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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요한복음 제7강
그들의 원대로 주시니라
말씀/요6:1-15
요절/요6:11 “예수께서 떡을 가져 축사하신 후에 앉아 있는 자들에게 나눠 주시고 물고기도 그렇게 그들의 원대로 주시니라.”
오늘 말씀은 요한복음에 기록된 예수님의 7가지 표적 중 네 번째 표적입니다. 특별히 오병이어 사건은 사복음서에 다 나와 있습니다. 그러나 저자가 보는 관점에 따라 약간씩 다르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공관복음서가 제자훈련에 중점을 두고 있다면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님이 누구인가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이 시간 오병이어 사건에 나타난 예수님은 누구인가 배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1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디베랴의 갈릴리 바다 건너편으로 가십니다. 이곳은 갈릴리 바다 해안 지역으로 베드로, 안드레, 빌립의 고향 벳세다입니다. 이곳에 간 이유는 마가복음에 기초하면, 전도여행을 다녀온 제자들에게 잠시 휴가를 제공하고자 함이었습니다. 그런데 큰 무리가 예수님의 일행을 따라왔습니다. 예수님이 병자들에게 행하시는 표적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한 산에 올라 제자들과 함께 거기 앉으셨습니다. 이 산은 현재 ‘골란 고원’이라 불리는 곳입니다. 고지대 위에 넓은 풀밭이 펼쳐진 곳입니다. 야외 집회를 하기엔 최적의 장소입니다. 때는 출애굽을 기념하는 명절인 유월절이 가까운 때입니다. 큰 무리는 대명절인 유월절을 맞아 제사 드리기 위해 예루살렘 성전으로 향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성전을 향하지 않고 예수님을 향해 나아왔습니다. 예수님을 통해 제2의 출애굽과 같은 구원의 역사가 일어날 것 같은 암시를 깔아줍니다. 5a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눈을 들어 그들이 자기에게로 오는 것을 보셨습니다. 여기 ‘보셨다’는 것은 단순히 큰 무리가 자기에게 오는 모습을 본 것뿐만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목자 없이 유리방황하는 불쌍한 자들이요, 영육 간에 도움이 절실한 자들로 보셨습니다. 예수님은 목자의 눈, 부모의 마음으로 그들을 보신 것입니다. 어떤 눈으로 보는가에 따라 무리를 대하는 태도는 완전히 달라집니다. 예수님은 참석 인원만 대략 오천 명에 달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전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계속 이어졌습니다. 어느 새 서산으로 해가 지려하고 참석자들의 배꼽시계에서는 ‘꼬르륵’ 소리가 났습니다. 예수님은 배고픈 양 무리를 그냥 돌려보낼 수 없었습니다.
그 무리를 보시고 예수님이 빌립에게 말씀하십니다. 5b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을 먹이겠느냐?” 이 상황의 핵심은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한두 사람이 아니라 큰 무리일 때 어떻게 할 것인가에 있습니다. 자신의 능력 밖으로 보이는 일이 맡겨졌을 때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조금 전에 둘씩 짝을 지어 전도여행을 다녀왔습니다. 전도여행을 통해 사람들이 복음을 영접하고 변화되는 역사가 있었습니다. 이 전도여행도 쉽지는 않지만 마음만 먹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그들 앞에 있는 상황은 마음먹기에 달린 것이 아닙니다. 불가능한 현실처럼 보입니다. 과연 그들을 한꺼번에 먹일 떡을 살 곳이 있겠습니까? 오늘날처럼 대량으로 떡을 찍어내는 공장이 아니라 집에서 조금씩 만들어 먹는 것이 당시의 문화였습니다. 예수님이 특별히 빌립을 콕 찍어 이 질문을 하신 것은 매우 자연스러워 보입니다. 왜냐면 그들은 지금 벳새다라는 동네에 있고 빌립은 바로 그곳 출신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빌립에게 질문하신 것은 단지 그런 의미만이 아니었습니다. 6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이 특별히 왜 빌립에게 이 질문을 하셨는지 설명해줍니다. “이렇게 말씀하심은 친히 어떻게 하실지를 아시고 빌립을 시험하고자 하심이라.” 예수님은 이미 5천 명의 큰 무리를 자신의 방법대로 자신이 먹일 계획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그렇기에 빌립에게 이 질문을 하신 것은 의도적인 것입니다. 한마디로 테스트입니다.
