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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의 도시 베네치아
아이처럼 여행에 신난 엄마
물의 도시 베네치아
이른 새벽 호텔 조반을 먹고 버스로 베네치아로 가는 길, (이차가 마지막까지 우리를 태우고 이동하던 버스)유럽은 어디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진황토색 뾰쪽 지붕’들이 줄지어 선 정겨운 마을을 따라 달렸다. 드넓은 목초지엔 어김없이 소, 말, 양들이 한가로이 풀을 뜯는 아름다운 풍경이 그림같이 달린 차창에 그리운 이들이 얼굴이 어른 거렸다. ‘베네치아(Venezia)’는 소설가 뒤마의 말처럼 죽기 전에 반드시 봐야 하는 도시가 아닌가 싶다! 아름다운 베네치아는 한 번 다녀간 사람은 몇 번이라도 다시 가보고 싶다는 곳, 아직 가보지 못한 사람은 일생에 한 번이라도 꼭 가보고 싶은 도시란다. 끝이 어딘지 모르게 이어지는 하늘 과 바다와 호수 가 펼쳐지는 유럽, 어디를 가나 한결 같이 아름다운 모습이다. 새벽이면 물안개가 자욱하고 낮에는 쪽빛 하늘과 흰 구름이 한 폭의 수채화를 만들어 내는 곳, 에메랄드 빛 바다와 하늘, 손을 뻗으면 닿을 것 같은 구름이 금세 타놓은 솜처럼 가까이 이방인들의 시선을 잡는다. 마치 오염 없던 우리 6~70년대 같은 길을 따라 도착한 베네치아, 세기의 로맨티스트 ‘카사노바’를 낳은 도시, 그의 이름에서 많은 이들이 희대의 바람둥이를 떠올릴 것이다. 물론 실제로 그는 수많은 로맨스로 유명하지만 카사노바는 당대 유럽 최고 수준의 지성이기도 했고 법학 박사이자 비밀 외교관, 종교 철학자, 사제, 바이올리니스트이기도 했으며, 프리메이슨 비밀결사 단원이었으며 군인이었다.
그에 대한 평가는 상당 부분 왜곡되어 왔고, 그 이면에 숨은 진면목을 볼 수 있는 책들이 그간 국내에서도 몇 차례 출간되었다 카사노바의 고향 베네치아를 상세한 지도와 함께 읽을 수 있는 책이라는 점에서 아주 독특하다하겠다. 카사노바 사후 2백 주기인 1998년에 독일에서 출간되어 화제를 모았던 '생갈의 기사'라는 책에서 베네치아가 꿈으로 남는 것은 그 자신의 고향에서 영영 추방당하는 운명에 처하기 때문이다. 여러 차례 인용되는 그의 자서전 <내 인생 이야기>는 18세기의 유럽 문화를 생생하게 재현하고 있는 귀중한 사료로, 카사노바가 호색가 이면에 숨은 진면목을 접할 수 있는 전설 같은 삶 때문이 아닐까 한다. 그 궤적을 따라가다 보면 그에 대한 평가는 새롭게 정리 된다. 사랑받는 희대의 사기꾼 카사노바가 벌이고 다녔다고 믿기 어려운 행각들이 꾸며 낸 이야기가 아니라 거의 대부분 실제로 일어난 일이었다는 사실을 상세한 지도상의 장소와 함께 확인해 주는 것뿐만 아니라 그와 동시대를 살았던 루소, 골도니, 괴테의 아버지 등이 기록한 베네치아의 모습을 통해 그 도시의 역사에 대한 풍요로운 지식을 접하는 것도 이 책을 읽는 또 다른 재미라 할 수 있겠다. 함께 편집된 다양한 삽화와 판화들이 흥미를 더하고 저자는 카사노바를 비롯한 각 저술가들의 텍스트마다 아주 조심스럽게 코멘트 했고, 카사노바의 독자에게 읽어 보기를 권하는 '참고 문헌'까지 수록해 놓았다. 카사노바의 글에서 언급된 귀족의 궁이나 광장 등에도 저자의 상세한 설명이 붙어 있어 카사노바 문학을 만든 고향, 베네치아를 살펴보는 데 손색이 없다.
