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가에서
김윤재
뭍에서 떠난 물고기가 물을 그리워하듯 가끔 새벽의 금강이
보고 싶었다.
여행길에서 아름다운 강을 지나치노라면 금강이 떠올랐지만
눈을 감아 버리며 외면을 하려 애를 썼다.
학창시절 첫눈이 오면 두 귀가 빨개지도록 걸었고 새해
첫날 버스를 타고 달려와 소박한 소망을 띄워 보내던 곳.
과거는 사람에게만 존재하는 것인가. 강물은 스무해가
지나 찾아온 나의 얼굴을 낯설어 하지 않과 반기는 듯
공산성을 휘돈다. 아직도 이전에 모습 그대로이다.
잡풀사이를 일렁이는 물너울도 떠나가는 남편을 부르다 지친
곰의 애절함을 간직한채 흐르고 있다.
억만굽이를 휘돌아야 한줄기 물이 되어 흘러든다는 강물은
동학사 굽이마다 쏟아놓은 스님들의 번뇌를 오늘도 실어오고
있는 것일까. 자꾸만 자꾸만 흘러만 간다.
신발을 벗어들고 강가에 서니 이런저런 지나간 일들이
강물을 타고 내려온다.
지금은 터미널이 생겨 없어졌지만 강변위에는 조그만
찻집이 있었다. 비가 오는 날이면 사람들이 떨어뜨린 빗물로
냄새가 나는 그곳이 왠일인지 좋았다. 강물이 내려다보이는
창가에 앉아 계단을 오르는 친구의 발자국 소리를 들으며
가슴설레였던 일이 어제일처럼 떠오른다.
금강과 찻집을 오르내리며 우정을 피워내던 시절. 우리는
무슨 이야기가 그리도 많았던지 새벽별이 강물에 드리워서야
일어나곤 했었다. 친구와 앉아 이야기를 나누던 자리를
눈으로 더듬는다. 공사를 하느라고 여기저기 바닥이
드러나고 물이 없어 많이 변한 것 같은데도 전혀 낯설지가
않다.
내가 지금까지 인생길을 여행하듯이 강물도 여행을 멈추지
않고 있다. 비록 나의 청춘은 가버렸고 벗들도 만날 수
없지만 이곳에 오니 그들의 체취가 느껴지는 것 같다.
오래전 겨울. 친구와 다투고 나서 나는 이곳으로
달려왔었다. 약속을 하지 않아도 이곳에 오면 우리들은 서로
만날 수 있었기 때문에 사과의 쪽지를 가지고 왔는데 눈위에
찍혀이는 운동화자욱은 친구의 것이 분명하다. 그가 먼저
다녀간 것을 알고 쪽지로 종이배를 접어 얼음장 밑 강물에
띄우고 일어서려는데 저만치서 걸어오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 순간 두근거리는 가슴소리를 들키지 않으려고 뱉어내었던
숨소리. 나는 그 일을 또다시 겪는 것처럼 가슴이 조여들어
한숨을 토해낸다.
유유히 흘러가는 강물을 보며 무정한 인생길을 생각한다.
꽁꽁 얼었던 강물도 봄이 오면 풀리는 것이 자연의
법칙인데 한번 끊어진 인연은 다시 엮어 내기가 이 드는
것이 인생사이니 얼마나 허망한 일인가.
지금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지내는지. 모두들 빠른
세월을 안고 사는 중년이 되어 있으리라.
강물은 계절따라 다른 모습으로 내게 왔었다.
초봄이 되어 얼음장 사이를 흐르는 물은 날카로움에 손을
베일 것 같은 투명한 강물이 된다. 그곳에 손을 넣어 물을
잡으면 봄은 왔지만 꽃샘추위에 벗어내지 못한 속치마처럼
내가 걸을 때마다 다리사이를 간지르듯이 흘러들었다.
공산성의 숲이 우거지는 여름의 강물은 초록의 물빛으로
여울을 이룬다. 나의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것처럼
공산성까지도 물속에 담고 있는 강물속에 오늘은 나의 허물을
벗어 놓으려 한다.
그것을 싣고 어디까지 갈지는 모르지만 결코 역류할 수
없는 것이 인생이듯이 되돌아 오지는 않으리라.
