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1월 18일 연중 제33주간 월요일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주님,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8,35-43
35 예수님께서 예리코에 가까이 이르셨을 때의 일이다. 어떤 눈먼 이가 길가에 앉아 구걸하고 있다가,
36 군중이 지나가는 소리를 듣고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37 사람들이 그에게 “나자렛 사람 예수님께서 지나가신다.” 하고 알려 주자,
38 그가 “예수님,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부르짖었다.
39 앞서 가던 이들이 그에게 잠자코 있으라고 꾸짖었지만, 그는 더욱 큰 소리로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외쳤다.
40 예수님께서 걸음을 멈추시고 그를 데려오라고 분부하셨다. 그가 가까이 다가오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물으셨다.
41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그가 “주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하였다.
42 예수님께서 그에게 “다시 보아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고 이르시니,
43 그가 즉시 다시 보게 되었다. 그는 하느님을 찬양하며 예수님을 따랐다.
군중도 모두 그것을 보고 하느님께 찬미를 드렸다.
음식 값은 이미 모두 지불되었습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얼마 되지 않아서 나는 9급 공무원으로 직장생활을 시작하였습니다. 그 때의 내 봉급은 쌀 두 가마니 반을 살 정도였는데 어린 동생들과 아주 빈한한 생활을 했기 때문에 먹는 일이 아주 큰일이었습니다. 우리 집 식구들은 왜 그렇게 많이들 먹어대는지 그 양식을 대는 일은 장남인 나에게 아주 벅찬 일이었습니다. 지금은 쌀을 10kg만 사도 석 달을 무난히 넘기면서 아주 많이 먹어도 넉넉하게 남습니다. 그러나 그 때는 보리쌀에 쌀을 섞고 겨울이 되면 무우, 고구마나 감자를 많이 넣어 밥과 함께 먹어도 언제나 양식이 달랑달랑하는 것입니다. 봉급 때를 기다리려면 정말 견디기 힘든 전쟁을 치러야만 했습니다.
한 번은 고구마로 저녁식사를 대신한 적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고등학교 선생님을 하고 은퇴한 동생이 중학교에 다닐 때 고구마 바구니를 앞에 품고 다른 식구들 몰래 서둘러 고구마를 먹다가 그만 급체해서 크게 혼이 났습니다. 배를 움켜쥐고 뒤틀며 울고 있는 동생을 어머니가 머리를 쥐어박으며 야단을 치시고 한쪽 구석에서 소리죽여 울면서 어린 것이 안타까워 동동거리던 여동생이 안쓰러워 집 밖으로 나가 유난히 하얀 달과 나무 가지에 앙상하게 걸려있는 까치집을 번갈아 바라보며 눈물을 삼키고 애매한 돌멩이를 발로 차면서 그 서러움을 달래곤 했던 생각이 납니다.
그날 우리 어머니는 얼마나 가슴이 아프셨을까 생각해 보면 지금도 속이 상합니다. 그 동생은 지금도 고구마를 보면 그 오래된 얘기를 꺼내면 모든 식구들이 한바탕 웃으며 눈가에 간혹 눈물이 맺히곤 합니다.
우리는 손님대접을 받으려면 칠첩반상(七牒飯床)은 되어야 한다는 말을 많이 합니다. 국과 김치를 제외하고 맛있는 반찬이 적어도 7가지는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나는 지금도 큰 식당에서 대접을 받을 때를 제외하고는 거의 무첩반상(無牒飯床)이 대부분입니다. 그래도 얼마나 맛있게 먹는지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음식이 맛이 없다고 퇴박을 놓거나 매식을 하였을 때 남기고 나오는 법이 없습니다. 제자들과 같이 식사를 할 때에는 음식을 남기면 모조리 가져다가 다 먹어치우곤 합니다. 그래서인지 몸무게가 80kg이 넘는 몸무게를 암수술을 하기 전까지 40년 가까이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술이나 담배를 전혀 하지 않고, 오직 밥을 맛있게 먹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가끔 나의 그 식성을 참으로 고마워하곤 하는데 지금은 건강을 생각해서 식사량을 줄이려고 하면서도 밥을 받으면 많든 적든 남길 줄 모르고 모두 다 먹으려는 나도 문제가 많은 사람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오랫동안 가난을 봉헌하였습니다. 서로 많이 먹이려고 애쓰면서 살았으며 그렇게 아주 부족한 양식을 가지고 나누어 먹으면서 주님께서 주신 복을 같이 나누었으며 감사할 줄 알게 되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이보다 더 큰 하느님의 은총이 없는 것 같습니다.
