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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희론
절미絶美한 정서의 인스피레이션과 회복의 전환 크로노토프
권대근
문학박사, 대신대학원대학교 교수
Ⅰ. 로그인
‘누구나의 문학’이 아니라 ‘누군가의 문학’이 된 작품은 그 절실한 울림으로 말미암아 심미적 취향을 가진 평론가의 비평본능을 자극한다. 송정자는 수필이 희망만큼 간절하고 절실한 작가가 아닐까. 사랑이라고 하는 절대절미한 정서를 생성시킬 뿐만 아니라 한밤의 허리가 겨워지도록 홀로 앉아 고독을 즐기는 작가다. 인간적인 유대가 확인되는 따뜻한 심성의 여인이고, 모든 사람들에게 기쁨과 셀렘을 주는 활력의 작가다. 인생을 칼칼하게 씻어내는 힘의 작가, 골 깊은 고독을 해독할 수 있는 강인한 작가다. 나는 왜 ‘송정자 수필’에 강하게 끌리는 걸까. 그 이유를 간단히 설명하자면, ‘작수필유법불가 무법역불가’라는 말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송정자의 수필은 ‘필유사성 필유사기’라는 수필시학으로 분석이 가능한 작품들의 집합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송정자는 ‘제재를 통해 주제를 겨냥한다’는 본격수필시학의 관점에서 문학적 성취를 일구어내었다는 점이다. 평자는 부지불식간에 한 권의 수필집을 읽어내면서 송정자 수필은 본격수필이라고 명명할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다. 게다가 나는 그녀가 확장해나가고 있는 전이시학과 중층구조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따라서 몇 편의 작품을 중심으로 송정자의 작품세계를 치유시학의 측면에서 고찰하되 완벽한 크로노토프를 갖춘 한 작품 <갓 구운 새벽>을 집중분석해 보기로 하겠다.
Ⅱ. 송정자의 수필세계
필자는 수필의 참신한 맛은 낯설게 보기와 개성적 묘사에서 우러난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체험의 나열화로 얻는 일상적인 느낌보다는 제재의 의미화를 통한 미적 형상화가 주는 참신함이 더 수필적 감흥을 불러온다는 것이다. 따라서 수필의 특성도 체험보다는 인식에 초점을 맞출 때 더 문학적 향취를 거둘 수 있다. 송정자수필은 본 것, 느낀 것만으로 기록되는 단순한 체험의 배열이 아니라 경험을 넘어 본질의 의미를 찾고, 그 의미를 전이의 시학을 통해 묘사로 그려낸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결국 수필을 쓴다는 것은 어떤 대상으로부터 특별한 의미를 찾아내는 과정인 것이다. 심층에서 제재통찰을 거치고, 표층에서 작가의 주관에 의한 제재의 소성이 교감되고, 담론층에서 전이 시학을 통해 제재에 새로운 의미가 부여될 때 비로소 문학성이 수필에 담기는 법이다. 자신만의 렌즈로 걸러진 송정자의 주옥같은 수필들은 문학보다 더 깊은 철학적 사유 위에서 인간 세계의 다양한 이해 방법론을 크로노토프와 에세이 테라피란 방법론으로 풀어내고 있어서, 문학적 성취가 어떤 다른 수필집보다 뛰어나다고 하겠다.
송정자 수필의 즐거운 가치평가는 탁월한 구조시학의 층위에서 빛난다. 송정자의 수필은 상상력과 미의식의 관계를 통해 구축되고 있어 우리는 체험이 문학적으로 어떻게 변용되는지 그 과정을 먼저 <외씨버선길>에서 행복하게 살펴볼 수 있다. 이 수필은 아주 뛰어난 수필이다. 산길을 걸어면서 겪는 고행과 깨달음 그리고 미감을 승무라는 춤에 견주고 그 의미를 중층적으로 확장시킨 전략이 주효해서 큰 울림을 준다. 영월의 운탄고도 시작점에서 만난 외씨버선길을 걸으며 외씨버선 춤인 승무를 떠올리고, 이를 ‘매우 엄혹한 고행에서만이 표현될 수 있는 몸짓임을 짐작하게 한다. 그 자태가 곧아서, 맑은 물가에 긴 다리를 드리운 한 마리의 학이 서 있는 듯하다.’ 고 표현한다. ‘처음 발을 내디뎠을 때는 폭신한 땅의 감촉이 전쟁의 서막인 줄도 모르고, 사뿐사뿐 속곳치마 들어 올리듯 내딛는 걸음’이었다는 대목은 고생을 투자해서 얻어가는 정신적 가치를 되새기게 한다.
이 수필 속에는 작가의 심미적 취향이 드러나는데, 고행에 대한 해석과 그것을 넘어서려는 몸부림이 선명하게 나타나 있다. 길 전체의 모양새를 보았을 때, 조지훈의 시 ‘승무’에 나오는 외씨버선의 윤곽을 닮아있어 시 속의 버선을 연상한 길이름을 지은 분들의 감성에 놀란다. 실제로 걸어보면 외씨버선 볼의 동탁한 매무새처럼 유려하고 고운 매력의 곡선, 그 이상이라고 썼다. 옛 보부상들이 짐을 머리에 이고 등에 지며 걸었던 삶의 고단함이 묻어있는 길이지만, 푸른 산속의 버선 품이 넉넉하기만 하고, 일렁거리는 상념을 사뿐히 접어 올리는 쾌감까지 전달해준다고 하였다. 그녀에게도 살아가는 목표가 시퍼렇던 시절이 있었다. 그녀의 고뇌에 찬 문장이 주는 감동은 오래 간다. 이 수필은 사상의 정서화나 이념의 감각화, 내용의 형상화가 아주 잘 된 작품이다. 수필적으로 문학적으로 예술적으로 작가정신 면에서 완성도가 높다. 이른 바 수필은 네 가지 성질을 다 가져야 한다는 ‘필유사성’의 조건을 충족하고 있다.
이제 외씨버선길은 더 이상 폭신하지도 유연하지도 않은 고행길로 치닫는다. 남한강을 첩첩이 휘감고 있는 산길은, 오르락내리락을 반복하다 쉼 없이 휘어진 구간이 한참동안 계속된다. 조망도 없는 급경사 길을 따라 ‘각동리 돌널무덤’을 올라갈 때쯤, 여기저기서 사람들의 헉헉거리는 소리가 숲속을 뒤흔들고 있었다. 마치 자진모리와 당악장단에 맞추어 관객을 몰아지경으로 이끌어가는 북의 연타처럼, 거칠고 빠른 숨소리가 박자를 맞춘다. 외씨버선이 법고 앞에서 버선코를 뾰족이 치켜 올린 채, 북채를 쉼 없이 두들기며 마지막 고지임을 알려주는 신호일 게다. 장삼을 뿌리고 제치며 뒤엎는 사위는, 인간이 갈구하는 끝없는 욕망을 나타내는 몸짓이 아니던가. 하얀 버선코 끝으로 표출되는 몸놀림의 가냘픈 모습. 치마 끝에서 살짝 가려진 버선코의 나비 같은 합장은, 숨길 수 없는 인간의 고뇌를 담은 춤사위다.
