 임명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우시려고 하실 때마다 하나님의 일에 대한 봉사를 항상 준비하고 있는 천사들의 무수한 군단을 하나님께서 가지셨다는 것을 알도록 하는 것은 우리의 믿음을 확고히 하는데 큰 역할을 합니다.
그보다도 더욱 직위와 힘을 받은 천사들 역시 우리의 생명을 보호하는 데 전념합니다.
그 천사들은 이 의무가 자기들에게 위임된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참으로 적절하게 하나님의 교회의 담이 되십니다.
또한 하나님은 하나님의 교회에 대한 모든 요새와 방어소가 되십니다.
그러나 우리의 현재의 불완전한 상태의 정도와 크기에 적절하게 하나님은 천사들을 통해서 우리를 돕는 능력을 나타내십니다.
더욱이 여기서 단수로 말하는 한 천사는 모든 다른 천사들에게도 적용되어야 합니다.
시편 34 편
그들은 "모든 천사들은 부리는 영으로서 구원받을 후사들을 위하여 섬기라고 보내심이 아니뇨"(히1:14)의 일반적인 명칭에 의하여 구별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 성경은 다른 곳에서 그것이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릴 때마다, 또 그것이 하나님의 백성들의 이익이 된다는 것을 하나님이 아실 때마다 많은 천사들이 하나님의 백성들 각 사람을 돌보고 있다(왕하6:15, 시151:11, 눅16:22)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의 내용은 아무리 우리 원수들의 수가 많고, 또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위험이 많을지라도 무적의 힘으로 무장한 하나님의 천사들이 끊임없이 우리를 보호하신다는 사실을 믿도록 합니다.
그 모든 악으로부터 우리를 돕고 또한 구원하려고 사방에 무장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2. 본문 8절은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입니다.
이 귀절에서 다윗은 사울에 대한 단순한 지식보다 사람들이 마땅히 깨달아야 할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하여 깨닫지 못하고 있는 인간들의 우둔함 때문에 그들을 꾸짖습니다
'맛보다' 는 말로 즉시 다윗은 그들이 맛보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동시에 이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은사를 그 맛도 음미하지 못한 채 게걸스럽게 먹어치웠거나 혹은 타락된 증오를 통하여 그 은사들을 배은망덕하게도 감추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지적합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그들의 감성을 일깨우고 또한 하나님의 선하심을 그들이 알도록 하거나 혹은 오히려 그 맛이 그들에게 나타나도록 하기 위하여 그 맛을 음미할 수 있는 어떤 미각을 돋구어줍니다.
문자 그대로 번역하면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다 알라' 입니다
그러므로 다윗의 뜻은, 즉 자기가 특별히 언급하고 있는 경건한 자들이 실제적인 경험에 의하여 하나님의 선하심에 관한 지식에 이르는 것을 하나님 편에서 방해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으로부터 그들 역시 공통적인 우둔함의 질병에 감염되어 있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이 교리는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라고 곧 추가되어 나오는 약속에 의하여 확증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은혜를 구하는 사람들의 기대를 결코 실망시키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 자신의 불신앙이 하나님께서 모든 좋은 것으로 충분하고 풍요하게 우리를 만족시켜 주시려는 것을 막는 유일한 장애물입니다.
시편 34 편
3. 본문 9절은 "너희 성도들아 여호와를 경외하라 저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부족함이 없도다" 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들이 하나님의 복을 받기 위한 길을 열기 위하여 거룩과 의를 추구해야 한다고 권고 받습니다.
우리는 사람들이 부정한 수단에 의지하거나 약탈, 또 심지어는 악한 폭력으로 그들의 결핍을 채우는 것이 예사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악인들을 모방하려는 욕구로 동요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그들의 번영을 어느 정도 부러워함으로써 그들이 때때로 그 이리들 가운데서 울부짖는 것을 스스로 허용해서는 안 되는 일입니다.
그리고 비록 악인이 자발적으로 모든 악한 폭력을 삼갈지라도 그들 주위에 있는 사람들 가운데서의 그 공통적인 생활 방법은 폭풍우와 같이 그들을 휩쓸어버립니다.