베네치아 가을이 시작되는 9월 첫째 일요일 오후에 시작되는 곤돌라 경주는(이탈리라어로 ‘흔들리다’는 뜻을 가졌단다. 곤돌라는 길이 10m 이내 너비 1.2m~1.6m의 폭이 좁은 배다.) 축제 ‘레가타스토리카’이다. 번쩍이는 의상을 차려입은 사람들이 중세를 흉내 낸 퍼레이드를 벌이면서 막이 오르고 거리에 잔잔한 음악이 울려 퍼지면 운하에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룬다. 황금의 도시 베네치아 프랑스 대사 필립 드 코민은 1495년경 자신이 본 도시 중 베네치아가 “가장 행복에 빛나는 도시”라고 환호하면서, 흰 대리석으로 이루어진 건물 전면들. (참고 이탈리아엔 세계 최고의 대리석 광산이 있다)금빛 현관이 있는 방들. 그리고 장식이 풍부한 벽난로 등을 언급했다. 1797년 베네치아를 정복했던 나폴레옹은 산마르코 광장을 두고 “유럽에서 가장 아름다운 살롱이며, 이것을 덮을 곳은 하늘밖엔 없다”라고 극찬했단다. 1786년 9월, 이탈리아를 여행 중이던 ‘요한 볼프강 괴테’는 섬을 에워싸고 있는 석호(潟湖)에 머무르면서 존경심에 가득 차서 이렇게 말했다고, “베네치아는 누가 방문해도 경이로운 섬이며, 이 도시의 모습이 싫증이 날 때까지 머무르겠다.” 제노바와 무수히 많은 전쟁을 해오던 베네치아가 1380년에 마침내 최종 승리 한 이후, 이 수상 도시는 명실상부 한 세계 무역 중심지가 되었고 수호성인인 복음서 저자 마가의 이름에 따라 ‘산 마르코 공화국’ 이라 불리던 베네치아는 1423년에 45척의 갤리선으로 이루어진 함대와 300척의 해외 운항선으로 구성된 상선대(尙船隊)를 가지고 있었다.
훈족의 침입으로 생겨난 물의 도시, ‘베네치아’
베네치아가 생기기 전에는 이곳이 황량한 바닷가 갯벌이었던 곳이다 452년 훈족의 왕 ‘아틸라(Attila)’와 그의 포악한 종족들이 이탈리아를 침범해 동북부에 위치한 아퀼레이아를 3개월간 포위하고 함락시켜 철저히 파괴했으며 아틸라는 포강 유역으로 진출해 겁에 질린 밀라노, 파비아 등에 무혈 입성했으며 그 뒤도 이들은 파죽지세로 파도바 · 베로나 · 브레시아 · 베르가모 등 일곱 개 도시를 모두 휩쓸었다. 훈족은 그 어느 민족보다 잔혹하였고 싸움에서 승승장구하였으며 마치 전쟁의 신처럼 유럽과 이탈리아를 유린하였다. 이탈리아 북부 베네토 지방 사람들은 그들의 거주지가 습격당하자 무작정 도망친 곳이 갯벌이었고 갯벌에는 훈족의 말이 빠져 갯벌에 들어오지 못해 살아남았다 그들은 할아버지가 일러준 나무, 물에도 잘 썩지 않는 ‘백양목’을 베어다 바다에 촘촘히 박아 하나씩 삶의 터전 섬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 엄청난 일을 목숨을 내놓고 했으리라 어떤 다른 대안이 없었으니……. 인간의 두뇌는 정말 그 끝이 어딘지 모르겠다. 인구가 늘어나면 다시 나무를 박아 섬을 만들고 이렇게 만들어진 118개 섬과 409개의 다리가 연결되어 있으며 베네치아에 있는 많은 운하는 모든 섬 사이를 이어주는 수로역할을 하고 이 섬들의 중심 수로인 ‘그란데’ 운하가 2개이며 넓은 만곡부 주위를 흘러 도시를 통과한다.
