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액션 영화배우 스티븐 시걸의 영화 ‘패트리어트(1998년)’가 있습니다. 바이러스와 치료제를 탈취한 나쁜 사람들이 마을을 바이러스에 감염시켰습니다. 그러나 자신들이 가져온 치료제가 바이러스에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아마도 바이러스에 변이가 생겼나 봅니다. 의사였던 스티븐 시걸은 나쁜 사람들과 싸우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바이러스의 치료제를 찾습니다. 나쁜 사람들과 싸우기 위해 시걸은 딸을 원주민에게 잠시 보호를 청하였습니다. 원주민 마을의 노인은 들에 핀 꽃을 이용해서 바이러스를 이겨내고 있었습니다. 꽃의 성분이 바이러스를 이겨내는 작용을 하고 있었습니다. 흔하게 볼 수 있는 들의 꽃이 사람들을 바이러스로부터 구한다는 내용이 인상적이었던 영화입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유다인들은 표징을 요구하고 그리스인들은 지혜를 찾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선포합니다. 그리스도는 유다인들에게는 걸림돌이고 다른 민족에게는 어리석음입니다. 그렇지만 유다인이든 그리스인이든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힘이시며 하느님의 지혜이십니다. 하느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더 지혜롭고 하느님의 약함이 사람보다 더 강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구원에로 인도하는 것은 엄청난 지혜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우리를 구원에로 인도하는 것은 놀라운 표징도 아니라고 이야기합니다. 우리를 구원에로 인도하는 것은 우리가 모두 알고 있지만 받아들이지 못하는 ‘십자가’라고 이야기합니다. 한국 교회에는 많은 순교자가 있고, 성인과 복자품에 오른 분들이 있습니다. 그분들은 재능, 출신, 능력, 성별이 다 다릅니다. 그러나 그분들에게 한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십자가’를 충실하게 지고 간 것입니다.
다른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입국절차를 밟아야 합니다. 개인별로 입국절차를 밟아야 합니다. 이민국 직원은 다른 사람이 도와주는 것을 엄격히 제한합니다. 힘들고 어려울지라도 입국절차는 본인 스스로 해야 합니다. 나의 여권과 나의 서류는 다른 사람에게 양도할 수도 없고, 빌려줄 수도 없습니다. 오직 나의 입국을 위해서만 필요한 것입니다. 친한 친구일지라도, 심지어 가족일지라도 어떻게 도와 줄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그러기에 여권은 유효기간이 6개월이 남았는지 확인해야 합니다. 비자가 필요한 나라에 가기 위해서는 미리 비자를 받아야 합니다. 안타깝지만 유효기간이 만료된 여권을 가져온 분이 있었습니다. 결국 그분은 처음으로 가는 이스라엘 성지순례를 포기해야 했습니다. 일정상 이스라엘에서 기다릴 수도 없었고, 나중에 함께 하기에는 상황이 여의치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순례 중에 항상 말하는 것이 있습니다. ‘다른 것은 몰라도 여권은 분실하면 안 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하느님나라에 들어가는 슬기로운 처녀와 하느님나라에 들어가지 못하는 어리석은 처녀의 이야기를 하십니다. 등잔의 기름은 무엇일까요? 우리가 지고가야 할 십자가라고 생각합니다. 유대인들에게는 걸림돌이었던 십자가입니다. 그리스인들에게는 어리석음이었던 십자가입니다. 세상 사람들에게는 피하고 십은 십자가입니다. 그러나 그 십자가는 나를 구원에로, 영원한 생명에로 인도하는 등불입니다. 예언자들이 지고 갔던 십자가입니다. 순교자들이 지고 갔던 십자가입니다. 우리 모두의 구원을 위해서 지고 가셨던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오늘은 자신의 십자가를 충실하게 지고 갔던 아우구스티노 성인을 기억하는 날입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회고록인 ‘고백록’을 통해서 교회에 큰 보물을 남겨 주었습니다. 오늘은 아우구스티노 성인의 말씀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십자가의 또 다른 이름은 ‘겸손’입니다.