저는 신대원에서 시험을 볼 때에 교수님의 채점 매기는 기준과 스타일, 출제 의도를 잘 파악하는 사람이 점수가 잘 나오는 것을 봅니다. 이처럼 시험을 잘 보려면 무엇보다 출제자의 심중의 의도를 파악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제가 하윤이에게 “뭐 먹을까?” 물을 때는 이미 제가 직접 무엇인가 만들어서 먹을 것을 제공해줄 것을 전제로 묻는 것입니다. 이것을 잘 아는 하윤이는 ‘라면’ 단순히 대답합니다. 집에 라면이 있는지, 없으면 라면이 얼마인지, 아빠에게 라면 살 돈이 있는지 없는지 전혀 계산하지 않습니다. 아빠는 하윤이에게 뭔가 먹을 것을 줄 것을 전제로 질문했기 때문에 하윤이는 단순히 대답한 것입니다. 여기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이 어디서 떡을 사서 먹이겠느냐 질문하실 때에는 이 사람들을 먹여야 하겠다는 예수님의 의지가 질문 속에 전제되어 있습니다. 먹이고자 하는 의지가 없다면 왜 물으셨겠습니까? 그냥 보내면 되지요. 분명한 것은 예수님이 목자 없는 양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어떻게 하든 그들을 먹이고자 하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면 빌립은 어떻게 대답합니까? 7절을 보십시오.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리이다.” 이 말은 “여기 있는 한 사람 한 사람이 떡을 한 입씩만 먹는다 할지라도 그 떡을 사려면 이백 데나리온은 족히 있어야 할 것입니다”라는 의미입니다. 그들을 배불리기는커녕 한 입만 먹고 입맛만 버리게 하는데 필요한 빵을 사는데 만도 이백 데나리온은 있어야 한다는 것이 빌립의 계산입니다. 한 데나리온은 일반 노동자가 받는 하루 품삯이었습니다. 그러므로 200데나리온은 노동자가 약 7개월 가까이를 하루도 쉬지 않고 일해야 벌 수 있는 큰돈입니다. 노동자 하루 품삯을 10만원으로 계산하면 200일 임금, 약 2,000만원이나 되는 큰돈이었습니다. 산 속 허허들판에서 오천 명을 먹일 많은 떡을 구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빌립의 대답이 한편 이해가 되기도 합니다. 지극히 현실적이고 이성적이고 상식적인 답변입니다. 그러나 빌립에게는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문제가 있는데 다름 아닌 그가 예수님의 제자라는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의 제자로 부르심을 받았고 그동안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 수많은 기적들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빌립은 예수님의 제자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대답에는 예수님께 대한 기대가 전혀 나타나 있지 않습니다. 현실적인 계산은 빠르지만 늘 그 계산속에 예수님께 대한 기대를 빼놓는 빌립, 이 문제를 아셨기 때문에 예수님은 빌립을 시험하신 것입니다.
이 문제는 빌립에게만 해당되는 사항은 아닙니다. 주님은 모든 인생이 믿음의 세계를 보기를 원하십니다. 민수기 11장 13a절, 22절을 보면 모세가 하나님께 여쭙니다. “이 모든 백성에게 줄 고기를 내가 어디서 얻으리이까?”, “그들을 위하여 양 떼와 소 떼를 잡은들 족하오며 바다의 모든 고기를 모은들 족하오리이까?” 하나님은 이런 모세에게 말씀하십니다. “여호와의 손이 짧으냐? 네가 이제 내 말이 네게 응하는 여부를 보리라.” 하나님은 여호와의 손이 결코 짧지 않다는 것을, 광야에서도 능히 200만 백성에게 양꼬치와 소고기 등심을 먹일 수 있다는 것을 믿도록 도우셨습니다.
또 열왕기하 4장 42,43절을 보면, 엘리사가 보리떡 이십 개와 자루에 담긴 채소를 받았을 때 이것으로 무리들을 먹이라고 했습니다. 그때 사환이 말합니다. “내가 어찌 이것을 백 명에게 주겠나이까?” 이때 엘리사는 사환에게 믿음을 심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그들이 먹고 남으리라 하셨느니라.”
