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에 기록된, 아버지 닮지 못한 임사홍
누가 아버지를 욕되게 말하는가?
아버지는 아들의 덕德을 말하지 말 것이며
아들은 아버지의 허물을 말하지 말라.
부불언자지덕하고 자불담부지과 니라
(父不言子之德 子不談父之過)
엽공(葉公)이 공자(孔子)에게 말했다.
“우리 마을에는 참으로 정직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 아버지가 양을 훔쳤는데, 그 아들이 증인으로 나섰습니다.”
공자가 대답했다.
“나의 제자들은 그것과는 달리,
아버지는 아들을 위해 숨기고, 아들은 아버지를 위해 숨깁니다.
정직함이란 바로 그 가운데 있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위해 숨기고
아들은 아버지를 위해 숨진다는 것은
바로 법률 이전의 도덕률(道德律)이다.
누가 아버지를 욕되게 말할 수 있는가.
그러나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
참으로 기가 막히는 경우도 있다.
그럴 때는 어떻게 말해야 할 것인가?
임희재(任熙載)는 연산군 때의 간신 임사홍(任仕洪)의 아들로
무오사화 때는 김종직(金宗直) 의 제자라는 이유로 귀양살이를 하기도 했다.
임희재는 병풍에다 다음과 같은 시(詩)를 썼다.
요순(堯舜)을 본받으면 나라가 태평할 것인데
진시황(秦始皇)은 왜 백성을 괴롭혔을까
환란이 집 안에서 일어날 줄 모르고
공연히 오랑케 막으려고 만리장성을 쌓았네.
어느 날 연산군이 임사홍의 집에 놀러 왔다가
병풍에 쓰여 있는 시를 보고 말했다.
“누가 쓴 시인가?
나를 진시황에다 비유하다니 살려 둘 수가 없다.”
항상 자기 아들을 못마땅하게 생각해 오던 임사홍은
행여나 그 불똥이 자기에게 튀지 않을까 염려되어
아들을 두둔하기는커녕 오히려 맞장구를 쳤다.
“못난 아들놈의 소행입니다. 그놈은 성품이 워낙 고약해서
그렇지 않아도 상감께 아뢰려던 참이었습니다.”
아버지의 이 한마디 때문에 임희재는 그날로 죽임을 당했다.
게다가 임사홍은 아들이 처형되던 날,
많은 손님을 초대해서 춤과 노래로 질탕한 잔치를 베풀었다.
아비만 한 자식 없다는 속담도 있지만, 천만의 말씀이다.
임사홍을 빼어닮은 자식이 있었다면
나라 꼴은 한결 더 위태로웠을 것이다.
아버지가 되기는 쉽다. 그러나 아들답기는 또 얼마나 어려운가?
쟝 파울이 말했다.
“자식이 열 있더라도, 자식에 대한 어버이 한 사람의 마음은,
어버이에 대한 열 자식의 마음을 훨씬 능가한다. 0384~
출처> 도서 > 매일매일 바뀌는 세상에도 변하지 않는 진리가 담긴
[에세이 명심보감] 이규호 편저
≪후기≫유성 박한곤
눈앞의 손익 판단에 눈이 어두우면
윤리倫理를 벗어나게 됩니다.
더욱이 물질문명이 난산難産한
황금만능주의 시대의 작금昨今에
임사홍같은 분이 없다고
단언할 수 있을까요!
음식을 꼭꼭 십 음으로 제맛을 느끼듯
세상사 깊이 보고 음미해야
삶이 주는 참맛을 느낄 수 있습니다.
물은 흘러가며
물가의 경치에 집착하지 않습니다.
늘 제 갈 길을 가기에 넓은 바다에 안겨
자유와 영원을 누립니다.
시작되는 2024년 2월에도 법구경 한 구절을 합께 되새겨 보았으면 합니다.
"손에 상처가 없다면
독을 손으로 만질 수 있으리라
상처가 없으면 해독을 입지 않듯이
악을 행하지 않으면 악이 미칠 수 없다." <법정 >저서 >법구경에서2024, 02, 01 >
<간신 임사홍 >
임사홍의 간교함은 자신의 아들마저 희생양으로 삼는 지경에 이르렀다. 임희재는 임사홍의 둘째아들로
사림파 영수 김종직(金宗直)의 제자로 무오사화 때 유배길에 오르기도 했다. 그는 아버지 임사홍이나 동생 임숭재와 달리,
연산군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갖고 있었다.
하루는 연산군이 임사홍의 집에 갔다가 병풍에 적혀 있는 시를 보게 되었다.
祖舜宗堯自太平(요순을 본받으면 저절로 태평할 것인데)
秦皇何事苦蒼生(진시황은 무슨 일로 백성들을 괴롭혔는가)
不知禍起所墻內(화가 집안에서 일어날 줄은 모르고)
虛築防胡萬里城(공연히 오랑캐를 막으려고 만리장성을 쌓았구나)
이 시는 임희재가 쓴 것으로, 겉으로는 진시황을 비판하고 있는 내용이지만 실제로는 진시황에 빗대어 연산군을 비난하는 내용이었다. 연산군은 불편한 심기를 내보이며 누가 쓴 것인지를 물었고, 임사홍은 사실대로 대답하였다. 연산군은 “경의 아들이 불충하니, 내가 그를 죽이려고 하는데 경의 생각은 어떠한가?”라고 그의 뜻을 물었다. 임사홍은 연산군의 지적에 바로 동의를 했고, 결국 임희재는 처형되었다. 혹자는 임희재가 항시 그 아버지의 잘못을 간하였으므로, 임사홍이 그를 좋아하지 아니하여 참소(讒訴)한 것이라고 하는 설(說)도 있다. 설마 아무리 간신배 임사홍이라 해도 자신의 아들 목숨까지 내버릴 수 있었을까.
여하튼, 임희재 사건 이후 연산군은 그를 더욱 신임하였고, 사람들은 그를 더욱 잔인한 사람으로 여겨 매우 경계하게 되었다. 아들을 죽음으로 몰아넣고, 아들의 죽음 앞에서도 아무렇지도 않게 잔치를 열었던 임사홍. 그에게 있어서 권력의 단맛은 아들의 목숨까지도 버릴 수 있는 절대적인 것이었다. 이후 임사홍은 연산군의 입맛에 맞는 최측근으로 특별한 임무를 부여받았다. 조선 팔도의 아름다운 여자를 뽑아 연산군에게 바치는 채홍사(採紅使)로 임명된 것이다. 임사홍은 채홍사로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면서 운평(運平: 연산군 때에 여러 고을에 모아놓은 가무기생)과 흥청(興淸:운평 가운데서 대궐로 뽑혀온 기생)을 뽑아 연산군에게 바쳤다.
흥청들과 어울려 ‘흥청망청’하고 폭정(暴政)을 일삼던 연산군은 결국 1506년 중종반정이 일어나면서 종말을 맞았고, 최측근 임사홍 역시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그냥 죽은 것이 아니라 죽은 뒤 20여일 후 부관참시 당하고 가산(家産)을 몰수당했다. 아이러니하게도 몰수된 재산의 일부는 한때 함께 사화를 일으켰지만, 중종반정 공신으로 배를 갈아 탄 또 다른 간신 유자광에게 돌아갔다. 그리하여 임사홍에게는 조선시대 대표적 간신이라는 오명(汚名)과 낙인이 영원히 남게 되었다.
출처 >>> 간신 임사홍 4편 작성자 KIMSEM
제공 : KIMSEM과 함께 역사 다시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