“완덕으로 이끄는 모든 길 가운데 첫째 길은 겸손입니다. 둘째 길도 겸손입니다. 셋째 길도 겸손입니다. 그대가 몇 번을 묻더라도 나의 대답은 같을 것입니다. 다른 길이 없어서가 아니라 모든 선한 행위에 겸손이 앞장서고, 함께 하고, 뒤를 따르지 않으면 교만이 모든 것을 우리 손에서 빼앗아 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하느님이신 겸손하신 예수님을 모실만큼 겸손하지 않았고, 그분 약함의 가르침도 아직 알지 못하였습니다.”(조재형신부)
2020년 가해 연중 제21주간 금요일
<감정은 내가 사는 지구다.>
복음: 마태오 25,1-13
인류에게 가장 소중한 존재는 지구입니다. 지구에서 생명의 양식과 에너지를 얻습니다. 그런데 인간의 욕심이 통제되지 않으면 인간이 지구에 가장 위험한 존재가 됩니다. 그러면 지구도 자신이 살려고 코로나바이러스와 같은 것들을 만들어냅니다. 인간이 지구를 통제하지 못하면 지구가 인간을 통제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지구와 같은 존재가 있습니다. 마음입니다. 혹은 마음에서 나오는 기분, 즉 감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기분이나 감정을 통제하지 못하면 어떻게 될까요? 마치 지구처럼 감정이 인간을 통제하게 됩니다. 분노 조절 장애와 같은 것을 겪게 되는 것입니다.
사냥꾼들이 곰을 잡는 방법 중에 이런 것이 있다고 합니다. 곰이 잘 다니는 길목에 커다란 돌덩이를 매달아 놓습니다. 그러면 그곳을 지나던 곰이 돌덩이에 머리를 부딪치게 됩니다. 머리를 부딪친 곰은 자기가 가는 길을 막은 돌에 화가 나서 그 돌덩이를 이마로 들이받습니다. 그러면 돌덩이는 저만큼 밀려갔다가 다시 곰을 향하여 밀려와 곰을 들이받습니다. 그러다 더 많이 화가 난 곰이 더 세게 돌덩이를 들이받습니다. 곰의 반복되는 무차별한 공격은 점점 그 도가 더 심해집니다.
결국, 곰은 그 어리석은 힘겨루기로 머리가 터지고 녹초가 되어 힘을 다 소모해버립니다. 그때 지켜보던 사냥꾼들이 와서 곰을 끌고 가면 그만이라고 합니다.
정말 그럴까 싶을 정도로 미련한 것 같습니다. 그러고보면 인간은 안 그런가요? 한 가지 생각에 집착하여 모든 에너지를 다 소진해버리는 일은 없나요? 자기를 모함하거나 돈을 떼먹은 사람을 굳이 떠올리며 스스로 감정의 에너지를 다 써버리지는 않습니까?
예전에 중국 북부 산시성 산젠 마을에서 한 남자가 자신을 버린 부인에 대한 복수로 결혼식장에서 폭탄을 터뜨려 36명이 사망하고 30여 명이 부상을 당한 일이 발생했습니다. 전직 석탄 광산 폭발물 전문가인 이 남자는 마차에 50kg짜리 폭탄을 싣고 마을 대로에서 열리는 결혼식장에 도착해 폭탄을 터뜨렸으며 자신도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런데 범인은 지난해부터 부인이 자신을 버리고 아들을 데려간 후 질투심과 분노에 가득 차 ‘최악의 사고’를 낼 것이라고 친구들에게 말하고 다녔다고 합니다. 감정을 정리할 시간이 1년이나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그 감정의 노예가 되어버렸고, 결국 수많은 사람에게 피해를 주었습니다. 정작 사건의 원인이 되었던 범인의 부인과 세 자녀(아들과 두 딸)는 결혼식장에 없었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기분 나쁜 것을 외적인 요인으로 돌립니다. 그러나 지구가 망가지는 것이 태양 때문일까요? 인간 때문입니다. 그리고 인간이 지구를 통제할 수 있습니다.
