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샘통신 73/200129]고향집, 황홀했던 번개팅
칠남매 대가족이 소가족으로 분화, 발전된 지도 오래된 셈.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명절풍경도 바뀌는 것은 당연. 아버지 말씀이다. “인자 너희도 모두 손자가 있고 그러니 각자 집에서 명절을 쇠라” “그럼 아버지는?” “나는 다행히 큰딸이 저그집으로 모셔간단다. 걱정말라” 하여, 판교집에서 아들내외 손자와 함께 이탈리아 레스토랑에서 외식도 하는 등 설명절 연휴를 즐겼다. 초이틀날엔 ‘6당회’의 당구대회가 있다하여 당구도 못치면서 친구들 보고싶은 마음에 달려갔다. 귀향하는 통에 자주 못보던 친구들과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는 것은 정말로 소중하고 좋은 시간이다. 덕분에 친구들이 쏜 대방어회와 즉석 매콤양념닭발도 실컷 먹은 행복한 저녁이었다.
다음날 예약한 무궁화호로 내려갈 준비를 하는데, 지암 친구의 전화다. “너 오후에 내려간다고 했지? 이왕이면 내 차로 같이 가면 어때?” “머-엉? 글먼 나야 땡큐지! 갖고갈 짐도 엄청 많은데” “글먼 내가 인우한테 같이 가자고 해야지” 기차표를 취소하고 친구들을 기다리는데, 정초부터 이런 동행同行이 이루어지다니, 올해 일년내내 재수가 좋을라나 싶다. 그렇게 3인이 졸지에 고향을 같이 내려오다. 역귀성인만큼 교통체증 제로. 3시간만에 도착, 5시. 내려오는 차속에서 ‘즐거운 문제’로 전화를 여러 통 해댔다. 모처럼 내려오는 친구들을 위해서라도 번개팅작전을 짠 것이다.
먼저, 인천 처갓집 명절인사를 하러 서울에 올라온 벽곡. “야, 별내 공사현장에서 쓸만한 석재石材 빨리 싣고 우리집으로 와. 나는 시방 ‘거물친구’ 둘과 도착했어” 다음에 최근 형수와 함께 국궁國弓에 몰입하고 있는 근봉 친구에게 전화, “알았네. 이따 보세”. 이어서 ‘지역 맹주盟主’인 소천 친구. “저녁에 정민 친구와 약속이 있는데?” “시끄런 소리말고 그 친구랑 같이 오셔” “아참, 병원에 들러 어머니 간병에 고생하는 효자 고룡도 태워와” 뚝 끊어버려도 무방한 사이다. 과학기술부 공무원으로 정년퇴직하여 완주 비봉에 저택을 짓고 95세 노모를 봉양하는 또다른 효자 원우에게 전화. “그 머냐, 색스폰 가져와 우리집 터 좀 밟아주셔. 인근에 열병합발전소 사장님도 별 약속 없으면 올 거셔” 자, 다음엔 누구에게 한다? 참, 남원의 ‘터줏대감’ 의료인, 외로운 주말부부 30여년, 남악에게 전화를 했다. “아이고, 당직이라고? 글먼 끝나고 꼭 오셔. 오늘 졸지에 번개팅 열 명도 넘어. 정초이니 신년하례식 셈치자고” “오케이”
6시 반에서 7시 사이, 우리집 마당에서 고기 구워먹자는 말에 모두 흔쾌하게 오케이다. 일사천리一瀉千里, 어찌 고맙지 않겠는가. 서울에서 최소 3시간, 전주에서 40분, 남원에서 20분. 정말 반갑고 고마운 친구들이다. 빈손으로 오라고 해도 아무 소용이 없다. 맥주 1박스, 소주 2박스, 크리넥스, 지역 동동주 3병, 큰통의 막걸리 3병, 포도주 1병. 술도 술이지만, 원우 친구 근처에 맛있는 고기집이 있다며 삼겹살 두 뭉치. “야, 큰일났다. 빨리 장 보러 가자” “불고기감 2근 주세요” 양념된장에 노란 배추속, 청양고추, 콩나물, 숯 두 뭉치, 캔맥주 한 박스… 등등을 주섬주섬 급하게 사오다. 다 해봤자 6만8000원. 나는 밥하고 국 끓일지만 안다. 불고기 갖은 양념으로 재는 것은 지암이 선수. 두세 번 서울에서 재어갖고 온 고추장 석쇠 불고기는 또 얼마나 맛있었던가. 그 생각만 해도 입에 침이 고인다. 오늘은 처음으로 여러 친구들에게 선을 보이는데, 쉐프에 다름 아니다. 어제는 닭발을 번개탄으로 서울도심에서 선을 보이더구만. 아낌없이 베푸는 마음, 이 아니 아름다우랴. 밤이 깊어간다. 좁은 식탁에 11명(왕회장 인우, 쉐프 지암, 천하에 없는 효자 원우-고룡-벽곡, 친구라면 사죽을 못쓰는 소천과 정민, 우리의 주치의 남악, 준비된 서예의 ‘대가’ 근봉 부부 그리고 소생)이 둘러앉았다. 다행히 우리집 의자 딱 11개. 마치 예정된 모임같다. 이런 행복한 회식이라니? 행복을 넘어 황홀하기까지 한, 그야말로 번개팅. 이런 모임이 어디 흔하랴. 흔치 않으리라. “오늘은 모두 자고 가는 거다” “사랑채가 게스트하우스여” 기름보일러 실내온도 21도로 해놓았으니 뜨끈뜨끈할 것이고, 열 명도 충분히 잔다.
