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우의 수
김진선
왼손 약지의 치수를 알게 된 날이었어
세상이 기지개를 켜는 것처럼 우리 사이를 설명할 수 있는 숫자가 하나 더 생겼지
백 일 이백 일 삼백 일
금세 삼백육십오 일이 되는
독차지하고 싶은 처음과 마지막을 함께 미루어 봐
만약 내가 약속 장소에 나타나지 않았으면 어쩌려고 했어? 가까스로 도착했는데 목이 쉬도록 시비를 건다면?
만약 나랑 갑자기 연락이 안 돼 그럼 얼마나 기다릴 거야? 어디까지 찾아다닐까
찾아올 수는 있어?
바닥을 기어다니는 바퀴벌레도 제 짝이 있다고 생각하면 쉽게 때려죽일 수 없는 것처럼
단 일 분이라도 눈 감았다 뜨는 사이 줄어드는 숫자를 보는 것과 부른 배처럼 더해지는 숫자를 보는 것은 다르지
적막 속에는 적막을 깨우는 소리가 사랑 속에는 사랑을 깨는 말이 있어
어떤 사랑은 천천히 다 마시고 일어나자는 말이 식으면 이만 일어나자는 말로 변하는데
만약 태어날 아이가 누구를 닮으면 좋겠어? 나는 지치지 않고 물어
그것이 졸릴 때의 이목구비인지 딴청을 부리는 말투나 식성에 대한 것인지 당신도 물어 구체적으로
걸음짓 머릿결 숨소리
작고 옅은 점
이루는 모든 것
바람에 흔들리는 조화 같은 날들을 유심히 모아서
어떤 사랑은 세상에 없는 경우를 만들어 내는 재주가 있고 우리는 그 재주를 잘 낚아챘지
빈틈없이 깍지 낀 열 손가락에 꼭 맞는다
ㅡ사이버문학광장 《문장웹진》(2025, 11월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