나는 지금까지 많은 잘못을 저지르며 살아왔지만 첫사랑을
깨트린 일이 오래도록 마음을 괴롭게 했었다. 왜그리도
그토록 헤어지려고 했었는지 지금도 화두로 남는다.
지금 생각해도 비내리는 이 강가에 그를 남겨놓고 돌아선
나는 너무도 독하고 모질었다.
부모님의 반대 때문도 아니었고 그가 군대를 마치고 복학을
하고 다시 대학원을 해야하는 일들이 문제가 되지 않았는데
그를 떠나고 말았다.
그를 남겨놓고 늘 함께 다니던 버스에 홀로 앉아 마곡사로
향했다. 마곡사 처마밑에 앉아 눈물을 터트렸지만 아무도
내게 관심을 기울여주는 사람은 없었다.
친구를 떠나 홀가분할 줄 알았지만 마음속에서는 나도
모르게 안개비가 내렸다. 그러던 어느날 그의 친구는 나를
불러내어 공주결핵원을 찾았다. 속으로 친구가 입원해
있을거란 것을 알았지만 거절하지 못하고 따라나섰다.
그동안 냉정한 척 지냈지만 친구를 볼 수 있는 구실이 생겨
내심 마음이 들떠 버스를 타고 가는 동안 만나면 무슨
이야기를 할것인지 정리를 하였지만 그에게 미안한 생각만
들었다.
몇 년째 앓아오던 병으로 창백해진 그의 잠든 얼굴을 보는
순간 어쩌면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눈물이 흘렀다.
그동안 내가 잘못했노라며 그에게 쓰러져 울고 싶었지만 애써
냉정을 되찾은 나는 색바랜 담요만 끌어다 덮어 주었다.
발밑을 차고 돌던 물살이 조금 전보다 가늘게 흐른다.
신발을 다시 신고 공산성에 올라가니 강기슭이 한눈에보인다.
우리의 인생도 저 강가처럼 미리 내려다 볼 수 있는
것이라면 서투른 삶을 살아가지는 않아도 되리라.
눈을 감고 귀를 막아도 세월은 흐르는가.
내가 가꾸며 살아가는 텃밭이 있음에 감사를 하면서도 가끔
새벽의 강이 그리워지곤 한다. 그것은 길다면 긴 여행길에서
잠시 쉬었던 간이역이기에 아름답게 느껴지는 것이 아닐까.
비록 철부지 시절이었지만 누군가를 조건없이 좋아할 수
있었던 젊음과 열정이 새삼 그립다.
한올 한올 어둠을 걷으며 새벽이 밝아오듯이 세월의 자락을
걷으며 살다보면 스무살의 강가를 예순살의 강가에 나는 다시
서게 되겠지.
그 안에는 또 수많은 사랑의 알갱이들이 있으리라. 그때
나는 어떠한 그리움을 안고 있을지 알 수 없지만 지금보다는
좀더 결고운 사람이 되어 있고 싶다.
물안개속에서 강물도 구별하기 어려웠던 것처럼 우정과.
사랑이라는 이름 앞에서 고뇌하던 나의 젊은 날.
나만이 향유할 수 있는 그리움을 강물에 띄우고 돌아서는
나의 치마자락을 붙잡는 강바람은 누구의 선물이련가.
98. 6.
첫댓글 강물도 구별하기 어려웠던 것처럼 우정과.
사랑이라는 이름 앞에서 고뇌하던 나의 젊은 날.
나만이 향유할 수 있는 그리움을 강물에 띄우고 돌아서는
나의 치마자락을 붙잡는 강바람은 누구의 선물이련가
눈을 감고 귀를 막아도 세월은 흐르는가.
내가 가꾸며 살아가는 텃밭이 있음에 감사를 하면서도 가끔 새벽의 강이 그리워지곤 한다. 그것은 길다면 긴 여행길에서 잠시 쉬었던 간이역이기에 아름답게 느껴지는 것이 아닐까.
비록 철부지 시절이었지만 누군가를 조건없이 좋아할 수 있었던 젊음과 열정이 새삼 그립다.