또 한편 그들은 필요의 탄원이 그들을 변명하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만일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께서 모든 악하고 거짓된 계획들을 대적하실 것임을 믿고 하나님을 경외하면서 그들 자신을 지켜간다면 모든 것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잘될 것이라고 약속합니다.
다윗은 굴레를 쓴 것처럼 이 유혹들을 제지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순박한 것을 목표로 하는 사람들을 어리석은 자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그 순박한 사람들이 그것을 목표로 함으로써 자신의 이익과 소득을 얻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불신자들이 가난을 두려워하고 또한 그들의 공상이 그것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하여 제안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나 시도하도록 그들을 재촉하고 있는 동안 다윗은 여기서 하나님께서 성도들을 돌보시어 육적인 것 때문에 그들이 궁핍 속에서 고통을 당하지 않도록 하신다고 증거합니다.
또 다윗은 두려워하거나 의심하지 말고 의로운 것을 추구할 때 위축되지 말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의롭게 행하시는 사람들을 결코 버리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악인들이 그들의 거짓된 거래와 불법적인 행위에서 기대하는 것 이상으로 오직 하나님께만 기대하는 존귀를 하나님께 양도하도록 그들에게 명령합니다.
다윗은 불법이 온 세상에서 억제할 수 없는 격노로 맹위를 떨칠 때 난잡한 군중들에게는 소용없을 것이기에 성도들로 하여금 경계하도록 분명히 일깨웁니다.
선하고 순박한 사람들의 정직함이 악인들의 뜻과 더불어 드러나게 될 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짓되고 불의한 모든 재물보다도 정직함 속에 더 큰 안전이 있다는 사실은 사람들 중에서 일반적으로 용인되고 있는 견해와는 반대되는 생각입니다.
시편 34 편
그들이 자진하여 의로운 길을 행하려고 애쓰며 하나님을 경외하는 일에서 떠나지 않으려고 힘쓰는 성도들을 하나님께서 권고하시려는 데에는 아무런 모순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세상과 그 세속적인 유혹의 쾌락을 추구하는 것을 제외한 행복하고 번영한 삶의 소망이 보이지 않을 때 경건의 빛이 얼마나 쉽게 흐려지며 또 꺼진다는 것을 우리가 알기 때문입니다.
4. 본문 10절은 "젊은 사자는 궁핍하여 주릴지라도 여호와를 찾는 자는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입니다.
시편 기자는 아주 적절한 비교를 통하여 이 교리를 설명합니다.
그 잔인함에 있어서 이 땅 위의 모든 야생 동물들을 능가하는 사자들이 굶주린 상태에서 먹이를 찾아 헤매는 데 비해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들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주시고 또 그들의 결핍을 채워주십니다.
다윗은 단순히 모든 불의를 방어하는 사람들이 그렇게 행함으로써 강탈이나 약탈을 하는 자들보다 훨씬 더 이익을 얻을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그 이유는 사자들이나 다른 짐승들이 때때로 굶주릴 때에라도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을 먹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선지자가 말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복에만 만족하고 그들의 식물을 오직 하나님의 손에서 구하는 의롭고 신실한 자들을 실망시키시기 보다는 사자들을 굶주림과 허기로 더 빨리 멸망시킬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자신의 걱정을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 아버지의 선하심과 관대하심을 절대적으로 신뢰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조용하고 평안하게 살아갈 것입니다.
또 이런 신실한 신자들은 해를 입지 않을 것입니다.
만일 선한 사람과 덕 있는 사람이 항상 빈곤으로부터 면함을 받지 못하고 핍박을 받는다면 그들이 최대의 궁핍으로 떨어졌거나 어떤 방향으로 돌아서야 할지 모를 때, 그 결과는 그들을 구원하시려 하나님이 적시에 손을 뻗치심으로 항상 우리가 생활에 필요한 것을 무엇이나 그분에게 헛되이 구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대답하겠습니다.
시편 34 편
시34:11-14 너희소자들아
본문에서 다윗은 여호와 경외를 가르침 받을 수 있다고 합니다.
1. 본문 11절은 "너희소자들아 와서 내게 들으라 내가 여호와를 경외함을 너희에게 가 르치리로다" 입니다.
