탕자의 비유에 나타난 양자의 영
앞에서 살펴본 로마서 8장 15절의 양자의 영 은 어떤 것일까?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탕자의 비유에서 우리는 그것의 실체를 확인할 수 있다. 18절부터 한 말씀씩 살펴보도록 하자.
18절 -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돼지우리가 좋은 사람은 결코 이런 말을 하지 않는다. 세상이 싫은 사람만이 아버지께 돌아가고 싶은 소원이 생기게 된다. 탕자는 아버지께 평생 갚을 수 없는 빚을 졌지만, 결코 용서받을 수 없는 큰 죄를 지었지만, 돼지우리 의 고난을 통하여 아버지께 돌아가기 원하게 된 것이다. 탕자의 마음속에 아버지께 대한 빚진 자 의 심령이 생긴 것이다.
19절 -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탕자는 아들이 되려고 아버지께 돌아온 것이 아니라, 품꾼이 되려고 돌아왔다. 스스로 아들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아버지 앞에 엎드려 자신을 이 집의 종으로 받아달라고 애원해야겠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탕자는 참된 양자의 영 을 받았다.
양자의 영 을 받은 그리스도인은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기에는 너무나 부족하다고 생각하게 되는데, 이것이 참된 양자의 영을 받은 사람에게서 나타나는 특징이다. 왜 이런 모습이 나타나게 될까? 자신이 너무나 엄청난 빚을 졌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양자의 영 속에는 무서워 떠는 종의 정신이 전혀 없다. 하나님의 눈치를 살피는 태도와 정신이 전혀 없다. 왜냐하면 더 이상 세상을 사랑하거나 아버지를 배반할 의도가 없기 때문이다. 다만, 아버지의 마음을 아프게 만든 자신의 부족과 죄를 깊이 뉘우칠 뿐이다. 그리고 아버지의 사랑과 자비를 기억하며 그분께 나아가게 된다. 여러분의 영은 양자의 영인가? 아니면 두려워 떠는 종의 영인가?
20절 -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 돌아가니라. 아직도 상거가 먼데 아버지가 저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양자의 영을 받으면 그때부터 제대로 된 부자 관계가 형성된다. 서로 부둥켜안는 사이가 된다. 이 말씀을 보면 아들이 아버지를 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가 먼저 아들을 안아 준다. 그래야 아들도 용기를 내서 아버지를 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아들이 너무나 측은해서 껴안고, 아들은 너무나 죄송해서 품에 안긴다. 탕자의 비유에서 탕자는 철저하게 빚진 자의 태도를 보여 준다.
21절 - 아들이 가로되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탕자의 비유 속에는 참된 양자의 영이 어떤 것인가에 대한 설명이 가득하다. 아버지가 너는 내 아들 이라고 하는데도 아들은 너무나 죄송스러워서 감당치 못하겠 다고 한다. 이것이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가 되어야 하지 않는가? 조금 의로운 일을 했고 조금 순종했다고 하나님 앞에서 너무나 당당한 모습을 취하는 것은 빚진 자의 태도가 아니다. 빚을 탕감해 주신 아버지께 대한 감사의 마음이 늘 넘치지만, 아버지의 희생과 용서로 인하여 늘 겸손한 태도로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이다.
빚진 자의 심령을 갖게 되는 것이야말로 죽었다가 살아나는 경험이다. 부활의 경험이다. 생명을 얻는 경험이다. 그러나 맏아들은 어떤가?누가복음 15:24에서 맏아들은 집 떠난 동생이 돌아오던 날에도 아버지를 위해서 밭에서 열심히 일하는 모습으로 나온다.
맏아들은 한 번도 집을 떠난 적이 없다. 겉으로 볼 때 그는 완벽한 아들이었다. 그런데 이상한 장면이 나온다. 아버지가 돌아온 작은아들을 위하여 종들에게 명하여 송아지를 잡아 잔치를 베풀려고 하는데, 큰아들은 그것을 너무나 싫어했다. 아버지께 대답하여 가로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눅 15:29)
나는 아버지를 위해서 죽으라고 일했는데, 아버지는 나를 위해서는 염소 새끼 한 마리도 잡아준 적이 없었다. 라는 것이 맏아들의 마음이다. 맏아들의 마음 어디에 양자의 영 이 있는가? 어디에 빚진 자의 심령이 있는가? 아버지의 집을 한 번도 떠난 적이 없지만, 부자의 정이, 형제의 정이 완전히 허물어져 있는 모습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착한 아들인데 속으로는 그 영혼이 썩어 가는 모습이다.
이 말씀이 한국말 성경에는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라고 되어 있지만, 영어 성경에는 여러 해 동안 아버지를 위해서 노예처럼 일했 다고 번역되어 있다. 큰아들은 양자의 영이 아니라 무서워 떠는 노예의 정신으로 아버지와 함께 살았던 것이다. 아버지의 뜻을 거스리면 형벌을 받으니까 노예처럼 열심히 일해서 아버지의 환심을 얻기 원했던 것이다. 큰아들은 일한 양에 비례해서 아버지가 관심을 두고 대가를 지불해 주길 기대했다. 아들의 마음이 아니라 노예의 마음으로 살았던 것이다.
혹시 우리는 우리가 행한 헌신과 희생의 대가를 기대하지 않는가? 내가 하나님을 위해서 이만큼 일했으니까, 내가 교회를 위해서 이만큼 일했으니까, 나에게 이 정도는 해 주어야 한다는 생각 말이다. 내가 저 사람을 위해서 이만큼 자비와 친절을 베풀었으니까 내가 이 정도는 받아야 한다는 생각 말이다. 하나님을 위해서 일한 대가와 공로를 기대하는 마음은 양자의 영 이 아니다. 그것은 빚진 자의 태도가 아니다.
큰아들의 문제는 아버지의 심정을 전혀 모르는 것이다. 작은아들을 다시 맞이하는 아버지의 심정을 성경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눅 15:24) 죽은 아들이 부활하여 다시 나타났다. 생명이 없던 아들이 돼지우리의 고난을 통해서 생명을 다시 얻은 것이다. 그래서 아버지 앞에 빚진 자의 심령으로 서게 되었다. 드디어 양자의 영을 받는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그러니 아버지가 얼마나 기쁘겠는가? 송아지가 아니라 그보다 더한 것도 잡아야 했을 것이다. 탕자가 돌아오면 하늘 아버지와 온 하늘의 천사들은 하늘에서 잔치를 베풀며 기뻐할 것이다.
성경은 말세에는 성소가 정결케 되는 복음을 경험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가 내게 이르되 이천삼백 주야까지니 그때에 성소가 정결하게 함을 입으리라 하였느니라. (단 8:14)
다니엘서 8장에 나오는 2,300주야 예언은 말세에 마음 성소를 정결케 하는 경험을 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살아남는 이들 44호 참조). 또한, 그러한 경험을 가져다줄 수 있는 복음이 전파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여러분의 마음 성소는 정결케 되어가고 있는가? 마음 성소를 정결케 하는 일은 우리의 육체를 십자가에 못 박아야 가능해진다.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려면 반드시 육체가 못 박혀야만 한다. 이것은 힘든 경험이다. 그래서 성경은 좁은 길을 걸으라고 말하는 것이다. 성경이 요구하는 높은 표준을 따라가기 힘든가? 빚진 자로 살아야 한다.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양자의 영을 부어 주실 것이다.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 라고 부를 수 있는 그리스도인만이 하늘 가는 길을 끝까지 걸어갈 수 있다. 바로 이것이 사도 바울이 로마서 8장에서 전하는 기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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