기분도 마찬가지입니다. 각자가 통제할 수 있습니다. 기분을 통제할 수 있는 능력이 행복의 기술입니다. 지구가 인간에게 생존할 수 있는 에너지를 주듯, 감정도 우리에게 그런 에너지를 줍니다. 감정이 무너지면 삶의 에너지도 잃게 되어 살고 싶지 않게 됩니다.
그러면 기분을 어떻게 좋게 유지할 수 있을까요? 기분은 지구와 같습니다. 지구를 보존하는 방법과 같은 것입니다. 괴롭히지 말고 내버려 두면 됩니다. 쉬게 해 주면 자연은 자연적으로 회복됩니다. 주님은 이를 위해 낮엔 일하고 밤엔 쉬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일주일에 하루, 칠 년에 일 년은 쉬도록 하셨습니다. 농사를 짓더라도 칠 년에 일 년은 휴면기로 두는 것입니다. 그러면 자연은 스스로 회복합니다.
감정도 마찬가지입니다. 휴식을 시켜주어야 합니다. 하지만 어떻게 휴식을 시켜주어야 하는지 모르는 게 문제입니다. 감정의 에너지를 사용하는 것이 ‘생각’입니다. 생각은 지구의 인간들과 같습니다. 생각할 때는 감정의 에너지가 소진됩니다. 그렇다면 주기적으로 생각을 멈추어주면 좋습니다. 생각을 멈추면 기도가 시작됩니다. 그러면 감정이 회복됩니다. 성령께서 들어오셔서 사랑과 기쁨의 감정을 일으켜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의 미련한 처녀들은 기분이 나빠지고 나서야 이것을 회복하려 하는 사람들과 같습니다. 지구가 다 망가진 후에야 부랴부랴 회복시키려고 노력하는 것과 같습니다. 규칙적인 기도를 하며 감정이 나빠지지 않게 주의해야 합니다.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은 파리 기후협약을 탈퇴하였습니다. 금성이 지구와 가장 비슷하지만, 인간이 살 수 없는 이유는 표면 온도가 450도나 되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는 이산화탄소가 더 많은 온실효과 때문입니다. 지구도 최근 몇 년간 이산화탄소 수치가 지나치게 상승하였습니다. 인간이 지구를 쉬게 하지 못하게 한 이유 때문입니다.
망가진 다음에 고치려고 하면 소용없습니다. 감정도 망가지기 전에 규칙적으로 쉬게 해 주어야 합니다. 이런 사람이 현명한 처녀와 같습니다.
‘규칙적인 기도’가 이렇게 중요합니다. 기분을 잘 조절할 줄 아는 사람들이 어쩌면 지구를 살릴 줄 아는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자기 생각에 사로잡히지 않는 규칙적인 쉼의 시간을 꼭 가져야 합니다.
2020년 08월 28일 금요일
[백] 성 아우구스티노 주교 학자 기념일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354년 북아프리카 누미디아의 타가스테(현재 알제리의 수크아라스)에서 모니카 성녀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젊은 시절 방탕한 생활을 하며 마니교에 깊이 빠져 있었다. 그러나 어머니 모니카 성녀의 끊임없는 기도와 이탈리아 밀라노의 성 암브로시오 주교의 영향으로 회개하고 입교하였다. 391년에 사제가 된 그는 5년 뒤 히포의 주교로 임명되었다. 아우구스티노 주교는 이단을 물리치며 교회를 수호하는 데 일생을 바치며 참회의 자서전 「고백록」 등 수많은 저서를 남겼다. 430년에 선종한 그는 중세 초기부터 ‘교회 학자’로 존경받고 있다.