1) 다윗은 더 큰 열정으로 성도들이 공정하고 악의없이 행하는 것 이상 그들에게 더 큰 유익이 없다는 사실을 깨우쳐주려고 모든 사람을 향하여 계속 권고합니다.
대부분 사람들이 행복과 안락을 획득하는 최상과 최단의 방법은 폭력, 약탈, 불의, 등 악한 방법들을 동원하여 다른 사람들을 능가하려고 애를 쓰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교리를 자주 되풀이할 필요가 있습니다.
2) 다윗은 사람들을 자신의 자녀들로 부름으로 사람들의 마음이 순화되고 겸손하게 돼야 할 필요가 있어 온화하고 정중한 명칭으로 심술궂은 감정들을 완화시킵니다.
아무나 그렇게 많은 공격 속에서 흔들리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다만 최대의 겸손으로 성령의 온유하심을 받은 사람들만이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최초에 자기가 규정하는 인생의 규칙은 온유하고 순종하는 사람들만이 지키고 복종할 수 있는 것이라고 그들에게 말하였습니다.
3) 다윗은 같은 목적으로 '와서' 라는 말과 '들으라' 는 명령을 합니다.
그 말 속에는 모든 악한 생각을 버리고 또 그들의 마음의 열정과 격렬함을 제어하는 사람들이 유순하고 온유한 자들이 될 것이라는 뜻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4) 다윗은 "여호와를 경외하라"는 말씀을 경건하고 거룩한 생활 규칙으로 제시합니다.
마치 선지자가 모든 사람들의 입에는 덕과 의가 있지만 거룩한 생활을 하면서 인간이 마땅히 살아야 할 인생을 살고 있는 사람들은 거의 없는 것처럼 말씀합니다.
그 이유는 그렇게 거룩한 생활을 하는 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라는 사실을 그들이 알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말씀한 것과 같습니다.
2. 본문 12절은 "생명을 사모하고 장수하여 복 받기를 원하는 사람이 누구뇨" 입니다.
다윗은 마치 모든 사람들이 그들 자신에게 내려진 불행을 자발적으로 끌어들이기라도 한 것처럼 그렇게 원한 사람이 있느냐고 묻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예외없이 행복한 생활을 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인간들이 욕망의 강퍅함 속에 나타낸 우맹과 어리석음을 비난합니다.
또 행복을 획득하려는 그들의 노력의 무위성을 신랄하게 책망합니다.
시편 34 편
모든 사람들이 그들에게 유익한 것이면 무엇이나 찾으며 열심히 손에 넣으려고 하는데 반하여 백명 중 거의 한 명 정도나 간신히 공정하고 정당한 방법으로 평화와 조용하고 바람직한 인생의 상태를 배우려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그의 제자들에게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진심으로 신실하고 정직한 자들에게만 주시는 거룩한 복보다는 다른 근원으로부터 행복한 삶을 기대하는 한 온 세상이 그들 자신의 어리석음으로 인하여 속고 또한 타락되었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나 이 선포 속에는 더욱 효과있게 일깨우기 위한 더 큰 열정이 계속됩니다.
마치 다윗이 모든 사람들이 행복을 갈망하고 있는데 누가 그것을 얻고자 거의 노력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또 모든 사람들은 자신의 잘못 때문에 오히려 많은 환난을 자충하는 일이 있을 수 있는가? 라고 말합니다.
3. 본문 13절은 "네 혀를 악에서 금하며 네 입술을 궤사한 말에서 금할지어다" 입니다
다윗이 여기서 말씀하고 있는 교훈은 대단히 희귀한 덕입니다.
우리가 진지하고 또 우리의 대화에서 속임으로부터 떠난 덕에 관계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참으로 중상이 이 첫 구절에서 정죄되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이것을 아주 더 많이 확대된 의미로 이해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말씀을 더 단순하고 그 목적에 부합하게 이해합니다.
곧 우리가 다윗이 하반절에서 반복하고 있는 것과 같은 내용을 우리 이웃에게 간사하게 말해서는 안 되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말이 저희에게 올무가 되는 수단으로 입증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의 말이 마음의 참 표현이 되는 방법으로 우리의 이야기를 조절하는 것보다 더 어려운 것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그것을 엄격하고 조심스런 통제로 훈련을 하도록 명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다른 사람들을 속이는 경우가 되지 않도록 함부로 날뛰지 않게 합니다.
