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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법을 완성하러 오신 예수
마 5:17-20
17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18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19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의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20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마 5:17-20 / [율법의 완성] 내가 모세의 율법과 예언자들이 쓴 책을 없애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없애러 온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왔다. 18)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천지가 없어지더라도 율법은 일점 일획도 없어지지 않고 다 이루어질 것이다. 19) 그러므로 만일 누구든지 별로 중요하지 않은 계명이라 하여 이를 어기거나, 어기도록 남을 가르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하늘나라에서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이 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율법을 가르치고 그 율법에 순종하는 사람은 하늘나라에서 큰 사람이 될 것이다. 20) 내가 너희에게 분명히 말한다. 너희가 바리새파 사람들이나 율법학자들보다 더 의롭게 살지 못한다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예수님의 새로운 율법이 선포됩니다. 본문 이후로 다섯 번의 “~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의 말씀이 반복됩니다. 본문은 다섯 번의 구체적인 율법의 사례를 들기 전 율법을 대하시는 예수님의 자세를 소개합니다.
율법을 완성하는 길(17-18)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오신 이유를 분명하게 선포하십니다. 율법이나 선지자를 페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전하게 하기 위하여 오신 것입니다. 여기서 율법과 선지자는 구약의 말씀을 대표합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구약의 모든 말씀들을 성취하시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율법은 문자주의가 아니라 정신주의로 해석하셨습니다. 문자주의적 율법해석은 율법에 기록된 문자 그대로를 지키면 율법을 지켰다고 보는 것입니다. 반면에 정신주의는 그 율법이 일컫는 정신이 무엇인지 그 가치관과 생각으로 살아가는 삶을 의미합니다. 율법이 빠지기 쉬운 오류는 문자주의에 함몰되어 율법의 정신을 잃어버린다는데 있습니다.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율법의 가장 큰 정신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같은 맥락에서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롬 13:10). 믿음과 사랑의 가치관으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갈 때 우리는 율법의 일점일획을 성취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후로 등장하는 다섯 번의 말씀이 그 실례를 보여줍니다.
너희 의가 더 낫지 못하면(19-20)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율법해석은 문자주의였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율법을 지킬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선언하십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나을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이 말씀은 우리의 의로는 천국에 이를 수 없음을 의미하는 것이며, 또한 가장 큰 의는 믿음의 의, 하나님의 의(롬 3:21)임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이 말하는 율법의 의로는 결코 천국을 소유할 수 없습니다. 천국은 율법의 의가 아닌, 하나님의 의를 소유한 자만이 들어갈 수 있는 곳입니다.
적 용 :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가는 나의 가치관은 무엇입니까? 기독교적 세계관 가운데 내 삶의 방향은 설정되어 있습니까? 오늘 내 삶속에서 하나님의 법을 성취해 갈 작은 실천은 무엇입니까?
어떤 의학박사의 논문에서 ‘효자는 장수한다.’라는 글이 있습니다. 저자는 이것이 성경적인 가르침이라고도 말하는데요. 효도와 건강의 상관관계를 의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느냐가 참 흥미로웠습니다. 책의 한 대목에는 효자는 항상 부모에게 감사하며, 풍요롭고 따뜻한 마음으로 부모님을 생각하는데, 이 때 생체기능이 활성화 돼 엔돌핀이 생산되고, 시간이 갈수록 면역기능이 강해져 질병이나 스트레스에 대한 저항력이 높아질 수밖에 없다. 라고 말합니다. 자식은 부모님과 관계가 원만할 때 항상 마음이 든든하고, 마음의 병이 또 육신의 병과 관련 있으니 의학적인 근거 또한 다분하다 생각이 듭니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보이는 부모님을 공경하는 것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으로 이어진다는 진리를 기억해야겠습니다.