아아, 깊어가는 밤 ‘성주신成主神’의 귀도 감미로운 색스폰 선율에 즐거웠으리라. 지신地神밟기도 이만하면 충분하리라. 도반道伴인 청담형이 얼마 전 “인자, 이 집 ‘싹 다’ 잘될 거시오. 어르신들의 에너지가 고스란히 담긴 장롱 등 유품을 귀하게 여기고, 지붕은 그대로 놓고 요렇게 깔끔하게 리모델링 히갖고 아버지를 모신다면 말 다했소. 사람들이 많이 찾아와 북적북적헐 거시오. 쇄소응대灑掃應對, 집청소나 노상 잘해 노시오. 고거시 사람 사는 벱이요. 안그렇소잉?” 말한대로 ‘조짐’이 좋다. 문제는 ‘철없는’ 주인장. 열한 명이 덕담을 나누며 주고받은 술잔에 고만 형편없이 취해 버린 것이다. 친구의 손을 꼭 쥔 채 그 친구 어깨에 기대 졸고 있는 사진이라니? 친구들이 언제 간지도 모른 채, 사랑방에서 새벽에 깨어나니 효자 두 명만 자고 있더라는 사실이다. 그냥 모다 이해해 주겠지, 친구들의 자비심慈悲心만 기대할 따름.
다음날, 남자주부男子主婦의 어설픈 김치콩나물국을 개운하고 맛있다며 잘 먹어주는 인우-지암 친구가 고맙다. 아침을 먹은 후, 차에서 채곡채곡 내리는 것은 앵글과 기둥철제들. 언젠가 닭을 키우겠다는 나의 말을 유심히 들었나보다. 닭장을 만들어주겠다고 실어온 것이다. 럴수, 럴수, 이럴 수가. 도대체 우리 친구들의 이 무조건적인 성의誠意와 즉시 실천實踐에 감격한 적이 무릇 기하였던가. 길이 30여m에 이르는 담을 칼라블록으로 한 여름 쌓아주고 토방에 ‘돌옷’과 샘물가에 타일을 입혀준 벽곡의 감동이 채 가시지 않았는데, 이번에는 지암이 나를 울린다. 컨테이너의 앵글도 모두 짜주었건만, 이번엔 닭장까지라니? 은근히 겁이 난다. 내가 닭을 잘 키워, 이 친구들이 오면 닭백숙을 해줄 수 있을까? 자신이 없다. 부화는 어떻게 시키지? 병아리를 그냥 한 열 마리 사가지고 올까? 인우는 어느새 오수 철물점에서 닭장을 사방으로 둘러치는 철조망을 사왔다. 나는 이 친구들을 위해서 무엇을 해주어야지? 옳지! 노지露地의 시금치가 있구나. 지난 가을 뿌려놓은 것이, 겨울을 이겨낸 기특한 나물이 아닌가. 캐서 다듬어 씻어놓으니 한 푸대는 족히 된다. 또, 그리고, 무를 캐서 단지에 신문지로 싸서 넣어놓은 게 있었지. 그것을 주면 좋겠다. 시금치무침과 생채는 지금이 딱 제맛이다. 두 보따리를 챙겨놓으니 마음이 몹시 흡족하다. 우리 어머니가 그랬으리라. 자식들 온다면 보따리 보따리 챙겨놓던 심정을 알 것만 같다.
한참 작업을 하고 있는데, 광양 큰딸과 함께 명절을 쇠신 아버지가 들어오신다. 이 친구들 보아라. 넙죽 세배를 하고 용돈까지 드린다. 아부지, 무척 황송해 하신다. 그리고 하는 말이 ‘가관’이다. “이놈, 저희가 같이 평생 안고 갈 게요. 책만 읽었지, 문약文弱해서 암것도 못하잖아요. 걱정마세요” 이런, 이런, 이런…. 때가 한참 지나서야 남원의 유명한 추어탕집으로 나를 ‘모셔’ 간다. 벼룩도 낯짝이 있지, 이것이야 내가 사야지. 들어가면서 식당주인에게 얼른 카드를 맡겼다. 남원 병원장이 강추한 진짜 깔끔한 맛집. 전라도추어탕의 진수같다. 거기에 미꾸라지와 민물새우 반반인 튀김이라니? 별내의 젊고 예쁜 형수가 추어탕을 좋아한다기에 포장도 한 그릇.
메뉴판에 ‘만세탕’이 시가라 써 있다. 만세탕을 아시는가? 개구리가 사지를 위아래로 쭉 뻗어 죽는 모습이 만세萬歲를 부르는 것같다하여 만세탕이다. 청량한 계곡 등에서 살고, 잡으면 법에 크게 걸려 벌금이 수백만원이 된다던데, 어떻게 만세탕을 공공연히 팔까? 겨울잠을 자고 있는 개구리는 배를 딸 필요도 없이 그대로 넣고 끓인다던가. 보약이 따로 없다는데, 값을 물었다. 대 중 소 5만, 7만, 10만원. 민물매운탕보다 훨 비싸다. 친구들은 추어탕으로 충분하다며 질색을 한다. 좋아한다면 무엇인들 못사주랴. 또 올라가야 한다. 평일이니까 막히지는 않겠지? 오수 시장에 나를 떨궈주고 가는 친구들, 차량이 멀어지니 하마터면 서운함에, 고마움에 눈물이 나올 뻔했다. 우정友情도 사람을 얼마든지 울게 만들지 않던가. 아이고, 정초에 머리나 깎고 가자. 40년이 넘은 이용소, 앞면도를 해주니 너무 좋다. 어찌나 깊이 자던지, 안깨웠다고 한다. 1만원. 고향에 이런 이발소는 ‘미래유산’으로 남겨둔짐도 하다. 어둑해서야 돌아온 집. 닭장이 눈에 띈다. 그것 참, 닭은 어떻게 키우지, 걱정이 앞선다. 흐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