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비홍(黃飛鴻, 1847~1925)
이름 : 황비홍
성별 : 남
생일 : 1847년 음력 7월 9일, 광동 불산진 출생
사망 : 1925년 음력 3월 25일, 광주성서방편의원에서 병으로 사망.
황비홍의 원명은 황석상(黃錫祥)이고, 자는 달운(達雲)이다. 원적은 남애 서초령 서록주촌이다. 어린 시절은 불산에서 지낸다. 황비홍은 6살 때부터 부친 황기영(黃麒英)을 따라 무술을 익힌다. 집안이 가난하여 자주 부친을 따라 불산, 광주등지로 가서 무술을 보여주고 약을 팔았다. 13살때, 황비홍은 불산 두지항에서 무술로 약을 팔 때, 철교삼의 첫째 제자인 임복성을 만난다. 그로부터 철선권, 비타등의 절기를 익힌다. 이후 홍권(洪拳) 대가가 되는 기초가 된다.
16세때, 황비홍이 광주서관 제7보수각에 무관을 세우고, 나중에 안안가에 "보지림(寶芝林)"이라는 의관을 세운다. 그는 제자를 많이 거느린 일대의 무림종사가 된다. 그는 이후 제독인 오전미, 유영복등으로부터 군의관 기격총교련 광동민단총교련등의 직을 맡고, 유영복을 따라 대만에서 일본에 항전하기도 하였다. 그의 일생은 힘들게 살았고, 만년에는 아들이 죽음을 당하고, 보지림이 불타고, 아들이 실업하는등 여러 타격을 받았다. 1925년 음력 3월 25일 황비홍은 병으로 사망한다.
1847년 음력 7월 9일, 광동불산진 출생
1853년 부친 황기영을 따라 무술을 익힘
1859년 부친을 따라 불산, 광주, 순덕등지에서 무술을 팜, 이 기간에 사상표룡곤으로 무술스스이 정대웅의 좌수조어곤법을 이김으로써 소년영웅의 칭호를 얻음.
1860년 불산 두지항에서 철교삼의 제자인 임복성을 만나 2년간 임복성으로부터 철선권, 비타등의 절기를 전수받음.
1863년 광주로 이사함. 동,철업종의 노동자들이 투자하여 설립한 무관을 제7보수각에 세우고, 비홍은 떠돌아다니면서 무술을 파는 생활을 청산함.
1865년 광주삼란행(과란, 채란, 어란)에서 그를 업계의 무술교련으로 모심.
1866년 서초궁산허에 가게에서 잠을 잘 때 도적의 침입을 받는데, 황비홍 일인이 수십명을 격퇴함. 이후 이름을 떨쳐 석룡향에 초청을 받아 제자들을 거둠.
1867년 어느 서양인이 소만큼 큰 개를 데리고 홍콩에서 비무대를 설치하고 중국인들에게 도전하였을 때, 황비홍은 중국인들이 수모를 당하는 것을 참지못하고 홍콩으로 가서 "후형괴각"으로 맹견을 물리침. 이로써 홍콩에 이름을 떨침.
1868년, 홍콩 수갱구 대원에서 작은 장사꾼 팽옥의 가게가 현지의 깡패에게 부서지고 상처를 입었을 때, 황비홍이 지나가다 그를 도와주게 됨. 상대방 수십명으로부터 무기를 들고 공격을 받고도 황비홍이 격퇴함.
1868년경, 광주 관회날교부근에 의관을 세움. 삼란의 교련직은 양관이 대체함.
1869년 불산 평정교 귀뚜라미싸움장의 노구숙이 현장보안을 맡을 때, 황비홍이 도적을 물리쳐줌.
1871년 처 나(羅)씨를 취함. 결혼후 3개월만에 나씨는 죽음.
1873년 광주수군 무술교련이 됨, 광주장군아문 "정신대기수"라는 직을 받음.
1882년 오전미는 황비홍을 군중무술교련으로 모셔감. 회란교에 설치한 무관은 닫음.
1888년 부친 황기영이 병으로 사망. 한달쯤 후 오전미 사망. 황비홍은 군중 무술교련직을 사직하고, 광주 인안가에 골절상을 치료하는 '보지림'을 세움.
1888년, 흑기군의 수령 유영복이 황비홍의 무술이 고강하고, 의술이 정통한 것을 높이 평가하여 그를 군의관과 복자군 무술총교련으로 모셔감. 그에게 의예정통이라는 나무 편액을 내림.
1894년 6월 유영복이 대만을 잃음. 황비홍은 대만을 떠나 광동으로 옴. 스스로 의술을 행하고 무술을 더 이상 전수하지 않기로 함. 보지림의 앞에 "무예쿵후는 전수하기 어렵다. 천금을 주더라도 전수하지 않으니, 스승을 구하는 사람은 여기서 찾지 마시오"라고 써 놓는다.
1896년 마씨와 재혼함. 2녀 2남(한림, 한삼)을 낳음. 얼마되지 않아 마씨는 병으로 죽음
1902년 잠씨와 재혼함. 2남(한추, 한희), 얼마되지 않아 잠씨도 병으로 죽음
1911년 8월 유영복의 요청을 받아 광동민단 총교련을 맡음.
1912년 어란의 마여찬이 도적으로부터 얻어맏자, 황비홍이 도적들을 징계함.
1915년 막계란을 첩으로 삼음.
1918년 광주 18보 복안가의 양씨 실랍장에서 수비를 맡음.
1919년 무술에 정통한 둘째 아들 황한삼이 귀안량의 암산을 받아 죽음. 이에 충격을 받아 황비홍은 다시 다른 아들에게 무술을 전수하지 않음.
1919년 4월 9일 광주해주극원 광동성 정무회 성립대회상에서 비타를 보여줌.
1924년 10월 광주에서 상단폭란을 진압할 때, 보지림이 불에 탐. 집안재산이 모두 불에 타 없어짐. 큰 아들 한림이 직업을 잃음 이로 인해 우울함이 병으로 됨.
1925년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