너비 37~69m이며 평균수심이 2.7m인 그란데 운하 주위에는 많은 대저택, 교회, 해상주유소 등이 있다. 19세기까지 안토니오 다 폰테가 설계한 리알토 다리가 그란데 운하를 가르지르는 유일한 다리였지만, 나중에 다리 2개 더 건설되었고 409 개에 달하는 베네치아 다리들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은 베네치아 공화국 감옥과 팔라초 두칼레(도제의 궁전) 사이에 짧게 서 있는 이것이 '한탄의 다리'다. 관광객들이 여기에서 필수적으로 사진을 많이 찍는 곳이다. (아래사진 참조) 따라서 동남아의 수상 가옥과는 전혀 다르다고 하겠다. 처음 비잔틴의 지배를 받으면서 급속히 해상무역지로 성장하여 7세기 말에는 무역의 중심지로 알려졌고, 도시공화제(都市共和制) 아래 독립적 특권을 행사하였으며 베네치아에는 ‘세레니시마’ 라는 가문이 있었는데, 이 가문은 1202년에 ‘엔리꼬 단돌로 총독’이 콘스탄티노플을 정복하기 위해 4차 십자군 지원을 요청한 당시부터 세력을 급속히 확대, 중계무역으로 부를 축적하였다. 이후 베네치아는 소위 중계 무역 도시, 즉 홍콩과 같이 잘 살게 되었으며, 15세기부터 밀라노, 피렌체와 더불어 이탈리아를 장악했으나1797년에 베네치아는 자치권을 잃게 되는데 나폴레옹이 침략해 베네치아를 오스트리아에게 넘겨 버렸기 때문이다. 베네치아의 주인인 세레니시마 가문은 몰락하고 1866년 베네치아는 이탈리아로 다시 돌아왔다. 문화적으로 살펴보면 베네치아는 주로 비잔틴 양식과 북쪽에 위치한 지리적 이점으로 고딕 양식, 그리고 이탈리아 중부에서 영향을 받은 르네상스 양식이 혼재되어 있는 곳이다. 베네치아에는 지하철이 없으며 도로가 좁고 자동차가 단 한 대도 없는 물의도시 베네치아의 주된 교통수단은 수상 버스(바포레토)다. 수상 버스는 곳곳에 정류장이 있어 이용하기 쉬우며 승차권은 각 정류장마다 있는 판매소에서 구입하면 되고 수상 버스 노선은 많은 편이며 그 중에서도 여행자들이 자주 이용하는 1번과 82번을 기억하면 된다. 82번은 1번과 같은 노선의 급행이다. 2011년 4월 1일부터 새 ACTV패스 도입했으므로 개찰 안할 시 벌금은 6유로이며 추가로 행정관리비까지 내야 하니 주의해야 하며 또한 수상 택시가 있다. 빠르고 편리한 교통수단이지만 요금이 조금 비싸다 기본요금이 약 10유로(휴일 할증이 있으며 화물 요금은 따로 받는다.)~4인 기준 60유로 정도. 그리고 곤돌라가 있다. 베네치아에 왔다면 한 번쯤은 타볼 만하다. 비쌀 것이라 생각하지만 합승 제여서 여러 명이 타면 큰 부담이 되지는 않는다. 곤돌라 사공, ‘곤돌리에라’의 칸초네를 들으며 유유자적 즐기는 곤돌라 투어는 새로운 경험이라 할 수 있다. 기본요금 4인 기준 80유로(약~30분)