- <외씨버선길> 중에서
숲속을 뒤흔들고 있는 ‘여기저기서 사람들의 헉헉거리는 소리’ 거칠고 빠른 숨소리를 마치 ‘자진모리와 당악장단에 맞추어 관객을 몰아지경으로 이끌어가는 북의 연타’에 비유한다든지, ‘외씨버선’을 ‘법고 앞에서 버선코를 뾰족이 치켜 올린 채, 북채를 쉼 없이 두들기며 마지막 고지임을 알려주는 신호’로 해석해내고, 그 의미를 장삼을 뿌리고 제치며 뒤엎는 춤사위에 빗대어, 인간이 갈구하는 끝없는 욕망을 나타내는 몸짓으로 풀어내는 상상력과 해석력은 이미 훌륭한 수필가의 조건을 갖고 있음을 확실하게 보여준다. ‘갈구하는 끝없는 욕망’과 ‘숨길 수 없는 고뇌’를 춤사위에서 뽑아내는 그녀의 탁월한 인식능력은 이 수필뿐만 아니라 전체 수필을 관통하고 있어, 감동을 견인하는 역할을 잘 하고 있다.
묘사에 힘입은 정서의 객관화는 이 수필의 문학성을 한층 높여준다. 문학이 독자의 감동을 목적으로 한다는 본질을 생각할 때 사상의 정서화는 필수적이며 또 연상에 의한 복잡한 내면의 심상을 표현하기 위한 감각적 접근과 다양한 비유의 구사는 필수적이다. 발레리는 문학 속에서, 사상이란 과일 속에 묻혀있는 영양소와 같이 숨겨져 있어야 한다고 했다. 엘리어트는 문학은 사상을 장미꽃 향기와 같이 감각화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수필이 어떻게 사실의 세계에 충실하면서도 이를 초월한 상상의 예술세계를 이러한 기법으로 구축해 나갈 수 있는지를 보여줄 수 있는 뛰어난 작품 중의 하나가 <외씨버선길>이다. 운탄고도에 대한 묘사가 읽는 이의 무릎을 치게 만드는 송정자의 다음 수필을 읽어보자. 이 수필 역시 수작이다. 완벽한 이중 층위와 변용의 시학이 빛난다.
수시로 꽃들의 움직임을 살펴보았다. 여전히 여치들은 이 꽃 저 꽃을 옮겨 다니며 꽃잎의 살점을 파먹고 있다. 그러나 한 발자국 떨어진 곳에서 보면 수난을 당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청초하기 이를 데 없는 한 폭의 그림이다. 꼿꼿하게 수형을 가다듬고 의연하게 서 있는 자세가 젊었을 때의 엄마 모습을 보는 것 같다. 온갖 풍상을 겪은 족두리꽃 그 안에 엄마가 서 있었다.
아버지는 생때같은 큰 아들을 잃고 그때부터 수족이 잘린 듯한 고통을 엄마에게 모두 푸셨다. 밤이면 짐승이 되어 울부짖었다. 막걸리에 절어 끅끅대던 쉰 소리는 담벼락을 타고 넘어갔다. 전봇대를 휘돌던 밤바람에 오도카니 갇혀 메아리처럼 골목을 맴돌았다. 창살에 부딪혀 웅웅거리던 바람소리와 아버지의 신음소리가 합쳐지면 무겁게 가라앉은 장송곡처럼 들렸다. 엄마와 나는 한겨울에도 동이 틀 때까지 밖에서 오돌오돌 떨었다. 여름에는 모기에 뜯기며 아버지가 잠들기를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폭풍이 지나간 아침이면 엄마도 나도 한마디의 말도 없이 바쁘게 움직였다.
<족두리꽃> 중에서
송정자 수필의 중요한 내적 특성 중에 또 하나로 환상적 통합의 화해성을 들 수 있다. 그녀의 수필 상당수 작품들이 카타르시스를 통한 심리 치료, 치유의 문학이라는 특성에 기초하여 결말 구도가 화해로 설정되는 특성을 갖는다.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유년시절의 피할 수 없는 한두 가지의 피해의식을 가지고 빙하기를 겪으며 살아왔던 것이다. 피해의식의 부정적인 경험은 잘못된 세계관을 형성하고, 파괴적이고 비관적인 고정관념으로 발전하게 되는 수도 있다. 물론 이런 경험이 치유되지 못하고 계속 그림자로 남아 있을 때다. 그러나 송정자는 이런 빙하기 바람소리를 잘 파악하고 안식의 문학, 영혼의 문학인 수필의 목적을 제대로 살려서 자신을 치유하는 데 잘 활용하고 있다. <족두리꽃>은 은 이런 화해 구도를 가진 대표적인 수필이다. 송정자 수필의 가장 강한 특징은 손맛의 유려함이다. 존재의 집으로서 언어의 아름다움을 최대한 활용함으로써 그녀는 문학성과 치유성을 동시에 구축한다. 이 수필의 우수성 역시 치환의 미학에서 나오는데, 그녀는 참신한 발상과 비유를 무엇보다도 중요시한다. 한낱 꽃의 움직임도 벌레들의 동태도 예사로 보지 않는다. 족두리꽃은 구조면에서 처음, 중간, 그리고 끝이 잘 갖춰져 있어 표준구조의 명료성을 준다.
특히 주제의식의 상상화를 돕는 여치들의 동태를 묘사한 부분은 매우 역동성이면서 시청각적 이미지의 보고다. 상관화 기능을 중시하는 작가의 인식은 수필 감상의 흥미를 더해준다. 무엇보다도 송정자 수필을 읽는 매력은 날카로운 관찰을 통한 깊은 명상의 세계를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다. 여치를 ‘아버지상’으로, 족두리꽃을 ‘어머니상’으로 변용해서 현실의 삶에 투사시켜 해석해낼 수 있도록 하는 전략 덕분으로 우리는 그녀의 작품으로부터 예술적인 향기를 음미할 수 있다. 여치나 족두리꽃은 비유나 강조 등의 수사법에 의해 그 이미지가 문학적으로 전달된다. 이 수사적 장치 형성은 독자로 하여금 연상과 상상의 세계로 빠지게 한다. 이 수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치유시학으로 풀어내면서 화해해결구도를 통해 독자로하여금 아버지의 행동에 대한 이해를 구하고 있는 부분이다. 즉 우리는 물화된 보조관념을 통해 작자가 숨긴 이면적 상징물에 도달함으로써 작품을 미학적으로 이해하게 된다. 문학은 빠르고 정확한 의미 전달만이 아니라 그 전달의 효율성을 따진다. 얼마만큼 감동적이냐가 성패를 가르며 그렇기 때문에 문학적 장치도 필요하다. 독자가 작품을 음미하고 문장을 소화하며 작품을 함께 완성해 나갈 수 있도록 한 전략이 아주 훌륭했다.
자조하는 그의 얼굴에서 나는 왜 시퍼런 칼날을 세우고, 녹지도 못해 둥둥 떠다니는 남극의 유빙이 떠올랐을까. 빙결된 해빙이 매서운 바람이나 물결에 밀려 연안과 섬에 정착하지 못하고, 물 위를 표류하는 얼음덩어리. 저위도에서는 겨울철에, 극지방에서는 일 년 내내 유빙은 녹을 줄 모른다. 바다를 떠다니는 바람과 해류의 작용으로 자주 균열이 생기면서, 육지에 닿지도 못하고 떠 다녀야 하는 운명이다. 이른 봄에도 녹지 못하는 소녀의 아버지는 언제까지 막새바람에 표류하는 유빙이어야 할까. 그의 허리에서 차가운 얼음이 피처럼 뚝뚝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소설 <유빙이 녹기까지>의 작가는“우리를 둘러싼 끝도 시작도 없는 원형의 트랙처럼 슬픔도 그렇다.”고 했다. 종기처럼 상처가 곪은 사람들과 서로의 온기라도 당긴다면, 빙하의 한쪽이나마 녹여낼 수 있지 않을까.
