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개 환상통
김혜순
하이힐을 신은 새 한 마리 아스팔트 위를 울면서 간다
마스카라는 녹아 흐르고 밤의 깃털은 무한대 무한대
그들은 말했다 애도는 우리 것 너는 더러워서 안 돼
늘 같은 꿈을 꿉니다 얼굴은 사람이고 팔을 펼치면 새 말 끊지 말라고 했잖아요 늘 같은 꿈을 꿉니다 뼛속엔 투명한 새의 행로 선글라스 뒤에는 은쟁반 위의 까만 콩 두 개 (그 콩 두 개로 꿈도 보나요?)
지금은 식사 중이니 전화를 받을 수 없습니다 나는 걸어가면서 먹습니다 걸어가면서 머리를 올립니다 걸어가면서 피를 쌉니다
그 이름, 새는 복부에 창이 박힌 저 새는 모래의 날개를 가졌나? 바람에 쫓겨 가는 저 새는
저 좁은 어깨 노숙의 새가 유리에 맺혔다 사라집니다
사실은 겨드랑이가 푸드덕거려 걷습니다 커다란 날개가 부끄러워 걷습니다 세 든 집이 몸보다 작아서 걷습니다 비가 오면 내 젖은 두 손이 무한대 무한대
죽으려고 몸을 숨기러 가던 저 새가 나를 돌아보던 순간 여기는 서울인데 여기는 숨을 곳이 없는데
제발 나를 떠밀어주세요
쓸쓸한 눈빛처럼 공중을 헤매는 새에게 안전은 보장할 수 없다고 들어오면 때리겠다고 제발 떠벌리지 마세요
저 새는 땅에서 내동댕이쳐져 공중에 있답니다
사실 이 소리는 빗소리가 아닙니다 내 하이힐이 아스팔트를 두드리는 소리입니다
오늘 밤 나는 이 화장실밖에는 숨을 곳이 없어요 물이 나오는 곳 수도꼭지에서 흐르는 물소리가 나를 위로해주는 곳 나는 여기서 애도합니다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검은 날개를 들어 올리듯 마스카라로 눈썹을 들어 올리면
타일에 떨어지는 빗소리가 나를 떠밉니다
내 시를 내려놓을 곳 없는 이 밤에
김혜순 시인의 시집『날개 환상통』이 미국 전미도서비평가협회상을 받았다. 전미도서비평가협회(NBCC)는 3월 21일(현지시간) 미국 뉴욕 뉴스쿨에서 열린 ‘2023 NBCC 어워즈’에서『날개 환상통』의 영어판『Phantom Pain Wings』를 시 부문 수상작으로 발표했다.
『날개 환상통』은 김 시인의 등단 40주년인 2019년 출간된 시집이다. 5부로 나눠 총 72편의 시가 실린 이 시집은 주어와 목적어 사이의 문법적 경계를 허무는 김혜순만의 언어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미국 3대 문학상은 퓰리쳐상, 전미도서비평가협회상, 계관시인상인데, 김혜순 시인이 받은 전미도서비평가협회상은 스포츠로 치자면 US오픈 우승을 한 셈이다. 언론이 크게 주목하는 이유이다.
안새와 밖새
김혜순
차가운 바이올린 소리 쨍하게 얼어붙은 강물 위를 날아가며 얼음 밑에서 헤엄치는 물고기를 내려다보듯 새가 우리를 내려다보는 거지
그 새가 창문에 부딪히자 내게 일어난 증상
우유에 떨어지는 코피처럼 눈 내린 광장에서 흩어지는 사람들 사이에서
춥지? 하면 아니! 하고 나란히 걸어가는 두 사람 바이올린 요람인가 너와 나 같이 열렸다 같이 닫히는
두 몸 사이가 오히려 살아 있는 듯 너무 귀해서 만질 수도 없는 투명하고 뭉클한 새가 우리 사이에 있는 듯
위에서 보는 마음이 아프다 식탁 위의 전등과 싱크대 위의 전등 스위치가 나란히 붙어 있는 것처럼 나란히 걸어가는 두 사람
책 표지를 넘기면 나타나는 하얀 빈 종이 위에 진통제로 몽롱한 선생님이 쓰신 글씨 두 개처럼
이 세상에도 저세상에도 문이란 게 하나도 없다면 얼마나 좋을까
나는 이제야 느낀다 새가 날지 않으면 세상이 거울처럼 납작해진다는 것 그리하여 나의 새는 잠들어서도 날아간다는 것
그 새가 다시 유리창을 쪼는 동안 내게 일어난 증상
마치 얼음 밑에 갇힌 물고기를 바라보는 것처럼 걸어가는 너와 나 공중에서도 볼 수 있다는 것
-김혜순 시인은 1955년 경북 울진에서 태어났다. 초등학교에 입학할 무렵 강원도 원주에 이사해 거기서 청소년기를 보낸 그는 원주여고를 거쳐 1973년 건국대학교 국문과에 들어가 시를 쓰기 시작한다. 그는 1978년 「동아일보」신춘문예에 처음 써 본 평론 「시와 회화의 미학적 교류」가 입선하고 이어 1979년 「문학과 지성」에 「담배를 피우는 시인」,「도솔가」등의 시를 발표하며 정식으로 문단에 나온다. 대학 졸업 뒤 「평민사」와 「문장」의 편집부에서 일하던 그는 1993년 「김수영 시 연구」라는 논문으로 문학 박사 학위를 받는다. 그는 1998년 ‘김수영 문학상’을 받음으로써, 낯설고 이색적이어서 사람들이 부담스러워하던 그의 시세계는 비로소 문단의 공인을 받는다. 2019년 캐나다의 권위 있는 문학상인 그리핀 시 문학상(Griffin Poetry Prize)을 수상했다.