< 설 교 >
예수님의 종교개혁
매년 10월 마지막주일은 종교개혁주일로 지킵니다. 오늘 처음으로 교회에 나오신 분이 계시다면 이런 생각을 하실 것입니다. ‘교회도 개혁이 필요한가?’ 왜냐하면 이 개혁이라는 말 자체가 무엇인가 잘못되어져 있는 것을 새롭게 한다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인류의 역사는 태초부터 지금까지 끊임없이 개혁되어 왔으며 앞으로도 개혁되어져 갈 것입니다. 개혁되어지지 않으면 죽게 되어 있습니다. 어떤 때는 개혁운동이 인간 삶에 놀라운 효과를 가져온 때도 있었고 개혁 자체가 잘못되었을 때는 오히려 큰 불편만 가중시킨 경우도 있었습니다.
개혁의 종류는 모든 분야에서 이루어집니다. 지주들이 막대한 토지를 소유하고 소작농을 시켜 짓던 농사를 토지개혁을 시켜 농사짓는 농부들이 토지를 소유하게 한 일도 우리나라 역사에 있었고, 제5공화국, 제6공화국, 또 제7공화국이 될지도 모르는 정치 개혁도 계속되어지고 있습니다.
사회적인 개혁도 끊임없습니다. 금융 거래를 실명제로 하고 부동산 거래법을 새롭게 하고 날마다 새로운 것을 찾아가는 것이 세상입니다. 아울러 교회도 개혁되어져 왔고 또 앞으로도 계속 되어질 것입니다. 인간들은 누구나 불완전의 존재들이기 때문에 비록 교회라 할지라도 완전하지 못한 인간으로서 하는 일이 언제나 개혁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하게 됩니다.
신학에서 교회를 두 가지로 구분합니다. 유형교회, 무형교회가 있습니다. 유형교회는 지금 교회와 같은 우리 눈에 보이는, 우리가 몸담고 있는 보이는 교회를 말합니다. 유형교회는 불완전하다는 것이 신학의 정의입니다. 무형교회는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만이 아시는 교회, 또는 하늘나라에 존재하는 교회로서 완전한 교회입니다. 아울러 유형교회는 무형교회의 그림자 역할을 합니다. 어느 날 사람들이 예수님에게 예루살렘 성전 건물의 장엄한 것을 자랑삼아 말했습니다. “이 성전을 보시오. 이 성전은 46년 동안이나 걸려서 건축한 장엄한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그랬더니 “때가 되면 이 성전의 돌 위에 돌 하나 남지 않고 무너질 것이다.” 주후 70년에 예수님의 말씀은 그대로 성취가 되어 로마군에 의해서 돌 하나 남지 않고 무너졌습니다. 다시는 재건하지 못하고 마지막 한 쪽의 벽면이 지금까지 남아있어서 그것이 통곡의 벽이 된 것입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이 하나님을 예배하는 교회를 무너뜨리게 내버려 두시는가?’라는 의문이 생기실 것입니다. 무너질 수도 있고 불타서 없어질 수도 있습니다. 솔로몬의 성전처럼 잿더미가 될 수 있습니다. 세상의 교회가 불완전하다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됩니다.
제 친구 목사 한 분이 교단의 사무국장을 하는데 자기가 일하는 교단에서 일 년에 경기도와 서울에서 200개 교회가 없어진답니다. 그리고 또 그만한 숫자가 새로 생긴다는 것입니다. 유형교회는 없어질 수도 있고 또 생길 수도 있습니다. 진리의 기둥과 터인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기초로 해서 만세 반석 같은 믿음으로 영원무궁한 하나님의 교회라고 세웠는데 두 달도 못되어 없어져야 될 때 우리에게 ‘아, 하나님의 교회가 없어지다니!’ 하는 믿음의 갈등이 올 수 있습니다. 어떤 때는 교회가 술집이 되기도 하고 술집이 교회가 되기도 합니다.
송탄에 있는 어느 교회에 창립 예배를 드린다고 해서 갔습니다. 교회 건물이 미군부대 옆에 지은 아주 고급 바였는데, 그 부대가 철수하므로 장사가 안 되어 팔았는데 교회가 사서 예배당으로 쓴다는 것입니다. 그 교회 담임 목사는 얼마나 신이 났는지 모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너무나 좋습니다. 이 건물의 모든 구조가 교회로 쓰기에 너무나 적합하게 잘 꾸며져 있습니다. 노래 부르던 무대 위에 강대상 하나만 갖다놓으니까 당장 교회가 되었습니다. 마이크 시설까지 얼마나 잘해 놨는지 손댈 데가 없습니다.”