<유빙> 중에서
수필의 이야기 속으로 마음의 여행을 다녀오고 나면 오늘의 삶을 다시 바라볼 용기를 샘솟게 한다는 차원에서 이 수필은 짜임새 있는 구성 전략에 더하여 삶의 교훈적 가치를 더해 준다. ‘이른 봄에도 녹지 못하는 소녀의 아버지는 언제까지 막새바람에 표류하는 유빙이어야 할까. 그의 허리에서 차가운 얼음이 피처럼 뚝뚝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는 문장을 읽으며, 작중 인물, 수필의 이야기 속 그 소녀를 잃어버린 아버지는 온갖 산전수전으로 점철된 험난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 만약 이 사람의 인생사를 ‘사실대로’ 듣기만 했다면 기나긴 신세한탄에 불과했을 것이며, 독자들은 한 인간의 삶을 실패로 가득한 고통스런 이야기로 기억하지 않을까. 그렇다. 이야기는 바로 ‘기억’의 문제이기도 하다. 이야기는 바로 우리의 삶이 타인에게 ‘어떻게 기억될 것인가’라는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다. ‘종기처럼 상처가 곪은 사람’으로서 생활하면서도 그는 틈이 나는 대로, 딸을 찾으러 전국을 떠돌며 유빙처럼 살았던 것이다. 이런 그의 삶을 수필가 송정자로 인해 조금씩 이해하기 시작한 우리는 방랑자의 삶을 살면서도 순수의 영혼을 잃지 않은 그를 오히려 존경하게 된다. 그의 진정한 유산은 비록 삶을 견디지는 못했지만 돈으로도 살 수 없는 영혼의 유산이었다.
이 사람에 얽힌 슬픈 이야기가 수필로 승화되지 못했다면, 이 분의 삶은 얼마나 팍팍했을까. 단지 ‘객관적 사실’만을 찾아 헤매는 우리들은 비로소 인용된 예문에서 보듯 이 작가의 서사전략에 힘입어 그가 홀로 견뎌야 했던 숱한 고독과 방황의 날들을 이해하게 된다. 그 아름다운 이야기의 퍼레이드가 없었다면 그의 삶이 얼마나 시시했을까. 송정자 덕에 그의 삶은 생명을 얻게 됐고 그렇게 수필 속에서 영원히 살게 된다. 작가는 삶을 아름답게 가꾸는 이야기꾼이다. 송정자의 <유빙>이란 수필 속에는 가슴을 뭉클하게 하는 이야기가 있다. 송정자는 이야기꾼으로서 발단부의 서두 기능을 효과적으로 살려냄으로써 가슴을 움직이게 하는 문학의 힘이 무엇인가를 잘 보여주었다. 이야기의 주인공 실종소녀의 아버지는 경찰의 수사만 기다릴 수가 없어 생업을 포기하고 아내를 차에 태운 채, 딸을 보았다는 제보가 있을 때마다 전국 어느 곳이든 달려갔다. 점점 가세는 기울어 기초생활수급자가 되어 약간의 보조금과 후원금으로 전단지와 드림막을 제작하고, 돈이 부족하면 급한 대로 막일을 하면서 생계를 이어가고 있다고 한다.
이 수필은 실종 딸을 찾는 아버지의 절박한 심사를 너무도 절절하게 표현해 내고 있다. 소재로서의 이야기를 미적으로 배열하는 과정을 통하여 서사적 의미와 가치를 극대화시켰다. 대상을 너그럽게 바라보는, 관조의 눈 속에 따스한 정이 배어있는 좋은 수필의 완성이다. 송정자가 혼신의 힘으로 그려낸 이런 주변부 타자를 대상으로 하는 성격의 수필들은 작가정신이 빛나는 수필이다. 그녀는 머리보다 가슴에 와닿는 수필을 쓰는 사람이다. 이 작품 속에는 인생에 대한 담담한 관조와 거리를 두고 물끄러미 바라보는 조망이 있다. 타자의식을 통해 겸허한 자신을 쓰다듬는 자기 성찰의 모습에서 독자는 작가의 인간적인 면모를 다시 확인할 수 있다.<한국수필>로 등단하여, 오랜 시간 본격수필이라는 화두를 달고 꾸준히 글을 써오면서 늦게라도 수필집을 엮어내지 않았다면 그녀는 수필계에 얼마나 많은 손실을 초래했을까. 시대의 추이를 통찰하고, 주변부 타자들과 더불어 열린 가슴으로 현실에 부딪치는 일이 이 땅에서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가야 하는 작가의 사명이 아니겠는가. 세상이 아프면 작가도 아파야 하는 것이다. 자신과의 진실한 대면을 통해 인간적인 향내를 풍기고자 하는 것은 송정자 수필이 지닌 가치 평가에 적지 않은 시사를 준다고 하겠다.
성북동 일대에 모여 살며 그림을 그리는 친분으로 똘똘 뭉친 여섯 화가의 전시였다. 서울대 회화과 1회 졸업생인 산정 서세옥 작가와 그의 제자이자 동료인 송영방 화백을 중심으로 결성된 모임이다. 성북동 지근거리에 앞뒷집으로 모여 살면서 아침저녁으로 거리낌 없이 드나들며, 울적한 심회를 나누기도 하고, 문외의 기담으로 파안대소도 하여본다고 회상하는 글이 신문에 기고된 적이 있다. 집집마다 아끼는 돌과, 소나무, 매화와, 난초를 가꾸는 독창성이 넘치는 젊은 화가를 일컬어 성북의 청괴들이라 칭했다. 중국 청나라 양주지역의 유명화가들이었던 ‘양주팔괴’에서 이름을 따 붙인, 그림을 그리는 맑고 푸른 영혼을 가진 개성 있는 화가들이라는 뜻으로 명칭을 붙였다고 한다.
<청괴> 중에서
송정자는 성북동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향토성이 짙은 그녀의 수필은 한마디로 그리움이 있고, 인정이 있고, 구원이 있는 토포필리아의 공간에서 출발한다. 어딘가에 부드러운 곡선의 안식처가 있을 것 같은 작가의 시선은 성북에 머문다. 과거는 누구에게나 그리움의 대상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성북동을 공간적 배경으로 하는 수필들은 주로 자신의 심중에서 여울치는 물결의 무늬를 그려낸다. 그녀의 문학적 그림자 형상을 한마디로 말하자면 ‘성북동의 향기’라 할 수 있다. 작가적 현실 세계가 삶의 기록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삶'이라는 보편성에 의미를 부여하는 방향으로 키를 틀고 있기 때문에 그의 작품은 향토성의 서정이라는 지점에서 문학적 향기를 발한다. 무엇보다도 이 수필의 가치는 삶의 창조적 내포를 담고 있는 인정의 정서가 작품 속에 넘실거린다는 점이다. 전환의 시대에 인간의 내면, 특히 그 예술가의 우정을 조명하는 시간을 갖는다는 것은 하나의 축복일지 모른다. 글쓰기의 출발점은 인식에 있다. 인식이란 인간을 바르게 파악하는 것이다.
