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사랑
김지하
꽃 피어도
나비
오지 않는다
봄의 적막이
속에 든다
춥고
외로와
사랑하고저 하나
내밀어 볼
팔
없다
온 마음
맨몸이 죽도록
거리를 걷는다
피투성이로 걷는다
사랑하고저.
32. 산책은 행동
김지하
겨울 나무를 사랑한다면
봄은 기적 같으리
고독한 사람이
물 밑을 보리
이리저리 흩날리는
가랑잎에 훨훨훨
노을 불이 붙는다
산책은
행동.
33. 새
김지하
저 청한 하늘 저 흰 구름
왜 나를 울리나
밤 새워 물어뜯어도 닫지 않을
마지막 살의 그리움
피만 흐르네 더운 여름날
썩은 피만 흐르네
함께 답세라 아 뜨거운
새하얀 사슬 소리여
날이 밝을 수록 어두워 가는
암흑 속의 별밭
청한 하늘 푸르른 저 산맥 넘어
멀리 떠나가는 새
왜 날 울리나 뜨거운 햇살
새하얀 저 구름
죽어 너 되는 날의 아득함
아 묶인 이 가슴
34. 새봄3
김지하
겨우내
외로웠지요
새봄이 와
풀과 말하고
새순과 얘기하며
외로움이란 없다고
그래 흙도 물도 공기도 바람도
모두 다 형제라고
형제보다 더 높은
어른이라고
그리 생각하게 되었지요
마음 편해졌어요
축복처럼
새가 머리 위에서 노래합니다.
35. 생명
김지하
생명
한 줄기 희망이다
캄캄 벼랑에 걸린 이 목숨
한 줄기 희망이다
돌이킬 수도
밀어붙일 수도 없는 이 자리
노랗게 쓰러져버릴 수도
뿌리쳐 솟구칠 수도 없는
이 마지막 자리
어미가
새끼를 껴안고 울고 있다
생명의 슬픔
한 줄기 희망이다.
36. 서편
김지하
내 마음에
불길 꺼지고
밤낮
흰 달 뜬다
차가운 자리
노을마저 스러져
무서운 꿈마다
꽃 피어난다
지난날 회한도
이제는 즐거움
아파트 사이
봉숭아 한 잎에도
하늘 든다
님아
이젠 오소서
와
검은 삶에
붉은 살 돋우시라
나 지금
서편으로 가는데.
37. 아파트 꿈
김지하
나는
아파트에다
토담집을 짓는다
아파트 사이사이로
돌아 나가는 강물이 있어
산책길에
내 발을 적신다
음악이 들리는 창문
장미가 피는 창문
라일락이 서 있는 창문은
모두 다 내 집이다
내 눈의 집
저녁달이 오르면
내 눈은 거대한 우주가 되어
아파트 위에 둥실 뜬다
내 눈은 이제
빛
푸른 초원 비취는
구월 밤의
빛.
38. 애린
김지하
외롭다.
이말한마디
하기도 퍽은 어렵더만
이제는 하마.
크게
허공에 하마
외롭다.
가슴을 쓸고가는 빗살
빗살사이로 언듯언듯 났다 저무는
가느다란 햇살들이 얕게 얕게
지남 날들 스쳐지날수록
얕을수록
쓰리다.
입 있어도 말건넬이
이세상엔 이미없고
주먹 쥐어보나
아무것도 이젠 쥐어줄수없는
그리움마저 끊어짐 자리
밤비는 내리는데
소경 피리소리 한자락
이리 외롭다.
39. 엽서
김지하
잊어줘
난 벌써 잊었어
볼펜이 말 안 듣는 걸 봐
아니야
펜이 나빠서가 아니야
잊었어
귀밑머리 하얘지고
한 달이 하루같이 바삐 스러져가는
그때만 기다리고 있어
잊어줘
함께라는 말
지금 여기 끝끝내 우린 함께라는 그 말
그 말만 잊지 말아줘
나머지는 얼굴도
이름마저도 다 잊어줘
난 벌써 잊었어
아니야
엽서 위의 얼룩은 눈물자국이 아니야
창살 사이 흩뿌리는 빗방울자국이야
아니야
벽 위에 손톱으로 쓴 저 구절들은
네게 바친 것이 아니야
아니야
지금 쓰는 이 엽서는
네게 부칠 것이 아니야
습작이야 습작
손 무디어지지 않기 위해
그래
잊어줘
난 벌써 잊었어
단 하나
함께라는 말
지금 여기 끝끝내 우린 함께라는 그 말
그 말만 잊지 말아줘
나머지는 얼굴도
이름마저도 다 잊어줘
난 오래 전에
아주 오래 전에
벌써 잊었어
애린이란 네 이름마저
그 옛날에.
40. 엽서
김지하
잊어줘
난 벌써 잊었어
볼펜이 말 안 듣는 걸 봐
아니야
펜이 나빠서가 아니야
잊었어
귀밑머리 하얘지고
한 달이 하루같이 바삐 스러져가는
그때만 기다리고 있어
잊어줘
함께라는 말
지금 여기 끝끝내 우린 함께라는 그 말
그 말만 잊지 말아줘
나머지는 얼굴도
이름마저도 다 잊어줘
난 벌써 잊었어
아니야
엽서 위의 얼룩은 눈물자국이 아니야
창살 사이 흩뿌리는 빗방울자국이야
아니야
벽 위에 손톱으로 쓴 저 구절들은
네게 바친 것이 아니야
아니야
지금 쓰는 이 엽서는
네게 부칠 것이 아니야
습작이야 습작
손 무디어지지 않기 위해
그래
잊어줘
난 벌써 잊었어
단 하나
함께라는 말
지금 여기 끝끝내 우린 함께라는 그 말
그 말만 잊지 말아줘
나머지는 얼굴도
이름마저도 다 잊어줘
난 오래 전에
아주 오래 전에
벌써 잊었어
애린이란 네 이름마저
그 옛날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