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의 발을 씻겨주다
이 현원
천주교회에서 부부를 위한 M.E.*라는 교육 프로그램을 운영 하고 있다. 부부가 함께 수도원 같은 시설에 입소해, 행복한 부부가 되는 방법을 배우는 훈련이다. 교육 내용이 좋아 가톨릭 신자 외에 개신교나 불교 신자도 적지 않게 참여하고 있다.
과거 일이지만 내가 직장 다니면서 바쁘다는 이유로, 자녀들을 돌보거나 가정 내의 잔일은 모두 아내 몫으로 돌리기 일쑤였다. 밤이 늦도록 회사 일에 매달리면서 월급만 잘 갖다주면 충분한 줄 알았다. 모처럼의 토요일 오후나 일요일은 휴식이나 늦잠이라도 자고 싶었으나, 아내의 끈질긴 M.E. 참가 권유에 내 마음이 흔들리고 말았다.
오래전의 일로서 그 당시 40대 중반이었던 우리 부부는 바쁜 시간을 쪼개어 토요일 오후부터 시작하는 1박 2일의 M.E. 훈련에 참가했다. 장소는 서울 영등포구에 있는 살레시오회 수도원으로 기억한다. 토요일 오후, 담장으로 둘러싸인 수도원은 졸고 있는 듯 조용했다. 수도원 안으로 들어가니 부부들이 마당에 삼삼오오 모여서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입소 절차를 마치고 3시쯤 첫 번째 교육이 시작되었다. 수녀님이 마당에서 진행한 프로그램이었는데, 가슴 깊게 새겨진 그때 일이 지금까지 지워지지 않는다.
사회자 안내에 따라, 20여 쌍쯤 되는 부부들이 좌석에서 앉았다가 조별로 일어나 앞으로 나왔다. 내가 첫 번째 조였다. 아내는 의자에 앉아있고 남편은 세숫대야에 물을 담아오란다. 남자들은 수돗물에 가서 대야에 물을 받아, 찔끔찔끔 흘리며 오리걸음으로 자기 짝 앞에 와 앉았다. 아내는 눈치를 챘는지 모르지만, 난 그때까지 무슨 놀이를 하려는지 몰랐다.
아내는 양말을 벗은 후 대야에 발을 담갔고, 팔을 걷어 올린 남편은 아내의 발을 씻겨주라는 요구였다. ‘아 -’, 나도 모르게 가느다란 탄성이 새어 나왔다. 남편이 아내에게 주는 예상치 못한 선물이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최후의 만찬 날, 제자들에게 발을 씻겨준 데에서 유래된 소위 세족례(洗足禮)였다. 사람에게 가장 미천하다는 발을 씻겨주는 일은, 내 몸을 낮추면서 상대방에 대한 공경의 표시이다. 나는 아내의 발을 뽀드득뽀드득 씻겨주었다. 아내는 미안하기도 하고 한편으론 호강에 겨운 표정이었다. 평소 남편에게서 받아보지 못한 특별 대우라고 생각했는지 모른다.
M.E.의 첫 번째 관문인 발 씻겨주기 훈련은 이렇게 진행되었다, 남편이 사회생활과 돈벌이하느라 미처 몰랐던 사실, 즉 아내의 잡다한 집안일, 자식 키우기, 남편 뒷바라지 등 갖가지 노고를 잊지 말고 대접을 해주어야 한다는 뜻으로 받아들였다.
참여한 모든 남편이 평소 이렇게 아내를 공경하고, 대우해준다면 집안이 화목할 것으로 생각했으리라. 구태여 말을 안 해도 수녀님은 ‘가정을 다스리기 위해 남편이 갖추어야 할 첫 번째 덕목’이라고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수녀님이 과제를 끝낸 남편에게, 한 사람씩 소감을 말해 보란다. ‘수녀님이 바라는 정답은 뻔하다. 남달리 난 좀 색다른 대답을 해야지’하고 싱거운 마음을 먹었다. 나의 소감 차례가 되었다. “아내 발을 씻겨주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만일 저의 어머니가 이 장면을 보았으면 가슴이 아팠을 겁니다” 옆에서 다른 부부들이 키득키득 웃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수녀님은 웃지 않았다. 의도를 벗어나는 뚱딴지같은 소리에 미웠거나 못마땅해했을지 모른다.
지금도 혼자서 그 당시를 생각하면 피식 웃음이 나온다. 유교 성향이 유달랐던 우리 부모님 세대는, 여자가 남자들 밥상에서 같이 밥을 먹지 못한 가정이 꽤 있었다. 지금은 상상하기도 힘든 일이다. 그래서인지 내가 결혼 후에, 어쩌다 부엌에서 아내의 설거지라도 도와주면 못마땅해하던 어머니였다. 남자 일, 여자 일을 칼로 두부 자르듯 구분해야 한다는 부모님이었다. 그런 어머니가 아내의 발을 씻겨주는 내 모습을 보았다면 어떻게 생각했을지 짐작이 가고 남는다. 10여 년마다 한 번씩은 M.E.를 다녀와야겠다고 다짐했었으나, 아내에 대한 발씻김은 그때 1회로 끝났다. 아내의 발을 씻겨주면서 내 눈높이를 낮추어야 할 텐데, 좋은 관습인 걸 알면서도 집안에서는 잘되지 않았다.
교육을 이틀 동안 받으면서 아내와 격의 없는 대화로 나 자신을 되돌아볼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마치 속까지 보이는 커다란 거울 앞에서 나를 비추어 보는 것 같았다. 남존여비의 유교 분위기에 젖으며 자란 나는 가부장적이었고, 아내를 대할 때 우월감이 몸에 배지 않았나 성찰도 하였다. 아내가 집안에서 하는 일이, 힘이 들고 크게 보는 계기가 되었다.
현대 사회에 떠도는 인명재처(人命在妻), 처화만사성(妻和萬事成)이란 말을 들었다면 부모님은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궁금하다. 아마도 ‘세상 말세여’ 하시며 혀를 끌끌 차셨을 거다. 남녀의 위상 변화 추세에 맞게 발 씻어주는 의식도 ‘이제는 아내가 남편의 발을 씻겨주어야 맞지 않을까’ 하며 혼자 미소 지을 때가 있다.
아내의 발을 씻겨주는 일은 작은 정성이었지만 울림은 컸다. 화목한 가정의 문을 여는 열쇠가 되었을 뿐만이 아니라, 부부 사이를 밀착시켜주는 구실도 했다. 그때 낮추어진 눈높이가 정년퇴직 후, 제2 인생을 사는 오늘까지도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내가 좋아하는 자유인이란 행동반경이 시나브로 줄어들었는지 모르지만, 부부 공동의 영역은 늘어났으니 이 또한 소득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조그만 관심이 부부가 늙어 이별할 때까지 사랑하며 살 수 있는 원동력이 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M.E. : Marriage Encounter의 약자로 부부 일치운동이라고도 한다. 천주교회에서 운영하는 1박 2일 또는 2박 3일 동안의 부부 합숙 프로그램으로서, 부부간 성역 없는 대화와 자기 성찰을 통해서 상대방을 이해하고 자신을 깨우치는 교육과정이다. 궁극적으로는 부부간 또는 가족 간의 화목으로 평화로운 가정을 이루는 것을 목표로 한다.
첫댓글 회원정보에 있어 전에 닉네임인 '무심천'을 실명 '이현원'으로 수정하여 다시 글을 게재했습니다. 양해를 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