인도의 기업인 라메슈와 다스는 “말은 줄에 걸린 빨래처럼 마음의 바람에 펄럭인다.”고 했다. 글쓰기를 멈추고 태만해 있던 작가에게 돌아가시기 일 년 전, 청괴의 일원인 우현 송화백의 방문은 우연이었을까. 먹에 담긴 농담만큼 아름답고 멋이 뚝뚝 떨어지는 분이었다고 회고하는 그녀는 입명의 경지에 이르기까지 미친 듯이 붓끝을 휘갈기던 선생의 삶을 뒤돌아보며, 편편이 흩어져있는 삶의 조각보를 들여다본다. 수필을 잘 쓰기 위해서는 마음의 구조를 알아야 한다. 작가 스콧 피츠제랄드는 “최고의 지적 능력은 동시에 반대되는 두 가지 생각을 할 수 있는지 여부로 판단된다.”고 하였다. 마법사 멀린은 “슬플 때 뭔가를 배워야 한다.”고 했다. 인생은 길지 않지만 예의를 생각할 수 있을 만큼은 길다고 하였다. 서울대 미대 출신 화가들이 성북동 지근거리에 앞뒷집으로 모여 살면서 아침저녁으로 거리낌 없이 드나들며, 울적한 심회를 나누기도 하고, 문외의 기담으로 파안대소도 하며 우정을 나누었다고 하는 소식을 접하고. 그녀는 집집마다 아끼는 돌과, 소나무, 매화와 난초를 가꾸는 독창성이 넘치는 젊은 화가, 성북의 청괴들 이야기에 수필의 옷을 입혔던 것이다.
와인병에서 마개와 와인 사이의 빈 공간은 결국 와인의 부족량이다. 그 부재의 공간으로 와인의 품질을 평가하듯이, 아들의 소극적인 성격 역시 한 인간의 사람 됨됨이를 말하는 잣대가 되지 않을까. 세월이 지나 오랜 숙성의 과정에서 매우 느리고 미세하게 기화하는 얼리지는, 엔젤스쉐어(Angel's share)라고 한다. 하늘에 있는 천사가 와서 자신의 몫을 가져갔다는 예쁜 의미의 해석이다. 사람마다 자신의 얼리지가 왜 없겠는가. 이제 배우자를 만나게 된 아들의 얼리지는 초과량을 넘지 않았으면 싶다. 설령 이슬방울만큼의 산화가 찾아온다 해도 그것은 천사의 몫이라고, 코르크가 사랑으로 채워준다면 품질 좋은 와인을 유지하지 않을까.
<얼리지> 중에서
화자는 수필에다 총체적인 자신을 싣지 않는다. 소위 말하는 그림자의 상태로 자신을 무의식 속에다 매몰시켜 버리기 쉽다. 본래 수필의 존재 의미가 소통이라고 한다면 자신을 숨기고 있는 수필은 소통 상실이다. 그런데도 수필 언어에서는 은유와 환유라는 방법으로 언어를 사용하므로 상실된 언어를 더더욱 은폐시키는 역할을 하는 것이 흔하다. 감정의 소통으로 내면화된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 치료라면 언어를 복원하는 것이 치료의 목적이다. 수필을 통해 정서를 고백하는 것을 상실된 언어를 되살리는 아주 좋은 방법이다. 문학적 언어의 표현이라고 하여 내면 깊숙이 매몰되어 있는 자신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것은 절대 아니다. 정신분석 용어로 말하자면 은유와 환유의 방법으로 변형하여 드러낼 뿐이다. 그림자의 인격화란 자신의 내면을 정확하게 바라보고 진실되게 인식하여 솔직하게 드러낼 때만이 가능하다. 그녀는 추진력이 부족하고 귀차니즘 성향이 짙은 아들이 활달한 성격의 배우자를 만난다면 잘 어울리지 않을까 은근히 기대하면서, 예비 며느리가 선물로 준 와인을 따라 마시며, ‘얼리지’라는 제재로 아들에 대한 자신의 기대를 담아놓는 데 성공한다. 그런 면에서 진솔한 표현을 강조하는 수필 쓰기가 좋다. 배우자를 만나게 된 아들의 얼리지가 초과량을 넘지 않았으면 싶다는 작가의 소망이 제재인 얼리지에 잘 투영되어져 있다.
엘리엇이 말하는 자아이론의 핵심은 성찰이다. 성찰하는 과정은 삶의 궤적에 관하여 심리적이고, 사회적인 정보를 주시하고 되돌아보는 과정이다. 수필쓰기에는 자아 성찰이라는 과정이 들어간다. 수필의 개념에는 내면의 고백 못지않게 자아성찰이 주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자신의 내면을 수필을 통하여 고백하는 동시에 자기 성찰을 하므로 인간은 흔히 자신의 현재적 삶이 충족된 상태로 여기기보다는 무언가 결핍된 상태로 여기며 사는 수가 많다. 그것이 물질적인 것이든 정신적인 것이든 자신에게는 무언가 결핍된 것들이 많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흔하다. 또 이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느끼며 살아가는 것을 보게 된다. 대체 문학은 모든 것이 충족된 만족 속에서 나오지 아니하고, 무언가를 상실하거나 부재된 느낌 속에서 더욱 밝게 빛나는 법이다. 결핍의 인식 상태에서 사물에 대한 감각이 예민해지기 마련이다. 이 수필의 압권은 아무래도 ‘와인은 선선한 온도와 적정한 그늘을 만나는 최적의 환경에서 코르크 마개를 통해 미세한 숨을 쉰다. 두 사람이 오랜 시간 동안 숙성하면서 달콤한 풍미를 품을 수 있는 인생의 변곡점을 맞이한다면, 그 향기의 여운은 더할 나위 없을 게다.’라고 한 의미화 대목일 것이다. 창작은 이런 결핍된 상황으로부터 탈출하려는 노력으로 볼 수 있다.
우정은 하나의 영혼이 두 개의 몸에 살고 있는 것과 같다고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했던가. 친구는 나의 속 좁은 외면에도 불구하고 여러 차례 손을 내밀었다. 나보다 한층 더 성숙된 정신세계를 가진 친구다. 지금은 나와 같이 정독도서관에서 수필명인이신 권대근 교수의 불꽃같은 강의를 열심히 듣는 중이다. 삶의 엔딩노트를 작성할 때, 품위 있는 글을 남겨볼까 하는 바람이라 하니 얼마나 멋진가.
나란히 강의실에 앉아있는 친구와 나의 어깨 너머로 큰 비가 내린 후, 안개가 흩어지면서 맑게 갠 제색의 인왕산이 섬처럼 말갛게 떠 있다.
<제색> 중에서
이 작품은 우정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제시해주는 수필이다. 친구의 도리를 다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생각해 보게 한다는 측면에서 매우 교훈적이다. 무엇보다도 눈길을 사로잡는 멘트는 ‘우정은 하나의 영혼이 두 개의 몸에 살고 있는 것과 같다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어록이다. 친구는 자신의 속 좁은 외면에도 불구하고 여러 차례 손을 내밀었다고 한다. 작가 자신보다 한층 더 성숙된 정신세계를 가진 친구라고 친구를 높이 평가하는 차원에서 보면, 칭찬이라는 선물을 친구에게 안겨주려 수필을 쓰고, 그 친구를 주인공으로 내세웠던 것이다. 서로를 존중하고 배려하는 등 친구간의 우정을 그려내어 보여줌으로써 작가는 친구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작가와 친구간의 우정이 얼마나 깊은지를 추론할 수 있도록 발단부와 전개부에겸재 정선과 사천 이병연의 우정을 소개하고 있다. 둘은 서촌에서 나고 자란 경화세족으로 사천은 조선 진경시의 거장이며, 겸재는 진경산수의 화성으로 쌍벽을 이루었다고 한다. 서로 떨어져 지내면서도 시와 그림을 바꿔보는 ‘시화환상간’을 엮어 두 사람의 콜라보 중에도 백미인, 한강변의 서정적인 아름다음을 담은 ‘경교명승첩’을 탄생시켰다. 이에 버금가는 우정으로 자신과 친구와의 화음을 겸재와 사천의 우정에 견주어 큰 감동을 안겨주는 수필로 만들어 내었다.