어느 날 대서양을 횡단하는 배에 승선권이 얼마인지 묻고 간 청년이 있었습니다. 그는 오래 동안 유럽에서 일을 하다가 집에 다녀오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가지고 있는 돈으로 승선권을 사고, 그리고 얼마 남지 않은 돈으로 치즈와 비스킷을 사가지고 배에 올랐습니다. 돈은 한 푼도 없고 가족에게 줄 선물과 치즈와 비스킷이 한 가방이 되었습니다. 배에 오르자 모든 승객은 크고 화려한 식당에 모여 맛있는 음식을 먹는데 그는 혼자만 한쪽 구석으로 가서 자신이 싸 온 치즈와 비스킷을 먹었습니다. 그렇게 며칠 동안 그는 식당에서 풍겨 나오는 맛있는 음식 냄새를 맡으며 부러워해야 했습니다. 식당 안에 있는 사람들이 배를 쓰다듬으며 ‘이번 여행이 끝나면 다이어트를 해야 하겠다.’고 하는 말을 들을 때마다 정말로 견디기 어려웠습니다. 그도 식당에 가서 맛있는 음식을 먹고 싶었지만 돈이 없었습니다. 밤에 자리에 누워도, 식당 안에서 배불리 먹는 상상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항해가 끝나갈 무렵에 한 사람이 그에게 다가와 말했습니다. “선생님, 식사 시간마다 저기에서 치즈와 비스킷을 드시던데 이유가 뭡니까? 왜 연회장에 오셔서 우리와 같이 식사를 하시지 않으시는 것입니까?” 이 말에 남자는 얼굴이 빨개졌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저는 승선권도 겨우 샀습니다. 좋은 음식을 먹을 여유가 안 됩니다.” 그러자 상대편의 눈이 놀라움으로 동그래졌습니다. 그는 “선생님, 승선권에 음식 값까지 포함된 것을 정말 모르셨습니까? 음식 값은 이미 모두 지불되었습니다.”
오늘 눈이 먼 사람은 다시 볼 수 있기를 간절히 청합니다. 주님께 청하는 '눈을 뜸'은 그의 인생에서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은총입니다. 그러나 그는 믿음이라는 큰 티켓만 가지고 주님께 매달립니다. 주님께 아무것도 드릴 수 없지만 그는 모든 사람들에게 따돌림을 당했지만 오직 믿을 수 있는 주님께 차마 말씀드릴 수 없는 그 소망을 불감청이지만 고소원으로 주님께 매달립니다. 그의 마지막 희망입니다. 간절한 그의 희망은 주님께서 받아 주셨기 때문에 그는 기적을 입었습니다. 그는 믿음으로 그의 소망을 이루었습니다. 그는 믿음만으로 그의 가난을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주님의 은총은 믿음으로 이루어집니다.
<네가 어디에서 추락했는지 생각해 내어 회개하여라.>
▥ 요한 묵시록의 시작입니다. 1,1-4.5ㄴ; 2,1-5ㄱ
1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 하느님께서 머지않아 반드시 일어날 일들을 당신 종들에게 보여 주시려고
그리스도께 알리셨고, 그리스도께서 당신 천사를 보내시어 당신 종 요한에게 알려 주신 계시입니다.
2 요한은 하느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언, 곧 자기가 본 모든 것을 증언하였습니다.
3 이 예언의 말씀을 낭독하는 이와 그 말씀을 듣고 그 안에 기록된 것을 지키는 사람들은 행복합니다.
그때가 다가왔기 때문입니다.
4 요한이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이 글을 씁니다.
지금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으며 또 앞으로 오실 분과 그분의 어좌 앞에 계신 일곱 영에게서,
5 은총과 평화가 여러분에게 내리기를 빕니다. 나는 주님께서 나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습니다.
2,1 “에페소 교회의 천사에게 써 보내라.
‘오른손에 일곱 별을 쥐고 일곱 황금 등잔대 사이를 거니는 이가 이렇게 말한다.
2 나는 네가 한 일과 너의 노고와 인내를 알고, 또 네가 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못한다는 것을 안다.
사도가 아니면서 사도라고 자칭하는 자들을 시험하여 너는 그들이 거짓말쟁이임을 밝혀냈다.
3 너는 인내심이 있어서, 내 이름 때문에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지치는 일이 없었다.
4 그러나 너에게 나무랄 것이 있다. 너는 처음에 지녔던 사랑을 저버린 것이다.
5 그러므로 네가 어디에서 추락했는지 생각해 내어 회개하고, 처음에 하던 일들을 다시 하여라.’”