그러면서 뭐라고 그러시는지 아십니까? “본래 성령 충만한 사람과 술 취한 사람은 비슷합니다.” 왜냐? 둘 다 정신없이 떠듭니다. 술 취한 사람은 돈을 아까워하지 않습니다. 있는 돈 다 꺼내서 모두 쓰고 옵니다. 성령에 취하면 주머닛돈을 남겨오지 않습니다. 교회 왔다가 다 내고 갑니다. 술 취한 사람은 무서운 사람도 없고 아무에게나 욕도 합니다. 성령이 충만해도 똑같아집니다.
유형교회는 술집을 교회로 써도 괜찮습니다. 그런 교회들 많습니다. 상관없습니다. 헐어버리고 새로 만들어도 아무 상관없습니다. 팔아도 이사 가도 괜찮습니다. 갈보리교회도 삼성동에서 팔고 이사를 오지 않았습니까? 필요에 따라서 하는 겁니다. 이것이 유형교회에 대한 신학의 정의입니다. 그 이유는 완전하지 아니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도 얼마든지 잘못되어진 역사가 있었기 때문에 개혁운동이 일어난 것이요, 보다 나은 진리를 찾아가는 노력이 끊임없이 필요한 것입니다.
성경의 기록들을 관찰해 볼 때, 이스라엘 민족사가 잘못되어져 갔을 때 요시야 왕이 대대적인 민족 개혁운동을 전개해서 민족이 새로워지는 역사를 구약에서 찾아볼 수 있고 또 사무엘의 미스바 성회도 대대적 민족적 개혁 작업이었습니다.
신약에 세례 요한의 개혁운동을 봅시다. 세례가 뭔지도 모르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선포하고 회개를 위해 모두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라.” 했더니, “온 예루살렘 사람들이 모두 와서 그에게 세례를 받으니라.” 세례요한이 종교 개혁운동을 일으키는 것을 볼 수 있지 않습니까?
오늘 성경말씀 가운데는 예수님이 종교 개혁을 선언하시는 말씀이 나타납니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다.” 왜 이런 선언이 필요하셨는가?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하시는 일이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고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종교인들은 지금 우리들이 믿고 있는 하나님을 똑같이 믿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믿는 방법으로 그들에게 주어진 교과서가 율법입니다. 그들은 모세 5경을 기초로 해서 구체적 율법의 조항들을 613개나 만들었습니다. 얼마나 율법을 얼마나 소중하게 생각했느냐? 율법학교를 세워 아이들이 5살이 되면 가르치기 시작합니다. 머릿속에 613개의 율법 조항들을 다 암송하게 만듭니다. 밥을 먹어도 걸음을 걸어도 율법에 맞느냐 안 맞느냐를 항상 따지며 살아갑니다. 어쩌다가 율법을 어기는 사람이 나타나면 광고를 합니다. 소리를 쳐서 “이 사람이 이런 율법을 어겼습니다.” 온 동네 사람들이 모이게 하고 야단을 치고 경고를 하고 심하면 사정없이 때려서 그 자리에서 죽게 만듭니다. 그렇게 알고 살아가는 사람들 앞에 예수님이 나타나셔서 설교하시고 행동을 하시는데 율법을 막 어기는 것같이 보였습니다. 율법에는 죄인들과는 한 자리에 앉아서 먹으면 안 됩니다. 시편 1편에도 있습니다.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그런데 예수님이 삭개오 집에 들어가서 겸상을 하고 이야기를 하십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바깥에서 뭐라고 합니까? 수군거려 가로되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도다.” 다른 사람은 안 들어옵니다. 왜? 율법이니까 그런 겁니다. 어떤 때는 예수님이 안식일을 범합니다. “왜 안식일에 이런 일을 하느냐?” “하면 어때? 나는 안식일의 주인이다.” 그래서 마찰이 생깁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씻지 아니한 손으로 음식을 먹었다가 심하게 비판을 당하는 기록이 성경에 나오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신 가장 큰 이유가 뭡니까? 율법을 어겼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망령되게 한 죄,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한 죄입니다. 율법에는 그렇게 하면 안 되기 때문에 끌어다 죽인 겁니다. 