현대의 문화인은 정치적으로는 부와 쾌락을 원하나 예술적 실존으로는 내핍과 괴로움을 원하는 모순적 상태에 있다고 한 트릴링의 말과 쾌락을 거부하고 반쾌락에서 만족을 찾는 인간의 본능적 충동이 있다고 한 프로이트의 지적을 토대로 살펴 볼 때, '궁'의 상황이 보다 나은 예술 창작의 충분조건이 된다고 하겠다. 정신적 '궁'의 상황이 가져다 준 실의나 좌절감은 작가 내부에 그렇지 않았던 상태와의 괴리감을 인식시키고, 이로 인해 동일성의 상태에 조금 더 접근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준다. 상실감이 강하면 강할수록 갈망도 커지는 것이니, 동일성의 추구란 서로간에 형성된 파국적 관계를 청산하려는 노력인 것이다. 작가의 친구는 글을 쓰면 제일 먼저 읽어주는 독자로, 비평과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그런 그들에게 일 년간의 공백기가 비집고 들어왔다. 작가에게 힘든 시기가 찾아왔을 때, 서로 소식을 미루다가 서운한 일이 생기고 말았다. 작가는 갑작스레 소외됨을 느꼈고, 괴리감까지 보태져 이중의 고통이 찾아왔다. 작가가 평소와 같은 편안한 심리가 아닌, 잠을 못 잘 만큼 정신적으로 시달릴 때라 친구를 공감하지 못했던 것이다. 창작 과정 또한 이러한 내적 요구와 동떨어져 있지 않다. 힘이 들 때, 손을 내밀 때 그 손을 잡아준 친구에 바치는 헌사라 해도 무방할 듯싶다.
몸속을 거꾸로 빠져나간 피가 다시 수혈이 될 수 있을까. 그래서 누덕누덕한 그 속을 마름질이라도 하면 곱게 펴질 수 있을까. 구석구석 깨어져버린 파열음이 여기저기 한 가득이다. 자식을 앞세운 모성은, 직소 퍼즐처럼 끼워 맞출 수도 없다. 수만 가닥으로 너덜너덜해진 저 정신 줄이 돌아오려면, 생이 끝날 무렵이 되려나. 끊임없이 자신을 무두질해야 하는 유형(流形)의 땅에서 그 기나긴 형벌의 나날을 어찌할 것인가. 뭉치고 맺힌 응집이 올 풀리듯 빠져나올 수나 있을까. 골수가 뒤틀리고 창자가 끊어져 나가고, 눈앞의 곡기가 쓴 소태가 되어 입안을 되 물릴 것을. 어긋난 뼈마디가 아우성치는 그 줄타기의 순간은, 숨통을 막으며 제자리에서 맴돌 테지.
어느 날 퍼렇게 그을린 그리움이 부싯돌처럼 삶을 피워보려 할 때. 부딪히다가 무던히도 무뎌져갈 때, 텅 빈 f홀은 이별을 위무하는 음률을 잔잔히 차올릴까.
<이별의 f홀> 중에서
송정자의 <이별의 f홀>은 어떤 수필보다 그 느낌이 강렬하다. 아는 동생의 딸이 생을 버린 순간을 그녀는 ‘그 아이가 13층에서 몸을 날리는 순간, 나비가 사뿐히 받아주었을까. 하얀 날개를 입은 천사가 어서 오라며, 두 팔 벌여 품을 내어주었을까. 수만 가지 꽃이 만발한 정원에서 오색창연한 융단이라도 깔아 두었을까. 손에 잡히지 않는 깃털이 되어 세상에 티끌 한 올 남기지 않고 사라졌다.’고 썼다. 그리고 두 모녀의 이별을 ‘첼로와 바이올린의 두 몸통에서 화인처럼 찍혀있는 f홀이 눈동자처럼 나를 올려다본다.’로 형상화했다. ‘줄감개를 조절하면 현의 섬세하고도 갸느린 그 떨림조차도 고스란히 실어 나르는 f홀, 악기의 f홀은 안과 밖의 공기를 이어주는 통로다. 바이올린이 내는 이름다운 선율의 흐름을 이 곳에서 조율한다. 모녀가 나란히 두 개의 f홀에 마음을 헹구며, 주고받던 사랑의 하모니는 이제 공명을 잃었다.’라는 표현으로 억누를 수 없는 정서를 객관화하는 솜씨는 그녀의 문재를 확연히 보여준다. 작은 변화만으로도 음색의 밝기와 어둠, 부드러운 것까지 모두 뱉어내는 f홀이다. 단순히 알파벳과 유사한 미학적 상징인 줄만 알았던 f홀은, 수세기에 걸쳐 ‘장인들이 피를 갈아 혼을 불어넣은 악기의 심장이다. 그 f홀 구멍이 연주자를 잃고 끝없는 블랙홀로 빠져들고 있다.’는 말로 딸을 잃은 어미의 비애를 극적으로 그려내는 데 성공하고 있다.
이 수필의 최대 압권은 위의 인용된 대목이다. 심장 같았던 딸을 잃은 어미의 애끓는 심정을 이보다 절제된 정서로 절절하게 표현할 수 있을까. 병사가 아닌 자살이라는 소식을 듣는 순간, 먹구름이 몰려왔을 터, 자식과의 영원한 이별, 이렇게 무서운 별리가 어디 또 있겠는가. 소중한 사람을 더 이상 볼 수 없는 일이라면, 그건 누구에게나 고통이지만 가장 큰 고통은 그 젊은 딸의 어머가 짊어져야 할 삶의 무게가 아닐까. 송정자는 딸의 죽음 앞에 있는 지인을 보면서 글을 쓰는 생의 부박함에 치를 떨었을 것이 아닌가. 그녀는 사십구재로 사찰을 드나들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인간의 두려움은 타인의 죽음에서 발견된다. 제삼자의 죽음이 난무하는 현대사회에서 죽음은 이미지와 숫자로 지나쳐간다. 그 앞에서 인간은 세계의 단절과 세계보다 더 큰 한 인간과의 끝나지 않는 단절을 경험하게 된다. 삶 앞에 있는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애도의 방식은 삶의 영역에서 필수적인 명복의 언어로 생각되는 의례와 종교적 절차를 거치는 것뿐이다. 작가가 고인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란 한 신체의 온기가 다 가기 전에 손을 꼭 잡는 일이며, 온기가 다한 신체에 대한 예의를 갖추는 일이며, 그것을 잊어버리지 않은 일이다.