당신의 눈물
김혜순
당신이 나를 스쳐보던 그 시선 그 시선이 멈추었던 그 순간 거기 나 영원히 있고 싶어 물끄러미 물 꾸러미 당신 것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내 것인 물 한 꾸러미 그 속에서 헤엄치고 싶어 잠들면 내 가슴을 헤적이던 물의 나라 그곳으로 잠겨서 가고 싶어 당신 시선의 줄에 매달려 가는 조그만 어항이고 싶어
『당신의 첫』김혜순 문학과지성사 中에서
연금술
김혜순
내 앞에 줄줄이 흘러내리는 이 달빛을 무쇠 가마솥에 부어 한밤내 엿처럼 고아보자 그런 다음 돌처럼 굳은 그것을 들고 가서 당신의 방문 열쇄 구멍에 들어맞는 쇠붙인가 시험해보자
내 눈앞으로 줄줄이 달려온 저 산맥을 들어 대장간 가져가서 몇 날 며칠 담금질해보자 그런 다음 새끼손가락만 하게 졸아든 그것을 들고 가서 당신의 방문 열쇠 구멍에 딱 맞는 능선인가 시험해보자
쌍계사 일주문 앞에서 땅바닥에 녹슨 못 땅땅 박으며 울지만 말고 햇빛이 몇억 년 고았다는 열쇠 같은 저 초승달이나 쳐다보자
『당신의 첫』김혜순 문학과지성사 2009년(초판 4쇄)
시 창작 워크숍
김혜순
시 쓰기를 가르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많이 받는다. 그러면 않아는 대답한다. 가르친다기보다 더불어 생각할 수 있는 것과 혼자 생각해봐야 할 것이 있는 것 아닐까요, 그래서 않아는 더불어 생각해봐야 할 것을 서로서로 나눕니다, 라고 대답한다. 또 갑자기 정색하고 ‘시란 무엇입니까’하는 질문을 받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이런 질문에 대한 대답이 시를 철학적 전개에 종속시키는 것이라 여겨지는 경우, 이 질문 자체의 불가능성을 거론할 수 있겠다.) 그러면 않아는 시란 무엇인가에 대한 대답은 오백 가지가 있고, 그 오백 가지를 시간과 장소, 기본 듣는 사람, 날씨 등등의 경우의 수에 적용한 만큼 대답이 많이 나올 수 있습니다, 라고 대답한다. 시란 무엇인가에 대한 대답이 교과서적이거나 보편적인 정의로 규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면, 시 한편에 따라 다른 대답이 나올 수 있다. 어떤 대답도 맞고, 또 모두 틀린 것이 시에 대한 정의다. 시에는 어떤 진리도 통용되고, 또 어떤 진리도 통용될 수 없다. 이럴 때 시는 가르치고 배울 수 없는 것이 된다. 그러나 세상에 나온 시만큼, 세상에 나올 시 그만큼 시란 무엇인가에 대한 대답이 있을 수 있다. 시에 대한 정의는 끊임없이 개별적으로 내려지지만, 영원히 시라는 원대한 공화국을 벗어날 수 없는, 옥시모론으로만 대답해야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마치 우리 각자가 다른 사주를 갖고 태어나 그 탄생 연월일시의 우주를 간직하고 살아나가듯이, 태어난 시각에 시작된 우주의 운행을 자신의 운명이라 여기듯이, 시 비평 혹은 시 수업은 각각의 시에 다르게 적용되는 우주 혹은 쓴 사람의 실존을 나눈다. 그래서 어젠 시는 영감의 소산이라고 했다가 오늘은 영감이란 게 도대체 무엇이기에 어디에 숨어 있다가 온다는 말이냐, 라고 질문을 되돌려버릴 수도 있다. 그리하여 시는 가르치고 배우는 것이라기 보다 매시간 다른 시를 앞에 놓고 매번 다른 정의를 내려보는 거다. 시 한편 한편의 체험적 단독성, 개별성을 널리 선포해보는 거다. 그리하여 매번 광대한 시적 고독에 이르는 거다.
「시 창작 워크숍」(『않아는 이렇게 말했다』 문학동네, 2016) 中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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