빌라도가 말합니다. “나는 그에게서 죽일 죄를 찾지 못했다. 무슨 죄가 있느냐?” “율법을 어겼습니다.” “율법이 뭐냐? 나는 그게 뭔지도 모른다. 우리 로마법에는 이런 사람은 선한 사람인데 왜 나더러 이 사람을 죽이라 하느냐?” 이런 갈등이 생깁니다. 율법을 폐한다고 믿었기 때문에 예수님을 죽인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왜 이렇게 자기가 죽으면서까지 이런 일을 하셨는가? 예수님이 그렇게 하신 이유가 본문에 나와 있습니다. “나는 율법을 완전케 하려 함이로다.”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과 율법의 관계는 무엇인가? 예수님은 율법의 완성자입니다. 율법을 완전케 할 의무를 가지고 세상에 오신 분입니다. 모든 율법은 예수 그리스도를 예언한 말씀입니다. 그 예언이 성취된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출현입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셔서 보니까 하나님의 백성들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율법을 믿고 있으며, 잘 믿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잘못되게 믿고 있습니다. 율법은 인간을 구원하는데 도움이 되라고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을 죽이는 무기로 사용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율법의 근본정신은 모두 다 잊어버리고 형식만 중요시하여 세상에서 가장 질이 나쁜 종교로 만들어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종교개혁을 일으키시는 겁니다. “죄인과 함께 있지 말라 한 율법은 죄인과 같이 악에 동참하지 말라는 것이 율법의 정신인데 너희는 사람 자체를 미워하는 것으로 율법의 정신을 잘못 사용하고 있도다.”
율법의 정신은 죽을 사람을 살려내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 세상에 좋은 종교와 나쁜 종교가 있습니다. 좋은 종교는 어떠한 형편에 있던지 사람을 구원하고 살리는 종교요, 나쁜 종교는 어떤 명목으로라도 사람을 죽이는 방법을 채택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보십시오. 무수하게 죽을 사람을 모두 다 살려내는 복음의 정신을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아버지에게 큰 죄를 지은 탕자가 돌아오니까 금방 아들의 권리를 되찾았습니다. 율법으로 말하면 그런 사람은 부모를 거역했기 때문에 죽여야 합니다.
예수님의 예화는 돌아오자마자 금가락지를 끼우고 비단 신을 신기고 목욕을 시켜서 제자리에 올려놔서 회복시킵니다. 죽어서 썩은 냄새가 나는 나사로를 다시 살려냅니다. 병이 들어 죽을 지경에 있는 그 당시의 죄인들이라고 하는 환자들을 모두 다 고쳐주어 살려냅니다. 문둥병자는 저주 받았으니까 빨리 죽으라는 것이 율법주의자들이 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다 고쳐주셨습니다. 사람들이 손에 돌멩이를 들고 와서 죽이려고 하는 간음 현장 여인도 예수님은 살려내십니다. 당시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혜 부분은 잊어버리고 차디찬 형식만 믿고 율법이란 몽둥이 하나만 들고 다니면서 ‘뭐 때려잡을 거 없나?’ 하고 돌아다니다가 조금 걸리면 사정없이 두들겨 패서 죽여 버리는 그게 무슨 하나님의 율법의 정신이냐? 그래서 예수님이 개혁하신 것입니다.
종교 개혁 운동이 절정에 달했던 시기가 마틴 루터 시대로 그 이후 개신교회가 탄생했는데 결정적으로 일으킨 날을 1517년 10월 31일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이렇게 10월 마지막주일을 종교개혁주일로 지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생각해야 됩니다. 지금 우리 교회는 ○○교회라는 간판을 걸고 세계 선교를 하고 있고 믿음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담임 목사인 저는 신학을 전공한 사람입니다. 그러면 신학이 내 신앙의 뜻에 가장 훌륭한 신학의 기초라고 믿었기 때문에 공부한 것입니다.