세상에서 가장 슬픈 일에 직면한 지인의 절박하고 애통한 심정과 상황을 이보다 더 절묘하게 나타낼 수 있을까. 국민교육헌장이나 3.1독립선언서보다 더 명문의 요건과 감동의 울림을 주는 문장이 또 있을까. 그녀는 “구석구석 깨어져버린 파열음이 여기저기 한 가득이다. 자식을 앞세운 모성은, 직소 퍼즐처럼 끼워 맞출 수도 없다. 수만 가닥으로 너덜너덜해진 저 정신 줄이 돌아오려면, 생이 끝날 무렵이 되려나. 끊임없이 자신을 무두질해야 하는 유형(流形)의 땅에서 그 기나긴 형벌의 나날을 어찌할 것인가. 뭉치고 맺힌 응집이 올 풀리듯 빠져나올 수나 있을까. 골수가 뒤틀리고 창자가 끊어져 나가고, 눈앞의 곡기가 쓴 소태가 되어 입 안을 되물릴 것을. 어긋난 뼈마디가 아우성치는 그 줄타기의 순간은, 숨통을 막으며 제자리에서 맴돌 테지.”라는 정화되고, 순화되고, 승화된 말로 딸을 잃은 슬픈 심정을 표현하고 있다. 어미는 딸의 죽음 앞에서 더 이상 참다운 인간으로서의 생존을 유지하기 불가능할 정도로 심각한 위기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는 것이 결말부 마지막 의미화 문단의 핵심이다. 이별의 f홀을 다둑이는 그녀의 손길, 그 가공할 만한 문학적 표현의 힘 때문에 독자들은 진심으로 사자의 명복을 빌고, 딸을 잃은 어미의 심정으로 이 수필을 읽고, 애도와 감동을 표하지 않겠는가.
유달은 정신장애의 약을 싫어했는데 그 약을 먹기 시작했다며, “당신은 나를 더 좋은 사람이 되고 싶게 만들어요.”라는 명대사를 탄생시킨다. 밤을 뒤척이다가 결국 그녀의 집 벨을 누른다. 캐롤은 새벽 네 시에 용건이 뭐냐고 묻는다. 유달은 머뭇거리며 “빵집이 곧 문을 열어요. 따듯한 빵 좋아하잖아요.”라며 하얀 치아를 드러낸다. 어스름한 새벽에 두 사람은 보도블록의 선을 마구 밟고서 불빛이 환한 빵집으로 들어가 따듯한 빵을 고르는 장면이 이 영화의 엔딩씬이다. 새벽녘의 빵이 저물어가고 있는 삶의 횡단길에 청사초롱의 불을 밝혀 준 셈이다.
‘달콤 제빵소’의 문을 열었다. 빵의 천국이 따로 없다. 홍수처럼 넘쳐나는 아침의 빵이 진열장에서 각색의 치장을 하고 손님 맞을 준비를 하고 있다. 세 살배기 아기가 먹을 크로아상 한쪽을 담아본다. 어릴 적 할머니의 제상에 한 가지 맛의 빵만 올렸던 내가, 지금은 할미가 되어 손녀에게 먹일 눈꽃 같은 빵을 고르는 중이다. 샛별 같은 아가의 입안에서 쌀알처럼 뽀얀 젖니가 오물오물거릴 때, 한쪽 손에는 금세 넣어줄 빵조각을 쥔 채 무릎을 구부리고 있다. 할머니도 하루에 수십 번이나 진달래 꽃잎이라도 따서 내 입속에 넣어주고 싶었을 것을.
- <갓 구운 새벽> 중에서
공간은 비어있지만, 공간을 채우고 있는 사물은 인간을 대변하고, 집단을 인식하게 한다. 공간을 채우는 방식과 배치를 통해 사람간의 관계를 파악할 수 있다. 그렇기에 공간에 투영되어 있는 사물은 곧 인간 그 자체가 된다. 인간이 매일 같이 반복적으로 에너지를 소비하는 공간은 인간을 ‘있는 그대로’ 드러낸다. 수필에서의 공간은 필자가 관찰하고 회상하고 상상하는 대상과 그 대상이 있는 곳이기도 하다. 수필 작품에서의 시간과 공간은 분리되지 않고 결합되어 있다. 송정자의 수필 <갓 구운 새벽>에서 ‘빵’이 있는 ‘제빵소’와 ‘사랑’이 있는 ‘새벽’은 시공성을 가진 하나의 크로노토프다. ‘새벽’은 곧 ‘빵’이라는 걸 누구나 알 수 있게 하는 제목이다. 20세기 러시아의 문학이론가이자 사상가 미하일 바흐친은 어떤 사건을 통시적이며 동시에 동시적인 시간관으로 다루는 방식을 ‘크로노토프Chronotope’라고 불렀다.
송정자의 수필 <갓 구운 새벽>에서 상징적으로 표현된 시간과 공간은 본질적으로 서로 연관되어 있는 특성을 지닌다. 시간과 공간이 만나는 교차점에서 사건과 행동이 발생하고 그 의미가 결정되기 때문에 이 작품에서 ‘과거와 현재’, ‘소녀적과 할머니적’, ‘잿상과 식탁’, ‘시골집과 도시집’, ‘받은 빵과 산 빵’, ‘맛없는 빵과 맛있는 빵’ 등 교차되고 있는 시공간은 송정자 수필을 읽어내는 데 있어서 중요한 키워드가 된다. 여기서 ‘빵’은 사건이 발생한 당대의 시간적, 공간적 의미를 유기적으로 고려하면서 그 의미를 해석하고 인식하게 하는 매개체다. 어떤 사건이 발생했을 때 그것의 시간적 의미는 당대의 역사성에, 공간적 의미는 당대의 사회성에 연결시켜 유기적으로 해석함으로써 총체적 해석이 가능하다. 이야기나 사건을 배열하여 플롯의 질서를 만들어낼 때 언제, 어디서 발생한 사건인가를 크로노토프를 활용해서 명료하게 보여주고 있는 이 수필은 구성적 복잡성으로 인해 문학적 성취가 빛난다고 하겠다.
시간 안에 일어나는 사건은 자신이 거주하는 장소와 문화의 특성 안에서 토착적으로 해석된다. 크로노토프는 예술적으로 상상되고 설계된 시공간이다. 특히 중간에 삽입된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다’라는 영화이야기는 <갓 구운 새벽> 에서 주제의식의 객관화를 돕는 중요한 장치다. 그녀가 꿈꾸는 미래를 암시하기 때문이다. 예술에서 시간과 공간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고, 이로 인해 발생한 시공간의 이미지와 느낌 즉, 크로노토프는 이 수필의 본질, 즉 반성적 성찰과 치유 그리고 성장을 향한다. 송정자의 수필 <갓 구운 새벽>의 강점은 완벽한 크로노토프를 갖는다는 것이다. ‘갓 구운 새벽’이란 제목 속에서 ‘달콤제빵소’란 공간성과 ‘영화의 새벽’이란 시간성을 동시에 획득하기 때문이다. ‘빵’과 ‘새벽’은 화해해결구도로 전개되는 이야기의 마디를 맺고 푸는 결정점을 가리키기도 한다. ‘소녀시절의 빵’과 ‘할머니시절의 빵’이 서로 시공을 달리함으로써 크로노토프는 작가가 표현하고자 하는 생각과 감정을 독자들이 간접 경험하고 지각할 수 있게 한다.
