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수를 사랑하기는커녕 은혜를 원수로 갚는 것이 세상에서 비일비재하지 않은가? 다윗은 자신의 위험을 무릅쓰고 블레셋의 침략을 받은 그일라 주민들을 구원해 주었다.
(삼상 23:3) 다윗의 사람들이 그에게 이르되 보소서 우리가 유다에 있기도 두렵거든 하물며 그일라에 가서 블레셋 사람들의 군대를 치는 일이리이까 한지라
이것은 분명 자기를 희생할 각오로 내린 결정이었지만 사람들은 자신들이 받은 은혜를 원수로 갚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다윗이 그일라 성으로 들어갔다는 이야기를 듣고 사울은 드디어 다윗을 잡을 수 있다고 판단하고 군사들을 불러 모았다. 다윗은 자신의 처지를 알고 하나님께 물었다. 사울이 자신을 잡기 위해 내려올 것인지 사울이 그일라를 에워싼다면 그일라 주민들이 자신들을 사울에게 바칠 것인지.... 하나님께서 주신 대답은 다윗이 우려했던 대로 모든 것이 어둡고 불길했다.
(삼상 23:11) 그일라 사람들이 나를 그의 손에 넘기겠나이까 주의 종이 들은 대로 사울이 내려 오겠나이까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원하건대 주의 종에게 일러 주옵소서 하니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그가 내려오리라 하신지라 (삼상 23:12) 다윗이 이르되 그일라 사람들이 나와 내 사람들을 사울의 손에 넘기겠나이까 하니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그들이 너를 넘기리라 하신지라
다윗은 그일라를 위해 목숨을 걸었어도 그일라 사람들은 사울이 성을 에워싸면 다윗을 내어 줄 것이라는 사실에서 우리는 사람들의 비정함을 느낄 수 있다. 이것이 보통 사람들의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인 한계의 모습이다. 누구나 자신이 위태롭게 되면 거짓말도 하고 친구도 원수에게 내어 주게 된다. 하지만 다윗은 그일라 사람들을 원망하지 않고 급히 그일라를 떠나 광야 요새로 피하였다. 다윗과 그를 따르는 자들이 십 광야 하길라산 숲에 숨어 있을 때 십 사람들이 기브아에 있는 사울에게 와서 다윗이 거기 숨어 있다는 사실을 고변하였다.
(삼상 23:20) 그러하온즉 왕은 내려오시기를 원하시는 대로 내려오소서 그를 왕의 손에 넘길 것이 우리의 의무니이다 하니 (삼상 23:21) 사울이 이르되 너희가 나를 긍휼히 여겼으니 여호와께 복 받기를 원하노라
이런 타락한 거래가 가장 신성해야 할 교회에서도 이루어진다. 십 사람들처럼 세상의 이익을 얻기 위해 복을 갈구하는 사람들이 있고 거기에 비열한 갈구자들에게 하나님의 이름으로 복을 비는 설교자들도 많다.
하나님을 스스로는 믿지도 않고 그분의 말씀에 순종할 마음도 없는 사울은 여호와의 이름을 팔아서 복을 빌었다. “너희가 여호와께 복 받기를 원하노라” 세상에는 이런 하나님의 이름으로 복 장사하는 사람들이 많다.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하나님 이름으로 복을 빌어주고 아무런 효과도 없는 부도난 복 수표를 남발하는 사람들이다. 하나님 이름과 복음 사업을 자신의 밥벌이로 이용하는 사람들, 하나님의 뜻에는 별로 관심도 없으면서 사울처럼 하나님의 복을 팔아 자기 탐욕을 챙기려는 사람들, 이들은 모두 복 장사꾼들이다. 사람들에게는 숨겨질지라도 하나님은 이런 모든 사람의 행위와 마음을 아신다. (갈 6:7)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고 하신다.
사울이 아무리 다윗을 잡아서 죽이려고 하였지만 사울의 마지막 운명이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하나님의 뜻에서 할 걸음 멀어진 그 자리에서 이젠 너무 멀리까지 가버린 사울이 아무런 거리낌 없이 여호와의 이름을 입에 올리면서 그 마음에 아무런 가책도 느끼지 못했다.
진실이 사라진 양심의 자리에는 몰염치로 굳어진 탐욕이 자리 잡고, 탐욕으로 어두워진 눈은 이것이 복인지 독인지 구분하지 못하고 독을 복으로 복을 독으로 알고 들이킨다. 지금 우리는 사울인가 아니면 다윗인가?
하나님 아버지! 세상은 참 매정하고 가혹합니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친구도 버리고 하나님마저 자신의 이익의 도구로 사용하는 철면피들이 많습니다. 주여, 우리를 새롭게 하시고 정직한 양심을 주사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주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소서. 하나님께 충성하고 하나님을 이용하는 사람이 되지 않도록 도와 주십시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