입당송
집회 15,5 참조
주님이 그를 지혜와 지식의 영으로 충만하게 하시어, 회중 가운데에서 그의 입을 열어 주시고, 영광의 옷을 입혀 주셨네.
본기도
주님,
일찍이 복된 아우구스티노 주교에게 부어 주신 그 정신을
주님의 교회 안에서 새롭게 일깨우시어
저희도 그 정신을 따라 참된 지혜의 원천이신 주님을 그리워하고
영원한 사랑의 근원이신 주님을 찾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
말씀의 초대
바오로 사도는, 유다인들은 표징을 요구하고 그리스인들은 지혜를 찾지만, 자신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선포한다고 말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하늘 나라는 저마다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에 비길 수 있다고 하신다(복음).
제1독서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선포합니다. 그리스도는 사람들에게는 걸림돌이지만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는 하느님의 지혜이십니다.>
▥ 사도 바오로의 코린토 1서 말씀입니다.
1,17-25
형제 여러분,
17 그리스도께서는 세례를 주라고 나를 보내신 것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라고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이 일을 말재주로 하라는 것이 아니었으니,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는 것입니다.
18 멸망할 자들에게는 십자가에 관한 말씀이 어리석은 것이지만,
구원을 받을 우리에게는 하느님의 힘입니다.
19 사실 성경에도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나는 지혜롭다는 자들의 지혜를 부수어 버리고
슬기롭다는 자들의 슬기를 치워 버리리라.”
20 지혜로운 자가 어디에 있습니까? 율법 학자가 어디에 있습니까?
이 세상의 논객이 어디에 있습니까?
하느님께서 세상의 지혜를 어리석은 것으로 만들어 버리지 않으셨습니까?
21 사실 세상은 하느님의 지혜를 보면서도
자기의 지혜로는 하느님을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분께서는 복음 선포의 어리석음을 통하여
믿는 이들을 구원하기로 작정하셨습니다.
22 유다인들은 표징을 요구하고 그리스인들은 지혜를 찾습니다.
23 그러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선포합니다.
그리스도는 유다인들에게는 걸림돌이고
다른 민족에게는 어리석음입니다.
24 그렇지만 유다인이든 그리스인이든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힘이시며 하느님의 지혜이십니다.
25 하느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더 지혜롭고
하느님의 약함이 사람보다 더 강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시편 33(32),1-2.4-5.10-11(◎ 5ㄴ 참조)
◎ 주님의 자애가 온 땅에 가득하네.
○ 의인들아, 주님 안에서 환호하여라. 올곧은 이에게는 찬양이 어울린다. 비파 타며 주님을 찬송하고, 열 줄 수금으로 찬미 노래 불러라. ◎
○ 주님의 말씀은 바르고, 그 하신 일 모두 진실하다. 주님은 정의와 공정을 좋아하시네. 그분의 자애가 온 땅에 가득하네. ◎
○ 주님은 민족들의 의지를 꺾으시고, 백성들의 계획을 흩으신다. 주님의 뜻은 영원히 이어지고, 그 마음속 계획은 대대로 이어진다. ◎
복음 환호송
루카 21,36 참조
◎ 알렐루야.
○ 너희는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도록, 늘 깨어 기도하여라.
◎ 알렐루야.
복음
<신랑이 온다. 신랑을 맞으러 나가라.>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5,1-13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런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다.
1 “하늘 나라는 저마다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에 비길 수 있을 것이다.
2 그 가운데 다섯은 어리석고 다섯은 슬기로웠다.
3 어리석은 처녀들은 등은 가지고 있었지만 기름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4 그러나 슬기로운 처녀들은 등과 함께
기름도 그릇에 담아 가지고 있었다.
5 신랑이 늦어지자 처녀들은 모두 졸다가 잠이 들었다.
6 그런데 한밤중에 외치는 소리가 났다.
‘신랑이 온다. 신랑을 맞으러 나가라.’