그러면 신학은 완전한가? 절대 아닙니다. 앞으로 얼마든지 개혁해 나가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아마 다니다가 이런 말을 들을 때가 있을 겁니다. “우리가 정통이라고 말하는 교단입니다.” 하나님 앞에 정통이 누가 있습니까? 누가 정통이라고 인정했습니까? 자기 자신들이 했습니다. 내가 나를 정통이라고 말하면 그 자체가 교만이요 모순입니다. 누가 인정하는 겁니까? 자기들이 인정하는 겁니다. 누가 하나님 앞에서 정통을 말할 수 있습니까? 장로교, 감리교, 성결교, 순복음, 가톨릭도 모두 완전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섭리와 뜻은 예수님 오실 때까지 날마다 새로운 진리로 개혁되어져 나갈 것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온유하시고 넓고 크신 지혜를 오늘 세계를 사는 사람들이 완전하게 다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다 알려고 하는 그 자체가 모순입니다.
성경 말씀은 내가 모르는 말씀이 더 많아야 그게 정상입니다. 이 시대에 알려지지 아니한 하나님의 뜻이 다음 세대에 가서 알려지기도 하고, 우리가 지금 알고 믿고 있는 것이 더 분명하게 더 정확하게 알려질 수가 있다고 믿어야 합니다.
바울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지금은 내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요즘의 거울은 너무 잘 나오지만 옛날의 거울은 돌멩이 갈아서 만든 석경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희미하고 잘 안보입니다. 우리가 지금 하나님에 대해서 아는 진리가 아주 희미합니다. 또, 내가 알고 있는 것도 부분적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다음에 내가 하늘나라에서 주님을 만날 때는 나를 분명하게 아신 것 같이 그때에 내가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알리라.” 얼마나 훌륭한 신학입니까?
칼 바르트라고 하는 신학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어느 시대에 어떤 세계관에도 사로잡히지 말라. 이것은 변할 수가 있다.” 옛날에는 교회가 가지고 있는 권력이 있었습니다. 그 권력을 가지고 갈릴레오를 죽이기 위해 재판했습니다. 왜? 지구가 돌아간다고 말했기 때문입니다. 그때에는 하나님이 지구를 돌리게 하는 뜻을 기독교가 알지 못했던 시절입니다. 나중에 보니까 지구가 돌아간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시대에는 몰랐던 하나님의 진리가, 세계관이 새로워진 것입니다.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은 교회만 새롭게 한 것이 아닙니다. 서구의 문명과 문화를 새롭게 하는 방향 제시가 되어 정치와 경제, 사회 모든 분야를 새롭게 했고, 종교개혁으로 인해 온 세계가 새롭게 변화되었습니다.
자, 지금 어떤 개혁운동을 합니다. 목적이 뭡니까? 정치개혁을 한다, 민주시민의 권리 보장이나 행복을 위한 것이라면 그것이 성공합니다. 그러나 내 마음에 안 드는 놈들을 모두 때려잡는 괘씸죄 심판장을 만드는 정치개혁은 개혁했기 때문에 더 망하는 겁니다. 토지개혁의 목적은 부자들을 때려잡는 목적이 아니었습니다. 가난한 사람의 경제 구원을 이루는데 목적을 두고 했으니까 성공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종교 개혁 목적은 어디 있는가? 예수님은 율법 문제가 나왔을 때 말씀하신 게 있습니다. 요즘에 제가 지역 예배를 다니면서 설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많은 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제일 큽니까?” 서기관이 물었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다. 둘째는 이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 같이 사랑하라.” 결국 “사랑과 구원에 초점을 맞추어서 율법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너희들은 왜 때려잡느냐?” 그리고 개혁 운동의 최고의 희생자를 예수 그리스도 자신으로 정하신 겁니다. 이것이 십자가 사건입니다. 자신을 개혁하지 못하는 사람이 누구를 개혁합니까? 우리 신앙생활의 표준 교과서는 성경입니다. 그러나 그 성경을 해석하는 차이 때문에 교회 방향이 수없이 달라져 왔습니다. 종교개혁운동이 유럽에서 퍼져나갈 때 사실 가톨릭에서는 마귀들이라고 규정했습니다. 마틴 루터를 잡아다 사형시키라고 해서 재판에 끌려 다녔습니다.
