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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 섬기러 오셨다 말씀/ 마가복음 10:32-52 요절/ 마가복음 10:45 | 2024. 7. 21 | |
마가복음 제 17 강 |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사람들은 누구나 의미 있고 행복한 삶을 살고자 합니다. 하지만 어떻게 해야 행복을 얻을 수 있는지 알지 못합니다. 세상에서 성공하고 권력과 부를 얻고 많은 사람들을 마음대로 부리면 행복이 찾아옵니까? 예수님은 섬김 받기보다 도리어 섬기는 삶에 참 행복이 있다고 말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행복의 비결을 알고 참으로 복된 인생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에 예수님께서 그들 앞에 가시는데, 제자들이 놀라고 따르는 자들이 두려워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이번 예루살렘행은 마지막 순례 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평상시와 다르게 결연한 자세로 앞장 서서 리드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새로운 모습에 놀랐습니다. 함께 따르는 사람들은 두려워하였습니다. 예루살렘 입성하여 머지 않아 한 방을 터뜨리실 예수님에 대한 기대감과 함께 염려와 두려움이 그들에게 밀려왔습니다. 예수님은 열 두 제자들을 데리시고 자기가 당할 일을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고난과 죽음과 부활에 대한 말씀 다시 말해 복음의 말씀이었습니다. 33절을 보십시오.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겨지매 그들이 죽이기로 결의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주겠고 그들은 능욕하며 침 뱉으며 채찍질하고 죽일 것이나 그는 삼일 만에 살아나리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예루살렘에서의 메시아 사역 다시 말해 고난과 죽음과 부활에 대해서 제자들에게 세 번째 가르치셨습니다. 이번에는 더욱 구체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메시아의 길은 고난의 길이요 능욕의 길이요 죽음의 길이었습니다. 특별히 이번 말씀에는 예수님의 십자가형이 암시되어 있습니다. 이사야 53장에 예언된 대로 예수님은 우리의 상처와 질고와 죄를 치유하기 위해서 채찍질 당하고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할 것입니다. 하지만 죽음으로 끝나지 않고 삼일 만에 다시 살아나실 것입니다. 메시아의 길은 고난과 죽음의 길이지만 동시에 부활과 영광의 길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싫어하는 줄 알면서도 왜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대해서 반복해서 가르치십니까? 그것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이야말로 제자들이 반드시 받아들여야 하고 사람들에게 전해야 하는 복음의 핵심이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반복해서 가르쳐야 합니다. 우리는 매년 사복음서 중 한 복음서를 배우고 가르칩니다. 배워야 할 신구약 말씀이 많지만 해마다 복음서를 공부하는 것은 복음의 의미를 더 깊이 알고 마음에 새기고 삶에 적용하고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달콤한 말씀만 듣고자 하지 않고, 힘이 들지만 우리에 참 양식이 되는 복음의 말씀을 들을 귀를 가지고 듣고, 복음의 능력을 매순간 믿고 오직 믿음으로 살아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에서 제자들은 여전히 높은 자리를 두고 헤게모니 쟁탈전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베드로와 치열한 경쟁관계에 있는 야고보와 요한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을 알고 마음이 조급해졌습니다. 그 형제들은 베드로가 손을 쓰기 전에 기회를 잡아서 예수님께 자리 청탁을 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이야말로 예수님의 최측근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나아와 말했습니다. “선생님이여 무엇이든지 우리가 구하는 바를 우리에게 하여 주시기를 원하옵나이다.” 예수님은 그들의 당돌한 행동에 화를 낼만도 한데 사랑스런 자녀를 대하는 부모님 같이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물으셨습니다. 그들은 예수님 다음으로 높은 자리를 달라고 했습니다. “주의 영광 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 그들의 마음에는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에 대한 말씀은 없었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왕으로 입성하시고 원수 나라 로마정권을 무너뜨리고 새로운 나라를 세울 거라고 기대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왕으로 다스리실 때 자기들을 가장 높은 자리, 국무총리와 수석 장관의 자리에 앉게 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들은 다른 제자들과 베드로를 제끼고 첫째가 되고 싶었고 영광을 얻고 싶었습니다. 그들은 경쟁심과 야망으로 가득했습니다. 그들은 영광의 자리에 앉는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 엄마 찬스도 쓰고 뭐든지 하고자 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정신차려 이 놈들아”라고 무안을 주지 않고 그들이 구하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친절하게 설명해 주셨습니다. 