베네치아 건축물은 다양해서 이탈리아·아랍·비잔틴·고딕·르네상스·마니에리슴·바로크 양식 등이 모두 나타난다. 수세기 동안 베네치아의 사회·정치 중심지였던 산마르코 광장은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광장으로 손꼽힌다. 이 광장의 3면에는 아치가 이어진 회랑이 줄지어 서 있고, 높이 99m인 캠퍼닐리 종루가 서 있는 동쪽 끝은 황금빛 산마르코 바실리카와 팔라초 두칼레의 분홍빛 정면으로 막혀 있다. 광장 입구는 그란데 운하와 넓은 산마르코 저지가 만나는 지점에 있고, 팔라초 두칼레에 있는 화려한 방들은 베네치아의 많은 위대한 예술가가 장식한 것이며, 베네치아인이 오랜 세월 동안 수차례의 정복으로 모은 수집품이 산마르코 광장을 메우고 있다. 베네치아에는 역사적·예술적으로 중요한 대저택과 옛 주택이 450여 채 남아 있다. 이 건축물들은 대개 말뚝이나 돌 받침대 위에 세워져 있는데 원래 소유 가문의 수중에 남아 있는 것은 별로 없다. 그 대부분에 사무실과 골동품상점이 들어섰으며 일부는 호텔로 개조되어 명성을 얻고 있다. 그란데 운하를 끼고 산타마리아 델라카리타의 옛 수녀원, 성당, 상인조합건물에 들어 있는 아카데미아는 주요미술관으로서 이곳의 유명한 예술가들의 작품을 전시하고 있고 아카데미아 소장품 가운데 일부는 봉사단체 조합들인 스쿠올레가 제공한 것으로, 이 조합들 중 2개가 지금까지도 장식품과 그림을 옛 모습대로 완전히 복구한 원래의 조합건물을 사용하면서 자선단체 활동을 하고 있다. 1430년 도미니쿠스 수도회가 헌당한 산티조반니에파올로 교회는 주민들이 산차니폴로 교회라고 부르기도 하며 조반니 벨리니가 제작한 폴리프틱(성단의 배후 등에 4매 이상 되는 패널을 이어 맞춘 화상)과 파올로 베로네세가 제작한 천장화가 눈길을 끈다. 프란체스코 수도회에서 13세기에 세운 산타마리아 데이프라리 에는 화가 티치아노가 묻힌 웅장한 무덤과 함께 그의 〈성모승천〉·〈페사로 마돈나〉 등의 작품이 보관되어 있다. 그밖에 훌륭한 교회 건축물로 일레덴토레·산조르조마조레·레치텔레 교회 등이 있다(베네치아아카데미아 미술관). 베네치아는 음악으로도 유명한데, 음악은 도시의 상업적 세력이 쇠퇴하면서 더욱 중요해졌다.
베네치아 관광은 크게 ‘산 마르코 성당’ 주변과 아울러 거리의 상점 구경으로 나뉘며 베네치아에서라면 유적지는 놓치더라도 운치 있는 가게들은 꼭 한번 구경하는 게 좋다고 한다. 베네치아는 복잡해도 치안은 좋다. 나폴리처럼 좀도둑은 별로 없단다. 이곳은 고급 휴양지이기 때문에 치안이 철저해서 좀 지저분하게 보이는 사람들은 무조건 경찰들이 불심검문을 한다고, 이곳에 동양 노동자들이 많기 때문이란다. 옷은 깨끗하게, 외모는 단정하게 하고 다니는 것이 불이익을 당하지 않는 방법이란다. 우리는 버스에서 내려 배를 타고 수로 중심가로 들어갔다 베네치아 현대 생활에 필수적인 전기, 수도, 통신, 가스 등, 인프라는 물속에 만들 수 없기 때문에 길 바로 아래 얕은 지하에 묻고 운하에 접한 건물들은 조차(潮差)에 따라 바닷물이 들고 나면서 갈수록 약해지고 벽돌이 점점 침식되어 떨어져 나가기도 하며 게다가 벽돌로 쌓은 벽 안의 진흙도 바닷물을 먹어 함께 쓸려 나가기도 한단다. 