4. 본문 14절은 "악을 버리고 선을 행하며 화평을 찾아 따를지어다" 입니다.
1) 여기서 먼저 선지자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모든 악을 버리고 그들의 이웃을 돕는 선행에 헌신할 것을 그들에게 명령합니다.
(1) 이 절은 일반적으로 다윗이 회개의 두 부분에 대하여 취급하는 것처럼 인용됩니다.
회개에 있어서 그 첫 번째는 죄인이 탐닉하고 있는 악을 버리는 것입니다.
또 그 자신의 이전 생활 태도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는 그 죄인이 자신의 행동을 의에 따르도록 하는 것입니다.
시편 34 편
(2) 그러나 이곳에서 우리는 어떻게 이웃을 대해야 하는가를 특별히 배우게 됩니다.
종종 발생하는 것처럼 어떤 사람들에 대하여 자유주의적일 뿐만 아니라 또한 그들에게 관대한 사람, 혹은 적어도 친절한 행위로 많은 사람을 돕는 사람이 다른 사람들을 속이고 상처를 입힘으로 그들에게 악을 행하기에 다윗은 아주 적절하게 하나님 앞에서 인정받는 삶을 살기 원하는 사람들은 악행에서 떠나야 한다는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3) 다른 한편 많은 사람들이 만일 그들이 어떤 사람을 속이거나 악행을 하거나 또 그에게 상처를 입히지만 않는다면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요구하시는 의무를 다 이행하였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아주 적절하게 이웃에게 행해야 할 선행에 대한 다른 교훈을 덧붙입니다.
(4) 하나님의 종들이 게으른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종들은 서로의 안녕과 번영을 바라면서 그들의 안녕과 번영이 그들 안에 머물 때까지 서로 장려해야 합니다.
2) 다음에 다윗은 "화평을 찾아 따를지어다"라고 평화를 유지할 의무를 가르칩니다.
(1) 이제 우리는 화평이 온유함과 인내로 말미암아 유지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때때로 조급하고 당파를 일삼으며 완고한 정신의 소유자들을 만날 뿐 아니라 사소한 경우에까지라도 분쟁을 일으킬 준비가 되어 있는 그러한 자들을 종종 만납니다
또 많은 악한 자들이 우리를 짜증나게 합니다.
또한 어떤 자들이 자신들의 사악으로 할 수 있는 한 선한 자들의 마음을 자기들에게서 따돌리고 또 어떤 자들은 논쟁의 근거를 열심히 찾습니다.
때문에 다윗은 단순히 우리가 평화를 추구해야 한다고 가르칠 뿐 아니라 그 평화가 우리들에게서 떠났다고 보일 때는 언제라도 우리가 그 평화를 추구하기 위한 최대한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우리에게 명령합니다.
(2) 그러나 이 같은 명령은 제한적인 것으로 이해되어야 합니다.
선하고 겸손한 사람들이 평화를 지키려고 최선을 기울여 모든 일을 하였을 때 악인들의 마음을 부드럽게 하지 못하거나 혹은 그들을 정직하게 하지 못하고 오히려 악을 조장하는 일이 때때로 발생할 것입니다. 또한 그들의 불신앙이 때때로 우리와 분리하도록 그들에게 강요하고 또 그들을 피하도록 하게 합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공공연한 전쟁을 선포함으로서 하나님께 도전할 때에 우리가 그들을 반대하고 격퇴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하나님께 불충성과 반역이 될 것입니다
(3) 그러나 다윗은 우리의 개인적인 일들에서 온유하고 겸손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또한 화평을 유지하려면 비록 고통과 불편이 따른다고 할지라도 그 평화를 유지하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시편 34 편
시34:15-17 여호와의 눈은
본문에서 다윗은 하나님께서 의인, 곧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를 향하여 보신다고 합니다(15상반절).
또 하나님께서 의인의 기도를 들으신다고 합니다(15하반절, 17, 18).
1. 본문 15-16절은 "(15) 여호와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 귀는 저희 부르짖음에 기 울이시는도다
(16) 여호와의 얼굴은 행악하는 자를 대하사 저희의 자취를 땅에서 끊으려 하시는도다"
입니다.