7 그러자 처녀들이 모두 일어나 저마다 등을 챙기는데,
8 어리석은 처녀들이 슬기로운 처녀들에게
‘우리 등이 꺼져 가니 너희 기름을 나누어 다오.’ 하고 청하였다.
9 그러나 슬기로운 처녀들은
‘안 된다. 우리도 너희도 모자랄 터이니
차라리 상인들에게 가서 사라.’ 하고 대답하였다.
10 그들이 기름을 사러 간 사이에 신랑이 왔다.
준비하고 있던 처녀들은 신랑과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혔다.
11 나중에 나머지 처녀들이 와서
‘주인님, 주인님, 문을 열어 주십시오.’ 하고 청하였지만,
12 그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너희를 알지 못한다.’ 하고 대답하였다.
13 그러니 깨어 있어라. 너희가 그 날과 그 시간을 모르기 때문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또는, 기념일 독서(1요한 4,7-16)와 복음(마태 23,8-12)을 봉독할 수 있다.>
예물 기도
주님,
저희가 구원의 제사를 거행하며 주님의 자비를 청하오니
이 자비의 성사가 저희에게 일치의 표지가 되고
사랑의 끈이 되게 하소서.
우리 주 …….
영성체송
마태 23,10.8 참조
주님이 말씀하신다. 너희 스승님은 그리스도 한 분뿐이시고, 너희는 모두 형제다.
영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영성체 후 기도
주님,
그리스도의 잔치에 참여한 저희를 거룩하게 하시어
저희가 그리스도의 지체로서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루게 하소서.
우리 주 …….
오늘의 묵상
슬기로움과 어리석음의 대비는 예수님의 여러 비유에 나타나는 전형적 형식입니다. 반석 위에 집을 지은 슬기로운 사람과 모래 위에 집을 지은 어리석은 사람이 그렇고(마태 7,24-27 참조), 자신을 위해서만 재화를 모으던 부자가 어리석은 사람의 예였으며(루카 12,16-21 참조), 영리하여 칭찬받는 약은 집사는 반대로 슬기로운 사람의 예였습니다(루카 16,1-8 참조).
오늘의 복음인 ‘열 처녀의 비유’도 슬기로움과 어리석음의 대비가 담겨 있습니다. 처녀 열 명이 신랑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어리석은 처녀 다섯 명은 등은 가지고 있었지만 기름은 준비하고 있지 않았습니다. 반대로 슬기로운 처녀 다섯 명은 등과 함께 기름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신랑이 오는 시간이 지체되면서 처녀들은 졸다가 그만 잠이 들었습니다. 한밤중에 신랑이 온다는 외침이 들립니다. 처녀들이 모두 일어나 저마다 등을 챙기지만 미리 기름을 준비하지 않은 어리석은 처녀들은 뒤늦게 기름을 사러 가고, 이미 신랑은 도착하고 맙니다. 결국 준비하고 있던 슬기로운 처녀들은 신랑과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갑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처녀들은 문이 닫혀 혼인 잔치에 들어가지 못하였습니다.
우리에게는 비유 속 인물들이 더 선명하게 다가옵니다. 신랑은 세상의 심판자로 오시는 예수님이시고, 신랑의 도착이 지체되는 것은 ‘그 날과 그 시간’을 알 수 없는 종말의 지연입니다. 열 처녀는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교회 공동체를 뜻하고, 기름은 마땅히 해야 할 선행이며, 어리석은 처녀들에 대한 거부는 심판을 뜻합니다.
따라서 슬기로움과 어리석음의 대비를 통하여 예수님께서는 교회 공동체 구성원인 우리에게 깨어 준비할 것을 경고하시고, 일상의 수고로움에 대한 위로와 혼인 잔치에 들어갈 구원의 약속을 주십니다. 마땅히 깨어 준비하는 수고로움은 우리의 슬기로움에 있습니다. 곧 예수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고 들은 대로 실행하는 것이 믿는 이의 슬기로움입니다.
(박기석 사도 요한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