축일 11월 18일 성녀 로사 필리핀 뒤셴 (Rose Philippine Duchesne)
신분 : 수녀원장, 선교사
활동 연도 : 1769-1852년
같은 이름 : 뒤센, 뒤센느, 뒤셴느, 로싸, 로즈, 필리피나, 필립핀
성녀 로사 필리핀 뒤셴(Rosa-Philippine Duchesne)은 1769년 8월 29일 프랑스 그르노블(Grenoble)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아버지 피에르 프랑수아 뒤셴(Pierre Francois Duchesne)은 저명한 법률가였고, 어머니 로즈 유프로신 페리에(Rose-Euphrosine Perier)는 프랑스에서 존경받는 유력한 가문의 딸이었다. 그녀는 그르노블 근교에 있는 생트 마리 당 오(Sainte-Marie-d’en-Haut)의 성모 방문 수녀회에서 교육을 받으며 수도 성소를 키웠고, 강력하게 결혼을 요구하던 양친을 요구를 뿌리치고 1788년에 성모 방문 수녀회에 입회하였다. 그러나 다음 해부터 시작된 프랑스 혁명의 불길이 전국을 휩쓸면서 수도원도 약탈당하고 강제로 폐쇄되면서 수도자들은 프랑스에서 추방되었다. 그녀는 1791년에 몰래 집으로 돌아와 병자들을 방문하거나 고통받는 이들을 돌보며 가능한 수도 규칙에 따른 삶을 이어가고자 노력했다. 또한 혁명의 희생자로 감옥에 갇힌 성직자들을 찾아다니며 위로하는 데에도 힘썼다.
1801년 교황 비오 7세(Pius VII)와 나폴레옹 간에 교회와 국가의 평화로운 관계 회복을 목적으로 하는 협정이 체결된 후, 그녀는 자신이 생활했던 성모 방문 수녀회로 돌아와 수녀원을 재건하려고 여러 노력을 기울였다. 그 무렵 성녀 로사 필리핀 뒤셴은 이제 막 성심 수녀회를 설립한 성녀 막달레나 소피아 바라(Magdalena Sophia Barat, 5월 25일) 원장을 만나 수녀원 재건에 대한 도움을 청했으나 현실적으로 불가능함을 깨닫게 되었다. 성녀 막달레나 소피아 바라는 그녀의 열정과 용기에 감명받아 그녀를 성심 수녀회로 초대했고, 이를 받아들인 성녀 로사 필리핀 뒤셴은 1804년 12월 31일 성심 수녀회의 수녀로 서원을 했다.
1818년 그녀는 네 명의 동료 수녀들과 함께 신대륙인 미국으로 파견되어 분원장이 되었고, 영어를 배우면서 미주리(Missouri) 주에서 가장 외딴 마을이었던 세인트찰스(St. Charles)에 정착해 미국에서 첫 번째 성심 수녀회 수도원을 세웠다. 그들은 미시시피강(Mississippi River) 서안에서 무료 학교와 인디언들을 위한 학교 등을 운영하다가, 다음 해에 세인트루이스(St. Louis)의 플로리전트(Florisant)에도 진출했다. 영어뿐만 아니라 인디언과의 소통 및 문화적 차이 등 많은 난관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공동체는 크게 성장했고, 1828년경에는 미시시피강을 따라 여섯 개의 분원을 갖게 되었다.
그녀는 1840년에 미국 지부장직을 사임하고 이듬해에 예수회 선교사와 함께 슈거 크리크(Sugar Creek)를 따라 캔자스(Kansas) 동부의 인디언 보호구역인 포타와토미(Potawatomi)에서 인디언을 위한 학교 운영을 도왔다. 비록 그들의 말을 할 수 없어서 대화를 나눌 수는 없었지만 늘 기도와 묵상에 잠긴 모습을 통해 ‘항상 기도하는 여인’(Quahkahkanumad)이란 이름으로 불릴 정도로 인디언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불과 1년 후 건강이 나빠져 다시 세인트찰스로 돌아와 여생을 기도하며 보내다가 1852년 11월 18일 83세의 나이로 선종해 수녀원 묘지에 묻혔다가 3년 뒤 그녀를 추모하기 위해 건립한 작은 성당에 안치되었다. 미국 교회를 위해 헌신한 성녀 로사 필리핀 뒤셴은 1940년 5월 12일 교황 비오 12세(Pius XI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8년 7월 3일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다.
오늘 축일을 맞은 로사 필리핀 뒤셴 (Rose Philippine Duchesne) 자매들에게 주님의 축복이 가득하시길 기도합니다.
야고보 아저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