우리의 인내에 대한 최상의 지원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돌보시며, 또한 모든 사람이 정직과 공정의 과정 속에서 인내함에 따라서 하나님의 보호하심 아래서 모든 사람이 평화와 안전을 유지할 것이라는 견고한 확신입니다.
그러므로 순서상, 성도들은 그들이 순결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동안 그들이 세상의 변덕에 자신이 노출되어 있다고 생각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또 이 공포로 인하여 옳은 길에서 빗나가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다윗은 그들이 하나님의 섭리를 생각하도록 권고하며, 또한 그들이 하나님의 날개 아래서 안전한 것을 확신하도록 권고합니다.
또 선하고 순전한 사람들이 그들의 의를 더 잘 지켜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다윗은 "여호와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라고 말합니다.
동시에 다윗은 만일 어느 때라도 세상이 그들을 부당하게 핍박하면 그들이 탄원하고 기도하도록 격려합니다.
"그 귀는 저희 부르짖음에 기울이시는도다" 라는 말 속에서 다윗은 이유 없이 부당하게 핍박을 받는 사람들이 모든 고통 속에서 하나님을 그의 보복자로 부름으로써 곧 적절한 치유책을 발견할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비록 하나님께서 때때로 사람들의 악행을 못 본 체하시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또 즉각 그들을 형벌하시지 않음으로써 그들을 눈감아주시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하나님의 검열을 피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입니다(16절).
악인들이 그들의 무사함으로 인하여 계속 범죄를 강화하는 동안 하나님은 "저희 자취를 땅에서 끊으려"(벧전3:10)고 하나님께서 살펴보고 계신다고 말합니다.
다윗은 지금 특별히 이런 종류의 형벌에 대하여 말합니다.
시편 34 편
그 이유는 불신자들은 자신의 전 생애가 행복할 것이라고 기대할 뿐 아니라, 또한 이 세상에서 망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그의 첫 번째 서신에서 이 귀절을 대단히 지혜롭게 적용합니다.
베드로전서 3:10, 11, 12절에서 사도는 본 시편의 12, 13, 14, 15, 16절을 인용합니다.
사도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악인들의 교만과 오만이 아주 빈번하게 우리를 당연한 한계 이상으로 이르게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도는 우리의 슬픔을 달래고 안타까움을 진정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그렇게 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도움을 바라고, 선한 양심에 대한 증거를 가지면서 하나님의 판단을 신뢰하는 것 이상 우리의 온건을 지키는 데 더 유용한 것은 없습니다.
만일 그것이 반대를 받는다면, 오랫동안 고통을 받은 선한 사람들은 반대로 아무런 도움이나 위로를 발견할 수 없다는 체험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의인들에게 주시는 도움은 언제나 분명하게 나타나는 것도 아닙니다.
또 하나님의 도우심이 같은 분량만큼 주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결코 그들을 버리시지 않도록 그 고통을 경감하여 주십니다.
그밖에도 가장 착한 사람들일지라도 때때로 하나님의 도움을 거절하는데, 그 이유는 백 명중 겨우 한 명 정도만이 그런 성실의 과정을 보전하기 때문입니다.
또 그 사람이 자신의 잘못으로 가해지는 어떤 불행의 고통들을 받을 만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넘어지자마자 곧 죄가 그들 속에 뿌리를 내리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그들을 매질하여 벌하시고, 또 때로는 그가 완전한 파멸로 버리시는 자들을 책망하시는 것보다 더욱 준엄하게 형벌 하십니다.
그러나 계속 많은 일들이 이 세상에서 혼합되어 있고 또한 혼동되어 있는 것으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선한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악인들의 폭력과 상해에 대적하여 쓸데없이 그들을 돕기를 약속하지 않으셨다는 것을 발견할 것입니다.
2. 본문 17절은 "의인이 외치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저희의 모든 환난에서 건지셨도다" 입니다.
선지자의 의미는 그들이 부르짖을 때마다 하나님이 그것을 들어 주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모든 시대에 적용될 수 있는 교리입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한두 번 하신 일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시편 34 편
다윗은 하나님께서 항상 하셨던 일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또한 '하나님의 귀는 의인의 부르짖음에 기울이시는도다' 라고 말한 앞 절의 말씀에 대한 확증입니다.