이 수필의 압권은 <갓 구운 새벽>에서 작가가 구현해낸 ‘빵집’이라는 공간 안에서 ‘새벽’이란 시간성의 개념이 가시화되고 구체화되어 ‘밝음으로의 진출’이라는 주제의식의 의미를 완벽하게 구현해내고 있다는 점이다. 이 수필은 토도로프의 중층구조를 지향함과 동시에 과거-현재라는 대립항적인 구도를 갖는다. 둘은 항상 융합된 상태에 있다. 공간과 시간을 따로 분리하는 것보다 결합해서 해석하고 분석하는 것이 더 이롭다. 그것은 시․공간의 결합 설정, 즉 크로노토프의 완성을 의미한다. 바람직한 시공성의 관계 정립은 온전한 서사 구도를 잡는 일이다. 체험을 통해 성찰하고 희망과 비전을 제시하는 일은 수필의 지향점이기도 하다. 사랑은 분명 성장의 기원이 되지만 이 수필에서 그 성장은 기쁨이 아닌 슬픔에서 유래했다. 성장은 슬픔이 사라지거나 슬픔을 극복한 후 일어나는 ‘미래의 일’이 된다. 성장이란 결핍 없이 온전한 존재를 지향하는 과정이라기보다는 계속 몰아치는 죄책감 가운데서도 끊임없는 희망으로 굳셀 수 있는 능력에 가까워진다. 어쩌면 그것만이 조금 앞서 살아온 작가가 후대 독자에게 미리 일러줄 수 있는 가장 정직한 희망일 것이다.
유예된 미래나 미화된 과거에 갇히지 않은, 성장서사가 ‘죄책감의 고백’과 ‘불경한 소녀-되기’에서 피어났다고 하겠다. 이런 대립항적 시공성의 구도는 완벽한 크로노토프를 이룬다. 이 수필은 성찰을 통한 철학적 의미를 제시하고 있어 더욱 바람직한 구도를 갖는다. 체험을 펼치고도 성찰의 결과물이 없다면 시공성의 확립, 즉 바흐친이 말한 크로노토프에 대한 고려가 부족한 탓이다. 인간은 시간과 공간 속에서 태어나 살다가 죽는다. 그동안 인간의 행동이 자유의지에 비릇한다고 할지라도 시간과 공간의 영향을 받기 마련이다. 삶이란 끊임없이 이동하는 유기체이므로 누구나 지나가버린 시간과 떠나온 장소에 향수를 품는다. 문학이 다루는 상실감과 그리움이 여기에서 비릇된다. 작가가 수필 속에서 할머니를 기억하는 감정조차 기본적으로 시간과 장소에 대한 아쉬움이라고 말할 수 있다.
내가 어렸을 때 밀양의 우리 집은 사과밭을 하고 있었다. 과수원 마당에서 멍석에 쏟아놓은 사과를 선별하는 작업을 하고 있을 때였다. 큰오빠가 일군들과 나눠먹을 새참으로 삶은 고구마 몇 알을, 할머니께 갖다 드리라고 했다. 낡은 툇마루에 딸려있는 할머니의 방 앞에 오후의 햇살이 흩어졌다 다시 모여들고 있었다. 신발도 벗지 않은 채 댓돌에 서서 창호지가 펄럭거리는 문짝 고리를 힘껏 잡아당겼다. 팔을 있는 대로 뻗어 고구마 접시를 디밀어놓고 재빨리 뒤돌아섰다. 오랫동안 중풍으로 앓아누워 계실 때라 쟁쟁한 햇발에 가린 할머니의 방은 너무 컴컴해서였다.
<갓 구운 새벽> 중에서 -
두 개의 크로노토프 ‘억지로 던져놓기와 적극적으로 사주기’ 크로노토프는 작품 속에 ‘예술적으로 표현된 시간과 공간 사이의 내적 연관’을 말한다. 이런 관점에서 송정자의 ‘갓 구운 새벽’의 의미를 크로노토프의 형식과 관련지을 수 있다. 수필 <갓 구운 새벽>에서 그려지고 있는 열 살 소녀 송정자는 오빠의 심부름을 당연히 잘 해내어야 했던 철부지 소녀였다. 그녀가 오빠의 심부름으로 음식을 드렸던 중풍에 걸려 어두운 방 한 구석에 누워있었던 할머니는 시대의 희생양이었다. 시골 사람들은 고구마로 배를 채우고, 모두들 가난했기에 정부에서 초등학교에 무료 급식빵을 제공하던 어려운 시절이었다. 이 속에서 ‘일상의 크로노토프’의 표정은 ‘억지로 전달하기와 소극적으로 저항하기’의 형식을 구성한다. 이는 가난의 시대를 온몸으로 살아야 했던 그러면서 내키지 않은 오빠의 지시에 그냥 따라야 했던 굴종을 최소화하면서 저항의 몸짓을 표출하는 의지로서의 의미를 지닌다.
알록달록 고운 꽃상여가 나가고 신주를 모셔놓은 다음날부터 학교에서 배급되던 급식 빵을 매일 할머니께 올렸다. 볼록하게 솟은 산봉우리처럼 봉긋한 빵은 말랑말랑했다. 반드르르한 갈색 껍데기는 또 얼마나 바삭거리며 고소했던지. 노르스름한 속살을 하나 씩 뜯어내면 부드러운 결은 하나의 경이가 되어 사르르 입안에서 녹는 맛이었다. 학교에 다녀 온 날에는 어김없이 하루 전의 빵을 치우고, 교실에서 줄을 서서 받아온 새 빵으로 바꾸어놓았다. 매캐한 향내 속에서 나무위패는 여전히 나를 짓누르는 듯했다. 상을 치울 때까지 꼬박 일 년 동안 나의 빵을 할머니에게 다 드렸다.
- <갓 구운 새벽> 중에서
막내로서 할머니가 살아 있을 때는 고구마를, 돌아가셨을 때는 급식빵을 할머니에게 드려야 했던 것은 서열상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을 것이다. 작가 역시 이런 구조적 환경을 인정하기 때문에 할머니의 얼굴도 한 번 마주치지 않았고, 손도 한 번 잡아주지 않았다. 소극적 차원에 머물 수밖에 없다는 점을 지적하는 것이다. 새벽에 할머니가 돌아갔을 때, 주변에 떨어져 있던 고구마 조각을 발견하고 혹시 자신이 준 고구마를 먹고 돌아가셨을 수도 있다는 것에 대한 죄책감으로 그녀는 어두운 유년 시절을 적어도 1년 이상을 보내야 했다. 하지만 이러한 하기 싫은 일에 대하여 적극적으로 저항할 수 있는 힘도 없고 해서 의무감이나 애정이 없이 억지로 소극적인 저항을 감행할 뿐이다. 이러한 죄책감은 불경한 자신의 눈에 비친 공간의 의미를 복잡하게 자리매김한다. ‘싫어요’라는 저항을 하지 못한 채 오빠의 지시에 무조건 따르도록 강요받는다. 하기 싫은 심부름을 억지로 하다보니, 할머니와 보이지 않는 대립각을 낳는다. 절대적인 남성의 힘 앞에 적극적인 저항을 하지는 못하지만 내재된 불만과 불신은 나날이 커진다. 이런 억압에서 벗어나기 위해 작가는 1년간만이란 시간을 설정하게 된다.