모터보트가 강한 물살을 일으켜 침식이 더욱 가속화되고 이로 인해 건물의 기초가 점점 약해져 위험한 순간이 닥칠 수도 있으며 또한 유속이 느린 운하에 진흙이 계속 퇴적되어 배가 다닐 수 없게 되기 때문에 이를 유지보수하기 위해 다양한 기술들이 활용되는데 우선 운하의 일정 구간을 나무로 된 임시 제방으로 막아 물을 뺀 뒤 운하에 쌓인 퇴적 바닥을 준설하고, 건물의 기초를 강화시키기 위해 벽 속으로 시멘트를 주입시켜 굳히거나 오래된 벽돌을 바꾸기도 한단다. 여러 번 차와 배를 갈아타고 베니스여행의 최고 ‘곤돌라’를 타고 수로를 돌았다. 곤돌라 사공들의 기막힌 솜씨(노 젓는 기술) 에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닿을 듯 스치며 지나는 아찔함을 맛보며 교차하는 수로를 한 시간 가량 돌면서 곤돌라 사공들 수입에 다시 한 번 놀랐다 2~6명을 태우고 배의 고물에 서있는 사공이 오른쪽에서 노를 한번 크게 저으며 나아간다. 곤돌라 이물(배의 머리 쪽)에는 고물(사공이 서 있는 곳) 의 것보다 조금 큰 뾰족한 쇠가 장식되어 있다. 어떤 곤돌라에는 떼었다 붙였다 할 수 있는 지붕이 있어서 객실을 만들 수도 있다. 16세기에 열린 곤돌라 경기가 보트 경기의 시초였으며 이 경기는 남녀 모두 참가했단다. 1562년 사치금지법이 실시된 뒤로 모든 곤돌라는 검은색으로 통일되었으며 대부분 영업용이지만 제복을 입은 하인이 시중드는 개인용도 있다. 건조 비용이 많이 들어 지금은 사양산업이 되어가고 있는 곤돌라 사공들의 수입은 60%세금을 제외한 금액이 년 1억3천만 원이란다. 그래서 곤돌라 운전 자격이 엄격할 뿐 아리라 합격이 굉장히 어렵다 한다.
산 마르코 대성당(Basilica San Marco)성당에는 이집트 지역에서 가져온 여러 유물과 ‘산 마르코(San Marco)’의 유골을 안치할 납골당의 목적으로 9세기에 세웠단다. 성당의 종탑은 높이가 99m로 9세기 무렵부터 있어 왔으나 무너지고 손상을 받았다. 1511년~1514년까지 다시 지어졌지만 1902년에 잘 서 있던 탑이 와르르 무너져 버렸다고 지금 보는 탑은 1912년에 다시 지었다하고 이 탑은 거센 바닷바람을 많이 맞아서 무너지기 쉽다 하며 전망이 좋아 이곳에서 망원경으로 알프스 산맥까지 볼 수 있단다. 11세기에 롬바르디아 양식이 가미되어 리모델링되었고 전체적으로 비잔틴 양식을 지니고 있으며, 돔은 총 5개로 이루어져 있고 산 마르코의 업적을 기리는 12~13세기의 그림들이 있다. 하지만 베네치아가 오스트리아로 넘어갈 때 나폴레옹과 오스트리아에서 유물을 모두 가져가고 그 뒤 나폴레옹은 워털루 전쟁의 패배로 그때의 전리품들을 돌려주게 되었는데 다 돌려받지는 못했단다. 산 마르코 성당 입구 위의 4마리의 청동 말들은 베네치아가 1204년 콘스탄티노플 에서 가져온 것이며, 현재의 것은 복제품이며 진품은 성당 2층의 박물관에 있다. 이 말들은 현재 여러 유럽의 장식물로 많이 쓰이는데 로마에 있는 법원 건물과 프랑스의 루브르 박물관의 카루젤 개선문 등지에서 볼 수 있다. 산 마르코 성당 앞에 있는 광장의 좌우에는 오래된 카페들이 있고 카페에는 무명 악사들이 연주를 하기도 하며, 이 카페에 앉아 느긋이 취향에 맞는 것을 맛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가격은 그리 비싸지 않다.