예수님은 빌립이 이성과 상식을 뛰어 넘는 믿음의 세계를 보기를 원하십니다. 얼마든지 먹이시고 남기시는 예수님을 믿고 무리들을 먹이는 목자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빌립은 이런 믿음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을 바로 앞에 모시고도 예수님이 안보였습니다. 먹게 하겠느냐 하시는 예수님의 안타까운 심정을 읽지 못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포함한 ‘우리가’ 이렇게 말씀하셨지만 빌립은 ‘우리가’에 예수님과 예수님의 능력을 생각하지 못한 채 제자들, 자신들의 모습만 바라보고 있습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이제까지 예수님은 물로 포도주를 만드셨고 왕의 신하의 아들도 원격으로 살리셨습니다. 38년 동안이나 누워 있어 죽은 자나 다름없던 병자를 한 마디 말씀으로 일어나게 하셨습니다. 이 정도라면 오천 명의 무리도 충분히 먹일 수 있지 않을까요? 이제까지 하신 모든 일이 다 돈 한푼 안들이고 하신 일들인데 이백 데나리온이 없는 것이 문제가 될까요? 빌립의 문제는 예수님의 마음도, 예수님의 의지도, 예수님의 능력도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는데 있습니다. 빌립이 계산은 참 잘하고 똑똑한데 예수님이라는 결정적인 변수를 빼고 계산하는 바람에 안타깝게도 오답을 내고 말았습니다. 나중에는 몰라도 이런 지금 현재의 빌립으로서는 대기업의 회계 담당 이사가 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양 무리들의 목자가 될 수 없고 시대의 영적 지도자가 될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도 이 사람들을 먹이려면 어디서 떡을 사야 하겠느냐 물으실 때가 있습니다. “죽어가고 있는 캠퍼스 영혼들에게 어떻게 생명의 복음을 전해야 할까?” “너희가 속한 직장 동료들의 영혼의 갈급함을 채워줄 목자가 되어줄 수 있겠니?” 내 한 몸 피곤하다고, 내 가족 챙기기도 벅차다고 느끼는 우리에게 주님은 물으십니다. 우리는 이런 주님의 질문에 빌립처럼 대답할 때가 참 많습니다. “코로나 때문에 대면 전도도 어렵고 현실이 얼마나 어려운데 캠퍼스 전도, 직장 전도가 되겠습니까?” “경제가 어렵고 취직하기가 바늘구멍인데 제자양성이 되겠습니까?” “아무리 계산기 두드려 봐도 답이 안 나옵니다.” 이러다보면 사실 아무 것도 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다 계산해보고 현실에 맞춰 살려고만 하다보면 도대체 믿음이 설 자리는 어디일까요?
빌립이 보여준 것처럼 이성적이고 상식적인 냉철한 현실 인식은 칭찬받을 만한 일입니다. 왜냐면 현실을 직시하지 않으면 문제의식을 가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문제의식을 가지지 않은 사람은 예수님을 찾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빌립은 거기서 멈춰서는 안 되었습니다. 또 하나의 현실이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하나님이 살아 계시고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항상 현실을 볼 때 그 현실을 바라보시는 주님의 마음이 어떠하며 주님은 무엇이 이루어지기를 원하는지 함께 생각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뜻과 계획이라는 변수를 항상 계산에 넣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와 예수님과의 관계는 한 곳에 있을지라도 서로 다른 꿈을 꾸는 동상이몽의 관계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아브라함은 75세에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창12:1).” 그 나이에 새 출발을 한다니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됩니다. 또 이제까지 자식 하나 없던 사람에게 큰 민족이 나온다니! 이성적으로 현실적으로 실현 가능성이 없습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상식을 깨고 현실을 뛰어넘었습니다. 만약 이것이 믿음의 근거 없는 자기 확신이었다면 미친 사람 취급 받아야 마땅할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주신 명령이자 약속이기에 상식과 이성과 계산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더 신뢰하여 과감히 자신을 던질 수 있었습니다.