지금 유럽의 성당이나 거리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동상이 있습니다. 아예 교회 안에 십자가 강대상 옆에 붙어 있습니다. 그게 뭐냐? 성직자의 가운을 입은 사람이 긴 창을 가지고 다른 사람을 땅바닥에 눕혀서 발로 밟고 그 목에다 창끝을 갖다 댄 동상입니다. 거리에도 많습니다. 유럽 다니시면 한번 유심히 보세요. 거기 깔려 죽는 사람이 개신교 신자입니다. 마귀는 이렇게 죽여야 한다고 그런 것입니다.
종교 개혁 이후 가장 큰 성과는 개신교회가 탄생했다는 것이 아니고 그때까지의 교회들이 새로워지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칼빈의 성직개념 해석으로 유럽에 경제 부흥이 일어났습니다. 그때까지는 교회에서 어떻게 설교를 했느냐 하면 “이윤 추구는 죄다.” 그러면 상업적인 직업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어떻게 합니까? 이윤을 남기는 것이 죄라고 규정하는 어떻게 하느냐 말입니다. 경제 발전이 안 되었습니다. 그래서 교인들이 교회 나오지 못했습니다. 모두 이윤 추구를 하면서 살아야 되는데 죄라고 하니 교회가 텅텅 비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종교개혁운동을 해서 칼빈을 비롯한 수없이 많은 신학자들이 “농사짓는 것도 장사하는 것도 목사나 신부하는 것과 똑같다. 하나님의 목적은 동일하다.” 성직 개념을 새롭게 하고 “모든 선한 노력은 하나님의 축복이다.” 그때부터 세상이 살아났습니다. 그래서 유럽이 이렇게 잘살게 된 겁니다.
종교 개혁운동이 세상에 미친 영향은 아주 놀라웠습니다. 세상을 변화시켰습니다. 영국교회들이 개혁운동이 일어나서 청교도들이 핍박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믿는 사람들이 하나님 믿는 사람을 핍박하는 이상한 나라가 되었습니다. 영국에 가면 ‘스미스필드(Smithfield)’라고 하는 사형장이 있습니다. 거기서 성직자 288명을 끌어다 처형했습니다. 이런 일이 벌어지니까 청교도들이 신앙의 자유를 찾아서 1620년에 불모지인 미국을 찾아와 살기 시작했는데 어디에서 살았느냐 하면 보스턴에서 살았습니다. 그때는 보스턴이 황무지였습니다. 거기서 살면서 마침내 보스턴이라고 하는 마을을 건설했고 그 마을에다 앞으로 이 나라를 이끌어갈 위대한 지도자들, 신앙이 좋은 지도자들을 배출하기 위해 대학을 하나 세워서 인재 양성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그들이 세운 학교가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 지금까지 세계의 그 많은 대학 가운데 가장 인정받는 최고의 대학이 되었는데 바로 하버드 대학입니다. 해마다 어느 대학이 가장 우수한가 세계 10대 대학이 선출되는데 하버드 대학이 빠진 적이 없습니다. 항상 1번 아니면 2번에 들어가는 대학이 되었습니다. 반기문 장관이 유엔사무총장이 되는데 가장 큰 힘이 된 이력서가 “그는 하버드 출신으로서 세계관을 가지고 있다.”이었습니다.
두 번째 평가받는 학교가 예일대학 아닙니까? 이 학교는 본래 신학교였습니다. 이 나라를 하나님의 뜻 가운데서 지도해 나갈 수 있는 인재를 양성하자고 성경을 가르치는 학교를 세워 시작한 것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 세계에서 첫 번째, 두 번째 가는 학교로 발전했습니다. 과거 대통령도 지금 대통령도 다 예일 출신입니다. 이렇게 개신교의 종교개혁은 세계를 변화시켰습니다.