두칼레 궁전(Palazzo Ducale) 제노바의 전성기 때 만든 궁전으로 피사, 베네치아와의 해전에서 연전연승하여 지중해의 상권을 장악하게 되었을 때 만들어졌다한다 당시 오베르토 스피놀라와 코라도 도리아는 1291년에 산 로렌조와 산 마테오 성당 사이에 있는 모든 건물들을 사들여, 3년 후, 궁전의 주요 부분이 건설되기 시작했으며 이 궁전은 1339년부터 ‘두칼레’ 라 불리게 되었고 제노바의 첫 제독인 ‘시몬 보카네그라’가 여기서 머물게 되는데 14세기 때 궁전이 확장되었으며, 내부 광장의 필요성이 제기되면서 다른 많은 건물들도 설치되었단다. 16세기 때는 많은 중세 시대 건물들이 사라지고 궁전은 공화국을 상징하기 위해 외양을 바꾸었으며 1591년에 건물의 외양이 현대화되었다고, 거대한 홀이 정원 옆에 설치되었고 이중 계단도 생겨나고 궁전의 서쪽은 바로 대회의당과 중회의당으로 통하는 구조로 지어졌다. 같은 건물에 있는 예배당은 단순한 직사각형 방으로 만들고, 다양한 프레스코화들이 여왕의 승리를 묘사하고 있다. 1777년의 화재로 궁전의 일부(대회의당)가 소실되기도 하였으며 쥬셉페 이솔라는 1875년에 리구리아의 무역을 묘사하는 프레스코화를 남겼으며 건물의 중심부를 재건축할 때 티치네제 시모네 칸토니의 디자인이 사용되었고 유명한 신 고적 양식으로 만든 건물이며, 천장은 돔 형태로 되었다. 19~20세기에 이루어졌던 작업들은 궁전을 새롭게 만들어 주변과 격리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오르란도 그로쏘에 의해 만들어졌던 특별한 정문은 궁전의 동쪽에 있는 페라리 광장과의 구역을 구분 짓기 위해 만들어졌단다. 이 궁전이 최종적으로 완공되었을 당시, 궁전은 유럽에서 가장 규모가 큰 성이었다. 이후 건축가 죠반니 스팔라의 프로젝트 덕분에 궁전은 거의 옛날 모습으로 원상 복구 되었다고, 이 건축물의 특색은 건물들을 서로 이어주며 ‘떠 있는 길’이라 불리며 철로 만들어진 나선형 구조물이다. 이렇게 산마르코 성당을 비롯해 그곳 명소를 두루 다 돌아보고 다음여행지로 가기 위해 버스에 오르며 인상 좋은 ‘안토니오’(버스기사) 에게 가벼운 인사를 건넸다. “본 죠르노” 간단한 인사지만 그들은 아주 좋아한다.
계속…….다음여행지 ‘밀라노’
탄식의 다리(Ponte dei Sospiri, Venezia)
베네치아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유명한 이 다리가 작은 운하를 사이에 두고 두칼레 궁전과 감옥을 잇는 다리다. 궁전에서 재판을 받고 감옥으로 가던 죄수들이 한숨을 쉬는 곳이라 해서 '탄식의 다리'로 불리게 되었으며 베네치아는 홍수가 많아, 지하 감옥은 홍수에 잠겨 버리기 때문에 이 다리를 건너 감옥에 들어가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한다는 말이 전해지면서부터며 더 이름이 났고 카사노바 탈옥으로 유명하기도 하단다. (10월부터 우기가 시작 되어 겨울 내내 비가 내린다는 베네치아는 정말 물의 도시 같다.)
산마르코 성당 과 두칼레 궁전(Palazzo Ducale)
곤돌라 gondola
산마르코 성당
리알토 다리(Rialto Bridge)
프레스코화 미켈라젤로 작품ceiling-painting
산타마리아 델라 살루테 교회 Santa Maria della Salu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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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베네치아 여행담
너무 행복했어요
사모님이신가 봅니다
미인이시네요
베네치아
건축물은 이탈리아
아랍 비잔틴 르네상스
바로크 양식
책에서만 보았던
상식 직접 보셨으니
가슴 벅찬 여행길이셨네요
전 유럽에
언제나 가보려나요
부럽습니다
베네치아 물의 도시답게
신기함으로 다가옵니다.
도심 빌딩사이로 배가 다니는 도시
감사히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