사실 우리에게도 만 가지가 부족합니다. 사람마다 조금의 차이는 있겠지만 가진 것도 없고 능력도 별로 없습니다. 주님은 이런 우리 사정을 아십니다. 그러나 다만 우리에게 한 가지를 원하십니다. 주님과 같은 마음을 가지고 믿음으로 기도하고 도전하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기도는 주님의 마음과 계획에 우리의 마음과 계획을 일치시켜 나가는 과정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주님께서 친히 하시는 일에 주님과 같은 마음으로 참여하는 사람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이때 누가 등장합니까? 빌립이 불가능하다고 말할 때 안드레가 열심히 뭔가를 찾고 있었습니다. 9절을 보십시오.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있나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사옵나이까?” 보리떡은 값싼 음식으로 가난한 사람들의 양식이었습니다. 세 덩어리가 보통 한 끼 음식으로 사용되었습니다. 물고기 역시 큰 멸치 정도의 작은 분량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에 비해 가지고 온 것은 터무니없이 너무나 작은 것입니다. 그래서 안드레도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사옵나이까?’ 말합니다. 빌립보다는 나아 보이지만 안드레도 자신의 행동에 대해서 확신은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안드레가 오병이어를 가진 아이를 데려온 이유가 무엇일까요? 예수님의 질문 속에서 어찌하든 무리를 먹이고자 하시는 예수님의 목자의 마음을 아마도 읽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는 부족하지만 손발을 놀려 음식을 찾았고 도시락을 가지고 있는 어린 아이라도 찾아 데리고 나온 것 같습니다. 안드레의 행동은 모자라고 덜 떨어진 사람의 행동이 아닙니다. 배고픈 무리를 먹이고자하는 예수님의 마음이 전달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양 무리를 향한 불쌍히 여기는 주님의 마음을 알기에 안드레처럼 “일단 가진 것을 찾아보자” “주님께 진심을 드리자” 이런 정신이 있습니다. 구체적인 해결책은 안 보일지라도 주님의 마음에 동참하기 위해 일단은 이리저리 찾아보고 발로 열심히 뛰어다닙니다. 그렇게 발로 뛴 결과 냉엄한 현실을 온 몸으로 깨닫게 되는 경우가 참 많습니다. 현실의 벽이 이 정도까지 높은 줄 몰랐구나” “현실이 이렇게까지 먹을 것이 없는 줄 몰랐는데 힘들구나” 이런 결론에 다다르곤 합니다. 그래서인지 경험이 많으면 많을수록 점점 더 부정적인 사람이 되어가기도 합니다. 한때 믿음의 깃발을 높이 들었던 사람들 중에도 이제는 “어차피 안 될 일 가지고 무리하지 맙시다” 이렇게 말하기도 합니다. 사실 심정만 가지고는 현실의 한계가 너무나 높기 때문입니다. 여기에도 중요한 한 가지가 빠져 있습니다. 우리는 심정과 더불어 현실 너머에 계시는 주님의 의지와 능력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사실 오병이어는 오천 명에 비해 ‘오’자만 같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 같습니다. 있으나마나 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안드레의 오병이어를 어떻게 합니까? 무시했습니까? 먹잘 것도 없는 것 가져왔다고 “니나 먹어라” 무안을 주었습니까? 11절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예수께서 떡을 가져 축사하신 후에 앉아 있는 자들에게 나눠 주시고 물고기도 그렇게 그들의 원대로 주시니라.” 예수님은 안드레가 데리고 온 아이의 보리떡을 가지고 감사기도하신 후에 잔디밭에 앉아 있는 무리들에게 나누어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손에서 끊임없이 먹을 것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은 뒤쪽에 앉아 있는 사람들까지 먹으려면 부족할 수 있으니 적당히 먹으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이 원하는 만큼 풍성하게 먹도록 하셨습니다. 물고기도 그렇게 감사기도하시고 나눠주셨습니다. 나눠주시되 그들의 원대로 주셨습니다. 원대로 주셨다는 것은 지금 말로 ‘무한리필’입니다.
사람의 능력과 심정만으로는 원대로 먹일 수 없습니다. 원대로 해주려면 돈이 무한정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원대로 주십니다. 이는 예수님의 은혜가 무한대임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영원토록 먹이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이것은 무리들의 생각처럼 예수님을 붙잡으면 평생 밥걱정 없이 살 수 있다는 그런 경제적인 의미가 아닙니다. 물론 주님의 의지와 마음에 따라 우리의 필요를 넉넉히 채워주시는 분임은 확실합니다. 그러나 이 말씀의 본질적인 의미는 누구든지 예수님께 나아오기만 하면 영원한 생명을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원대로 주시는 이 일은 처음부터 끝까지 예수님께서 의지적으로 작정하신 일이고 예정된 계획입니다. 우리가 원대로 주시는 주님께 믿음으로 나아가므로 예수님의 은혜의 풍성함을 체험하고 영생의 생명력이 충만한 삶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12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무리가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을 거두고 버리는 것이 없게 하셨습니다. 왜 먹고 버리는 것을 없게 하실까요? 아까워서일까요? 이는 예수님께서 주신 풍성한 은혜들을 잘 간직하여 그 풍성함을 기억하는 역사의식을 갖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풍성함의 역사를 이루신 예수님을 기억할 때 믿음이 생기고 감사가 피어오르게 됩니다. 그런데 대개는 자기들이 열심히 해서 되었으면 애착을 가지고 난리를 치는데 은혜로 된 것은 쉽게 잊어버립니다. 너무나 쉽게 은혜의 체험, 믿음의 체험을 잊어버리기에 문제가 생기면 항상 새로운 문제가 되어버립니다. 물질문제를 해결해주셨는데도, 물질문제에 다시 부딪히면 처음 그런 문제 부딪힌 사람처럼 두려워하고 힘들어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의 은혜를 거두면서 예수님께 대한 믿음을 새롭게 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내게 행하신 은혜들을 늘 간직하면서 그 은혜와 그 때의 믿음이 지속적으로 나의 삶을 지배하게 해야 합니다.