그러면 우리의 현실을 한번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 대한민국 교회는 세계 교회 역사 가운데서 보기 드문 짧은 시간에 놀라운 성장을 한 것이 사실입니다. 대한민국처럼 가는 곳마다 십자가가 눈에 띄는 나라가 없습니다. 문제는 이제부터입니다. 서구의 그 많은 교회들이 지금 대한민국과 같은 수준에서부터 교회가 퇴보하기 시작하였기 때문입니다. 지나간 10년 동안 한국의 가톨릭교회는 교인이 75퍼센트나 늘었습니다. 가톨릭교회들은 개신교처럼 요란스러운 프로그램은 안합니다. 조용히 와서 미사를 드리고 갈 뿐입니다. 개신교회는 여러 가지 프로그램을 365일 합니다. 그런데도 지난 10년 동안 7퍼센트의 성도가 줄었습니다. 평가는 이렇습니다. “불신자들이 예수를 믿기 위해 가톨릭교회를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개신 교회 신자들이 개종을 해서 가톨릭으로 옮겨갔다.” 맞습니다. 왜 그랬을까? 이유가 나왔습니다. “개신교회는 이기주의적 모습을 보인다. 항상 싸우고 분열한다.” “이제는 지긋지긋하다.”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교회들이 다 그렇습니다. 법정에 고소하고 싸웁니다. “교회는 사회악과 싸워야 되는데 사회에 나가서는 말 한마디 제대로 못하는 사람들이 교회 와서는 순교적으로 싸움을 일으키는 것이 잘하는 것이냐? 개신교회는 틀렸다.” 여러분, 가톨릭교회가 싸우고 분열하는 거 보셨습니까? 가톨릭 본당 신부가 교인들에게 불신임을 받아서 나가라 들어가라 하는 것을 보셨습니까? 가톨릭교회에는 그런 것이 없습니다. 가톨릭교회는 전체교회를 중심하는 철학이고 개신교회는 개 교회 중심철학이기 때문에 좀 다릅니다. 자, 그러면 가톨릭교회가 한국의 사회악과 싸워준 일이 뭐냐고 우리가 물었을 때 분명한 게 있습니다.
대한민국의 민주화 운동은 명동성당 중심으로 이루어졌습니다. 항상 거기서부터 문제가 제기되어 민주화에 크게 공헌했습니다. 명동 본당 신부는 가끔 광고를 이렇게 합니다. “명동성당만 오지 마세요. 가까운 지역의 성당으로 가서 미사를 드리세요.” 그런데 우리 개신교회는 어떻게 합니까? 프로그램을 많이 해서 천국 잔치다, 예수 잔치다 하면서 다른 교회 나간다고 해도 쌀 한 포대 주면서 “한번만 나와 보라구!” 남의 신자 끌어오는 프로그램을 얼마나 많이 합니까? 그렇게 해서 당장 그 교회는 교인이 늘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전체 교인은 죽습니다. 솔직히 말해 저는 교회 프로그램을 많이 하지 않습니다. 저는 다른 신자를 우리 교회 끌어와야 되는 그런 프로그램은 일부러 40년 동안 한 번도 한 적이 없습니다. 교회도 사회도 혼자 살고자 하면 나까지 죽습니다. 거룩한 나눔이 교회입니다.
○○교회가 여러분이나 저나 똑같이 잘하고 있는 것 중의 하나가 헌금의 30퍼센트가 외국으로 나갑니다. 누군지 알지도 못합니다. 선교비로 다 보내고 있습니다. 외지의 형제들을 풍성하게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교회가 지금 파송지만 어제까지 307군데입니다. 그러면 갈보리교회가 307군데가 세상에서 자라고 있는 겁니다. 그런 정신으로 나가야 교회가 삽니다. 앞으로 더 많이 해야 됩니다. 여러분이 내시는 헌금의 30퍼센트는 다 외국으로 선교비로 나가는 겁니다. 내게 주신 것을 나눠주라는 뜻입니다. 21세기는 한국이 세계 선교의 주역이 되어야 한다고 세계 교회가 다 인정하고 우리 자신들도 그렇게 인정합니다. 어떻게 해나갈 것인가? 거룩한 개혁을 해서 훌륭하게 쓰임 받는 여러분과 제가 되어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