다윗은 우리의 불평이나 신음을 하나님 앞에 내놓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귀머거리가 아니시라는 사실을 효과적으로 지금 증명하고 있습니다.
'외치매' 라는 말로 비록 하나님께서 의인들을 보호하실지라도 그들이 역경으로부터 제외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배웁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여러 가지 시련으로 연단하실 때에 그런 놀라운 방법으로 그들에게 베풀어주시는 그 보호를 규정하고 있습니다.
같은 방법으로 우리가 여기서 그 구원이 하나님을 부르는 자들에게만 약속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에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하도록 하는 적지 않은 용기로 나타나야 합니다.
성도들이 하나님의 섭리를 게으름에 빠지게 한다고 생각하도록 하는 것이 다윗의 뜻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그들의 안전에 대한 보호자이시라는 사실을 확신하면서 그들은 그들의 기도와 탄원을 곧바로 하나님께 향하도록 해야 합니다.
시편 34 편
시34:18-22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에게
다윗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에 대하여 여러 가지 말로서 형용하였습니다.
혹은 의인이라 하였고(15, 17, 19, 21), 혹은 마음이 상한 자라 하였고(18절), 또 혹은 여호와의 종들이라고 하였습니다(22절).
1. 본문 18절은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에게 가까이 하시고 중심에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 입니다.
다윗은 여기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매우 비천하여졌을 때, 또 그들이 거의 죽게 된 상태에 이르렀을 때에라도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의 구원자가 되신다는 앞에서 나온 교리를 예증하고 계속 더욱 확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지연되고 그것에 대한 모든 체험이 훨씬 뒤로 물러나서 우리의 영혼이 실패하기 시작한다는 것은 대단히 가혹한 시련입니다.
심지어 그들의 마음이 그들을 쇠약하게 하고 실패하게 할 때 또 그들이 거의 죽게 되었을 때 하나님이 성도들에게 가까이 계신다고 하는 사실은 인간의 감성과 이성으로서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무덤으로부터 다시 일으켜 세울 때 이 방법에 의하여 하나님의 능력이 더욱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더욱이 신자들이 오직 하나님 안에서 다시 한번 숨을 쉬도록 완전히 내던짐을 당하고 고통을 당하는 것은 마땅합니다.
이것으로부터 우리는 또한 스토아 학파의 철학자들이 자랑하는 마음의 교만보다 참된 인내에 더 반대되는 것은 없다는 것을 배우게 됩니다.
우리는 마음의 참된 고통이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낮추어서 하나님 앞에 굴복하여 하나님께서 우리를 높여주실 때까지는 우리가 참으로 겸손한 사람이라고 인정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우리가 계속적인 비극으로 인하여 압도당하고 또 거의 죽음 상태에 이르렀을 때에라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떠나지 아니하신다는 사실은 가장 큰 위로로 가득 찬 교리가 아닐 수 없습니다.
2. 본문 19-20절은 "(19) 의인은 고난이 많으나 여호와께서 그 모든 고난에서 건지시는도다 (20) 그 모든 뼈를 보호하심이여 그 중에 하나도 꺾이지 아니하도다" 입니다.
시편 34 편
다윗은 여기서 때때로 그의 마음 속에 일어났던 생각, 곧 '하나님께서 의인들을 돌보시는데 그들이 계속 그렇게 많은 고난과 시련을 겪는 일이 어떻게 일어날 수 있는가?
만일 그들이 평화롭게 화평과 안식을 누리지 못한다면 하나님의 보호가 무엇 때문에 필요할 것인가?
또 아무에게도 고통을 일으키는 원인이 되지 않은 사람들이 그들 자신은 그렇게 모든 다양한 방법으로 고통을 당하고 괴로움을 받아야 하는 것보다 더 모순된 일이 무엇이겠는가' 라는 생각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끊임없이 공격하고 있는 유혹들은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우리의 믿음을 동요시키지 않으며 우리는 이 교훈, 곧 비록 하나님께서 의안을 다스리시고 또 그들의 안전을 지켜 주실지라도 그들이 많은 불행을 겪고 또한 그 불행에 노출 당하게 되는데 이것은 그런 시련을 통하여 연단을 받아서 그들의 확신에 찬 성실성에 증거하고 또 하나님께서 그들의 구원자이시라는 더 많은 경험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라는 이 교훈을 기억해야 합니다.