먼저 예수님은 그들은 그들이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한다고 깨우쳐주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예수님이 마시는 잔을 그들이 마실 수 있는지 예수님이 받는 세례를 그들이 받을 수 있는지 물으십니다. 영광의 자리는 원한다고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마시는 잔을 마시고 예수님이 받는 세례를 받는 자들이 영광의 자리에 앉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마시는 잔은 고난의 잔이요, 예수님이 받는 세례는 죽음의 세례입니다. 이는 예수님의 고난에 참여하고 예수님의 죽음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끝까지 따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야고보와 요한은 그들 마음에 예수 복음의 말씀, 고난과 죽음의 말씀은 없었고 자기 부인과 자기 십자가의 제자도는 없었습니다. 그들은 그들이 원하는 영광의 자리가 어떤 자리인지 어떤 의미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고난 없는 영광을 원했고 희생 없는 열매를 원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예수님께 잘못 구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했습니다. 그리고 영광의 자리를 탐하는 것을 내려놓고 예수님이 마시는 잔과 예수님이 받는 세례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고 예수님의 고난의 길을 함께 걸어가야 했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잔과 세례의 의미를 알지 못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할 수 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들은 영광의 자리를 놓지 못했습니다. 자리에 대한 집착과 야망이 너무 커서 어찌하든지 그 자리를 차지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 영광의 자리에 앉을 수만 있다면 뭐든지 할 수 있다고 한 것입니다. 아마도 그들은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잔과 세례를 축배의 잔과 세례로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에 대한 말씀을 여전히 받아들이지 않았고 제자도에 대한 말씀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영광의 메시아관을 가지고 있었고, 예수님이 왕으로 다스리시고 다윗 시대의 영광을 재현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은 할 수 있습니다라고 대답한 제자들의 말을 진정한 것으로 받아주셨습니다. “너희는 내가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내가 받는 세례를 받으려니와” 예수님은 참으로 관대하시고 이해심이 깊으시고 인내심이 대단하십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이 마시는 잔을 마시고 예수님이 받는 세례를 받게 될 것입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야고보는 열두 제자들 가운데 첫 번째 순교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요한은 가장 나중까지 남아 예수님의 고난에 참여하고 희생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그 당시에 예수님이 말씀하신 잔과 세례의 의미를 알고 자기들도 할 수 있다고 대답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사건 이후에야 그들은 잔과 세례에 대한 진정한 의미를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어떤 자가 영광의 자리에 앉게 된다고 말씀하십니까? 40절을 보십시오.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내가 줄 것이 아니라 누구를 위하여 준비되었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 영광의 자리는 예수님께서 혈육의 가족이나 가까운 사람에게 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누구든지 준비된 사람이 얻을 것이며 하나님의 주권으로 얻게 될 것입니다. 영광의 자리는 고난을 통과한 자에게 주어집니다. 하지만 고난을 많이 받았다고 해서 그 댓가로 영광의 자리에 앉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고난 받는 것도 은혜요 영광의 자리에 앉는 것도 은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철저하게 하나님의 주권을 믿고, 예수님의 고난에 참여해야 하며 예수님의 영광에 참여해야 합니다. 영광의 자리를 욕심내지 말아야 합니다. 내가 간절히 원하고 내가 고난을 많이 받았다고 해서 영광의 자리에 앉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아버지 하나님께서 원하는 자를 영광의 자리에 앉게 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리에 대한 야망과 경쟁심을 내려놓고 맡은 일에 충성하고 하나님이 세우신 영적 질서를 존중해야 합니다.
영광의 자리를 청탁한 야고보와 요한에 대해서 열 제자들이 모두 화를 냈습니다. “아니 그럴 수가 있나 해도 너무 하네” 야고보와 요한뿐만 아니라 모두 영광의 자리에 대한 마음이 있었습니다. 평상시 말이 없는 다대오조차 분노했고 제자들 간에 자리 싸움이 치열했습니다. 현대사회에서도 자리를 놓고 경쟁하고 다투는 것은 흔한 일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높은 자리, 좋은 자리에 앉고 싶어합니다. 그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서 열심히 공부하고 실력을 쌓고 스토리를 만듭니다. 잘 나가는 사람들을 미워하고 끌어내리고 짓밟고 자기를 높이고자 합니다. 우리는 정글과 같은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또한 좀 더 높이 올라가기 위해서 경쟁하고 치열한 삶을 살아갑니다. 예수님은 이런 우리에게 어떤 삶이 진정으로 의미있고 행복한 삶이라고 가르치십니까?