또 먹고 남은 조각이 열두 바구니에 찼습니다. 성경에서 ‘열둘’은 조직의 완전수입니다. 이스라엘은 열두 지파로 구성되었고, 예수님은 열두 제자를 선택하였고, 새 예루살렘 도성은 열두 기초석과 열두 진주문을 가지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열둘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상징합니다. 열두 바구니에 찼다는 의미는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은혜의 풍성함, 영생의 충만함을 경험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과거, 광야에서 하늘에서 만나를 비처럼 내리게 해서 200만 명의 이스라엘 백성들을 먹여주셨습니다. 또 수많은 메추라기 떼를 보내셔서 그들이 마음껏 고기를 먹을 수 있게 해주셨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도 지금 벳새다 산속 들판에서 오천 명의 무리를 풍성하게 먹여주셨습니다.
오천 명을 풍성하게 먹이신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태초에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분이십니다. 아무것도 없는 가운데서 세상을 충만하게 하고 풍요롭게 하고 풍성하게 채우시는 분이십니다. 아무것도 없던 들판에서 예수님으로 인해 먹을 것이 남아돌게 되었고 더불어 사람들의 즐거워하는 소리가 넘쳐나게 되었습니다. 풍요로움의 축제의 장이 되었습니다.
위에서 언급한 열왕기하 4장에도 오병이어 기적과 유사한 기적이 나옵니다. 42-44절에 보면 “한 사람이 바알 살리사에서부터 와서 처음 만든 떡 곧 보리떡 이십 개와 또 자루에 담은 채소를 하나님의 사람에게 드린지라. 그가 이르되 무리에게 주어 먹게 하라. 그 사환이 이르되 내가 어찌 이것을 백 명에게 주겠나이까 하나 엘리사는 또 이르되 무리에게 주어 먹게 하라. 여호와의 말씀이 그들이 먹고 남으리라 하셨느니라. 그가 그들 앞에 주었더니 여호와께서 말씀하신대로 먹고 남았더라.” 이 이야기는 엘리사가 보리떡 이십 개로 백 명을 먹이고 남은 사건입니다. 이 사건은 오병이어의 표적을 행하신 예수님을 예표하는 사건입니다. 오병이어 표적 사건은 단순한 기적이 아니라 하나님이 먹이시고 남게 하시는 역사요 예수님이 하나님께서 보내신 메시야임을 보여주는 기적 사건입니다. 더 나아가 이 사건은 예수님이 우리 영혼을 살리시는 생명의 떡으로 오신 분임을 나타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이 행하신 이 표적을 보고 “야, 예수님은 병만 잘 고치는 줄 알았는데 떡도 잘 만드시는구나.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구나” 말하였습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야로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억지로 붙들어 임금 삼으려 했습니다. 예수님이 임금이 되면 월급이 꼬박꼬박 자기 주머니에 들어오고 평생 먹는 문제는 해결 되겠구나 경제적인 메시야로 생각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오병이어 기적 사건을 통해 생명의 수여자 예수님, 영생을 주시는 예수님의 영적인 세계를 깨닫기보다 현실적인 빵문제 해결의 도구로만 생각하는 무리들을 안타까워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기도하시러 혼자 다시 산 속으로 들어가십니다.
이상에서 우리는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 예수님은 안드레의 오병이어의 심정을 꼬투리로 일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예수님의 주권적인 일하심 가운데에 우리가 동참하기를 원하시고 주님의 일하심을 경험하기를 원하십니다. 이를 통해 예수님이 어떤 분인가를 깊이 깨닫고 믿음을 가지길 원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 인생들의 삶을 윤택하게 하시고 풍요롭게 하기를 원하십니다. 차고 넘치도록 풍성하게 하시는 주님이십니다. 이런 삶을 위해 본질적으로 필요한 영생을 우리에게 주시는 분이십니다. 이 예수님을 의지하고 예수님과 함께 하는 것이 진정으로 윤택하고 풍요로운 인생입니다. 우리가 영생을 주시고 주님의 은혜로 풍요롭게 하시는 예수님을 깊이 알아가며 그분을 신뢰하고 의지하며 살아가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