만일 그들이 모든 종류의 시련으로부터 제외된다면 믿음이 약해질 것이며 하나님을 부르기를 그칠 것이고 또한 그들의 경건성은 숨겨진 채로 알려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여러 가지 고난으로 훈련을 받아야 하며 또 특별히 말세에는 더욱 그렇기 때문에 그들이 무수한 죽음 속에서 하나님으로 인하여 놀랍게 보호를 받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필요합니다.
만일 이 고난이 좀처럼 발생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우연히 일어난 것이거나 혹은 우연의 결과로 발생한 것처럼 보일 것입니다.
그러나 수많은 불행들이 끝없이 계속 일어난다면 하나님께서 그의 손을 그들에게 뻗치실 때에 하나님의 은혜가 알려지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어떤 악이 그들을 공격할지라도 결코 용기를 잃지 않게 격려합니다.
죽음으로부터 일어나신 것처럼 그들을 수천 번씩이라도 쉽게 구원하실 수 있는 하나님께서 결코 그들을 실망시키지 않으실 것입니다.
다윗이 '그들의 뼈'에 대하여 덧붙인 것은 이 교리에 대한 진리를 실증하는데 적지않은 도움을 주는 것으로 보이며 또 하나님의 보호를 받는 사람들은 모든 위험에서 자유로운 것임을 우리에게 가르치는데 공헌하고 있습니다.
3. 본문 21-22절은 "(21) 악이 악인을 죽일 것이라 의인을 미워하는 자는 죄를 받으리로다 (22) 여호와께서 그 종들의 영혼을 구속하시나니 저에게 피하는 자는 다 죄를 받지 아니하리로다" 입니다.
시편 34 편
우리가 여기서 '악'이라고 번역한 (라아)라는 히브리어를 어떤 사람들은 '불행'으로 번역하며 그 뜻은 '불신자들이 비참하게 멸망할 것이다' 로 됩니다.
그 이유는 마지막에 그들이 재난으로 멸망당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다른 번역이 더 명백한 것은 자신을 방어하여 주리라고 생각하는 그 악이 자신의 머리를 내리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다윗이 앞에서 가르쳤던 것처럼 정직하고 부끄러움 없는 생활 이상 더 좋은 것은 없었으며 지금은 다윗이 악인들의 모든 악한 계획은 비록 어떤 일에서 아무도 그들을 대적하는 사람이 없을지라도 결국 자신의 파멸을 가져오리라고 선포합니다.
그 절의 둘째 소절에서 불신자들은 그들 자신이 파멸의 원인과 도구가 되도록 명령받은 것은 의인들을 위한 것이라고 다윗은 언급합니다.
다윗은 '의인을 미워하는 자는 멸망하리로다' 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이것이 우리들의 놋쇠벽과 확실한 방어가 되도록 해야 합니다.
아무리 우리를 에워싼 원수들이 많을지라도 그들은 이미 멸망받도록 예정된 자들이니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다윗은 그가 "여호와는 그 종들의 영혼을 구속하시나니"라고 말한 마지막 절에서 동일한 일을 확증합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그들의 안전을 위하여 하나님의 능력을 행사하시지 않는다면 그렇게 많은 위험들 속에서 단 한 순간인들 어떻게 그들이 안전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구속하다' 라는 단어로 어떤 종류의 육체와는 관계없는 보존이 설명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구속주로 나타나기 전에 우리가 먼저 필연적으로 죽음의 판결을 받거나 혹은 죽도록 운명지어져야 합니다.
이것으로부터 지나치게 황급하게 서두르는 사람들과 또 만일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한 구원을 행하시면서 신속하게 나타나시지 않으면 하나님의 능력을 깨닫지 못할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혜의 전달을 저지한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더욱이 아무도 도덕적 혹은 철학적 덕으로만 하나님의 종들을 판단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기에 다윗은 하나님의 종들이 저희 구원이 달려 있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을 저희가 알 수 있는 하나의 주요한 표로 지정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