예수님은 먼저 세상 사람들이 어떤 가치관을 가지고 살고 있는지 말씀하십니다. 42절입니다. “예수께서 불러다가 이르시되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당시 세상에서 높은 자리에 앉아 있는 자들은 로마 권력자들이요 유대 종교지도자들이었습니다. 백성들은 그들이 어떻게 권력을 쓰고 있는지 잘 알았습니다. 로마 권력자들은 백성들을 임의로 다시 말해 마음대로 주관했습니다. 종교지도자들은 권력을 남용했습니다. 권력자들의 불의와 탐욕으로 인해 백성들은 수탈당하고 고통과 슬픔과 절망에 빠졌습니다. 권력은 힘없는 백성들을 억누리고 꼼짝 못하게 하고 불행하게 하라고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권력은 힘없는 백성들을 돌보고 살리고 행복하게 하라고 주어진 것입니다. 하지만 자리가 주어지고 권력이 주어지면 백성들을 위하여 권력을 쓰기보다 자기의 이익을 위하여 쓰고 함부로 권력을 휘두르고 남용합니다.
인간은 죄악된 존재입니다. 권력을 주신 분은 하나님이신데 인간은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 자기가 하나님의 자리를 대신하고자 하고 자기 마음대로 권력을 쓰고 싶어합니다. 그래서 백성들을 위하여 정치하겠다고 구호를 외치지만 정권을 잡게 되면 독재자의 길을 가고 권력 남용의 나쁜 선례를 남기는 경우가 많습니다. 과거 청년대학생들이 민주화 운동을 하고 많은 피를 흘린 댓가로 우리나라는 민주정권이 들어서게 되었고 경제적으로도 선진국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기득권이 된 그들은 어떻게 다스렸습니까? 국민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권력을 남용함으로 국민들을 고통과 불행에 빠뜨릴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제자들은 어떤 가치관을 가져야 합니까? 제자들은 세상 집권자들과는 달라야 합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제자들은 예수님이 떠나신 후에 영적 지도자들로서 예수님의 일을 하고 구원역사를 이루어가야 할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로마 권력자들과 유대 종교지도자들의 영향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그들처럼 백성들을 임의로 주관하지 말아야 하고 백성들에게 권세를 부리지 말아야 합니다. 권력을 많이 갖고 마음대로 쓸 수 있는 사람이 큰 자라는 인본적인 가치관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제자들은 섬기는 자가 되고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에서 진정으로 큰 자는 섬기는 자이며 으뜸이 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는 자입니다. 이는 참으로 놀라운 말씀입니다. 세상에서는 섬기는 자, 모든 사람의 종이 되는 자는 큰 자가 아니요 꼴찌요 밀린 자요 패자입니다. 하지만 하나님 나라에서는 세상 나라와 정반대입니다. 섬기는 자가 큰 자로 인정받고 모든 사람의 종이 되는 자가 으뜸이라고 인정받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런 사람을 인정해 주시고 하나님께서 인정해 주십니다. 섬기는 종이 되는 사람이 하나님의 인정과 축복을 받고 하나님의 구원역사에 귀히 쓰임 받습니다.
