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의 회상
광야를 걷던 예수는 옛날 에덴동산에서 아담 해와가 쫓겨난 후 에덴동산을 잃어버림으로 말미암아 그들의 후손 역시 그 동산을 찾아 헤매야 할 것을 그 마음에 회상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추방당한 아담 이후 슬픔의 동산에서 살아온 역사적인 선조들을 회상하게 될 때에 예수님은 산이라는 명사와 함께 산에 대해서 그 마음에 심각히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담 해와가 에덴동산에서 쫓김을 받았던 것을 쫓김받지 않았던 입장으로 원상복귀하기 위하여 1,600년 이후에 나타난 노아가 120년이라는 기나긴 세월 동안 아라랏산 기슭에서 모든 역경을 참으면서 방주를 만들었던 그의 절개심을 회상하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노아가 그와 같은 생애를 보낸 것은, 오늘의 나 한 자체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노아가 이와 같이 산정에 올라 있는 자신의 모습을 그리워하며 수고했을 것이라고 예수는 생각했을 것입니다.
(1959.01.25, 전 본부교회)
예수는 아브라함이 제물 실수를 한 이후 이삭 번제의 명령을 받고 산상을 향하던 것을 회상치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때에 사라의 만득자(晩得子)인 이삭을 속여서 모리아산상으로 데리고 가던 아브라함의 비장한 심정을 회상치 않을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삭은 누구를 위하여 제물로 바쳐지지 않으면 안 되었던고? 아브라함은 누구를 위하여 독자인 이삭을 제물로 드리지 않으면 안 되었던가? 물론 아버지를 위함이요, 동시에 오실 메시아를 위함이었다는 것, 이러한 역사적인 사실을 회상하였을 것입니다.
(1959.01.25, 전 본부교회)
예수는 그 다음에 모세를 회상했을 것입니다. 그는 바로 궁중 40년과 미디안 광야 40년의 수고의 노정을 거쳤습니다. 이렇게 서글픈 심정을 품고 나오던 모세 앞에 호렙산 기슭의 불붙은 가시덤불 가운데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새로운 약속을 하시던 그 장면을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또 모세가 자기를 찾아오신 하나님을 호렙산에서 만나 불변의 인연을 맺는 장면, 원수인 사탄을 이 우주에서 기필코 제거시키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와 그 뜻에 대하는 모세의 충절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모세가 인연맺는 그 장면을 회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택한 이스라엘 백성을 애급 땅에서 가나안 복지로 인도하라는 명령을 받은 모세는 80노객이요 광야에서 시달린 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시선과 모습이야말로 하늘의 심정에 사무친 모습이었습니다. 그런 마음의 표준을 갖고 있던 모세를 회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1959.01.25, 전 본부교회)
60만 대중을 먹을 것도 없고 입을 것도 없는 황무지인 광야로 끌고 나온 입장에서, 끝까지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여야 할 책임을 짊어진 모세는 그들이 잘못되거나 그릇된 길로 가지 않을까 염려해서 찾아 올라간 곳이 시내산이었습니다. 시내산정에서 모세는 40주야 금식기도를 했습니다. 그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가지고 내려오게 되는데, 예수님은 그러한 모세의 사정을 연상치 않을 수 없었습니다. 모세가 이렇듯 시내산에 올라가서 40일 금식기도를 한 것은 오로지 하늘 아버지를 위함이요, 메시아가 오실 길을 닦기 위함이었고, 더 나아가서 선민을 세우시어서 하나님이 찾고자 하시는 복귀된 나라를 찾아 세우기 위함이었다는 것을 연상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1959.01.25, 전 본부교회)
엘리야가 갈멜산 꼭대기에서 사탄 편인 바알의 제사장들과 대결하던 그러한 장면은 모두가 누구를 위한 것인가? 이러한 회상을 하며 걷던 예수께서는 선조들이 산정에 올라가서 판가리 할 수 있는 하나의 해결점을 찾기 위하여 하늘 앞에 기도했던 그 사실이 모두가 하나님을 위함이요, 나아가서는 자기를 위함이었다는 것을 생각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산에 대한 이러한 역사적인 인연을 회상하며 비장한 심정을 품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들도 이러한 예수의 심중의 세계를 회상하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1959.01.25, 전 본부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