송정자 수필에서 공간의 의미는 죄책감의 상처를 메꾸면서 회복해야 할 그 무엇과 관련이 깊다. ‘달콤 제빵소’가 그러하다. 작가의 영화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에 대한 이상적 동경은 회복해야 할 미래적 공간에 대한 기대 때문이다. 그 공간은 사랑이 싹트고 시작되는 공간이다. 이 중에서 특히 인간적인 소통 기구는 ‘빵’이라는 음식이다. 빵집은 그녀가 수시로 오가면서 손녀와 내면적으로 소통할 수 있는 가능성의 공간이다. 사랑을 생산하는 일 자체의 중요성과 관련시킨다면 다행스러운 일이다. 중요한 것은 ‘일상의 크로노토프’가 죄의식과 저항의 형식에서 ‘치유’와 ‘기대’의 형식으로 전환된다는 점이다. ‘달콤 제빵소의 문을 열었다. 빵의 천국이 따로 없다.’는 표현은 반전을 의미한다. ‘어릴 적 할머니의 젯상에 한 가지 맛의 빵만 올렸던 내가, 지금은 할미가 되어 손녀에게 먹일 눈꽃 같은 빵을 고르는 중이다.’는 대목도 상황이 역전되었음을 내포한다. 무릎을 구부리고 빵을 고르면서 손녀를 상상하고 있는 장면이나, 지난 어두운 날의 할머니의 마음을 긍정적으로 헤아리는 것은 전부 치유와 성장을 확인해주는 대목이다.
‘달콤 제빵소’의 문을 열었다. 빵의 천국이 따로 없다. 홍수처럼 넘쳐나는 아침의 빵이 진열장에서 각색의 치장을 하고 손님 맞을 준비를 하고 있다. 세 살배기 아기가 먹을 크로아상 한쪽을 담아본다. 어릴 적 할머니의 젯상에 한 가지 맛의 빵만 올렸던 내가, 지금은 할미가 되어 손녀에게 먹일 눈꽃 같은 빵을 고르는 중이다. 샛별 같은 아가의 입안에서 쌀알처럼 뽀얀 젖니가 오물오물 거릴 때, 한쪽 손에는 금세 넣어줄 빵조각을 쥔 채 무릎을 구부리고 있다. 할머니도 하루에 수 십 번이나 진달래 꽃잎이라도 따서 내 입속에 넣어주고 싶었을 것을. 열 살 남짓한 어린소녀의 회개 속에 갇혀있던 그 때의 빵은 잿빛 어둠이었다. 할머니가 돌아가셨던 그 새벽의 자욱했던 산안개를 걷어내고 이제는 윤색으로 구워 낸 말간 새벽을 맞이할 수 있을까. 낡은 잠을 떨쳐내고 반들반들 윤기를 머금은 새벽녘 갓밝이처럼, 이제 그 빵에다 삶의 광채를 입혀도 될까.
- <갓 구운 새벽> 중에서 -
<갓 구운 새벽>에서 작가는 어떻게 반전의 구도의 크로노토프를 성취했을까? 작가는 과거의 공간에서 죄책감에 머물지 않고 할머니가 되어 손녀에게 갓 구운 빵을 사먹이고자 한다. 상실과 울음의 크로노토프에서 성장과 치유의 크로노토프로 시공간을 발전적으로 이동시켜 닫힘에서 열림으로, 어둠에서 밝음으로, 수동에서 능동으로, 받은 빵에서 산 빵으로, 식은 빵에서 따뜻한 빵으로, 맛없는 빵에서 맛있는 빵으로 시공에 놓인 대상을 극적으로 전이시켜 희망과 기대의 메시지로 건저냄으로써 작가는 독자들의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만약에 과거 소녀 시절의 어두운 기억에 공간성을 묻었다면, 미완의 크로노토프가 되었을 것이다. 이 수필은 좌책감과 슬픔의 이중주를 넘어 치유와 극복의 과정까지 보여주고 있어 화해해결구도라는 수필미학을 구축해내었다. ‘회복의 크로노토프’에서 구성되는 ‘빵’은 ‘희망과 기대’로 표출된다. 그리하여 과거 일상의 죄의식과 일상 자체가 침투당했던 시대상황과의 관련을 보여주는 것에서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이 수필에서 ‘저항과 해방’은 주체 구성의 방식이기도 하다. 이 속에서 우리는 주체적 사유를 획득한 유쾌한 할머니를 만날 수 있었다.
Ⅲ. 로그아웃
송정자의 수필은 그 글감에 작가의 창작의도와 문학성을 가미시켜 재구성한 문학적 이야기이라 할 수 있다. 일상적 사건이 문학적 사건으로 전부 승화되고 있어서 감동을 준다. 이러한 송정자 수필의 텍스트는 플롯에 의해 조직되는 표면구조 surface structure와 그 표면구조 아래 스토리에 의해 추상되는 심층구조 deep structure가 유기적으로 구축한 미적 통일체라 하겠다. 작가는 이러한 시퀀스의 조직법을 활용하여 그 사이사이에 문학성을 생성하고 증폭시킬 수 있는 변용의 기법을 삽입한다. 이런 전이와 치환의 시학이 삽입되면서, 이야기의 배열질서는 미적으로 변형되고 보다 예술성이 풍부한 감동적인 이야기로 창조된다. 송정자 수필은 하나같이 소재로서의 이야기를 미적으로 배열하는 과정을 통하여 서사적 의미와 가치를 극대화시키고 있어 문학적 성취가 높다.
따라서 수필가 송정자의 경험은 의미 있는 사건으로 구성되며, 송정자의 서사 행위는 그것에 대한 이해와 해석으로부터 발생한다. 이런 점에서 서사 행위는 그것에 인간 경험을 줄거리로 조직하면서 의미의 세계를 구성하는 활동이기도 하다. 송정자의 성장서사는 인간의 사고 구조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어 그것을 어떻게 구성하느냐에 따라 작품의 질에 지대한 영향을 준다. 호모 폴리티쿠스, 호모 이코노미쿠스, 호모 파베르 등 인간의 본성을 규정하려는 수많은 명칭들이 있지만, 작가는 호모 로퀜스, 언어적 인간이다. 인간들에 대한 따뜻한 연민의 정서가 녹아 있는 작가, 하늘색 꽃달개비의 예쁜 모습과 함께 푸른 화초의 젊음을 보여주는 작가, 생을 조용히 사유할 수 있는 자세가 된 작가, 송정자는 자신이 만들어낸 언어로 끊임없이 ‘이야기’를 하며 오늘도 진실의 문학, 수필이 만들어내는 끊임없는 이야기의 네트워크 속에서 저마다의 이야기를 소비하며 살아가고 있다.
송정자 수필에 나타난 예술성과 치유성의 의의를 치유시학과 바흐친의 눈을 통하여 살펴보았다. 이를 통하여 과거 죄책감에 주눅 들지 않고 새벽 햇살처럼 밝게 살아나가고자 하는 주체적 화자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는 개별자로서 허점을 지니고 있지만 솔직한 내면을 간직하고 주체적으로 발언하고 이상적인 삶을 꿈꾸고 있는 자신을 보여주는 데 성공했다는 점에서 성장서사의 치유수필로서 의의가 있다. 화자는 ‘일상의 크로노토프를 통하여 ‘보이지 않게 이루어지는 억압에 대한 소극적 저항’으로 참삶의 의지를 표출하였다. 이는 고백문학이라는 수필의 특성을 피할 수 없었기 때문이고, 소극적이지만 저항을 포기하지 않으면서 가부장제 시대를 관통하며 주체적으로 살아남기 위해 그녀가 선택한 삶의 논리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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