우리는 섬기는 종이 하나님께 큰 자로 인정을 받고 구원역사의 주역이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영적 가치관을 알고 있다고 해도 그런 삶을 살아가는 것은 여전히 어렵고 힘들게 느껴집니다. 이런 우리를 위하여 예수님은 어떤 생애를 사셨는지 말씀하십니다. 45절을 보십시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예수님은 자기를 가리켜 인자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본래 하나님이시오 가장 높으시고 영광스러운 분이십니다. 우리의 섬김과 경배를 받으셔야 마땅한 분이십니다. 그토록 존귀하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기 위해서였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섬기기 위해서 종이 되셨습니다. 하나님으로서의 특권을 버리시고 비천한 종이 되시고 섬기는 삶을 사셨습니다. 예수님은 좋은 사람들을 골라서 섬기신 것이 아니라 여러 모양의 죄인들을 섬기셨습니다. 이기적인 세리 마태와 삭개오를 섬기셨습니다. 사랑의 목마름으로 고통하는 사마리아 여인을 섬기셨습니다. 중풍병자와 청각장애인과 거라사 귀신들린 자를 섬기셨습니다. 예수님은 죄인들을 섬기시되 한계를 정해놓고 섬기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기까지 섬기셨습니다. 대속물은 노예나 죄수를 풀어줄 때 지불하는 속전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죄로부터 구원하기 위해서 자기 목숨을 속전으로 희생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섬김과 희생을 통해 우리는 죄사함을 받고 새생명을 얻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예수님의 은혜를 입고 하나님의 사랑으로 채워질 때 우리는 참 행복을 맛보게 되고 기쁨과 만족이 넘치게 됩니다. 더 나아가 섬기러 오신 예수님을 본받을 때 우리도 섬기는 종의 삶을 살 수 있고 더 풍성한 삶을 누릴 수 있습니다.
누군가를 섬기고 돕고자 할 때 나에게 뭔가가 있어야 합니다. 돈이 있어야 하고 재능이 있어야 하고 지식도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그것들보다 더 필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고 많은 사람들을 섬겼고 많은 열매를 맺었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도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으라, 그리스도를 본받으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마음, 특히 겸손과 사랑으로 충만할 때 한 사람을 섬길 수 있고 두 세 사람을 섬길 수 있고 가정도 섬길 수 있고 캠퍼스 학우들과 이웃들을 섬길 수 있습니다. 저는 한 형제를 돕다가 저의 한계를 느끼고 섬기는 삶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문제 많고 자기 중심적인 사람을 어디까지 섬겨야 하는가 심히 고민이 되었습니다. 그 한 사람을 섬기다가 다른 사람들을 돌보지 못하고 교회에 어려움이 찾아오는 것을 보면서 주님께 엎드리게 되었고 주님의 긍휼을 구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저 같은 죄인을 이 날 이때까지 섬겨주신 주님의 은혜를 돌아볼 수 있었고 새 힘을 얻었습니다. 주님께서 보내주신 사람들은 제가 섬겨야 할 양들입니다. 제가 여러 모양의 사람들을 그리스도의 마음, 겸손과 사랑으로 영접하고 끝까지 섬길 수 있길 기도합니다.
예수님께서 여리고에서 나가실 때 맹인 거지 바디매오가 나사렛 예수시란 말을 듣고 소리질렀습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많은 사람이 그에게 잠잠하라고 하며 꾸짖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더욱 크게 소리 질렀습니다.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그의 간절하고 끈질긴 외침은 예수님의 발걸음을 멈추게 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를 부르라고 하셨고 맹인은 너무 기뻐서 겉옷을 내버리고 뛰어 일어나 예수님께 나아왔습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그는 망설이지 않고 즉시 대답했습니다. “보기를 원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의 믿음을 인정하시고 축복해 주셨습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예수님이 말씀하자마자 그는 곧 보게 되었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맹인 거지는 비천한 사람이었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무시했습니다. 하지만 그에게는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문제해결자로 믿었습니다. 사람들의 무시 앞에서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그의 기도제목은 분명했습니다. 그것은 눈을 뜨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믿음으로 예수님께 나아갔고 믿음으로 기도제목을 말했고 놀라운 응답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은혜를 받은 그는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가 되었습니다. 열두 제자들은 예수님을 온전히 따르지 못하고 여전히 자기 생각과 세상 가치관에 빠져 있었습니다. 하지만 바디매오는 예수님을 믿고 치유의 은혜를 입었을 뿐 아니라 계산하지 않고 예수님을 따르는 삶을 시작했습니다. 우리에게도 새로운 시작이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제자도가 부담스러워지고 세상가치관이 알게 모르게 많이 들어올 때 우리는 새롭게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나를 불쌍히 여겨달라고 우리를 불쌍히 여겨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문제해결자 예수님을 믿고 새은혜를 입고 새로운 시작을 하고 새역사를 이루어가야 겠습니다.
가장 존귀하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시고 일생동안 섬기는 종의 삶을 사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죄인들을 섬기시되 십자가에 죽기까지 섬기셨습니다. 섬기러 오신 예수님을 본받아 캠퍼스 학우들과 이웃들을 겸손과 눈물로 섬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